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구간

호남정맥

산행일

둔병재~무등산~유둔재

(13km, 6시간)

2008년 10월 12일

 맑음

 

 

<산행기록>

둔병재-안양산-장불재-규봉암-신선대-유둔재

 6:50     7:40      8:50     9:30    10:30   12:50

 

 

 규봉 높은 절에 종소리 끊어지고

 

  이틀연속산행을 예정하고 둔병재의 안양산 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휴양림의 산막에서 드라마 세종대왕도 못 보고 잠이 들었는데 무지무지하게 더워 잠이 깼다. 방을 데우려고 온도를 올려놓고 잔 것이 화근이었는데 덕분에 온돌방에서 잔 것처럼 밤은 잘 지냈다. 혼자 쓰기에 운동장 같은 산막은 온수가 찔끔찔끔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난하였다. 주방기구와 전기밥솥이 갖춰져 있어서 밥을 해 먹을 수도 있고 소형 냉장고도 있다. 작은 담요는 4인 가족이 사용해도 넉넉한 양이고 샤워시설도 있어서 방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자연휴양림의 산막>

  휴양림 시설뿐만 아니라 시골의 어느 가정을 가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뜨거운 방에서 자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한비야가 쓴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라는 그의 국토 종주기에도 단종애사에서 뜨거운 방에 갇힌 단종의 심정을 알겠다며 여관방의 달궈진 방바닥을 이야기하고, 한 외국인의 한국 여행 경험을 적고 있다.

  “한국의 아궁이 방은 잠자는 방이 아닌 화장터 아궁이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싶고 고래(아궁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침에 죽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 나에게는 항상 놀랍고도 설명할 수 없는 사실로 각인되었다.”

 

  6:50

  밤새 정이 든 산막을 출발한다. 아침 6시에는 훤해진 날씨라서 조금 일찍 출발할 수도 있었는데 컵라면 하나 끓여 먹는다고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10월중순의 상쾌한 아침은 약간 쌀쌀한 느낌도 있지만 산행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해준다.

  산막을 출발하여 어제 도착한 출렁다리까지 올라간다. 출렁다리에서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둘러보니 위쪽에 산책길 이정표와 함께 오솔길이 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안양산으로 향하는 산책길>

  산책길을 따라 간다. 산책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안양산 오름길이 나오고 급경사의 오름길은 시작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먹은 컵라면 하나의 칼로리는 여기서 모두 축낸다. 이른 아침부터 땀이 비오듯 흐르고 숨은 고르지 않다.

  안양산이 지척에 보이는 능선에 올라선다. 어제 지나온 오산의 산줄기와 더불어 화순군의 산세가 엷게 깔린 구름과 함께 한 눈에 들어온다. 아! 이런 조망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숨이 멎는다. 일망무제의 장엄함이라. 정비석은 그의 ‘산정무한’에서 “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라고 했다던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일망무제의 산세>

  안양산으로 오르는 길은 억새가 가을의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맑은 날 이곳에서 해돋이를 감상할 수 있도록 시간계획을 세웠더라면 감동은 배가되었을 듯하다. 조선일보사에서 간행한 실전 종주산행에는 안경호 씨의 산행경험이 기록되어 있다.

  “다소 미끄러운 참나무숲길을 따라 10분쯤 올라가자 마침 동쪽에서 붉은 빛이 감돌더니 시뻘건 태양이 막 떠오른다. 일행들의 환호성과 함께 오늘의 답사가 축복을 받은 듯싶어 마냥 즐거워진다.”

 

  7:40

  둔병재에서 50분을 걸어 안양산 정상(853m)에 닿는다. 넓은 헬기장이 있고 주변은 온통 억새가 장관이다. 이곳에서 보는 풍광은 일출의 장관이 아니더라도 가을단풍이 내려오는 시점이라서 그런지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한동안 감탄하며 서 있게 된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안양산 정상>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안양산에서 보는 무등산>

  자연의 풍광을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다시 가야 하는 산행길이다. 안양산의 아름다운 모습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배낭을 둘러맨다. 그리고 길을 간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다시 뒤를 돌아본다. 300평이 넘는다는 안양산의 정상 헬기장은 억새가 산들거리고 저만치 휴양림과 장불재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 있는데 그 모습이 또한 장관이다. 카메라를 다시 꺼내어 마지막으로 한 장 더 남겼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이정표가 서 있는 정상의 모습>

  억새밭을 헤치며 내려간다. 저만치 묵묵하게 자리 잡고 있는 무등산을 향해 이어지는 정맥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키를 넘는 억새밭 속으로 한동안 뚝 떨어져 내려가다가 안부에 닿는다. 만수리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가 보인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안부>

  안부를 지나자 다시 오름길이 나온다. 무성한 숲터널 길이 점점 가팔라지다가 전망이 좋은 능선마루에 올라선다. 무등산으로 향하는 능선의 왼쪽에는 만연산 능선이 길게 뻗어 있고 화순읍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보인다. 능선의 오른쪽은 화순군 이서면이다. 무등산의 이쪽 절반은 화순군에 속하는 것으로 장불재에서 신선대로 가는 내내 화순군 무등산이라는 이름이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능선의 정면은 무등산이다.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이만치 떨어져서 보는 것이 무등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더 잘 된다. 한때 무진악, 무악, 서석산이라고도 불렸던 무등산의 무등은 불교와 인연이 있는 말로서 ‘반야심경’에서 부처가 절대 평등의 깨달음 곧 ‘무등등’을 말한 대목에서 유래된 듯하다고 한다. 높고 낮은 계급이 없다는 뜻으로도 풀어 새겨 볼 수 있는 ‘무등’이라는 말과 같이 이 산은 흙산으로서 생김새도 두루뭉실해 보인다. 멀리서 보면 마치 커다란 삿갓을 엎어놓은 모습이다.

 

  936m봉을 올라서자 무등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안양산에서 능선을 따라 이어온 모습이 백마의 안장처럼 푸근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이 아름다운 능선을 일컬어 백마능선이라고 부른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뒤돌아본 백마능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화순읍 방향의 만연산 줄기>

  장불재를 향하여 길을 간다. 저 멀리 장불재와 군시설물인지 이동통신 시설인지 안테나도 보인다. 그 오른쪽으로 무등산을 절경으로 만들어준 입석대의 모습도 보인다. 젊은 시절 정약용은 광주의 금소당에 거처할 때 동복의 적벽을 구경하고 서석산에 올랐다. 그 때 그에게 서석산 유람을 부추긴 사람이 화순의 조익현이다.

  “적벽의 뛰어난 경치는 여자가 화장을 한 것과 같아서 붉고 푸르게 분을 바른 모습이 비록 눈을 즐겁게 할 수는 있으나 가슴속의 회포를 열고 기지를 펴게 해주지는 못하네. 그대는 서석산을 보지 못하였는가. 우뚝한 모습은 마치 거인과 위사가 말하지도 웃지도 아니하고 조정에 앉아 있어 비록 움직이는 흔적은 볼 수 없되 그의 공화는 사물에 널리 미치는 것과 같네. 그대는 그 산을 가보지 않으려나?”

 

  사실 무등산은 육산이지만 그 특색은 오히려 암석의 아름다움에 있는데 그 대표적인 바위가 서석대, 입석대, 규봉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산 서쪽 양지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100척이나 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석이라 하였다”라고 밝힌 것과 같이 무등산의 바위는 특별한 데가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장불재가 바라보이는 능선>

  서석대는 장불재의 초원을 헤치고 동북쪽으로 300m쯤 가면 바위로 병풍을 친 것같이 보이는 돌무더기로 저녁 해질 무렵이면 햇빛에 반사되어 수정처럼 아름답게 번쩍거려 수정병풍이라고도 불린다. 5월 하순쯤이면 이곳 바위틈에 철쭉이 붉게 피어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한다.

  또 입석대는 장불재에서 동쪽으로 200m쯤 올라가면 해발 1017m의 높이에 있다. 다섯모에서 여덟모까지 난 10m가 넘는 돌기둥이 반달 모양으로 마치 석공이 먹줄을 퉁겨 깎아 세운 듯하게 서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의 의병장이던 고경명은 42세 되던 해 지은 ‘서석 유람록’에서 입석대를 이렇게 노래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높은 관모를 쓰고 몸이 큰 귀인이 단정하게 홀을 쥐고 공손히 읍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면 마치 철옹성과도 같은 튼튼한 요새에 일만의 병사가 숨어 있는 듯하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입석대>

 

  8:50

  해발 900m의 장불재에 닿는다. 둔병재에서 2시간이 소요되었다. 장불재에는 등산객 몇 분이 쉼터에 앉아 있고 저쪽에는 아침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려는 카메라 동호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한쪽에는 무슨 공사를 하는지 고갯마루가 파헤쳐진 채 작업중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장불재>

  저 멀리 광주시내가 내려다보인다. 광주가 어디냐 하면 무등산 아래에 있고 무등산이 어디냐 하면 광주에 있다 한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에 미친다”는 말이 있듯이 1187m로 높이 솟은 무등산과 이 산에 이어진 줄기가 병풍처럼 광주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 시대에는 무진주로, 통일 신라 시대에는 무주로 불렸던 광주가 지금의 땅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 태조 때인 940년부터였다. 자리를 잘 잡은 이 도시가 나주에 밀려 조선 시대 말까지 전라남도 지역을 대표하지 못했던 것은 나주가 수운이 편리하고 그 언저리에 넓은 농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주는 고려 태조 임금의 처가가 있던 곳이었고 그가 나라를 세우는 데에 도움을 받았던 지방인 데에 견주어 광주는 한때 후백제의 견훤이 자리한 도읍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장불재 풍경>

  그러나 조선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광주는 나주 못지않은 큰 고을이었으니 1789년 정조 임금 때 실시한 호구조사에 따르면 나주와 광주는 비슷한 5500명 선이었다. 그 후 일본의 식민통치를 맞게 되자 일제는 대륙침공과 자원 반출을 위해 광주 대신에 목포를 더 많이 개발하고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다 1940년부터는 광주 인구가 5만 명 정도의 목포인구를 앞지르기 시작하여 오늘날은 서울, 부산, 대구, 인천에 이어 국내 5위를 차지하는 대도시이며 인구 140만 명이 거주하는 호남지방 최대의 도시로 발전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장불재에서 내려다본 광주시내>

 

  장불재에서 휴식한 후 출발한다. 원래는 무등산의 정상을 통과해야 호남정맥이 이어지겠지만 정상 부근은 출입금지구역이라 규봉암으로 돌아가는 구간을 이용한다. 규봉사 1.3km라고 된 방향으로 발길을 옮겨 산허릿길의 평탄한 등산로를 따라 간다. 20분쯤 지나니 너덜지대를 만나고 조릿대숲도 지난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너덜지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규봉암 직전의 표지판>

  규봉암 갈림길에서 잠시 규봉암을 다녀오기로 한다. 무등산의 세 절경 중 하나인 규봉은 세 개의 돌기둥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삼존석 곧 여래존석, 관음존석, 미륵존석이라고 부른다. 이 삼존석 아래에 반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광석대이다. 노산 이은상은 이곳에서 ‘규봉암에서’라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규봉(圭峯) 높은 절에 종소리 끊어지고

  방 예불 마디마디 달은 점점 밝아오네

  삼존석(三尊石) 십대(十臺)를 돌아

  밤새도록 헤멜거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무등산 규봉>

  규봉 주변은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다. 신라말엽 옥룡자 도선국사가 이 암자를 창건하고 고려 때 보조국사가 규봉암에 머무르면서 수도하여 나중에 순천 송광사의 절터에 수선사를 짓고 세상에 도를 폈다고 한다. 지금도 규봉암 옆에 돌로 지어진 석실이 있는데 이 석실을 보조석굴이라고 하며 규봉 주위에는 십대석이 있다고 하니 송하대, 광석대, 장추대, 풍혈대, 청학대, 송광대, 법화대, 설법대, 은신대, 계성대를 일컫는다.

  이 중에서 풍혈대는 바위를 올라 돌틈으로 끼어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 바위를 끼어 나가면 총각은 장가를 빨리 가고 지옥길은 면한다고 하며 세 번 끼어 나가면 삼재에 든 사람이 그 액을 면한다하여 풍혈대를 찾아 온 사람이 많단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기암괴석 아래의 규봉암>

 

  규봉암의 절경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간다. 한참을 가니 신선대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는데 내가 참조했던 ‘따라가기’ 님의 산행기에도 이곳에서 광일목장을 경유하여 신선대로 향하는 방법이 있다며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래서 한참을 서성거렸는데 그러나 요즘은 광일목장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꼬막재 방향으로 더 가다가 신선대를 보고 수직으로 꺾어 내려가는 길이 선명하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광일목장 표지석>

  신선대 입구 표지석에서 좀더 걸어가니 신선대 억새평전을 알리는 표지판을 만난다. 이곳에서 건너편에 보이는 북산을 향하여 억새평전을 내려간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신선대 방향 갈림길>

  이곳의 억새 평전은 무등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무등산이 광주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 준다는 의미는 그 이름에만 있지 않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라고 시인 김광섭 씨가 노래한 ‘산’처럼 무등산은 제 몸이 사람과 맺은 인연의 역사를 덤덤하게 말해 주면서 무정하다 하여 조선 왕조의 태조 임금으로부터 ‘무정산’이란 이름을 얻은 산답게 그 아랫 세상을 모르는 체하며 지켜보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신선대 가는 길>

  억새밭을 지나 오름길을 간다. 북산으로 가는 오름길에서 암벽을 만난다. 깎아지른 입석 아래 제법 넓은 공터를 가진 바위인데 여기가 신선들이 놀만한 신선대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모습 또한 장관이다.

 

  10:30

  신선대에서 좀더 올라가니 북산 정상(777m)에 닿는다. 한 무더기의 돌탑이 서 있고 남진하는 호남정맥 종주대 한 팀이 휴식하고 있다. 북쪽으로 새롭게 나타나는 담양군의 산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호방하게 펼쳐진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북산 정상>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북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무등산>

  낮시간이 되면서 기온도 오른다. 이제는 땡볕에 걸으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시간대다. 10월 중순에 접어들었지만 낮에는 기온이 꽤 높다. 북산 정상은 그늘이 없어서 잠시 휴식한 후 출발한다.

  지금까지의 넓고 편안한 등로를 버리고 호남정맥 본연의 산길로 접어든다. 좁고 가시가 길을 막는 외로운 투쟁의 길이다. 훌륭한 조망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감상하였으니 이제는 서먹하고 어색한 길을 둘러보며 가야 한다. 북산 정상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리듯이 빠르게 내려간다. 넓은 공터를 지나 한참을 진행하니 돌무더기가 있는 백남정재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백남정재>

  잠시 휴식하며 지도를 본다. 북산에서부터 화순군과 광주광역시도 작별하고 어느새 담양군 땅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담양이다. 대나무의 생육환경에 맞아 우리나라에는 유일하게 대나무박물관이 있고 유학자의 쉼터인 정자문화와 가사문학이 살아 숨쉰다는 고을이다.

  그러나 첫 인상은 험난한 산길이 유둔재까지 이어짐으로써 즐겁지만은 않다. 방향감각을 잃을 정도로 깊은 산속을 잘도 헤쳐 나간다. 자그만치 2시간 거리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철탑을 지나고>

 

  12:50

  유둔재에 닿는다. 건너편에 가사문학 등산안내도가 서 있고 2차선의 좁은 도로는 867번 지방도가 지난다. 담양과 화순의 이서면을 이어주는 산길이다. 택시를 부르려고 전화를 걸었더니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다. 웬만한 고개에서는 핸드폰 통화가 가능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다시 시도해도 신통하지 않다. 다행히 전주 중앙산악회의 전상호 씨를 만나 둔병재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유둔재의 가사문학 등산안내도>

  산행을 노가리재까지 염두에 두고 출발했으나 유둔재에서 접었다. 유둔재 밑에 있는 소쇄원을 구경하고 싶어서다.<2008.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