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산줄기 환주44

                                (백두대간 5)


 

           *대간구간:정령치-만복대-노고단

           *산행일자:2009. 10. 10일(토)

           *소재지  :전북남원/전남구례

           *산높이  :노고단1,507m, 만복대1,433m, 작은고리봉1,248m

           *산행코스:정령치-만복대-작은고리봉-성삼재-노고단-코재

                           -화엄사계곡-화엄사버스정류장

           *산행시간:7시40분-17시25분(9시간45분)

           *동행    :나홀로

 


 

  어느 한 분의 산행기에 따르면 지리산의 산신할머니인 노고(老姑)는 천신의 딸로 반야(般若)와 결혼해 딸 여덟을 낳고 천왕봉에서 잘 살았다 합니다. 남편 반야가 깨우침을 더 많이 얻기 위해 반야봉(般若峰)으로 떠났고 부인 노고는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의 옷을 만들며  반야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합니다. 노고단에 오르자 반야봉에서 수도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지친 노고할미가 이 옷을 불태우고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 새삼 생각났습니다. 끝끝내 남편 반야를 만나보지 못하고 죽고 마는 노고(老姑)는 비련의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비련의 노고할미를 모시는 단(壇)을 천왕봉이 아닌 노고단에 만들어 놓은 것은 반야가 머문 반야봉에 보다 가까이 갖다놓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영국의 서정시인 예이츠는 그의 시 “술 노래 (A Drinking Song)”에서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님은 눈으로 들어온다”고 노래했습니다. 서양에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금언이 전해지고 있으며, 영국의 과학자 뉴턴은 “만유인력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곱에 반비례 한다”고 했습니다. 이 모두가 사랑하는 두 남녀가 오래 떨어져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러주는 명언들입니다.  님이 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모두 어우르는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진작 알았지만 반야와 노고처럼 죽은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효한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산자들끼리는 물론 산자와 죽은 자 및 죽은 자들의 영혼들을 결합시키는 위대한 사랑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존재하고 있음을 노고단에 올라 다시 확인했습니다. 30여 년 전 천왕봉을 같이 올랐던 집사람이 편히 쉬고 있는 제 고향 선산에 여유 공간이 있다는 것에 새삼 안도했습니다.


 

   아침7시40분 정령치에서 만복대로 향하는 계단 길로 올라섰습니다.

정령치에 올라서면 운무가 골짜기 골짜기를 가득 메워 광활한 운해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가슴 설렜습니다. 그새 햇살이 퍼져 비록 기대는 무산됐어도 반야봉을 중심으로 한 산자락들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 이 또한 볼만했습니다. 전망 좋은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만복대로 오르는 길에 여기 지리산과 덕유산 및 무등산에서만 자란다는 구상나무가 보여 반가웠습니다. 아침이슬을 머금은 길섶의 잡풀들로 바짓가랑이에 조금 물기가 묻었지만 구두를 적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4년 전에 대간종주 차 이 길을 걸은 저를 잊지 않았는지 주홍색으로 곱게 채색된 당단풍나무가 가슴에 명찰을 달고 다소곳하게 아침인사를 건네 왔습니다. 만복대가 왼쪽으로 아주 가깝게 보이는 곳에서 오른 쪽으로 다름재 길이 갈리는 능선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오른 쪽 길은 탐방도로가 아니니 가지 말라는 안내판을 뒤로 하고 이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만복대를 오르는 중 짐 크기로 보아 대간 종주 중임이 틀림없는 40대의 한 쌍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는 확률이 만나는 사람들의 수에 반비례할 수밖에 없다 싶은 것은 서울 근교 산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 반갑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지만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하는 종주 길에서는 멀리서 목소리만 들려와도 달려가 인사를 건네고 싶기 때문입니다.


 

  8시50분 해발1,433m의 만복대에 올랐습니다.

정상의 돌탑이 이번에는 무엇을 소원하러 올라왔느냐고 제게 물어왔습니다. 네 해전 한 여름에 올랐을 때 불경스럽게도 이 돌탑 앞에서 팬츠를 내리고 거풍을 즐긴 저를 내치지 않고 고맙게도 소원을 말해보라는 이 돌탑에 이만큼 몸이 회복되어 여기 다시 선 것만도 대만족이며 달리 소망할 것이 없다고 답하고 나자 정말 몸이 다 나은 것처럼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저 아래 달궁계곡 건너편에 자리한 반야봉이 참으로 의젓해 보였고 성삼재로 이어지는 대간 길 또한 절세미인도 시샘할 정도로 선이 아름답고 부드러웠습니다. 길 양옆 작은 키의 억새들이 가을정취를 물씬 풍기는 풀밭을 지나 아주 작은 헬기장(?)으로 내려갔다가 1200봉(?)에 오른 시각이 9시58분으로 만복대를 출발해 딱 1시간 걸렸습니다. 헬기장에서 이 봉우리로 오르는 길에 한 부부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걸음이 느린 부인 분과 답답하다고 행보를 같이 하지 못하고 한참 앞서갔다가 다시 돌아와 부인을 챙기는 남편 분을 보고 저도 옛날에 집사람에게 저렇게 했지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10시34분 해발 1,248m의 작은고리봉에 올랐습니다.

이번 산행 최고의 반려자는 반야봉이었으니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1200봉에 오른 저를 보고 저 건너 반야봉이 두 팔을 벌려 반겼습니다. 이 봉우리의 파리와 벌들도 윙윙대며 덩달아 저를 반겨 시야가 탁 트인 1200봉에서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간신히 숨만 고른 채 곧바로 묘봉치로 내려갔습니다. 헬기장이 들어선 “만복대3.3Km/성삼재2.0Km" 지점의 안부가 지도에 나와 있는 묘봉치 같았습니다. 묘봉치에서 1108봉으로 올라섰다가 작은고리봉으로 진행하는 중 50명이 넘는다는 산악회 팀원들을 만나 길을 비켜주느라 10분가까이 멈춰 섰습니다. 서로 맞부딪히면 어느 한 쪽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할 만큼 길이 좁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만복대를 오르는 산객들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정상석이 세워진 작은고리봉 또한 전망이 일품이었고 이번 산행의 목적지인 성삼재가 더욱 가까이 보였습니다.


 

  11시15분 성삼재에 다다랐습니다.

작은고리봉에서 내려서서 성삼재로 진행하는 중 피아골로 내려가 볼까 하는 생각이 퍼뜩 났습니다. 이 속도로 진행하면 성삼재에 11시 반경이면 다다를 것이고 그리되면 예매한 구례구역 발 저녁7시11분 기차시간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게 됩니다. 이참에 코스를 길게 잡아 아직도 못 가본 피아골로 하산하자고 마음을 바꿔먹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습니다. 작은 고리봉을 출발한 후 40분이 채 못 되어 다다른 성삼재는 더 이상 차를 댈 수 없을 정도로 차들이 많이 올라와 시끌벅적했습니다. 피아골 행을 확정짓고자 구례터미널에 전화를 걸어 피아골에서 구례로 가는 버스시간을 확인해보았습니다. 저녁6시40분차는 너무 늦고 그 앞 4시30분 버스를 타야하는데 아무리 따져 봐도 제 주력으로는 무리라는 판단이 서 아쉽지만 피아골 행을 포기하고 이제껏 오르지 못한 노고단을 들러보기로 했습니다. 11시25분에 성삼재 탐방센타 앞을 출발해 꽤 넓은 길을 따라 올랐습니다. 전망대와 코재를 지나지 않고 새로 설치된 계단 길로 질러 올라가 다시 만난 넓은 길을 따라 왼쪽으로 진행했습니다.


 

  13시 정각 해발1,507m의 노고단을 올랐습니다.

큰 길을 따라 걷다가 대피소로 질러 오르는 산길로 접어들어 몇 분을 오르다가 잠시 쉬면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노고단대피소는 언제보아도 활기가 넘쳐 보여 이곳을 지날 때 마다 저 또한 힘든 것을 잊고 활기를 되찾곤 합니다. 대피소 위 고개 마루에서 오른 쪽 계단 길로 올라 때맞춰 열어놓은 노고단 정상을 밟았습니다. 노고단은 아고산지대의 키작은 초본들이 자라고 있는 보기 드문 평원입니다.  군부대주둔 및 탐방객과다로 훼손된 환경을 복원하고자 지리산 국립공원에서 오랫 동안 노고단을 제한적으로 열어놓았기에 제가 지리산에 첫 발을 들인지 39년 만에 처음 올랐습니다. 커다란 돌탑과 정상석이 서있는 노고단은 지리산 서부의 최고의 전망지여서 동쪽 끝으로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이 잘 보였습니다. 이번 산행 내내 저를 지켜본 반야봉도 지척에 자리하고 있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 했습니다. 남서쪽 아래로 굽이져 흐르는 섬진강이 눈에 잡히자 제가 걸어온 능선이 저 강에 물을 대온 동쪽울타리 산줄기였음도 절로 실감됐습니다.


 

  13시48분 코재를 출발해 화엄사 길로 내려갔습니다. 

노고단에서 대피소로 내려가 큰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일제 때 외국인선교사들이 풍토병을 피하기 위해 머물고자 지었다는 별장건물의 굴뚝이 보여 사진 찍어 왔습니다. 1970년대 초만해도 노고단 평원에 굴뚝 등의 별장 잔해들이 꽤 여러 곳에서 보였는데 지금은 다 없어지고 이 건물만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코재를 지나 구례가는 버스를 타고자 성삼재로 내려가다가 시간을 셈해보았더니 코재에서 5.7Km거리인 화엄사로 내려가도 문제없겠다 싶어 다시 코재로 돌아가 화엄사계곡 길로 내려섰습니다. 시간도 넉넉하고 경사도 가파른 돌 가닥 길이어서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 내려갔습니다. 꼭 두 해전 고교동기들과 이 계곡을 지났을 때는 물이 제법 많이 흐른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물이 졸졸 흐르다가 끊어지고 더 내려가면 다시 이어지는 등 물 흐름이 영 시원치 않은 것으로 보아 올해는 가을가뭄이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구나했습니다.


 

  14시59분 화엄사 전방 3.5 Km 지점의 국수등을 지났습니다.

노고단과 화엄사의 중간지점인 국수등에 내려서자 화엄사계곡의 나뭇잎들이 여전히 푸르러 이 가을이 아직도 여름을 완전히 접수하지 못해 보였습니다. 지겹도록 이어지는 돌 가닥 길이 그나마 덜 짜증스러웠던 것은 바짝 뒤따라 내려오는 두 모녀가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마치 친구들처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녀를 보고 왜 우리 아버지들은 저처럼 아들들과 살가운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수등에서 1Km 떨어진 참샘터도 물을 떠 마실 만큼 수량이 넉넉지 못했습니다. 잠시 흙길이 나타나 좋아 했는데 이내 너덜 길로 바뀌었고 이 너덜 길은 연기암 입구에서 끝났습니다. 국내최대 문수보살기도성지인 연기암을 들러 그 보살님의 입상을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노고단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보다 연기암에서 바라다보는 섬진강이 더 다정다감해 보이는 것은 저 강이 보듬고 있는 세속과 더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16시가 다 되어 연기암을 출발해 2Km 남겨놓은 화엄사로 향했습니다. 


 

  17시25분 화엄사 주차장에서 하루 산행을 접었습니다.

연기암을 출발해 화엄사로 내려가는 큰 길을 따라 꽤 오래 걸었어도 화엄사가 보이지 않았고 오가는 차들이 먼지를 풀풀 날려 하산 길을 잘 못 잡았다 했습니다. 아직도 반시간 이상 걸어야 화엄사에 다다를 것이라는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한참을 걸어 내려온 큰 길을 버리고 화엄사 계곡을 끼고 걷는 산책로로 들어섰습니다. 재작년 가을 이 길을 걸을 때보다 물이 많이 줄어든 화엄사계곡 안의 담과 소에 눈길을 주고 대나무 숲길도 걸어 16시47분에 화엄사입구에 다다랐습니다. 탐방소에 들러 버스정류장이 1.5Km 떨어져 있다는 안내를 받고 차도를 따라 바쁘게 걸어 내려갔습니다. 버스정류장을 절 저 아래로 멀리 떨어뜨려 놓은 것이 화엄사의 경내를 정숙하게 유지하고 싶어서라면 한화콘도를 절 가까이 일주문 안에 짓도록 한 것은 왜일까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10분 넘게 기다려 구례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구례 터미널에서 저녁6시10분발 버스로 갈아타 구례구역으로 옮기면서 기사 분으로부터 구례구역이 구례군이 아닌 순천시 땅에 소재하고 있음을 처음 들었습니다.


 

  멀리 있는 님을 눈 가까이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입으로 들어오는 술의 힘을 빌리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저녁 식사 후 맥주 한 캔을 사 들자 에이츠가 환생해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님은 눈으로 들어온다”고” 읊조릴 것 같았습니다.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앉아 눈으로 들어오는 옛 님을 기다리는 동안 잠에 떨어져 언제 다녀갔는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 달 안으로 섬진강산줄기 환주를 이어가기 위해 다시 노고단을 찾을 것이기에 그리 서운해 하지 않았습니다. 노고할미의 러브스토리가 살아 전하는 한 언제고 저도 옛님을 다시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