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16구간(버리미기재-이화령)종주기

5월이 시작되었다. 5월은 신록의 계절, 계절의 여왕으로 불린다. 야회 활동에 안성맞춤이어서 행사가 많은 달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 빨리 간다. 그리고 어렸을 때보다 기온이 자꾸 더 높아지는 듯 오늘도 더운 날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 화두로 지구 온난화를 꼽고 있다. 자연 조건이 달라지면 인간의 삶의 환경도 달라지게 된다. 자연의 순리대로 순응해 살아간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 모든 것이 인공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조건이 변함으로써 무용지물이 되고 재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10시에 삼성역에서 출발한 버스가 25분 후 강동역에 도착하여 최회장 부부와 차에 올랐다. 버스 안에는박기현 회장과 이대장, 그리고 지난 구간에서 인경을 잃어버렸던 백원철 건축사, 조병섭 건축사, 강성택 건축사사 타고 있었다. 평소 빠지지 않던 채 총무는 집안일로 정황이 없는 상황이고 박정호 사장도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긴 구간을 가는 마당에 잠을 잘 시간이 없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차가 출발하자마자 통로측 접이 의자를 펴고 배낭을 벼개 삼아 잠을 청했다. 한동안 가다 차가 서행하는 느낌이 들어 밖을 보니 11시 55분 괴산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었다. 그 순간 이대장이 수안보 톨게이트로 가야 하는데 잘 못 들어왔다며 앞자리로 이동해 길을 안내 했다. 휴게소에 들러 식사를 하기로 예정했었는데 식사 할 수 있는 식당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12시 17분 이대장이 불이 켜져 있는 호프집에 들러 밥집을 물어보다가 그 집에서 해주기로 했다며 올라왔다. 일행은 밥이 다 될 때까지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후 이 대장이 밥이 다 되었다며 내려오라고 햇다. 늦은 밤인데 주변에서 부부싸움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이 목에 겨운 목소리로 “내가 이 나이에 술 한잔도 마음대로 못먹냐?” 하며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12시 45분 호프집 안으로 들어가니 식탁에 상을 차려 놓고 있었다. 주인이 직접 불을 때서 한 것인양 밥맛이 좋았다. 그리고 생선찌게와 고들빼기 김치등 밑 반찬도 좋아서 모두들 맛있다고 하면서 먹었다. 밥집도 아닌데 사정을 알고 해 준 것이라 더욱 고마웠다.

1시 23분 삭사를 마치고 승차했다. 34번 국도에서 517번 국도 쌍곡 게곡으로 들어가 1시 51분 버리미기재 도착했다. 이정표가 없어 울타리가 쳐진 것을 보고 지난번 마친 지점인 것을 알았다. 올라갈 방향을 배경으로 운전기사께 사진 촬영을 부탁해 찍고 2시 10분 출발했다. 울타리를 돌아들어 산행을 시작했다. 경사 길에 마사가 흘러내려 걸음이 미끄러웠다. 잠시 후 리본이 양쪽에 매달린 갈래길이 나오자 이 대장이 당황스러운 듯 길을 찾아 앞으로 가면서 좌측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가 예기한 길로 나아가니 길이 합류되었다. 대간 산행에서는 길이 애매한 때가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가다 보니 나의 헤드랜턴이 점점 흐려졌다. 그냥 견디려 했으나 금새 흐려졌으나 아까 차에서 건전지 두개를 갈아끼우며 다 써서 마지막 한개를 갈아 끼울 것이 없었다. 마침 옆에 있던 강성택 건축사가 여분이 있어  나머지 한 개를 갈아끼우고 나니 밝게 켜졌다. 문명이 없는 산을 찾았지만 깜깜한 밤 길을 걸으려면 헤드 랜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러니한 느낌이었다.

2시 14분 부러진 소나무를 지났다. 어둠속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헤드 랜턴에 비친 떡걸나무 잎이 제법 넓게 자라 있었다. 큰 산 속에서의 고요를 느끼며 완만한 길을 걸었다. 잠시 후 장성봉 2지점 표지를 보고 지났다. 지난번 대야산 구간에서 험한 암릉을 지나면서 이제 험한 구간은 벗어난 것처럼 여겼지만 군데군데 암릉이 나타나 다시 긴장하게 했다.

2시 30분 완만한 능선을 걷다 전망 바위를 지났다. 좌측으로 마을 불빛이 보였다. 완만한 능선길에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잠시 후 다시 완만한 오름길을 걸었다. 2시 43분 장성봉 3지점에 도착했다. 거기서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하지만 하늘에는 총총한 별이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봉우리를 넘어 내리막길을 걷다 다시 오름길을 걸었다. 정상일 것 같은 느낌으로 왔는데 다시 큰 산을 앞두고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다시 벼랑길을 오른 후 완만한 길을 걸어 2시 54분 장성봉(915.3)에 도착했다. 오늘 산행에서 지나는 큰 산 가운데 첫 번째 정상이었다. 일행은 거기서 잠시 쉬다 3시 5분 출발했다.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잠사 후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완만한 오름길을 걸었다. 어둠 속에 나무 형태로 소나무 숲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3시 22분 완만한 오름길을 걸어 잠시 후 막장봉 갈림길에 당도해 잠시 휴식을 취했다. 주변에 마을 불빛이 보였다. 다시 출발해 지그재그로 내리막길을 갔다. 백원철 건축사가 고도계를 보며 850M라고 했다. 완만한 내리막길에 참나무 숲길을 지났다. 헤드 랜턴이 비춰 철쭉도 보였다. 완만한 오름길을 걷다 다시 내리막에서 숲길을 지나고 다시 완만하게 경사진 오름길을 걷다보니 바위 봉우리가 나타났다.

3시 45분 다시 급경사진 오름길을 올라 봉우리를 넘어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 곳은 겉흙이 마사여서 길이 미끄러웠다. 옆에서 걷던 일행이 “올라가더니 또 내려가네” 했다. 힘들게 걸어 봉우리에 오른 다음 뚝 떨어지면 오른 것을 다 까먹는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한참을 내려가다 다시 완만한 오름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앞산처럼 포근한 완만한 길을 걸었다. 길가의 떡갈나무 숲에 잎이 핀 느낌이 들었다. 깜깜한 밤에 만나는 꽃길의 정취를 느끼며 느린 바람이 부는 완만한 길을 걸으니 점차 걸음이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봉우리를 넘어 내리막길을 걸었다. 길은 우측으로 휘어져 이어 나가고 있었다. 4시 3분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 휴식을 취했다. 옆에 있던 김원철 건축사가 고도계를 보고 810m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이 대장이 809m 봉일 듯 하다고 했다.

4시 15분 다시 출발해 바위 암릉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낙엽이 푹신한 길을 지나 완만한 봉우리를 넘어갔다. 그리고 계속해 완만한 길을 걸어가니 우측 산 너머로 그믐달 뜬 것이 보였다. 지난 구간에서는 더덩실 둥근달이 떠서 밤길을 비추었는데 이번에는 머리핀처럼 가느다랗게 되어 있었다. 거기다 늦게 떠서 없던 달이 생긴 듯한 느낌이었다.

다시 길을 걷다 넘어진 큰 소나무 옆을 지났다. 넘어지면서 뿌리가 들려 엉덩이 들고 있는 것처럼 되어 있었다. 그 곳 봉우리를 넘어 완만한 길을 걸어가다 보니 점차 날이 밝아 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급경사 길이 나타났다. 능선에 오르니 계곡 너머 봉우리가 보였다. 악휘봉 가까이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대간 마루금은 그 산을 올라가지 않고 지나치게 되었다. 4시 52분 공터 같은 헬기장에 도착했다. 선잠을 깬 졸린 새소리가 아닌 제대로 잠이 깨어 정신이 든 새소리가 들렸다.

다시 완만한 오름길을 걸었다. 느린 바람결에 깊은 계곡의 고요가 느껴졌다. 점차 동이 트면서 숲 내음도 풍겨나는 듯 했다. 그리고 산세 실루엣이 보여 뒤로 넘어온 산세도 윤곽이 보였다. 맑은 날씨에 봄의 숲에서 풍겨나는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어둠이 가시자 형체들이 아른거리듯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것이 어둠속에서 정령들이 요술을 부려 생긴 현상처럼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느낌이 귀히 여겨져 인상을 담으려고 스케치 하고 갔다.

5시 15분 악휘봉 삼거리에 도착했다. 정상석에서 바로옆에 있는 악휘봉이 보였다. 그 곳에 들르지는 않지만 뒤의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가까이 있는 선바위를 보고 왔다. 거기서 휴식을 취하다 5시 40분 출발했다. 거기서는 길이 우측 방향으로 직각으로 꺽여졌다. 그리고 바라보이는 시선도 달라지게 되었다. 방금 전 선바위에서 펼쳐보이던 시원한 풍경속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길이 가는 능선에서 좌측 아래로 은티 마을이 보였다. 완만하게 굴곡진 길을 걷다보니 5시 46분 좌측 방향에 해가 뜨고 있었다. 지난번 구간에 이어 이번에도 일출을 보았다. 오늘 가야할 길이 멀지만 기분은 상쾌하게 걷게 되었다. 길을 걷다보니 은티마을에서 개 짓는 소리도 들렸다.

한동안 걷다 6시 9분 로프를 잡고 급경사진 내리막 암릉 길을 내려갔다. 다시 암릉 구간을 지나 6시 25분 은치재에 당도했다. 공터 같은 곳에 작은 표지가 세워져 있었다. 다시 오르막 길을 걸어 6시 42분 주치봉(683)에 당도했다. 그 때 이대장이 조병섭 건축사의 전화를 받고 박기현 회장이 은티 마을로 내려가는 중이라고 했다.

주치봉에서 휴식을 취하다 7시 5분 다시 출발해 완만한 오름길을 걸어 바위로 되어 있는 봉우리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능선을 넘어가다 좌측에 놓인 바위를 지나 한걸음 나가자 좌측에서 바람이 세게 불어와 시원하게 했다. 해가 뜨니 기온이 높아지고 있었다. 벌써 바람이 좋은 계절이 되었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산세가 보였다.

7시 35분 청초한 멋을 지닌 야생화가 무리지어 피어 있는 것을 보며 걸어가다 급경사 오름길을 올랐다. 맨 앞에 이대장이 가고 그 뒤로 강성택 건축사가 묵묵히 걷고 있었다. 잠시 후 마당바위에 도착했다. 거기서 은티마을 뒤로 채석장이 보였다. 어느 곳보다 깊게 펴여서 자연 경관이 크게 훼손되어 보였다. 그 곳을 지나는 동안 계속해서 은티마을이 아래로 내려 보였다. 점심을 먹기로 한 시루봉 아래 물이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마루금 산세가 은티마을을 둘러치고 있었다.

8시 1분 구왕봉 정상에 당도했다. 거기서 바로 앞에 지금까지 봉우리 너머로 보이던 희양산이 바로 앞에 보였다. 그 곳에 다다르니 다른 일행이 쉬고 있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동안 산행중에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었다. 그들에게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고 물으니 은치재에서 시작해 우리가 마칠 이화령까지 간다고 했다.

거기서는 희양산으로 오르는 것이 숙제로 남아 있었다. 평소에 지름티재에서 봉암사 스님들이 지키며 희양산 오르는 것을 막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일행이 앉아 쉬며 지나갈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8시 30분 다시 출발했다. 내려가는 길의 경사가 심해 조심스러웠다. 바로 아래에 지름티재가 보였다. 주변을 보니 들은데로 움막과 울타리를 쳐 놓은 것이 보였다. 그러나 다행히 지키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8시 51분 울타리 사이에 사람이 통과 할 수 있게 뚫린 곳을 통과해 희양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9시 5분 조금 오르다 멈춰서 다른 일행을 기다렸다. 일행이 오르는 방향을 보니 지나온 구양봉이 정면으로 보이고 우측으로는 은티마을 너머의 산세가 보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큰 바위 사이에 조형미 있는 소나무가 한그루 꽉 차게 서 있었다.

뒤의 일행이다 도착해 9시 15분 다시 출발했다. 거기서부터 오름길의 경사가 급했다. 갈수록 경사가 더 급해지고 절편처럼 날이 예리하게 잘린 바위들이 있어서 오르기 힘들었다. 오르는 동안 주변에 썩어 나자빠진 나무가 보였다. 위를 바라보니 시야가 트인 정상부가 멀리 보였다. 그렇게 험한 길로 끝까지 오르려면 힘이 많이 빠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발걸음을 딛는 동안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지막 부분은 암벽 구간이어서 길게 로프가 걸려 있었다. 암벽 로프를 타고 올라가 9시 38분 너른 바위가 있는 곳에 올라섰다. 그 곳이 정상은 아니지만 어렵게 올라 심정적으로는 정상 같은 곳이었다.

그 곳에 올라서니 아까 보았던 다른 일행이 쉬고 있다 쉴 자리를 비켜주려는 듯이 금새 길을 떠나났다.  우리도 그들이 쉬고 있던 바위에서 쉬면서 뒤에 힘들게 올라올 일행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강성택 건축사가 줄이 흘들린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일행들이 로프를 타고 올라왔다. 거기서 대간 마루금은 희양산 정상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정상을 확인하고 가기로 하였다. 고단하여 나서지 않는 일행들에게 이대장이 연거푸 권하여 올라갔다. 올라서니 시선이 확 트여 지지난 구간부터 지나온 산세가 다 보였다.

그리고 아래를 보니 계곡 아래 봉암사가 뚜렷하게 보였다. 이 계곡은 봉암용곡이라 불린다. 병풍같이 사방을 둘러싼 산이 마치 봉황이 구름을 흔들며 날아오를 듯 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것이 속세를 벗어나 더 깊은 곳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게 했다. 그런 입지를 배경으로 있는 사찰이 희양산 봉암사이다. 봉암사는 지증대사 도헌(824~882)이 개산조(開山祖)인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이다. 최치원이 쓴 봉암사 지증대사 비문에는 창건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데, 지증 대사는 이 터를 보고 “만약에 절을 짓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그리고 1947년 성철, 청담, 자운 스님등이 일제 강점기가 지나며 우리 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결사를 결행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유래를 바탕으로 조계종에서는 1982년 6월 이 곳을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였다. 그런 연유로 평소에는 일반인에게 개방을 하지 않고 부처님 오신날만 개방하고 있다.

지도를 보니 이제 오늘 구간의 반 정보 밖에 지나지 않았다. 평소 이시간이면 삼분의 일 정도를 남겨 두고 잇을 시간이었다. 어제 밤에 산행을 더 일찍 시작해서 8시간 10분 정도를 걸었는데도 남은 거리가 많이 남은 것이 심리적으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목표한 산행에 나선 후에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구간을 다 마칠때까지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단지 다리가 아파서 걷기 힘든 상황이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10시 23분 희양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이 다시 좌측으로 직각으로 꺽여 나 있었다. 내리막 길을 가다 잠시 후 성터에서부터 시작되는 오르막 길을 걸었다. 성터는 오르는 능선을 따라 계속 이어져 있었다. 가다가 정상부를 치(雉)처럼 둘러쌓은 봉우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더 걸어 높은 봉우리에 오르니 뒤로 지나온 산세가 보이고 지나갈 방향에 이만봉과 그 너머 백화산이 보였다.

10시 35분 봉우리 넘어 내리막길의 암릉구간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계곡에 내려서서 다시  앞에 보이는 봉우리로 급경사 길을 걸어 올라갔다. 그 봉우리에 서니 앞에 시루봉이 보였다. 좌측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봉우리를 내려가 11시 5분 점심을 먹기로 한 계곡에 도착했다. 뒤의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 빈 물통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신발을 벗고 아래쪽으로 가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피로를 풀었다. 잠시 후 일행이 도착해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대장이 삼겹살을 가져와 데워 주어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최회장은 입맛이 없다며 가게서 파는 죽을 꺼내 먹었다. 산행중 하는 식사는 꿀맛이라고들 하는데 오늘 유독 구간이 길어 힘이 많이 들 텐데 입맛까지 잃은 듯하여 걱정이 되었다.

12시 20분 출발해 완만한 길을 걸어 올라갔다. 주변이 유독 완만하여 지도를 보니 그곳이 배너미평전이었다. 잠시 후 능선에 오르니 멀리 백화산이 보였다. 그리고 좌로 계곡건너에 큰 산들로 이어진 능선이 보였다. 좌측에 희멀겋게 주흘산이 보였다. 평소 방향감각으로 그 곳은 우리가 갈 곳과 무관한 줄 알았는데 그 곳이 바로 우리가 지나갈 방향이었다. 그만큼 오늘 구간은 쌍 에스자를 그리며 크게 휘돌아 가는 형국이다. 완만한 길을 가다  조금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한 곳에서 12시 54분 용머리 바위를 지났다. 그 뒤로는 계속 험한 암릉 구간이 이어져서 로프를 잡고 올라가 마당바위를 지났다.

1시 10분 이만봉에 도착했다. 거기서 백화산까지 4.7km 남은 지점이었다. 등고선과 고도표로 볼 때는 지형이 완만하게 나타나지만 군데군데 험한 곳이 나타나 생각만큼 빨리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가 말 안장 같은 계곡 지점에서 오름 길을 올라 1시 36분 곰틀봉에 당도했다. 그 곳에서는 백화산 방향으로 산줄기가 용틀임하며 지나는 광경이 힘차게 보였다. 백두대간을 하기 전 상상하던 그런 지형 모습이었다. 다시 길을 나서 가다 아까 만났던 일행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정상부에서 쉬고 있다가 나무에 표지해 좋은 표지를 가리키며 사진을 찍고 가라고 알려 주었다. 그 곳에서 전망을 보고 다시 내려가니 큰 소나무 그늘에서 최회장 부부가 쉬고 있었다.

계속해 경사가 비교적 급한 내리막길을 걸어 1시 50분 사다리재에 당도했다. 작은 표지판이 세워져서 그 곳을 알게 되었지만 사람들이 다닌 흔적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앞에 놓인 작은 봉우리를 지나가다 2시 26분 뇌정산 갈림길에 도착했다. 느린 바람결이나마 시원하게 느껴졌다. 거기서 백화산이 아까보다 조금 가까워져 보였다. 휴식을 하고 2시 37분 출발했다. 2시 42분 봉우리에 올랐다. 완만한 산길을 지나 2시 47분 봉우리에 올랐다. 사람들이 그 봉우리에서 쉬고 있었다. 한 사람이 “대간 뛰어요?”라고 말을 건냈다.

2시 48분 평전치에 당도했다. 봉우리를 오르는 곳은 수마노석 암릉으로 되어 있었다. 그 돌은 절편처럼 쪼개지는 성질이 있어 날이 서 있었다. 2시 56분 그 봉우리를 넘어 계곡으로 내려왔다 다시 올랐다. 옆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분지리 마을 너머로 우리가 백화산에서 좌측으로 유턴하듯 지나갈 산세가 병풍처럼 희푸르게  보였다.

가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앞 쪽 봉우리를 올랐다. 다시 로프가 길게 메인 곳이 나타나 로프를 잡고 올랐다. 오르니 앞쪽에 암릉으로 된 능선 구간이 나타났다. 다시 봉우리를 넘어 가 봉우리로 오르는 길가에 우측 경사지에 야생화가 꽃밭을 이루며 피어 있었다. 그 옆길을 올라 3시 20분 다시 바위 봉우리에 올랐다. 그 곳을 오르며 이제 정상에 다다랗겠지 하며 올랐는데 오르고 보니 다시 두어개의 봉우리가 더 놓여 있었다.

다시 봉우리를 지나니 좀 더 높은 다음 봉우리가 보였다. 거기서 보니 그 산이 정말 백화산 봉우리일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니 그 봉우리 좌측으로 비켜 길이 나 잇고 그 너머로 다시 올라야 할 봉우리가 보였다. 순간 마음이 지쳐와서 풀섭에 혼자 덥석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목이 많이 말랐지만 물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아 아껴 마시는데, 나물 뜯는 사람이 가까이 와서 갖고 있던 얼음물을 주었다. 부부가 함께 나물을 뜯으며 지나가는데 백두대간은 다 끝냈다고 하며 지나갔다. 얼음물을 마시고 나니 기운이 회복되는 듯해서 다시 백화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3시 30분 고대하던 백화산(1,063)에 당도했다. 오늘 산행하는 구간중 가장 높은 산이었다. 그런데 깊은 산중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 가까이 보였다.  주변에 산세 겹겹이 마을과 들녘이 보였다. 이 곳까지 오면서 보이던 주변 시야와 달리 한결 속세에 다가온 느낌이었다.

큰 산세가 엉켜 있었다. 그렇지만 그 삶터로 보면 큰 산세에 면한 형국이었다. 백화산은 이 주변에서 가장 큰 산이어서 이 고장 사람들에게 의지처 같은 인식이 되어 있을 듯 했다. 정상을 확인하고 정상 부근에서 쉴 곳을 찾았다. 앞서 간 조병섭 건축사사 보이지 않아 의아해 하고 있는데 잠시 후 돗자리를 들고 나타나며 잠 잘 곳을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다며 다가와 정상석으로 가 번갈아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나무 그늘에 비스듬히 누워 잇다보니 조금 후 이대장이 나타났다. 강 건축사도 도착했다. 앞서 가던 일행이 주위에서 쉬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이 다가와 1.5리터짜리 얼음물과 빵을 주었다. 그저께 오후에 집이 있는 익산에서 산거라며 괜찮을지 냄새를 맡아보고 주었다. 시장끼를 느끼던 차에 빵을 먹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4시 40분 최회장 부부가 도착했다.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정상석으로 올라가니 매우 지친 표정이었다.  사모님은 사진 찍기도 힘든 듯 조건축사가 권하는 사진찍기도 사양하였으나 단체 사진 촬영을 부탁하자 찍어주면서 손목이 떨린다고 했다.

잠시 더 쉬다가 4시 53분 백화산을 출발했다. 최회장 부부 배낭을 나누어지고 가기로 하고 이대장이 배낭을 두개 지고 앞서 갔다. 4시 5분 암릉  봉우리를 넘었다. 백화산에서부터는 정말 편안한 길이라고 했는데 암릉이 나타나 부담스러웠다. 거기서 우측으로 문경시내와 그 곳을 지나는 고속도로가 보이고 그 도로를 지나는 차소리도 들렸다.

봉우리를 넘어 내림길을 걸어 갔다. 다시 암릉 구건이 나타나 다시 힘이 들었지만 신록이 산세를 부드럽게 느끼게 했다. 잠시 후 앞서 걷던 이대장이 전화가 안된다며 나에게 앞서가서 상황을 알려주라고 해서 앞서 갔다. 5시 헬기장을 지나 평평한 초원같은 길을 걸었다. 거기서부터는 확실히 길이 완만해져 있어서 걷기 편했다.

5시 16분 황악산에 도착했다. 거기서 대간 길을 찾으니 좌측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 리본을 보며 이어진 길을 걸었다. 5시 22분 백화산까지 50분으로 써 있는 표지판을 지나니 우측에 키 큰 낙엽수 숲이 보였다.

5시 24분 완만한 오름길을 걸어 봉우리 같은 곳을 넘어 갔다. 수령이 많지 않은 나무에 피어난 잎이 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길은 낙엽이 두텁게 깔려 더 선명하게 보였다. 길 옆에 모내기한 벼가 자라듯 푸르게 무성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낙엽이 쌓여 아무것도 돋아나지 않은 길을 더욱 선명해 보이게 했다.
5시 36분 좌로 굽은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잠시 후 낙엽송 숲과 연못이 있는 곳을 지났다. 그 연못에서 맹꽁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5시 45분 헬기장이 나타났다. 평소 잘 쓰지 않는 듯 칙칙해 보였다. 하지만 주변에 흰 꽃이 피어 향기를 피워냈다. 그 곳을 지나 다시 내리막길을 갔다. 길에 큰 나무가 가로막고 쓰러져 있는 곳 지났다. 5시 53분 우측에 갈대밭과 그 너머로 갈마봉이 보였다. 헬기장을 지났다. 5시 56분 조봉(673m)에 도착했다. 그 곳 정상적 뒤에는 “2007년 4월 문경 산들임 산꾼들 구슬땀 흘리며 목도로 세우다.”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다시 길을 나서 가는 동안 좌측 계곡건너 지나간 산들이 푸르고 크게 보였다. 좌측에 이화령 길이 산길과 평행하게 지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우측아래에는 지도에 고랭지 밭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곳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고 차소리가 들렸다. 6시 13분 길 좌측에 방커 같이 패인 큰 웅덩이를 보며 지나갔다. 잠시 후 우측아래 마을이 보였다.

6시 20분 앞에 보이던 봉우리를 지나 내려갔다. 다시 나타난 봉우리에 부담을 느끼다 마음을 다 잡고  마지막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다시 앞에 봉우리 보였다. 기대가 무너져 마음이 지친 상태로 마지막 아껴 두었던 물을 마셨다. 그런데 가다보니 길은 봉우리 정상부를 지나지 않고 우측으로 비켜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길이 경사가 심한 비탈에 나 있어서 걷기에 조심스러웠다.

6시 37분 앞쪽 조금 높은 지대에 건물이 보였다. 그 곳에 다가가며 우측 아래로 지그재그로 난 계단길을 걸어내려가니 6시 40분 아래에 도로가 보였다. 도로에 내려서기 전 살펴보니 박기현 회장이 저쪽에서 서 있는 모습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불렀다. 그가 다가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도로로 내려오자 일행이 금방 뒤따라 올 줄 알고 기다리며 서 있었다.

6시 42분 이화령에 도착했다. 길 건너에 큰 표지석에 “경상북도, 영남의 관문 이화령(529) 여기는 문경입니다.” 라고 써 있었다. 그 위로 너른 휴게소 광장이 있고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주차해 있었다. 차에 가 배낭을 벗어놓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휴게소 화장실에 갔다 매점에서 시원한 백주를 한캔 마시니 피로가 일시에 가시는 듯 했다. 그 휴게소가 서 있는 곳은 충청북도였다. 이화령은 충청북도에서 경상북도로 넘어가는 도의 경계지점이기도 했다.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와 신발끈을 풀고 이화령에서 펼쳐보이는 산세를 감상했다. 이화령은 큰 도로가 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지역 위치로는 우리가 오늘 지나온 여느 곳처럼 오지였을 것 같았다. 잠시 후 이대장이 도착했다. 하산 지점에서 입구에서 맥주를 사서 기다리던 박회장을 만난 듯 맥주캔을 들고 왔다.

기다리는 사이 일행이 다 도착하였다. 단체로 아까 본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찍고 나니 부부인 듯 한 두 사람이 다가와 서울로 가면 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듣고 있던 최화장이 그러라고 하여 그들이 올라타고 7시 20분 출발했다. 가는 도중 들를만한 식당을 알지 못하여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저켝을 먹고 기로 했는데 가다 식다이 나타나면 식사를 하고 가자고 했다. 연풍쪽으로 내려오니 길 가에 가든 같은 식당이 나타나 그 곳에서 식사를 하고 가기로 했다. 일행은 식사를 하며 오늘 겪은 고초를 이야기했다.

무척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다 마치고 나니 지난 추억처럼 홀가분하게 예기하게 되었다. 사람의 일이라는 게 다 그런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식사하는 분위기도 더 즐겁게 되었다. 돼지 갈비에 이어 밥과 함께 내온 된장찌개가 맛이 좋아서 냄비 바닥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8시 54분 식당을 나와 출발해 잠시 후 연풍 톨게이트를 지나고 자리에 누워 잠을 자다 깨고 보니 한경 변 풍경이 보였다. 10시 40분 서울 삼성역에 도착해 일행과 헤어져 전철을 타고 귀가했다.
(08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