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남정맥 종주기5

 

                                   *지맥구간:배토재-마곡고개-원전고개

                                   *산행일자:2010. 7. 31일(토)

                                   *소재지   :경남하동/사천

                                   *산높이   :무명봉247m/무명봉244m

                                   *산행코스:배토재-247봉-안남골고개-237봉-마곡고개

                                                  -삼화레미콘-원전고개 송림버스정류장

                                   *산행시간:7시42분-13시36분(5시간54분)

                                   *동행      :나홀로

 

 

   배토재에서 임도로 올라서자마자 위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내려오는 멧돼지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덩치는 큰 개만해 그리 크지 않았지만 더 이상 다가서다가는 자칫 공격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 가지고 있는 스틱 두 개를 서로 부딪치어 가까이오지 말라고 금속성소리를 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멧돼지가 저를 본 후 방향을 틀어 숲속으로 들어가 버려 다행히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멧돼지는 야행성동물이어서 주로 밤에 돌아다닙니다. 아침 시간 넓은 임도 길을 걸어 내려오는 그 멧돼지는 밤새도록 산속을 싸다니다가 편안한 잠자리로 되돌아가는 길에 저를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멧돼지는 제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 지레 겁먹은 제가 그가 극도로 싫어하는 금속성소리를 낸 것 같습니다. 진득하게 기다리면 알아서 피해줄 것을 그새를 못 참고 스틱을 두드려 멀리 내쫓은 꼴이 되었습니다. 모처럼 조우한 멧돼지와 인사말이라도 한마디 나눠볼 생각은 하지 않고 제가 마치 이산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빨리 길을 비켜달라고 위세를 떤 것 같아 뒤늦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멧돼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진 한 장 못 찍고 그대로 보낸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멧돼지와 조우한 곳이 숲 속 길이 아닌 넓은 임도 길인데다 그 거리도 상당히 가까운 편이어서 멧돼지의 전신을 사진으로 담기에는 이번이 최고의 호기였는데 그저 쫓아내는데 급급해 카메라를 꺼낼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민첩하게 움직였다면 사진을 한 방 먼저 찍고 스틱 소리를 내도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덜컥 겁부터 집어먹고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멧돼지가 두려운 나머지 적의를 갖고 대하면서 멧돼지에게는 저를 위해 사진모델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염치없는 짓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멧돼지와 대화를 나눌 자세를 갖고 때를 기다린다면 멧돼지도 제 진정을 알고 사진모델로 나서주겠지만 이번처럼 스틱이나 두들기며 내쫓기에 급급해 한다면 제가 멧돼지라고 해도 선선히 모델이 되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침7시42분 배토재에서 낙남정맥의 5구간 종주산행을 시작했습니다.진주터미널을 아침6시50분에 출발한 첫 버스는 구석진 상촌마을을 들르지 않아 전날 한낮에 탔던 버스 보다 “故鄕 玉宗”표지석이 세워진 배토재에 이르기까지 15분 남짓 시간이 덜 걸렸습니다. 산행시작 4-5분 후 넓은 길에서 만난 멧돼지는 제가 낸 스틱소리를 들은 후 이내 숲속으로 사라졌고 저는 그 길을 지나 왼쪽 좁은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소나무 밭과 밤나무 밭을 차례로 지나는 동안 아침이슬에 등산화가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또다시 소나무 밭을 지나 왼쪽 비포장넓은 길로 내려섰다가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오른 쪽 산길로 올라섰는데 이번 산행에서는 이처럼 임도와 산길을 들락거리기를 꽤 여러 번 했습니다. 배토재출발 40분 후 올라선 247봉(?) 바로 아래 제법 큰 묘지가 자리했는데 후손들의 손이 자주 가서인지 봉분과 주변이 보기 드물게 깔끔했습니다. 묘지에서 시멘트 길로 내려서 배나무 밭 위 임도를 따라 걷다가 다시 솔 밭길로 들어섰습니다. 곤줄박이보다 조금 커 보이는 흑청색의 새가 소나무를 쪼아대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가까이 접근하면 그때마다 자리를 옮기며 몸통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아 끝내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8시55분 안남골고개에 다다랐습니다. 세 번째 밤나무 밭을 지나 북쪽 음달과 남쪽 남포를 동서로 가르는 시멘트 길 안부인 안남골 고개 마루에 도착해 10분 남짓 쉰 후 정맥 길을 이어갔습니다. 고개 위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임도5거리로 내려섰습니다. 오른 쪽 바로 아래로 집 몇 채가 보이는 임도5거리에서 오래 내버려진 것 같은 과수원 사이 길로 걸어 대나무 숲을 만났습니다. 앞서 지나온 소나무 숲길은 칙칙하고 우중충한데 대나무 숲길은 푸르디푸른 데다 공기마저 삽상해 걷기에 딱 좋았습니다. 밤송이가 탐스러운 밤나무단지를 지나 하얀 꽃의 구절초와 개망초가 길을 환히 밝히는 임도로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황토가 훤히 드러난 산길로 들어갔습니다. 산길에서 다시 나와 우측사면이 조경수단지로 조성중인 임도를 따라 오르는 중 시멘트 길에서 내뿜는 지열로 온 몸이 후끈거려 산오름이 힘들었습니다.

 

  10시4분 삼각점이 박혀 있는 244봉(?)에 이르렀습니다. 임도 삼거리에서 쇠줄을 넘어 오른쪽 시멘트 길로 들어서 바로 위의 삼각점의 기반만 남은 244봉(?)에 올라섰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왼쪽으로 내려가 만난 임도 바로 윗길로 걷다가 다시 오솔길로 들어가 해발고도가 250m가량 되는 무명봉을 올랐습니다. 무명봉에서 나무들을 얹어놓은 묘지를 지나 그늘 길에서 15분가량 쉰 후 다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경사가 완만한 길을 따라 내려가 풀이 많이 나 있는 임도삼거리에 닿기 까지 이런 저런 버섯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참아내기 힘든 복중에 오히려 무성하게 잘 자라는 것은 아마도 버섯일 것입니다. 각양각색의 버섯들을 사진 찍어 왔지만 아직 도감을 준비하지 못해 그들 이름을 이 글에 옮겨놓지 못했습니다. 여름 한 철 산 식구로 편입되어 살고 있는 버섯들에 미안했습니다. 삼거리에서 북동쪽으로 꺾어 이어지는 임도가 얼마 후 끝나고 이어지는 산길은 간벌된 나무들이 나뒹구는 소나무밭길이어서 짜증도 났습니다. 활엽수 숲길이 그리운 길을 걸어 올라선 155봉에서 왼쪽으로 내려갔습니다.

 

  11시38분 아스팔트 차도가 지나는 마곡고개로 내려섰습니다. 155봉에서 급경사 길을 내려가 다다른 마곡고개는 아스팔트차도가 지나 이 고개를 넘는 차량들이 제법 많이 보였습니다. 차도를 건너 가파른 길을 걸어 무명봉에 올라섰습니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이번 산행이 1시간 후면 모두 끝날 것 같아 가져간 떡을 꺼내들면서 15분 가까이 쉬었습니다. 전혀 바람이 불지 않아 가만히 앉아 쉬고 있는 중에도 땀이 나 사타구니가 축축했습니다. 날씨가 무더워 팬티를 무릎 아래로 내리고 4-5분간 거풍을 했는데도 축축한 기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7-8분을 걷자 그동안 분명했던 길이 사라져 당혹스러웠습니다. 오른쪽 아래 임도(?)로 내려가 왼쪽으로 몇 걸음 걷지 않아 전혀 봉우리 같지 않은 밋밋한 103봉에 봉에 이르자 좌우로 흐릿한 임도 같은 길이 보였습니다. 일단 왼쪽으로 내려가다가 아닌 것 같아 다시 오른 쪽으로 가다가 이 길도 아닌 것 같아 점심 식사를 한 곳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은 후 다시 103봉으로 갔습니다. 왼쪽 길로 2-3분 내려가 편백나무에 붙어 있는 “낙남정간 제 이름 찾아주기 운동”의 표지기를 본 시각이 12시 50분이었습니다.

 

  13시36분 2번 도로가 지나는 원전고개의 송림버스정류장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낙남정간 제 이름 찾아주기 운동”의 표지기가 붙어 있는 곳에서 그 길로 조금 더 내려가 만난 넓은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진행했는데 원전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길이 바로 닿지 않아 지그재그로 고도를 낮추며 임도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잡초들이 우거진 넓은 공터를 지나 오른 쪽 능선으로 올라서면 원전고개로 이어지는 길이 나올 것 같은데 능선으로 오르기도 쉽지 않아 보이고 제대로 길이 나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아 공터에서 아래 공사장으로 내려가 시멘트 길로 들어섰습니다. 앞에 보이는 레미콘 공장이 지형도에 나와 있는 명진레미콘일 것 같아 마음 놓고 이 길을 따라 걸어 가까이 가보니 명진레미콘이 아니고 삼화레미콘이어서 엉뚱한 길로 내려온 것이 아닌가 싶어 불안했습니다. 일단 레미콘 공장에 조금 못 미친 삼거리의  나무그늘아래에서 자리 잡고 쉬다가 지나가는 할아버지 한 분에 명진레미콘의 위치를 여쭤 최근 삼화레미콘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확인하고 나자 비로소 안심됐습니다. 삼화레미콘공장 앞을 지나 2번 국도가 지나는 고가도로 아래 송림정류장에서 1시간 가까이 기다렸다가 14시20분 경 진주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원전고개에서 종주산행을 마치고나자 새삼 아침에 만난 멧돼지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제가 낸 스틱소리에 놀라 얼떨결에 숲속으로 자리를 비켰지만 속으로는 식식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밤을 새워 나돌아 다니다가 마음 편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나타나 마치 이 산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귀에 엄청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면서 길을 비켜달라고 강요했으니 말입니다. 우리나라 산 속 생태계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멧돼지가 길을 비켜가라는 사람들의 강요에 분노하지 않고 순순히 응한 것은 바로 최강자로서의 긍지와 여유 덕분일 것입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이라면 호랑이에게 엄청 시달림을 받았을 멧돼지가 사람들에 그렇게 관대할 수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광에서 인심 난다고 최강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길을 비켜줄 마음의 여유가 생겼을 것입니다. 제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멧돼지가 숲속으로 들어가 식식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처음 생각은 맞지 않을 것입니다. 식식대는 것이 아니라 길을 비켜주고 자선이라도 베푼 양 가슴 뿌듯해 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저는 길을 비켜준 멧돼지가 고맙고 그래서 늦게나마 고마움을 표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