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종주기18

 

 

                                      *정맥구간:내연/비학지맥분기점-가사령-통점재

                                      *산행일자:2012. 1. 9일(월)

                                      *소재지 :경북포항/청송

                                      *산높이 :고라산745m

                                      *산행코스:성법리정류장-성법령-가사령-내연/비힉분기점

                                                     -고락산-통점재-상옥리정류장

                                      *산행시간:9시16분-16시22분(7시간6분)

                                      *동행 :나홀로

 

 

  낙동정맥 종주 길에 경주를 들러 명소 몇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이번에 둘러본 유적지는 분황사, 황룡사지, 신라동궁과 월지, 월성, 계림과 첨성대로 경주역을 출발해 다시 경주역으로 돌아오기까지 5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1964년 중학교 3학년 때 수학여행을 와서 한 번 둘러봤고 1976년 광주중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 학생들을 인솔하고 다시 와보았기에 상당히 낯이 익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야기가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이 요즘 삼국유사를 공부한 덕분인지 가는 곳마다 새로웠고 신라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오후 한나절을 걸어 다니며 신라의 유적지 몇 곳을 탐방하고 나자 새삼 역사의 향기가 그윽하게 체감되어 그동안 제가 나이를 헛먹은 것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첫 번째 들른 분황사는선덕여왕 때 창건된  절입니다. 경내에 세워진 분황사 모전석탑은 원래 5층 또는 7층이던 것이 지금은 3층만 남아 있습니다. 이 절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께서 기거하시면서 책을 쓰기도 하신 곳이어서 원효성지로도 불립니다.  분황사 바로 옆에 황룡사 절터가 넓게 자리 잡았습니다.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절로 지었기에 2만4천평 남짓한 엄청 넓은 땅을 절터로 확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황룡사 절터가 더욱 넓게 보이는 것은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지은 황룡사의 모든 건축물이 전소되어 지금은 기둥을 받쳐주는 주춧돌만 듬성듬성 남아 있어서일 것입니다. 삼국을 일통한 문무왕이 지은 별궁에다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는 여기 신라동궁과 월지는 임해전을 복원해 신라의 전성기가 재현된 듯했습니다. 안압지로 더 많이 알려진 월지는 신라의 대표적인 원지(苑池)이기도 합니다. 안압지에서 멀지 않은 경주 월성은 신라시대에 궁궐이 있었던 곳입니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으로, 또 임금이 사시는 곳이라 하여 재성으로도 불리는 이 성을 한 바퀴 빙 도는데 거의 한 시간이 다 걸렸습니다. 꼼수를 부려 호공으로부터 이 땅을 탈취한 석탈해가 나중에 왕위에 올라 신라의 4대 임금이 되고 그 다음 다섯 번 째 임금인 파사왕이 여기에 성을 쌓고 이곳으로 옮겨 살았다 합니다. 남쪽으로 남천이 흘러 자연적으로 요새가 된 이곳에 토성을 쌓은 지혜는 지금까지 전해지지만, 한쪽에 조선조 때 만든 석빙고만 제 위치를 지키고 있을 뿐 길쭉한 배 모양의 궁터에 궁궐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썰렁했습니다.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은 월성에서 첨성대로 가는 중간에 자리한 숲으로 경주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숲이라 합니다. 내물왕릉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계림 안 숲을 거닐다가 향가 ‘찬기파랑가’ 시비(詩碑)를 보고 일연선사야말로 최고의 신라문화 대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본 첨성대는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저 첨성대 안에서 천체를 관측했다고 하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관측 값을 얻었는지도 궁금하고 그렇게 얻은 관측 값이 쓸모가 있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 첨성대가 동양 최고의 천문관측소라고 주장하려면 지금이라도 저 안에 들어가 선조들이 측정했던 똑 같은 방법으로 관측하고 그렇게 얻은 측정치가 유용함을 증명해보여야 할 것입니다.

 

 

  아침9시16분 성법리 정류장을 출발했습니다. 기계 환승센터를 8시35분에 출발한 버스는 시골버스답게 빠른 길을 놔두고 여기 저기 구석진 동네들을 들러 가느라 시간은 조금 더 걸렸지만 덕분에 은지저수지와 오덕리 산 아래 동네 등을 두루 볼 수 있었습니다. 성법리마을에서 9시8분에 하차해 산행채비를 한 후 북쪽으로 이어지는 69번도로를 따라 성법령으로 향했습니다. 내린 눈이 녹았다가 살짝 언 길을 따라 내려오는 차를 마주보면서 올라가다가 화물차 한 대가 도로 변 수로에 처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뜨끔했습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한 오름 길이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가느라 고도를 440m가량 높여 성법령에 다다르는데 무려 시간 반이나 걸렸습니다. 성법령에서 쉬지를 못하고 곧 바로 왼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여드레 전에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면서 산길뿐만 아니라 살아온 길도 다시 걸을 수 있다면 새해가 되어도 볼 수 없는 보고픈 이들을 만나볼 수 있을 텐데 하고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11시9분 해발709m의 내연/비학지맥 분기점 봉우리에서 낙동정맥 종주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시멘트바닥에 내린 하얀 눈 위에 누군가가 써놓은 ‘낙동정맥’ 네 글자를 사진 찍은 후 오른 쪽으로 북진하는 마루금을 이어갔습니다. 지난 가을 내내 넓은 잎들이 새로 떨어져 쌓인 푹신푹신한 길을 걷노라니 어느 시인이 낙엽 밟는 소리가 너는 좋으냐고 물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수은주가 영하로 푹 떨어져 매섭게 추워 산새들도 입이 얼어서인지 좀처럼 노래를 부르지 않는 요즘음 쥐죽은 듯 조용해 썩 내키지 않는 능선 길을 혼자 걸을 수 있는 것은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가 정적을 깨어주는 덕분이기에 저는 낙엽 밟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북쪽으로 직진하다 오른쪽으로 내려가 조금 더 걷자 녹이 쓴 안테나가 보였습니다. 631m봉에서 다시 오른 쪽으로 내려가 묘지를 지나고 다시 북진해 삼각점이 박혀 있는 599.6m봉에 이르렀습니다.

 

 

  12시30분 69번차도가 지나는 가사령으로 내려섰습니다. 599.6m봉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오른쪽으로 내려가다 가사령 차도가 바로 아래 보이는 절개면 꼭짓점에 이르렀습니다. 눈이 살 짝 덮여 미끄러운 길이 플라스틱 수로를 따라 왼쪽으로 나있어 이 길을 따라 조심해서 내려갔습니다. 포항시 죽장면의 가사리와 상옥리를 가름하는 가사령에 내려서서 바람을 피할만한 곳을 찾아 짐을 풀었습니다. 점심을 들면서 푹 쉬는 동안 따사롭게 내리쬐는 한 낮의 햇살에서 감미로움을 감지한 것은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옆 버들강아지도 이 햇살을 받고 조심스럽게 꽃망울을 터뜨려 겨울이 오면 봄이 멀 수 있겠느냐는 영국의 서정시인 셀리의 ‘서풍부’에 화답했습니다.

 

 

  13시55분 보현/팔공지맥 분기점에 도착했습니다. 반시간가량 머문 가사령을 출발해 능선으로 올라선 후 마루금을 다시 이어간 지 십분 남짓 지나 왼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쇠줄이 낮게 쳐져 밤에는 위험할 것 같은 길을 따라 내려가 임도삼거리에 이르자 가사령에서 이 삼거리로 바로 이어지는 임도가 보였습니다. 임도 건너 산길로 들어선 후 경사가 완만한 길을 따라 서쪽으로 진행하면서 해발고도를 100m가량 높이자 치받이 길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고도를 100m 높여 올라선 보현/팔공지맥 분기점에 하얀 눈이 길을 살짝 덮어 사진 찍어왔습니다. 이번 종주산행은 코스를 짧게 잡아 모처럼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도 됐기에 분기점에서 왼쪽으로 5-6분 걸어 ‘고라산’ 표지판이 걸려 있는 745m봉에 올라섰으나 기대했던 영천의 보현산이 보이지 않아 곧바로 분기점으로 복귀했습니다. 분기점에서 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어 조심해서 내려갔습니다.

 

 

  15시 정각 776.1m 봉에 올라섰습니다. 보현/팔공지맥 분기점에서 북동쪽으로 내려가 고도를 60m가량 낮추었다가 다시 오르는 낙엽 쌓인 길이 너무 푹신해 그냥 그 자리에서 덜렁 누워 4-5분간 쉬었습니다.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산 속에서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평안함이 느껴져 주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어 내려주신 평화가 바로 이런 것이다 싶었습니다. 오른 쪽 무릎이 조금 새큰거리기는 하지만 아직은 별 무리 없이 낙동정맥 종주 길에 오를 수 있도록 건각을 내려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묘지 봉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내려갔다가 왼쪽으로 진행해 다시 된비알 길을 올랐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잠시 멈춰 쉰 후 왼쪽으로 7-8분가량 걸어 이번 산행 최고봉인 776.1m봉에 올라섰으나 나뭇가지들이 시야를 막아 사진 하나 제대로 찍지 못하고 능선삼거리로 되돌아갔습니다.

 

 

   15시50분 경북포항과 청송을 가르는 통점재에 내려섰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북사면에 나 있어 등산화에 묻은 눈이 점점 불어날 만큼 눈이 쌓여, 이번 겨울 처음으로 눈길다운 눈길을 걸어봤습니다. 이 정도 눈이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지만 청송의 주왕산 권역으로 들어서면 눈이 많이 쌓일 것이 분명해 이번 겨울 낙동정맥 종주는 일단 바로 아래 통점재에서 마치고 눈이 다 녹은 4월쯤에 재개할 뜻입니다. 조심해서 묘지 2기가가 들어선 안부로 내려선 다음 북동쪽으로 진행하다가 문득 상옥리에서 청하로 가는 버스 시간이 생각났습니다. 이 차를 놓치면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바람을 가르며 죽어라고 내달렸습니다. 623m봉을 넘어 내려선 통점재에서 18구간 산행을 마무리하고 오른 쪽 상옥리 마을을 향해 68번 도로를 따라 내려갔습니다.

 

 

   16시2분 상옥리 할인마트 앞에서 이번 산행을 전부 마쳤습니다. 기북면의 성법리를 출발해 여기 죽장면의 상옥리에 이르기까지 7시간가량 소요됐는데 정맥 길은 5시간 남짓 밖에 걷지 않았으니 접근과 이탈에 2시간 가까이 걸린 것입니다. 택시비는 아꼈지만 접근과 이탈에 시간을 더 할애하느라 구간을 짧게 잡았으니 결국 공짜 점심은 없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기분이 날아갈 듯 기쁜 것은 버스 종점 마을에서 여러 분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살가움이 적지 않아섭니다. 할인마트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만나 뵌 한 분이 네이버에 개설한 당신의 블로그를 내보이며 자랑을 했는데, 과연 그리할 만한 것이 오후 5시 쯤 확인한 이 블로그의 접속건수가 2천 건이 넘었습니다. 당신이 재배하는 농작물도 올리고 음악도 올린다며 제게 주소를 알려준 이분은 저보다 한 살 위인데, 이분의 블로그에 비하면 제 블로그는 접속건수에서 비교하기 창피할 만큼 적어서 저도 블로그를 운영한다고 나대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선조 신라인들은 경주에 많은 유적지와 문화재를 남겼습니다.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신라의 문화를 접해보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명언이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길이 새길만한 금언임을 실감합니다. 분황사가 창건된 것이 선덕여왕 3년인 서력634년이니 거의 천사백년전의 일입니다. 분황사모전석탑을 보면서 신라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이 탑이 갖고 있는 예술성 덕분일 것입니다. 첨성대가 과연 천문관측소였느냐 관계없이 그 건축미는 앞으로도 높이 평가되어 계속 전해질 것입니다.

 

 

  인생은 짧은데 예술이 길다고 말하는 분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술이 무한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술의 수명이 아무리 길더라도 인류의 역사를 뛰어 넘지 못하는 것은 예술의 진가를 평가하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어서입니다. 레오나르드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아무리 뛰어난들 개나 돼지 앞에는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하는 동물만이 소위 평가를 할 수 있는데 지구상에 생각하는 동물은 사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사라진 다른 생명체들처럼 인류도 더 이상 종족을 이어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출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예술의 수명은 그 때를 넘지 못할 것이니 어느 누구라도 감히 예술이 무한하다고 억지를 부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이 길다지만, 자연은 지구가 사라질 때까지 존속되어 그 수명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가 밟아나가는 낙동정맥이란 약 6,500만년 전쯤인 신생대 제3기에 조산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태백산맥의 산줄기 중에서 태백산의 천의봉에서 부산의 다대포에 이르는 산줄기를 이르는 것이니 낙동정맥의 수명은 천 몇 백 년 전에 만들어진 분황사에 비하면 가히 무한대라 할 만합니다. 예술이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예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자연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술에서는 인간이 느껴지지만 자연에서는 생명이 느껴지는 것도 예술이란 인간이 자연에 손을 대 만들어진 아주 작은 작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행사진>

 

 

 

 

 

 

 

 

 

 

 

 

 

 

 

 

 

 

 

 

 

 

 

 

 

 

 

 

 

 

 

 

 

 

 

 

 

 

 

 

 

 

 

 

 

 

<경주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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