부제 : 벅찬 가슴으로 맞는 민족의 성지 태백산

1. 일시 : 2003년 5월 17일-18일 (무박 2일 )

2. 구간 : 고치령-화방재 ( 도상거리 42.3 km ,실거리는 만보계 분실로 기록못함)

3. 소요시간 : 20 시간 38분 (19시-다음날 15시38분 ,휴식포함)

4. 고치령-도래기재 : 나홀로
도래기재-화방재 : 홍순갑형님과 동행

5. 산행개요 :
- 소백산권을 지나 태백산권으로 들어간다.
- 옛사람이 말하는 십승지인 `양백지간`을 지난다.
- 남쪽 대간의 절반정도를 지났으며 강원도에 입성
- 산이 높아지고 육중하나 육산의 전형으로 느낌만은 푸근하다.

6. 산행기 :

하나의 시작 (天一一)

예정대로라면 전에 마친 `벌재-죽령-고치령`을 가야하지만 지인들과 소백산 철쭉을 보자는 약속을 지키려 그 구간을 남겨놓은채 나선길이다. 문학기 형님은 휴가를 내어 토요일 아침에 미리 출발하신다고 하셨고,홍순갑형님은 도래기재 까지는 미리 마친 상태이니 일요일 새벽에 홍형님과 만나기로한 `도래기재`까지는 혼자이다. 풍기에서 아내를 돌려보내고 호출한 택시(011-533-6805,안벽수)로 고치령까지 이동하면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풀어보았는데 특산물은 인삼,사과 그리고 인조견 이며 자신도 모르게 대간특집에 전화번호가 올려 있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간꾼을 나르게 되었다고 하니 대간이 사람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실감한다. 구불구불 간간이 포장된 도로를 힘겹게 오르자 안부에 차가 한 대 서있었고,3만원을 지불한뒤 산행준비를 하는동안 택시 한대가 올라와 두사람을 토해 놓는다. 산행을 마치고 차를 회수하는 산객인 듯한데 두사람은 길을 나서는 나에게 "지금 갈거냐?""어디까지 갈거냐?""혼자냐?"를 묻기에 대답을 해주고 천천히 산길에 접어든다.


[ 소백으로 지는 해 ]

저문길의 나그네

고갯마루 산신각은 어느 보살의 실화로 타서 없어졌다는데 자리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이내 올라선 헬기장에서는 소백의 준령속으로 떨어지는 해가 아쉬운 듯 조금남은 부분을 보여준다. 부드러운 육산의 곡선을 따라 천천히 진행하면서 고치령을 아침에 출발하신 문학기 형님의 흔적을 이내 발견한다. 붙여놓은 표지기 하나와 땅에 떨어져 흩어진 표지기 세장이 눈에 들어와 이를 회수하였는데,표지기는 두가지로 하나는 원래의 노란색이고 또 하나는 핑크빛으로 만들었는데 홍순갑 형님과 나의 필명까지 적혀있는게 아닌가! 평소 말씀은 안하셔도 이렇게 배려를 해주심에 괜히 "아무나 대장시켜주나!"하고 고마움을 표시해본다. 서서히 날이 어두워지고 길에는 1km마다 이정표가 서있는데 두 번째는 비알 오름길 중간에 서있는 것을 보니 어색한데 곧 `미내치`에 도착하여 헤드랜턴을 준비한다.

육산의 부드러움

부드러움이란 이런것인가? 고저차도 별로없고 방향도 두리뭉실 전환하는 데다가 풀향기로 가득한 이 숲속길이 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정표가 1km 간격으로 서있는데다가 이정표에서 5-10분 거리뒤에는 어김없이 헬기장이 서있었다는 것이다. 길은 제법 잘 나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매달린 표지기가 거의 없어 가끔식 멈춰 확인을 하며 진행하다보니 가파른 흙절벽 아래로 비포장 도로인 `마구령`이 빼꼭이 보인다.(8.56) 누군가 정성스레 올려 놓았을 돌탑이 얹힌 이정표 앞에서 잠시 쉬는동안 문학기형님께서 `도래기재`에 도착하였으며 기다리지 않고 계속 가시겠다는 전화를 받았고,집에도 전화하여 잘 가는 중이라고 알려준다. `마구령`에서 조금 뒤 올라선 헬기장에 적혀있는 `50-123-3-3` 이라는 글씨를 지나 그너머로 이어지는 길에 곧장 들어선다.


[ 마구령 이정표에 얹힌 돌탑 ]


양백의 중간지점 부석사

500m 마다 보이는 구조표지목에는 `소백 10-**`라고 써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직은 소백산권임을 알 수 있었고 `늦은목이`를 1km 앞둔 이정표에서 무심코 직진을 하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표지판까지 와서 확인하니 길은 오던 길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데 `봉황산 갈림길`이란 이정표위에는 `갈곷산`이라 매직으로 써있는게 아닌가! 하지만 확인을 않한채 그대로 갔어도 양백지간의 중간에 자리한,이중환이 "경상도 전체를 제압한다"고 감탄한 부석사와 봉황산에서 영풍,봉화,안동,예천,문경의 5개군을 아우르고 올 수 있는 있었기에 아쉬움을 뒤로한채 곧 해발 800m의 `늦은목이`에 내린다. 평범한 고개안부에는 이정표와 함께 코팅지가 붙어 있었는데 좌측 10m에 위치한다는 샘은 도무지 찾지 못하였고,`선달산까지 숨가쁜 오름길 1시간,여유를 갖고 천천히`라고 써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정말 뒷심이 요구되는 오름길이 내내 계속되었고 1시간이 거의 다되서야 도착한 너른정상 한켠에 잔디밭 산악회에서 세웠다는 하얀 표지목에 `선달산,1236m`이란 글씨가 선명히 나를 맞이한다.(12.10) 얼마 뒤 내려서는 길 앞에는 지금까지 보았던 어느곳 보다 많은 표지기가 붙어있어 감탄을 하였고 도중에 `무섭지 않느냐?`는 집사람의 전화에 `무엇보다 내가 더 무서워!`라고 대답을 한다. 정말 내가 무서운 것은 마음이다. 마음은 사람을 죽일수도 살릴수도 있으며 온갖것을 만들고 부순다. 해서 그것을 마땅히 제어하지 못하는 자신이 가장 무섭게 느껴진다. 쏟아지는 졸음을 주체못하고 푹신한 갈비에 잠시 누운게 30여분이 훌쩍 지났고 조금 개운한 발걸음으로 `박달령`에 닿는다.(2.13) 너른 헬기장너머 고갯마루엔 임도가 보이고 그 앞에는 산신각이 있는데 촛불이 켜있는지 안이 훤하다.

새로운 인연

잠시 요기를 하고 산신각에 인사를 드리고 가는데 허리춤에 있어야할 만보계가 보이지 않는다. 아까 자면서 빠진 것을 확인치 못하고 그냥 온 것이라 새로운 주인 찾기를 바라며 `옥돌봉`으로 향한다. 가끔 보이는 이정표는 락카칠을 한 나무로 만들어져있는데 `옥석산`이라 써있어 잠깐 혼란이 왔었고 도중에 다시 40분 정도를 잠에 취해 있었다. 화들짝 깨어나서 시간을 보니 도래기재에서 4시 30분에 만날약속을 지키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4시가 되어 도착한 `옥돌봉`에는 봉화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이 있었고 잠시 남쪽 절벽위에 서서 주변의 표지기들과 이제는 빛을 잃어버린 달을 보며 새벽을 맞을 준비를 한다. 제법 바빠진 내림길을 질주하며 문형님이 흘렸다는 수건을 찾을까 눈을 크게 떴지만 보이지 않았고 도래기재 거의 다와서 홍순갑형님의 전화를 받을 때 일단의 산행객들과 마주쳐 교행한다. 곧 통나무계단을 내려서 `도래기재`에 들어섰고 홍순갑 형님의 반가운 얼굴과 해후를 하였다.(4.37)

하나가 둘이되고 ( 地一二 )

물을 구하려 야영터까지 내려가는데 40m가 제법 멀었는데 계곡에서 시원스레 쏱아지는 시원한 물을 실컫 들이키니 물맛하며 차갑고 시원한게 오기를 잘했다. 이런 저런 준비를 마치니 벌써 다섯시가 다되가는데 벌써 날은 훤하여 랜턴이 필요없을 지경이다. 천천히 시작되는 오름길은 초장부터 경사가 제법 되는데 약 15분 뒤 첫 번째 임도에 도착하니 `구룡산 3.1km ,도래기재 1.4km` 이정표가 있고 먼저 출발했던 세사람이 쉬고 있었다. 임도 절개지 위로 다시 오르며 다른팀 둘을 먼저 보냈는데 그중 하나는 대간길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울 반바지차림에 아주 간편한 차림이라 감탄을 하게된다. 이제 지쳤음인가! 첫번째 나타난 헬기장에서 잠시 쉰다고 누웠는데 갑자기 "30분 되었으니 가자"라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또 한소끔 맛있게 잤는가보다.


[ 두번째 임도의 날씬한 소나무 ]

소나무가 긴 까닭은?

이내 내려선 두 번째 임도 길가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갸날픈 소나무 한그루가 길을 밝혀주고 있었고 잇단 절개지 오름길은 사뭇 된비알이다. 계속되는 오름길에 몸은 자꾸 쉬라고 유혹하는데 아까 일어났을 때 추위를 느낀 것이 체력저하 였는지 암튼 거북이가 무색할 정도로 천천히 그러나 쉬지않고 발걸음을 떼어본다. 앞에서 기다려주는 순갑형님은 초장부터 거북이를 달고 가고있으니 내심으론 갑갑도 하셨겠지만 내색치 않고 보이는 표지기를 관찰하시며 이런저런 얘기로 기운을 돋궈 주신다. `구룡산` 헬기장(8.07)에 도착해서 편안한 자세로 30분정도 생활요가를 즐기고 이제는 제법 평탄한 내림길에 들어서니 조금씩 몸이 회복되고 있었고 곧 참새골입구 이정표를 만난 뒤 방화선을 따라 계속 직진한다.

구룡산의 용틀임

조금씩 고도를 올려가는 방화선 주변엔 간간이 참나무를 쌓아놓은게 보이고 돌로 쌓은 작은 헬기장을 지나 방향을 틀고나서 얼마 뒤 왼쪽에 보이는 커다란 잦아드는 무덤옆에서 길은 다시 치오름을 시작한다. 짙은 산죽밭을 얼마나 올랐을까? 눈앞에 묘지와 비석이 보이는 `신선봉`이었고 (9.50) 이내 지나치는데 오른쪽으로 휘어져 내리는 내림길에도 산죽이 자주 보인다. 짐짓 무시하고 왔던 오른쪽 발뒤꿈치의 통증이 심해져 끈을 느슨하게도 하여보고 발딛는 법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조금 편한 내딛기를 해보는데 조금 낫긴하지만 그보다 컨디션이 많이 좋아지고 있었다. 양백지간이 시작된다는 각화산 사고터로 가는길이 갈라지는 `차돌배기`에 도착한 것이 10시56분 이고 길은 다시 방향을 바꾼다음 계속하여 부드러운 진행을 허락한다. 잠시 후 안부에서 `깃대봉`이란 이정표를 만났고 태백산까지 6km 남았다는 사실에 잠시 고무되었지만 약 1시간 동안을 내달리고 제법 긴 오름짓을 한 끝에야 만난 `깃대배기봉` 안내판에 이르러서야 잘못된 이정표에 잠시 속았음을 알고는 한참을 웃는다.(12.25)


[ 깃대배기봉 오름길에 만난 철쭉 ]


천상초원 깃대배기

산죽으로 뒤덮인 높이 1320m의 깃대배기봉은 구릉지역으로 측량을 위한 깃발을 꼽은데서 유래하였다 하며 길가에 보이는 자작나무의 유난히 하얀 껍질과 많은 들꽃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부드러운 길이 태백을 향해 열려있다. 모퉁이를 돌면서 오른쪽에 주목 한그루가 나타나 태백산에 당도한 실감이 났는데 곧이어 둥그런 하늘금에 우뚝선 천제단이 보이기 시작한다. 태백산의 모습은 흙이 많아 살이 두툼한, 토산(土山)의 넉넉함을 보여주는데,두루뭉실하기에 절경은 없으나 소박함에 깃든 뭇 생명을 살려주는 생기를 느낄수 있다. 태백산은 북악(北岳)으로 옛사람이 이르기를 우리나라 뭇산신중 가장 높은 산신이 여기에 머문다고 하였는데 그만큼 큰 정기가 서려 있다는 뜻일게다. 게다가 우리민족의 유래가 된 환웅천완,단군왕검을 모신 천왕단이 있어 더욱 정겹다.


[ 부소봉에서 바라보는 천제단 ]

민족신앙과 태백(太白)

굿소리가 끊이지 않아 무속의 장으로만 되는게 아닌가 싶지만 시나브로 사그라들던 민족의 신앙이 `태백산`을 중심으로 펴지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단을 거쳐 천제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대간과 주변의 봉우리들이 멀리까지 굽어 보이는데 오늘은 대기가 뿌연탓에 끝간데 없는 조망은 볼수 없었고, 다만 단에 올라 삼배를 하고 천부경(天符經)을 되내인다. "일시무시일 석삼극 무진본 천일일지일이 인일삼 일적십거 무궤화삼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대삼합육 생칠팔구 운삼사 성환오칠 일묘연만왕만래용 변부동본 본심본 태양앙명 인중천지일 일종무종일". 이땅에 '홍익인간''재세이화''성통광명'을 펼쳐주시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정신적 유산을 가진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사실이 자랑스럽다.(1.50) 천제단에서 장군단에 이르는 길에서 보여지는 진달래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흥분시키고 감동시킨다. 많은 이들과 교행하며 태백산보다 조금 더 높은 장군봉(1566.7m)과 장군단을 돌아서면 이내 주목군락을 만날 수 있다.


[ 태백산 천제단과 정상석 ]


[ 장군봉 가는길 ]

하늘나무 주목

주목은 `살아서 천년,죽어서 천년`이라 했던가? 이 끈질긴 생명력은 필시 우리의 민족정신을 닮아서 일게다. 주목의 멋진 자태에 반해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보호하려는 듯 울타리가 둘러쳐 있지만 고고한 자태는 변함없다. 계속되는 너덜길은 수많은 발길에 넓어져 있고 많이 훼손되어있는데 유일사 갈림길에 내려오니 작은 매점이 있어 우선 시원한 음료수부터 챙긴다. 혹시나 하여 주인께 물어보니 콜라와 라면을 드시고가신 문형님을 기억하므로 장난삼아 나이를 물었더니 30대 후반으로 아주 젊게 말하여 역쉬 `젊은 옵빠!` 하면서 또 한번을 웃는다. 매점 뒤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려가다 탑이 세워진 절벽에서 태백을 잠시 뒤돌아보곤 편안한 길따라 내려가다 사거리 이정표를 지나서 그대로 직진을 한다.












[ 주목의 자태 ]

날머리 여운

작은 언덕을 몇 개 넘고 안부에서 무심코 우측에 늘비한 표지기를 따라 내려서게 되었고 초입에 많이 붙어있던 표지기가 가면서는 보이질 않아 의심을 하지만 밑에 내려가니 몇 개가 달려있다. 하지만 너른길에 나오니 왼쪽에 팔보암이 보여 길을 잘못 내려왔음을 알았고 지도를 확인치 않았음을 책망하고 길 초입에 잘못 붙여있던 표지기를 다음에 옮겨 달을 궁리를 한다. 널따란 포도따라 어평재 아랫쪽에 있는 휴게소에 당도하여 정확한 날머리,들머리를 확인코자 화방재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사면에 위치한 개집에서 우렁찬 환영을 한다.(3.38) 개소리 말라고??? 다음차 `화방재-댓재`구간을 할 때에 조금 일찍와서 이 구간을 마무리 하겟노라 다짐하곤 양쪽 확인을 마친다음 순갑형님 제자와 상봉을 하게되었다.


[ 상동에서 태백으로 갈때 만나는 화방재 ]


하나가 셋이되는 이치 ( 人二三 )

태백 시내에 위치한 제자의 집에서 우선 시원한 등멱부터 하고나니 몸이 날아갈 듯 하였고 `피재`까지 갈거나 하는 치기도 부려본다. 정성껏 차린 음식에 감사하며 객 아닌 객으로 두사람의 오랜만의 해후를 축하하면서 인간적인 것이 우리네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진하게 느꼈다. 아!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분에 넘치게 복을 이렇게 받고 있으니 말이다. 형님들과 다니면서 많은 배려를 받았지만 이렇듯 인생을 살찌우는 산교육까지 받으니 감사하단 마음밖엔.. 태백역에서 차표를 끊고나서 기차시간까지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낙동강 발원지라는 황지(黃池)로 발걸음을 돌린다.






[ 황지가 품고 있는것은? ]

황지와 태백시

널따란 연못은 주변이 잘 정비되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었고 늦은 오후의 햇살에 비치는 주변을 모두 못안에 품은채 고요한 흐름을 하고 있다. 택리지에 따르면 "태백산에는 황지라는 훌륭한 곳이 있다...(중략).. 황지 위쪽,작약봉(芍藥峰) 아래에 금단하는 묘혈이 있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는 나라에서 묘터를 잡았으나 장사는 지내지 못한 곳이라 한다."고 하였다! 황지의 고요함이 모여 넘치고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내듯 태백도 이제는 기지개를 펴고 있음이 느껴진다. 지역적으로 탄광이 사양길에 접어든 뒤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만 척박한 땅에 자원이 산 말고는 없는 이곳에는 타지보다 유리한 조건을 내세워야 기업체를 유치할 수 있으므로 반사적인 자연파괴가 더욱 심화될까 걱정스럽다. 대간과 그 주변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오늘도 이렇게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집으로 가는길

마악 태백의 산그늘로 숨고있는 해를 보며,기차에 올라 얼마 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역이라는 `추전`을 지나고 얼마 뒤 멋있는 석항을 알려주신다는 홍형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다 눈을뜨니 벌써 제천을 넘어섰다. 조치원에서 아쉬운 이별을 하고 소백에서 만날 기약을 하며 오늘도 대간길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채 여정을 끝낸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3-04 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