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구간

호남정맥

산행일

감상굴재~내장산~추령

(15km, 7시간)

2008년 11월 9일

 맑음

 


                                                                                                                              <지도출처 : 실전종주산행>

<산행기록>

감상굴재-곡두재-상왕봉-순창새재-까치봉-신선봉-장군봉-추령

   7:00      7:50     9:40       10:20    11:45    12:15  13:10   14:00

 

 

 봄 백양 가을 내장!


 

  호남정맥 20구간 산행은 어제 산행을 끝낸 감상굴재에서 이틀연속산행의 두 번째 날을 시작한다. 오늘은 이곳에서 추령까지 도상거리 15km 구간을 예정했는데 백암산과 내장산이 포함되어 있어서 호남정맥의 백미라 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지난밤에 숙박지를 구하지 못해 결국 감상굴재의 신화회관 앞 공터에 주차를 하고 밤을 맞았었다. 폐허로 변한 신화회관은 지도상에도 나와 있는 길목의 식당이지만 도깨비라도 나올 듯 으스스했다. 아침에 해 뜨면 일어나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 해 지면 휴식하던 자연 순응 방식이 우리 조상들의 생활습관이라면 나는 문명의 혜택으로 밤 12시에 잠자리에 드는 습관이 들어 있었는데 차 안에서 할 일이 없어 일찍 침낭 속으로 들어가니 시간시간 잠이 깨는 바람에 밤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는데 12시가 넘자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틀연속산행의 가장 불편한 점은 숙식의 문제일 텐데 그 부분을 초월할 수 있는 유전인자가 나의 몸속에 내장되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데서나 잘 잔다. 특히 산행 후 씻지 않고도 잘 수 있을까 하는 점은 경험으로 해결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산행 중에 날이 어두워지면 능선에서도 텐트치고 잠을 자는 것이다.

 

  7:00

  컵라면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출발한다. 11월 초순의 아침은 산행하기에 쾌적의 조건을 마련한다. 남부지방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절정의 단풍인파가 모여드는 계절이니 춥다는 느낌은 없다. 

 
<감상굴재>

  신화회관 앞 도로를 가로질러 강선마을 정자의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길 양편으로 수확을 끝낸 논밭이 자리 잡았고 비닐하우스도 보인다. 아침 시간이라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전봇대 사이를 지나 건너편 산길로 들어선다. 선답자의 리본이 매달려 있고 서서히 능선으로 올라가는 분위기다.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뚜렷하다.

 

<뒤돌아본 강선마을>

 

  산길의 왼쪽은 전라남도 장성군이고 오른쪽은 순창군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산이 둘러 있고 물이 굽이쳐 있다”고 그렸던 장성군은 입암산과 방장산 같은 굵직한 산들이 마치 긴 성처럼 이 군을 둘러싸고 있다. 고려 때부터 불려진 ‘장성(長城)’이라는 이름도 어쩌면 산이 긴 성처럼 둘러쳐진 이곳 북쪽의 지형 때문에 나온 것이겠다. 그런가 하면 암행어사 박문수가 산수가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이요 둘째가 장흥”이라고 했다는 말도 전해오는 것을 보면 풍수지리가의 눈에는 장성 지방에서 굵직한 인물이 많이 나오는 것도 이처럼 터가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곡두재 지나자마자 왼쪽 길을 따른다>

  호남 지방에서 유림의 고장을 꼽을 때 ‘광나장창’이라고 하여 광주, 나주, 창평과 더불어 장성을 빼놓지 않았다. 마치 경상도 지방에서 안동 문장을 꼽듯이 전라도 지방에서는 ‘장성 문장’을 으뜸으로 쳤던 것이다.

  장성은 식민지 시대에 전라도 땅에서 여러 차례 의병을 일으켰다가 마침내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했던 의병장 기삼연의 고향이고 이곳의 북이면 모현리에 있는 촛대봉 마을은 호남 지방에서 처음으로 삼일 운동의 햇불을 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장성의 이런 선비 정신은 기정진을 모신 고산 서원, 김인후를 모신 필암서원, 변이중을 모신 봉암서원 등으로도 알 수 있는데 “못나서 촌구석에 묻혀 사는 것이 아니다”는 장성 사람들의 높은 자존심은 “장성 사람은 고춧가루 서 말을 먹고도 재채기 한 번 안 한다”라거나 “삼성 삼평 사람들이 앉은 곳에 풀도 안 난다”는 말을 낳기에 이르렀다.

 

<백양사의 깊은 골짜기>

  곡두재를 지나면서부터는 급경사의 오르막이 백암산 정상을 향하여 펼쳐진다. 땀은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능선에 올라 땀을 닦으며 백양사의 깊은 골짜기와 건너편 능선을 바라본다.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듯한 백학봉이 보인다. 육당 최남선이 “흰 맛, 날카로운 맛, 맑은 맛, 신령스런 맛이 있다”고 극찬하였다는 백학봉이다.

 

<구암사 갈림길>

 

<헬기장>

  백양사가 내려다보이는 능선 길은 절경이다. 백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여환선사가 백암사로 개창하였고 고려 덕종 때 중연선사가 중창 불사 후 정토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이 절이 지금의 백양사로 불리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선조 7년(1574년) 환성지안 선사가 영천굴에 주석하여 법화경을 독경하며 예불하였는데 그럴 때면 백학봉 밑에 사는 흰 양 한마리가 암자로 찾아와 스님이 ‘법화경’을 외는 것을 다 듣고 돌아갔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스님의 독경소리에 깨달음을 얻어 축생의 몸을 벗고 이제 사람의 몸으로 환생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하며 절하며 물러났다. 스님은 이를 이상히 여겨 다음날 아침 뒷산을 산책하던 중 흰 양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꿈을 이해하였다. 그 후로 스님의 높은 법력에 의해 축생인 양을 제도하였다 하여 이때부터 절 이름을 백양사(白羊寺)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능선 길의 위험표시판>

 

  9:40

  백암산 상왕봉 정상(741m)에 닿는다.  서울의 어느 인터넷 산악회의 단체 산행객이 정상을 점령한 가운데 주변의 산세를 둘러본다. 옛부터 봄이면 백양, 가을이면 내장이라 했듯이  백암산의 봄과 가을은 노산 이은상의 싯구에 ‘백암산 황매화야 보는 이 없어/ 저 혼자 피고 진들 어떠하리만/ 학바위 기묘한 절경 보지 않고서/ 조화의 솜씰랑은 아는 체 마라’라고 했다. 단풍의 계절이라지만 높은 산의 나뭇잎들은 벌써 떨어져 내렸는데 산아래 골짜기의 풍경은 아직도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정상 직전의 순창새재 갈림길>

 

<백암산 정상>

  여기서 한 번 착각을 일으킨다. 호남정맥은 상왕봉 정상 못 미쳐 순창새재 갈림길 이정표를 보고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나는 상왕봉을 지나가는 능선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가 잘못인 줄 알고 돌아서 올라 왔다.

  다시 순창새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백암산 정상을 지나면서 온전히 전라북도의 땅으로 들어선다. 이제는 전라북도 정읍시와 순창군의 경계능선을 추령까지 이어가게 된다.

  순창새재로 향하는 능선은 평탄하다. 길도 선명하고 등산객도 자주 보인다. 내장산에서 백암산 정상까지 종주하는 산행객으로도 보인다. 어떨 때는 한적하기도 해서 능선 종주코스로 이용해도 될 것 같다. 

 

<순창새재 가는 능선 길>

 

  10:20

  백암산 정상에서 30분 거리의 순창새재에 닿는다. 내장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 세워놓은 산행코스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고 이정표도 서 있다. 여기서 곧장 오른쪽의 잘 나 있는 등산로를 따르면 내장산 까치봉으로 갈 수 있는데 호남정맥 산줄기는 안내문 뒤편 봉우리로 올라야 한다.

 

<순창새재>

  안내문 뒤편 봉우리를 향하여 낙엽을 밟는다. 길은 선명하지 않으나 낙엽 위로 호남정맥 산꾼들의 흔적이 엿보인다. 봉우리에 올라서자 이곳이 영산기맥 분기점이다. 아무런 표시는 없으나 오른쪽은 호남정맥 능선이고 왼쪽은 영산기맥 능선인데 양쪽으로 리본이 붙어 있다.

 

<영산기맥 갈림길>

  오른쪽으로 간다. 건너편에 우뚝하게 높은 봉우리는 내장산 산줄기일 테고 북쪽의 정읍시 방향은 서당제라 불리는 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산죽을 헤치고 나가자 쌓아놓은 돌이 보이고 한적한 능선 길은 내장산 주등산로를 만날 때까지 계속된다.

 

<성터같은 흔적을 지나고>

  능선은 낙엽이 떨어져 가을을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내장사와 같은 사찰 주변은 단풍이 절정을 지나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이 지나면 단풍 행락객도 급속히 줄어든다는 택시 기사님의 귀띔이다.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소등근재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니 까치봉 1.4km라고 새겨진 이정표를 만난다.

 

 

<주등산로에 서 있는 이정표>

  이제는 까치봉에 이르는 주등산로를 따라 간다. 주등산로라서 산행 길이 즐겁게 이어지겠다는 기대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만다. 등산객이 자주 다니는 등산로는 먼지 풀풀 날리는 먼지 길인데 앞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에 길을 양보하다보니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다. 도대체 몇 명이나 지나가는 거야? 끝없이 이어지는 산행객은 긴 파도처럼 잠시 끊어졌다 또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드디어 까치봉 갈림길에 올라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정표를 보니 까치봉까지는 300m거리다. 가까우니 갔다 올까 하고 일어섰다가 포기하고 만다. 까치봉에 개미떼처럼 붙어있는 사람들과 좁은 능선 길에 줄지어선 사람들... 나는 산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리라고 예상을 못했는데 가을단풍을 즐기려는 산행객의 행렬이 대단하다.

 

<까치봉 갈림길>

  

  내장산 신선봉을 향하여 능선길을 간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서 관광지로 알려진 내장산은 호남의 금강산으로 불린다. 해발 765m의 신선봉을 비롯하여 서래봉, 장군봉, 문필봉, 연자봉 같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백제 무왕 37년인 636년에 영은 선사가 세운 것이라고는 하나 6.25 전쟁 때 죄다 타 버린 내장사가 있어 가을이면 전국에서 단풍관광 인파가 몰려든다는 내장산이다. 나도 그 내장산의 단풍인파에 휩쓸려 능선 길을 이어간다.

 

<신선봉 가는 능선길>

 

<내장산 신선봉 안내판>

 

  12:15

  내장산 신선봉 정상(763m)에 닿는다. 넓은 헬기장을 가득 메운 산행객들이 무리지어 식사를 하는가 하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모습이다. 한쪽에는 신선봉 안내문이 서 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내장산 최고봉으로 경관이 수려하고 내장 9봉을 조망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선유하였으나 봉우리가 높아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 신선봉이라 불리운다. 봉우리 아래 계곡 산벽에 유서 깊은 용굴과 금선폭포, 기름바위, 신선문 등이 있고 남쪽으로 구암사로 통하여 그 너머로 백양사에 이른다.”

  안내문에 말하는 용굴은 역사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전주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이 태조의 영정 따위를 옮겨와 한 해가 넘게 이 굴에 숨겨두고 굴 앞 암자에서 정성들여 간수해낸 이가 손홍록과 안의이다. 임진왜란 중에 다른 세 곳의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전란에 불탔으나 오직 전주 사고본 만이 온전했던 것은 이런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신선봉 정상에서 휴식하는 산행객들>

 

<신선봉에서 이어지는 능선>

  신선봉에서 휴식한 후 동쪽 능선을 이어간다. 기억도 먼 83년 5월, 혼자 내장산을 찾았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내장사에서 용굴을 지나 신선봉에 올랐는데 하늘이 핑그르르..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불안해하던 차에 남자 두 사람과 여자 한 사람으로 구성된 산행객을 만나고 일행이 된다. 산행의 경험이 없고 준비가 소홀했던 나에게 소주 한 잔과 통닭찜이 얼마나 맛있었는지는 생각하기 어렵지 않은데 내장사까지 동행하며 즐거운 산행길이 된다.

  유동래씨라는 35살의 연장, 대장으로 통했다.

  “대장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여, 알겄는가?”

  “알겠습니다. 대장님.”

  23살이라는 아가씨가 목소리도 이쁘게 대답한다. 손양이란다.

  “손양은 대장을 잘 만난 덕에 신선대까지 올라와 보구... 신선이 이곳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보통 한 판 두었다하면 천 년이야 천 년... 하늘에서 놀던 선녀가 구슬을 떨어뜨렸는데 신선이 찾아주기로 했다 이 말씀이거든. 그래서 땅을 파고 긁어냈는데 긁어낸 자리가 계곡이고 아직 남은 것이 산이야.”

  “어쩜!”

 
<장군봉 정상>

 

  13:10

  장군봉에 닿는다. 외줄기로 이어진 내장산 능선은 산줄기 자체가 산행의 아름다운 코스이다. 장군봉에 닿자 내장사가 더욱 가깝게 내려다보이고 내장산 중턱까지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골짜기는 온통 붉게 물든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다. 건너편에는 농기구의 ‘써래’처럼 생겼다는 서래봉이 우뚝한 바위를 하늘로 세우고 있다.

  “내장산 골짜구리 돌벼래 위에/ 불타는 가을 단풍 자랑 말아라/ 신선봉 등 너머로 눈 퍼붓는 날/ 비자림 숲이 더 좋더구나” 하고 시인 이은상이 읊게 한 비자나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단풍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는데 하기야 내장산이 단풍만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겠는가. 내장산에서 자란 산딸기와 복분자로 빚은 술인 복분자술이 썩 맛이 좋아 주당들에겐 내장산을 찾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장군봉을 지나자 내리막 산길이 이어지고 잠시 후에는 유군재에 닿는다. 군사가 머물렀다는 뜻을 가진 유군재는 내장산 능선에서 내장사로 하산하는 코스인데 나에게 인상 깊게 남은 이유는 이곳을 지나 백양사까지 8km 구간을 걸었던 지난 83년의 경험 때문이다.

 

<유군재>

  유군재를 지나 추령으로 향한다. 등산객들이 줄을 지어 섰던 내장산 능선을 지나자 유군재 이후부터는 등산객이 뜸하다. 국립공원 표석이 서 있는 480m 봉에 닿자 내장산 골짜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내장사 주위로 단풍의 붉은 잎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 사이사이로 행락객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방향을 바꾸어 내장사 들목을 바라보니 이곳도 풍광이 아름답다. 내장사 들목의 동구리 골짜기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인 희묵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울 적에 쌓았다는 내장산성이 있다고 하는데 전쟁의 소용돌이는 이곳에도 뻗쳤음을 본다.

 

<내장사가 바라보이는 골짜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가을 햇볕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내장산의 가을을 만끽하며 추령으로 향한다. 이곳 능선도 정읍시와 순창군을 구분짓는 경계이지만 주위는 온통 산으로 이루어져 모든 것이 산 속에 푹 파묻혔다.

 

<산으로 파묻힌 추령가는 능선 길>

  추령이 가까워지자 정읍에서 내장산 들목을 지나 추령으로 올라오는 찻길이 내려다보인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힘들게 올라오는 차량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는데 추령으로 올라서면 평지로 바뀌는 지형의 특성이 신기할 정도다. 천치재에서부터 호남정맥이 돌아가는 순창군 복흥면은 고도가 400m 이상으로 고지대에 속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추령으로 오르는 국도>

 

  14:00

  오늘의 산행 종착지인 추령에 닿는다. 49번 국도가 정읍시와 순창군을 이어주고 감상굴재를 지나 장성군으로 들어가는 고갯길인 추령은 힘들여 산길을 올라온 차량이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도를 늦춘다. 

 

<추령>

  추령 고갯마루는 분주하다. 지금은 순창군에서 진행하는 장승축제 중이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소란스럽다. 장승의 기원은 솟대, 신목(神木) 등과 함께 청동기 시대의 원시 신앙물로서 일종의 수호 신앙인데 이곳 추령에는 오래전부터 장승촌이 형성되어 왔다. 행사장으로 들어가 본다. 장승촌에 어울리는 다양한 장승이 갖가지 진기한 표정으로 전시되어 있고 그 옆에는 특산물을 파는 가게와 식당들이 관광객을 맞느라 축제는 절정을 향해 달린다.

 

<추령장승축제가 진행되는 행사장>

  행사장에서 나와 택시를 부른다. 어젯밤 백양사 아래에서 본 수많은 감 판매장에 대하여 기사님께 물었더니 그 마을이 원래부터 감생산지로 유명했단다. 오늘의 도로변은 ‘호박고구마’ 판매장이 손님을 부르니 가을은 그렇게 풍성함을 남기고 있다. 나에게는 내장산을 지나온 호남정맥이 조약봉을 향하여 북진하는 일만 남았고...<20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