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1구간(중산리-성삼재)지리산종주산행기


8월 24일 저녘 10시 30분 집결하기로 한 시간에 맞춰 고속터미널로 나갔다. 사무실에서 어것 저것 챙기느라 빠듯하여 마음이 급했는데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하였으나 일행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히 여기며 전화를 거니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고 하여 그리로 가니 이방섭, 남상길, 황선욱 건축사와 최완규씨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도 저녘을 먹고 가야하겠기에 같이 국밥을 시켜 먹는동안 김건구 건축사가 도착하여 식사를 추가했다. 그리고 잠시 후 조병섭 건축사가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는데  이승훈 건축사는 오는 중인데 시간이 빠듯할 것 같다며 걱정하고 있었다.


일행이 타고갈 버스는 11시 10분 진주행 고속버스인데 시간이 지나도 이승훈 건축사가 나타나지 않아 마음을 졸였는데, 남상길 건축사가 마치 앞에 나타난 듯 통화하며 기사를 설득해 차를 붙잡은 동안 도착하여  안심하고 출발했다. 우리 일행이 앉은 좌석은 한자리씩 놓인 자리만 앞뒤로 8자리였는데 그렇게 하느라고 남상길 건축사가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좌석을 길게 펴고 잠을 청했다. 도착하는데로 바로 산행에 나서기 때문에 잠잘 시간은 차안 뿐일 것 같았다.


1시 20분 금강휴게소에 도착했으나 내리지 않았다. 3시 6분 진주 톨게이트로 들어서 3시 15분 터미널에 도착했다. 깜깜한 밤에 내린 손님들은 거의다 등산객이었다. 서울에서 등산차림으로 함께 탔던 단체 일행도 내려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화장실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택시와 흥정을 하여 택시를 타고 중산리로 갔다.


중산리까지 2대 9만원(5만원)에 가기로 했는데 시간은 4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우리를 태운 택시는 지리산에 산행하려는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태우고 다니는 듯 했다. 그는 평소 하루에 3~4회 운행하는데 올해는 주발에 비온다는 소식에 1번밖에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성삼재에서 중산리까지 가는 손님을 많이 태운다고 했는데 그 구간은 10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우리가 탄 택시는 20번 도로를 따라가고 있었다. 가는 동안 중산리까지 이어지는 계곡이 옆으로 놓여 있는데 낯에는 그 곳으로 온 피서객 차량 때문에 지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그 길로 통하는 남명선생의 산천제도 있는데 지나쳤다고 했다. 삼거리를 지나며 우측으로 가면 대원사인데 진주에서는 그 곳으로 가는 손님들이 더 많다고 했다.


4시 중산리에 도착했다. 산행을 시작하기 앞서 식당으로 가서 산채 비빔밥으로 아침을 먹고 세수와 양치질도 하였다. 식당 안쪽에 걸려 있는 지리산 그림에 우리가 있는 중산리 위치가 나타나 있어 올라갈 곳을 다시 한번 가늠해 보았다.


5시 산행을 시작하였다. 입구 팻말에 천왕봉까지 거리가 5.4km로 나타나 있었다. 전등이 켜진 입구를 지나 밤길을 걸어갔다. 15분 정도 오르니 좌측으로 큰 능선자락의 산세가 검은 윤곽으로 느껴졌다. 깜깜한 밤길을 해드랜턴 불빛으로 디딜 자리를 비춰가며 걸었다. 바위들이 엉겨 있는 길은 밧줄을 잡을 수 있게 해 놓은 곳도 있었다. 숲 사이로 언뜻 하늘의 별이 보였다. 밤에 산행을 시작하는 것은 잠도 억지로 뿌리쳐야 하는 등 무리가 있다. 그래도 평소 잊고 있던 또 다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점도 있고, 산행을 시작하면 야성을 회복하듯 몸이 적응되어 걷게 된다.


5시 30분 커다란 전나무가 있는 곳에서 선채로 첫 번째 휴식을 취하며 산 공기를 마셨다. 깜깜한 산행길에서는 앉아 쉬기가 번거롭게 느껴진다. 디시 출발해 10분 정도 오르니 현장에서 아나방이라고 하는 구멍뚫린 철판을 깔아놓은 다리가 나타났다. 5시 43분 삼거리에 닿아 위치를 확인하며 잠시 머물다 올라갔다. 오르막 길을 오르는 동안 주변이 훤해졌다.


이제 밤은 지나고 오늘 충만한 하루의 시작이 느껴졌다. 거리가 벌어지는지 뒤에서 선두반보하는 소리가 들렷다.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면 야생동물 죽는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 지날 즈음 통나무 등으로 산행길을 편하도록 다듬어 놓은 곳에 접어들었다. 그런 구간은 계단처럼 디디기 팎팍한 면도 있지만, 바위돌이 널부러진 원래 상태에 비하면 휠씬 편하게 갈 수 있다. 우측으로 아침 해가 뜨고 있어서 주변을 보며 갈 수 있게 되었다.


바우재 거리를 지났다. 하늘 아래 숲이 이불처럼 그윽이 감싸고 있었다. 6시 20분 우측 숲에서 푸른 능선이 겹쳐 보였다. 바람기 없이 평온한 가운데 깊은 산 속의 고요가 느껴졌다. 6시 27분 우측 산 능선으로 해 뜨는 것 보며 휴식했다. 푸른 숲너머로 능선을 오른 해의 존재가 서기처럼 느껴졌다. 주변에 갈참나무, 낙엽송, 아래에는 단풍나무, 조릿대 등이 자라고 있었다.


6시 40분 망바위(1068m)에 도착했다. 바위 이름은 뒤쪽 바위에 안내되어 있는데 앞에 잇는 바위가 나무에 가리지 않아 조망이 더 유리했다. 그 바위에 오르니 굽이 굽이 이어진 주변 능선이 넓게 보였다.  7시 땀이 베이며 본격적인 산행 콘디숀이 되었다. 7시 5분 큰 떡갈나무가 있는 숲길을 오르다 다시 휴식하다 바라보이는 풍경에 마음이 동해 이번 산행에서 첫 스케치를 했다.


7시 15분 법계사 앞 헬기장에 도착했다. 앞쪽으로 산 봉우리가 높게 보였다. 옆에서 그곳이 천왕봉이라고 했다. 그러나 높은 지대에서 올라온 때문인지 감각적으로는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천왕봉이라는 말 자체로서 설레임이 일었다. 천왕봉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지리산을 꽤 여러차레 들렀었다. 고등학교때 혼자서 지리산을 찾는다는게 차편이 용이한 뱀사골만 다녀갔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지리산 기슭의 사찰들, 산천제 등의 인근 유적들, 지리산 천년송을 답사하러 왔었다. 그리고 작년에는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마음먹고 건축사 등산동호회 일행과 백무동에서 올라왔는데 비가 와서 그만 하산하고 말았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지리산을 갖다 왔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하지 못했었다. 그처럼 고대하던 천왕봉을 앞에 두고 평소 마음속으로 상상하던 정기를 느끼려 애쓰게 되었다. 7시 30분 법계사를 에둘러 난 길로 오르니 조망이 드넓게 펼쳐지는 곳이 바위가 있어 멈춰 섰다. 거기서 보니 천왕봉을 정점으로 흘러내리는 푸른 능선이 광활히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올라온 중산리에 드문드문 집들도 보였다. 그것을 보니 지리산은 거대한 산이지만 삶을 품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계곡 같은 오름길을 올라갔다. 8시 앞서 오는 남자분이 배낭 두개를 가슴과 등에 앞뒤로 매고 오고 있었는데 뒤따라오는 여성의 배낭을 대신 메어주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앞에 가던 아가씨는 약봉지 주워들고 있으면서 오다가 혹시 빠뜨렸느냐고 물어보았다. 다 착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 부근부터는 관목지대여서 주변이 트여 보였으나 따가운 햇살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아침이어서 맑고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으며 트인 공간이 마음에 평온함을 주었다. 길은 주위 돌들을 모아 약간 다듬어져 있었는데  길 가운데 그 돌들을 모아 작은 돌무지 탑을 쌓아 놓은 곳이 있었다. 뒤돌아서며 우측을 보니 길게 능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른 일행이 그 곳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잇기에 물어보니 천왕봉으로부터 이어진 연하봉 촛대봉, 세석, 영신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다간 능선이라고 해서 나도 기념촬영을 했다.


터널같은 바위를 지나니 경사가 한층 더 급해진 길이 나왔다. 그 위로는 길이라기 보다는 급경사지에 엉켜있는 바위들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친 흔적일 뿐이었다. 그 주변에는 고사목들도 여기 저기 눈에 띄었다.




지리산

                                   김 석 환


누구나 오르고 싶어진다

그곳까지는...


국토의 등줄기

모태의 산을 그리워하는

본능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기에


천왕봉까지 이어온

백두대간 기운이 

멈춰서 또아리 틀다

여운이 뻗치며 어우러진

드넓은 산세


첩첩히 산 밖에 보이지 않고

산과 산을 오가며 노니는 구름은

높다란 봉우리에 걸려

잠시 고여 있다


발걸음 내 디딜 때마다

마음 여미어지는

장엄한 산


그 품은 어질어

온갖 생명을

아우르고 있다.



8시 35분 정상 가까이 올랐다. 고사목과 철 이르게 가을 정취를 풍기는 야생화들이 초연히 피어 있었다. 8시 50분 샘이 있는 곳에 당도해 귀한 마음으로 물을 마셨다. 물이 맑고 시원해 단숨에 한주걱을 들이켰다. 주목과 소나무가 푸르고 건강해 보였다. 곰 출현지역이라고 써 놓은 팻말이 보였다. 위로 천왕봉이 보였다. 거기서 정상이 바로 위에 보이지만 걸음으로는 멀리 느껴졌다. 위를 바라보니 짙은 파란 하늘이 해맑게 보였다. 그러나 오르는데는 힘이 많이 들었다. 디디기 어려운 돌무더기에다 가파르기까지 걷기 어려웠다. 정상 막바지에 다다르니 우측에 몇 사람이 쉬고 있었다. 정상 지점을 물으니 좌측을 가리키며 저기라고 알려 주었다.


9시 천왕봉 정상(1915)에 올랐다. 홀로 감격스러워 팻말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차례를 기다려 기념 촬영을 했다. 우리가 오른 반대 방향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정상을 확인한 사람들은 저마다 천왕봉에 오른 감회를 만끽하기 위해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측으로 대원사에서 올라오는 능선도 보였다. 여느 정상에서와 달리 천왕봉에서는 한 개의 봉우리로서보다 거대한 자연의 존재로 느껴졌다. 뒤에 오는 일행을 가다리다 햇살이 따가워 바위 그늘에 있다 다시 올라가니 일행들이 다 올라오고 있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그늘진 아래로 내려가서 간식을 먹으며 쉬었다. 주변 사람들도 정상에 오른 후의 만족스러움에 여유롭고 달콤한 얼굴들이었다.


10시 10분 내려가는 길을 나섰다. 여느 때 같으면 하산한다는 생각이 들테지만 지리산 종주 일정으로서는 막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앞에서부터, 장터목, 촛대봉, 세석, 벽소령 등 앞으로 거쳐 갈 곳들의 봉우리들이 보였다. 그렇게 보이는 지점들은 의무적으로 거쳐야만 할 곳처럼 느껴졌다. 정상부근에는 고사목이 이곳저곳 서 있었다. 길은 아까보다 훨씬 완만한 상태였다. 디디기 편하게 계단이 놓여진 곳도 있었다. 10시 30분 짧은 통로 구간을 지나는데 반대쪽에서 계속해서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나다 물어보니 백무동, 장터목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었다. 노고단에서 오다 세석산장에서 자고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잠시 후 제석평전을 지났다. 그곳을 지나는 동안 큰 산세에서의 평온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곳은 주목군락지로 유명한데 산위에 펼쳐진 넓은 평원의 느낌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11시 17분 장터목 산장에 도착했다. 그 높은 곳에서 장이 섰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곳은 실제로 함양 백무동과 시천 중산리 사람들이 올라와 장이 섰다. 일행은 거기서 식사를 하고 가기로 했다. 일행이 라면을 끓이는 동안 물을 뜨러 좌측 아래로 조금 내려가니 약수물을 받을 수 있게 수도꼭지를 설치해 놓은 곳이 나타났다. 꼭지가 두개인데 나오는 양이 적어 기다려 받는데 시간이 걸렸다.


라면과 햇반으로 점심을 먹었다. 12시 27분 식사와 휴식을 마치고 출발했다. 장이 섰던 위치를 둥그렇게 나무 울타리를 쳐 놓았는데 울타리 너머로 가을향기를 피울 꽃몽오리가 갖 맺혀 있었다.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어 12시 40분 연화봉에 도착했다. 그 봉우리에 서니 주변으로 시야가 트여 드넓은 산세가 느껴졌다. 다시 출발해 평평한 산길을 걸었다. 10분쯤 후 뒤돌아보니 천왕봉이 구름에 쌓여 보였다. 바위길과 흙길을 걷다 조릿대 숲길로 들어섰다. 앞에 바위 봉우리가 보여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에게 촛대봉인가요? 했더니 좀 더 가야된다고 했다. 앞서가다 뒤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려고 길 옆에 비켜 있는 소나무 아래 좁은 바위에 앉아 쉬었다. 뜻 밖에 좌측으로 푸른 능선이 보여 기분 좋은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옆 길로 단체로 온 듯한 학생들이 선생님들과 함께 지나갔다. 어른이 “그래 이런 자리서 쉬고 자연 감상도 하고 가야지, 밥만묵고 가고...” 하며 지나갔다.


다시 길을 걸어 1시 30분 삼신봉에 도착했다. 계속해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교차하며 지나게 되었다. 올라오는 한분에게 물어보니 거림에서 올라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곳은 작년에 세석에서 비를 만나 하산 명령을 듣고 우리 일행이 내려갔던 곳이다. 다음에 지날 촛대봉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어보이 40~50분 걸린다고 했다.


더 가다 촛대봉(1703)을 올랐다. 촛대봉 근처에 푯말이 보였다. 거기에는 지리산의 지질 형성에 대해 써 있었는데,제4기에 충적층이 형성되고 쥐라기때 화강암층, 트라이아스기에는 염리상 화강암과 반려암층, 선캠브리아기에는 흙운모 편마암, 반상 변전질 편마암, 화강암질 편마암, 미고미타이트질 편마암, 단층 편마암이 형성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촛대봉에서 휴식을 취하다 다시 길을 나서 세석 평전이 내려다 보이는 능선에 도착했다. 거기서 보이는 모습이 좋아 잠시 쉬며 그 풍경을 스케치했다.


2시 25분 세석산장에 도착했다. 거기서 벽소령까지는 6.4km가 남아 있었다. 우리 일행은 오늘 그곳까지 가기로 했다. 세석산장에서 물을 보충하고 세면을 하고 나니 한결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 따금 산장에서 삶터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일행이 모두 모여 갈길을 확인하고 다시 출발했다. 가장 앞에 영신봉을 거쳐가게 되는 길이다. 조금 오르니 오른편 평평한 곳에 3명이 실갱이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중년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헬기로 구조 요청을 해달라고 하는데 대피소 직원들은 헬기가 뜰 수 있을지 모른다며 우선 세석 대피소로 옮기자고 하고 여인은 계속 요구하고 있었다. 


그곳부터는 본격적인 능선길이었다. 그 길에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곳을 지났는데 썩어서 부스러졌다. 조금후 능선에 오르니 좌측으로 멀리 조망되는 산세가 보였다. 다시 통로 같은 숲길을 걸어갔다. 2시 57분 세석산장으로부터 0.6KM 떨어져 있는 영신봉(1651)에 도착했다. 거기서 벽소령까지 5.7KM 그리고 연하천 대피소 까지는 9.3KM 남은 이정표가 세워 있었다. 쉬지 않고 지나는 동안  좌측으로 시야가 시원스레 펼쳐졌다. 멀리까지 겹겹이 여러 갈래의 능선이 너울너울 펼쳐나가고 있었다. 바로 앞에는 잡목과 산에 핀 야생화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선명한데 뒤로 보이는 그 산세는 희멀건 푸른색을 띠어 보였다.


다시 길을 가다보니 이번에는 깊이 패인 계곡 좌우로 대칭을 이루듯 놓인 능선이 멀리까지 펼쳐 보였다. 3시 7분 뒤에 오는 일행을 가다려 휴식을 가졌다.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출출해진 시각이어서 권하는 방울토마토를 맛있게 먹었다. 잠시 쉬다 다시 길을 나섰다. 길은 한만한데 돌이 널부러지 듯 있어 디디기 조심스러운 곳이 많았다. 산행 때 모난 돌들이 제멋대로 놓여 있는 그런 곳이 가장 힘들게 느껴졌다. 그런 곳은 디딜 지점을 잘 확인해야지 잘못하다간 미끄러져 발목을 삘 염려가 있다. 그리고 날선 모서리 돌을 밟으면 체중이 발바닥에 고루 전달되지 않아 더 피로하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0시간 가까이 지난데다가 길이 그래서인지 벽소령 가는 길이 더 힘들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곳까지 가는 동안 마주 오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길의 상황과 걸리는 시간을 자주 묻게 되었다. 한 분은 “길이 지랄 같아요” 라고 말했다. 산에서 그런 물음에 대답하는 말들은 다 주관적인 생각일 때가 많다. 걸리는 시간에 대한 생각도 제 각각이다. 그래도 힘이 들면 물어보며 말을 건네고 싶을 때가 있다. 도시에서와 달리 산행에서 오가는 사람들끼리는 인사를 잘 나누는 편이다. 대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한다. 나는 물어보다 대답해주는 사람들에게는 대개 ‘좋은 산행 되십시요“라고 말하고 지났다. 앞서 들은대로 길을 걷기가 터벅거렸다. 힘이 들고 지쳐가고 있어서 상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해진 구간을 걸어야 하는 의무를 다하는 걸음이 되기도 했다. 그런 때 유일한 위안은 거리가 가까워진 팻말을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가다가 몇 번이나 벽소령이 얼마나 남았는지, 길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물어보았다. 계속해서 가다보니 길가에 두 사람이 좌정하듯 앉아 좌측으로 펼쳐진 너른 산세를 조망하며 쉬고 있었다. 다시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을 만나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자 성삼재서 오는데, 오늘 거기서부터 12시간이나 걷고 있다고 했다. 길을 가다 앞이 환해지는 곳이 나타났다. 숲길에서 보이는 바로 앞 공터에서 여대생으로 보이는 두명이서 각각 나무에 기대어 곤히 자고 있었다.


3시 59분 칠선봉(1558)에 도착했다. 우측 깊은 계곡에서 시원한 바람이 올라왔다. 이정표를 보니 지나온 천왕봉은 7.2KM, 앞으로 갈 벽소령까지는 4.3KM가 남아 있었다. 세석평전을 2.7KM지난 지점이었다.  그곳에는 하나의 탑을 세워 놓은 듯이 커다란 바위가 서 있었다. 그 곳에는 천왕봉 쪽을 찍은 사진을 새겨 만든 안내판도 있었다. 그 사진을 보며 영신봉, 세석평전, 촛대봉, 그리고 더 멀리 천왕봉 가까이 있는 산봉우리 등 지나온 봉우리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남은 길이 버겁게 여겨졌지만 멀리 보이는 그 지점들을 대하니 보람도 느껴졌다.


우리가 계획하고 온 지리산 종주를 마치려면 오늘 숙박지인 벽소령으로부터도 13km 정도를 더 가야 한다. 점차 힘이 드는 마당에 그것을 생각하니 지리산이 정말 거대하게 느껴졌다. 지리산은 196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전체 영역이 471,758km의 광활한 면적에 이르는데, 경남, 전남, 전북 3개도의 하동, 산청, 함양, 구례, 남원시 등 1개시 4개군 15개 읍면에 걸쳐 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종주능선(25.5km)에서는 천왕봉의 일출(日出), 세석평전의 철쭉, 벽소령의 명월(明月), 반야봉의 낙조(落照), 그리고 노고단의 운해(雲海)등 자연경관이 유명하다.


계속해서 능선길을 걸었다. 주변으로 펼쳐지는 툭 트인 조망은 시원했지만 걷는 거리가 늘어갈수록 점점 걷는데 힘이 들었다. 4시 10분 능선을 지나 나오다 내리막 숲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가다 앞쪽 왼편 있는 바위에 서니 앞으로 바라보이는 산 능선이 여러겹 겹쳐진 시원스런 풍경이 펼쳐졌다. 거기서 일행이 모여 사진 촬영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벽소령에서 온 다른 일행도 쉬고 있었다. 다시 우측 아래 숲길로 접어들어 걷다 4시 30분 앞쪽 고개 마루에 올랐다. 주변에 큰 나무가 둘러쳐 있는 공터인데 땀을 흘리며 올라온데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다시 잠시 머물다 갔다.


다시 숲길을 걸어가다 4시 45분 선비샘(1456M)에 도착했다. 그 곳도 지대가 높은데 샘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공터가 있는 그 곳은 사람들에게 반가운 휴식처가 되고 있어서인지 명랑한 분위기였다. 거기서 오늘 마칠 벽소령까지는 2.4KM가 남았다. 샘물을 빈 물병 받아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길 양옆으로 목재 난간이 세워진 평지길 뒤 오르막 숲길로 들어섰다. 잔자갈이 구르며 땅이 패여진 길이라 걷기에 불편한 구간이 있었다. 조금 가다 다시 좌측으로 트인 평지길이 나왔다. 그런 길에 서면 늘 기분이 상쾌해진다. 잠시 후 조릿대 숲길을 걸었다. 조릿대가 뉘인 곳에 흘이 덮혀 푹신한 느낌이 드는 곳이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좌우로 굽은 산죽길이 이어졌다.


5시 내리막길을 걷다 고개를 올라 트인곳을 지나고 다시 조릿대 숲길을 지나 내리막길을 걸었다. 종주길은 점이 선으로 연결된다. 길을 가다 다시 앞서오는 일행에게 벽소령이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았더니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길이 좋더라고요” 했다. 5시 15분 구 벽소령(1375)에 당도했다. 벽소령이 1.1KM 남아 있었다. 그곳을 지나니 걷기 편한 긴 평지길이 나왔다.  그러나 길 좌측은 절벽이어서 안전을 위해 줄을 쳐 놓았고 우측으로도 낙석지대의 위험을 알리며 줄이 쳐져 있었다. 좌측벼랑이 있는 줄 너머로 잠시 들어가 아래를 보니 큰 계곡의 공간감이 느껴졌다. 벼랑에 핀 들 꽃에서 곧 가을 향기가 느껴지기 시작할 듯 했다. 또 아래 계곡에서 멀리 들리는 물소리가 더 깊게 느껴졌다. 먼 앞쪽으로는 푸른 능선이 겹쳐 보였다. 거기서 계곡과 산세를 감상하다 다시 길을 걸어갔다.


5시 38분 벽소령(1354m) 팻말이 세워 있는 곳에 당도했다. 거기서 오늘 쉬어 가기로 한 벽소령 대피소까지는 0.6km가 남아 있었다. 조금 가니 숲 길 앞쪽에서 사람들 소리 들렸다. 휴식의 달콤함이 베인 소리였다. 취사를 준비는 사람들이 내는 코펠소리도 들렸다. 걷는 의무를 다한 끝에 도착했다.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벽소령 대피소 풍경을 스케치했다. 일행이 당도해 밖에 놓인 하나의 테이블을 잡고 여장을 풀었다. 그 곳에는 세수할 물이 없어서 씻을 수는 없는 것이 아쉬웠다.


일행은 저녁부터 먹기로 했다. 김건구 건축사가 그곳까지 일행을 위해 비장(?)해온 삼겹살을 직접 구어 주어 소주잔을 나누며 그날의 무사한 산행을 축하하며 건배했다. 그러나 숙소 예약을 하고 오지 않아 잠자리가 걱정이었다. 남상길 건축사가 차양 아래에 메트리스를 깔아 자리를 맡아 놓았다. 총무인 그의 기민한 상황 판단으로 잠자리도 안심이 되었다.


앉아 있는데 뒤에서 친구가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 깜짝 놀라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다른 일행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며 그리로 돌아갔다. 또 친구와 함께 온 대전 건축사회 등산 동호회장도 만나서 반갑게 자리를 함께 했다. 그 사이 산장 관리실에서 예약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기실로 모이라고 했다. 방송을 듣고 가니 여자, 노약자 순으로 대기실서 잘 수 있는 표를 나누어 주었다. 자리를 배정 받고 일행과 함께 밖으로 나갔으나 몸이 으스스해져서 들어가 쉬겠다고 하고 들어와 일찍 자리에 누웠다.


얼마 후 일행이 들어와 잠자리에 들기까지 부산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방에서 자리를 정한 사람들도 들락거려 잠이 깨었으나 그대로 누워 있다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주변이 환해져서 잠에서 깨었다. 환해서 동이 튼 것으로 생각했는데 시간을 보니 3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시계가 고장난 줄 알았는데 밖으로 나와 보니 깜깜한 밤이었다.


하늘을 보니 쏟아질 듯 커다할게 보이는 별들이 총총히 하늘을 수 놓고 있었다. 하늘 중앙에 카시오페아자리가 있고, 남서쪽에 별자리의 왕자라는 오리온 자리가 있었다. 그 광경이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향 집에서 살 때 보았던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엊그제 에너지의 날 전국 곳곳에서 행사를 연다고 하면서 서울 시청 주변에서도 22일 소등 행사가 있었다. 도시 문명은 자연 상태에서 영위될 수 없다. 이미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관성으로 살고 있는 터여서 5분 소등이 특별한 행사가 되고 있었다. 차마 오분이다. 더 이상 지체하면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정한 시간이다. 나는 그곳에 갔다가 늦는 바람에 막 불이 다시 켜진 때 도착하고 말았지만 소등했을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도시는 등불같이 모든 것이 인위로 영위되는 곳이다. 전등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자연스럽게 지니던 정서를 잃어버리게도 하였다. 농촌에서 밤은 활동을 멈출 수 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자연운행의 명령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맑은 밤하늘을 보면 저절로 상상의 나래가 펼치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이 인간의 삼성을 아름답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도시로 나와 생활하면서부터 그러한 느낌을 망각해왔다. 그러면서 어둠이 있어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라산은 여전히 자연 그대로의 밤하늘이 나타났다. 야간 산행에서 헤드 랜턴을 켜고 가지만, 그것은 밧딧불과 같을 뿐 지나간 자리는 금새 칠흑같은 어둠에 파묻히고 만다. 밤이란 거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달빛 별빛을 의지하고 어둠에 익숙한 삶으로부터 발달한 감각으로 일을 볼 수 는 있었다. 하지만 밤은  정지, 휴식의 시간으로 받아들였다. 깜깜한 밤에는 활동이 단념되어 일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인공 불빛이 없던 시절의 삶은 그만큼 건강하게 될 수 있다. 그러한 삶의 리듬이 건강을 이루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너무 많은 신경을 쓰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골에서는 날씨만 좋으면 매일 총총한 별이 보였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불빛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인식하며 왠지 상실의 아쉬운 기분이 들곤 한다.


다시 대피소 안으로 들어오니 대기실에서 자는 사람들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하지만 일부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방에서 일찍 가려는 사람들이 옴직임으로 부시럭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아래층에서 반납할 담요를 들고 헤드랜턴을 켜고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다시 잠을 청했으나 깊은 잠이 들지 않았다. 5시 20분경 일행들이 일어나 함께 일어났다. 담요를 개어 모아 논 곳에 함께 두고 배낭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이미 별이 사라진 깜깜한 상태였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멀리서부터 여명이 밝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후 큰 뭉개 구름에 의미한 햇살이 비치며 붉게 물들어 보였다. 


5시 35분 벽소령을 출발했다. 아침은 연하천에 가서 먹기로 했다. 어제보다 짐이 줄어 배낭이 조금 가볍게 느껴졌다. 오르막길을 올라 6시 10분 형제봉에 닿았다. 조망이 훤히 트인 바위에서 쉬면서 앞으로 겹겹이 펼쳐 보이는 산세를 감상했다. 드넓은 지리산이 느껴졌다. 그리고 희미하게 무지개도 떠 있었다.


곧 동이 트고 해가 솟아오를 것 같았다. 내리막길을 가다 다시 앞에 놓인 평선봉에 올랐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부부가 방금 일출을 보았다고 했다. 해뜨는 방향을 바라보니 막 올라와 있었다. 그러면서 나까는 무지개도 보았다고 했다. 앞을 보니 그 무지개는 아까보다 더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지금도 보인다고 했더니 따라 보며 그 모습에 감탄을 했다.


다시 길을 가다 연하천에서 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시간은 1시간 반에서 2시간 걸린다고 했다. 다시 길을 가는 동안 새로운 아침햇살이 숲 사이로 비췄다. 길가에 처음 이름을 듣는 백당나무가 보였다. 6시 35분 우측으로 솟은 커다란 바위를 지났다. 노고단 12.6KM 벽소령 1.5KM 지점이다. 그 봉우리를 넘어 내리막 숲길을 걸었다. 길을 가다보니 뽕닢 피나무라고 명찰이 달린 나무가 보였다. 그것은 바둑판을 만들기 좋은 나무이다.


아까부터 걸음을 내 디딜 때마다 피곤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어제 세석에서 벽소령 올 때보다 길이 나아져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7시에 나무다리를 걸쳐 길을 이어놓은 곳을 지나며 우측을 돌아보니 멀리 천왕봉이 보였다. 우리가 머물던 벽소령 산장도 보였다. 길게 능선으로 이어져 그야말로 하나의 산으로 인식되었다.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가자 맞은편에서 일하는 복장으로 지게를 진 사람이 다가왔다. 일을 하시냐고 묻자 “연하천 산장에서 공사하는데 짐 받으러 간다”고 했다. 거기서 연하천대피소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길 우측으로 철조망을 둘러쳐 놓았는데 그 곳은 연하천 주목 군락지 특별관리구역이었다.


7시 45분 연하천 휴게소에 도착했다. 그 곳은 지나온 대피소들과 달리 좁은 장소에 있었다. 그곳에는 51.3m2의 기존 건물이 있는데 83.6m2로 중측 공사중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입구에서 피로를 가시게 할 생각으로 세수부터 하고 물도 채웠다. 대피소에 도착할 때마다 그런 일을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뒤이어 도착한 일행들과 취사장에 자리를 잡고 라면과 햇반으로 아침을 먹었다. 황선욱 건축사가 나눠준 햇반 반쪽에 라면 국물을 부어 먹다 토할 것 같아 바닥에 우의를 깔고 잠시 누웠다. 다리에 힘이 다 빠져나간 듯이 느껴졌다. 어제 저녘을 먹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일행들이 걱정을 하였다.


걱정을 덜으려고 조금 후 함께 커피를 마시고 9시 그곳을 출발했다. 올라갈 초입에는 목재로 데크와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고무판을 대어놓아 디디기가 편했다.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밧줄 난간도 있었다. 완만한 오르막 길을 걷는 동안 깨끗한 숲공기가 느껴지고 맑은 목청의 새소리가 들렷다. 평화롭게 느껴지는 숲길을 걷는 동안 마음도 평화로워졌다.


맞은편에서 오던 여성 두분이서 바로 옆에 보이는 투구꽃이라며 찍었다. 조금 후 나타난 이정표에 노고단까지 10.1km 거리가 표시되어 있었다. 내리막길을 걸어가다보니 앞쪽으로 지나갈 산들이 이어져 보였다. 다시 평평한 길을 가는 동안 맑은 아침햇살을 받은 초목이 더 깨끗하게 눈길에 닿았다. 다시 숲길로 접어들어 걸었다. 사람들이 봄철에 체취하러 다니는 작은 고로쇠나무가 보였다.


한동안 편안한 숲길을 걷다 뱀사골 2.6Km로 표시된 팻말을 보며 지나 평평한 길을 지나 앞으로 완만하게 이어진 오름길을 걸어갔다. 거기서는 양옆의 숲과 멀리 산봉우리가 낮게 보여 그곳이 높은 지대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 길가에 아까 보았던 투구꽃이 보였다. 계속 완만한 길이 이어져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더우기 이따금 바람결도 느낄 수 있었다.


숲길로 접어들어 완만한 길을 오르다 앞에서 모여 쉬는 사람중에 인사를 해서 보니 어제 벽소령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우리보다 일찍 출발해 가다 쉬고 있었다. 어제 벽소령서 내가 스케치하는 모습을 찍었던 분이 사과를 1/4쪽으로 나눠주어 맛있게 먹었다. 어제 저녘부터 아침사이 먹은게 별로 없어서 체력 보충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10시 토끼봉 봉우리 정상에 도착했다. 구름과 함께 반야봉이 멀리 보였다. 거기서 지나온  연하대피소는 3.0KM 지났는데 조금 앞 이정표에 2.4KM라고 되어 잇던 것과 차이가 나서 헷갈리게 되었다. 다시 길을 걸으며 앞을 보니 반야봉 푸르른 산세가 시원스레 보였다. 그리고 좌우로 바다 같은 산세가 펼쳐 보였다. 다시 숲길로 들어서 갇는 동안 망채나무가 보였다.


숲길을 걷는 동안 날것들이 얼굴에 부디쳐 번거롭게 하였다. 길가에 세워 놓은 낮은 푯말에 반야봉 3.5KM로 쓰여 있었다. 길을 가는 조릿대 숲길에 햇살이 아롱거리며 비추었다. 10시 29분 데크로 된 길을 지나 평지길이 나왔다.  터널 끝처럼 보이는 앞쪽 주변에 다른 일행들이 쉬고 있었다. 앞에 나타날 반야봉을 목표로 계속 걸어갔다. 아까부터는 몸의 컨디숀이 좋아져 걷는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10시 31분 화개재에 당도했다. 그곳은 경남 연동골에서 소금 해물을 가져오고, 전북 뱀사골 삼베 산나물을 가져와 장이 섰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길을 깔아 놓은 목재 데크를 걸어 지나갔다. 거기서는 한번 되돌아가도록 길이 되어 있었다. 가는 방향에 반야봉이 가까이 있었다. 마주 오는 사람에게 그리로 가는 길을 물으니 길은 편한편인데 이삼백개 계단을 한번 올라야 한다고 했다.


잠시 후 과연 그 계단길이 나타났다. 안내판에 화개재와 삼도봉을 잇는 길이 240M 폭 1.5M(1999) 30% 급경사 구간에 안전한 탐방 동선 유도라고 써 있었다. 10시 37분 계단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주변에 ‘자연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정통로만 이용해주세요’라는 말들이 쓰여 있었다. 계단 밑을 보니 험한 바위들이 널부러진 곳이었다. 만약 그대로라면 걷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맞은편에서 내려오던 젊은 분과 지나치며 인사를 건냇더니 다리가 후들 거린다고 했다. 내가 거꾸로 가보세요 했더니 “왜 내가 그 방법을 생각 못했죠” 하며 뒤돌아 내려갔다. 다시 한참을 올라갔으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더 가다 보니 위쪽이 휜해 보였다. 내려오는 중년 부부에게 “저 보이는 위가 다예요?” 하고 물으니 “아뇨 더 올라가야 돼요” 라고 했다.


위쪽에 휴식을 위해 만들어 놓은 데크에서 잠시 쉬었다. 뒤돌아보니 돌아본 구간에 먹구름이 끼어 보였다. 10시 52분 반야봉 1.5KM로 쓰인 팻말을 지났다. 우측에 산봉우리를 느끼며 좌측으로 돌아난 좁은 길을 갔다. 좌측으로  비스듬히 뉘인 경사진 바위 옆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초한지에 나오는 잔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좌측에 있는 큰 계곡에는 안개가 자욱히 끼어 있었다. 그 곳을 지나 10시 58분 삼도봉에 도착했다. 그 곳은 잔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3도 경계 지점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쉬는 사이 뒤에 오던 일행이 올라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11시 20분 삼도봉을 출발해서 노고단을 목표로 갔다. 이제 종주 구간도 얼마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11시 30분 노루목에 도착했다. 거기서 노고단이4.5KM 남았다. 아침에 몸이 좋지 않을 때와 달리 기운이 회복되어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어갔다.


우측으로 반야봉 정상이 놓여 있는데 오르지 않고 능선을 지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조금 내려가나 누군가 말을 걸어 쳐다보니 조병섭 건축사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연하천에서 앞서 출발한 황선욱 건축사와 최완규씨 두 사람이 뱀사골대피소로 잘못 갈까봐 알려 주겠다고 급하게 앞서 갔었다. 다시 조금 더 내려가 11시 57분 임걸령에 도착했다. 주변이 시원하게 트인 공간이었다. 난간이 쳐진  바위 끝에 다가가니 그 너머로 산세가 보였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니 둥근 학돌에 샘물이 고인 샘이 나왔다. 옆에 놓인 물 주걱에 가득 받아 샘물을 마셨다. 물맛이 시원하고  좋았다. 뒤에 오는 일행이 도착하길 기다리며 함께 사진을 찍고 쉬었다.


12시 15분 임걸령을 출발했다. 이제 종주구간도 막바지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노고단을 지나 성삼제까지 갈 길만 남았다. 12시 26분 피아골 삼거리(1336)를 지났다. 언제부턴가 피아골이라는 단어에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부근에서 쉬며 점심을 먹고 있었다. 작은 공터를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키 큰 활엽수 숲이어서 색다르게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을 지나 트인 길을 걷게 되었다.


뒤돌아보니 황선욱 건축사와 최완규씨가 뒤따라오고 있어 사진을 찍었다. 좌측으로는 이삭이 팬 들풀이 초원을 이루고 있어 느낌이 좋았다. 그 곳을 지나가니 헬기장이 있는 봉우리가 나타났다. 그곳에서도 지나온 능선이 멀리 이어져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니 노고단 능선이 트여 보였다. 그 곳을 지나가는 동안 갑자기 비가 내려 급히 우비를 꺼내 배낭까지 감싸게 입었다. 5분 정도 지나 12시 45분 비가 그쳤다. 그러나 초목에 고인 빗물이 바람결에 쏟아져 비 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잠시 후 다시 햇살이 숲 사이로 비추었다. 좌측에 능선을 느끼며 터널 같은 산죽길을 걷다 앞으로 시야가 트여 바라보니 능선 위의 탑이 보였다.


1시 13분 노고단(1507)에 올랐다. 길상봉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곳은 천왕봉(1915) 반야봉(1732)과 함께 지리산 3대 봉우리인데 노고단의 명칭은 신선 할머니(노고단 老姑壇)에게 제사지내는 단이 있어 유래되었다. 그리고 그 곳은 신라 화랑의 수련장이기도 했으며 1920년대는 선교사 풍토병을 고치기도 했다.


그 곳 지역은 넓이가 30만평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산추리 군락지로서 한여름 기온이 서늘한 아고산(亞高山) 기후이며 각종 고산 식물이 자란다. 종주길에서 노고단이 위로 보였다. 긴 길을 걷다 올라갈까말까 망설이다 의미 잇게 여겨 올라갔다.  1시 20분 노고단 정상에 올랐다. 그곳에는 돌무더기로 탑을 쌓아 놓았다.


그 사이 일행이 지났을까봐 빨리 내려 왔으나 보이지 않아 두리번 거렸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되돌아보니 황선욱 건축사였다. 뒤이어 일행이 도착해 함께 바로 아래 보이는 노고단 대피소로 내려갔다. 그곳도 공사중이었다. 일행이 머물 듯 하다 바로 2시 50분 성삼재 길로 내려왔다. 계단길과 완만한 길이 안내된 표지판을 보며 계단 길로 내려가 탁족을 하니 피로가 다 풀리는 듯 했다. 거기서부터 성삼재까지는 포장길이었다. 그 도로를 따라 가는 중에 도로 난간 너머로 강줄기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옆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니 짐작대로 섬진강이었다. 그 우측으로 우리가 기차를 타기로 한 구례가 보였다. 길을 걸어내려와 성삼제에 도착했다. 당초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는데 시간이 촉박해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구례로 가는 길은 861 지방도로였다. 내려가면서 우측으로 천은사 입구가 보였다. 다시 내려오는 동안 차창밖으로 우리가 잠시 머물다 온 지리산 산세가 친근하게 보였다. 평야로 내려오자 주변에 벼 이삭이 팬 들녘이 보였다. 택시가 구례를 지나쳤다. 구레구역은 실제로는 순천에 위치한다. 택시 기사가 구례 양반들이 기차역이 생기면 시끄럽다고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고 설명했다. 3시 30분에 구례구역 앞에 도착했다. 식다을 찾아 그 지역에서 유명한 매운탕을 먹으려다가 시간이 없어 중국집에 들러 식사했다. 


당초 부안으로 가서 일을 보고 올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여의 치 않아 바로 올라가겠다고 전화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역으로 나가 기차를 기다렸다. 플랫폼 시설은 콘크리트와 철로 지어져 있지만 기다리는 사람들 표정은 시골 풍경처럼 한가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빨간 기관차가 객실을 이끌고 기적을 한번 울리며 플랫폼으로 휘어 들어왔다. 4시 8분 그 용산행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07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