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길을 묻다

 

*05. 07. 21 안흥진-유득재(금북정맥 1구간)


7시 첫차로 서산-태안을 거쳐 안흥진으로 가는 시내버스 안은 차창 밖 풍광만큼이나 시골 내음이 물씬 풍깁니다
그 속의 내 모습은 한가로운 농촌마을에 난데없이 자리한 모텔처럼 생경스럽습니다
도시에서 다람쥐처럼 맴돌 때는 모르다가 벗어나면 비로소 도시에 길들여진 노예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음은 애써 느긋한 척 등받이에 기대어 여유를 보이지만 어느덧 시간은 10시를 넘고 차창에 부서지는 햇살은 

지글지글 대지를 달구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내려와 밤중에 시작할 걸 그랬나?' 후회도 듭니다
그래도 처음 시작인 데다가 바다를 본다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놓치기 싫습니다
"아저씨! 이 쪽으로 등산하러 가십니까?"
아까부터 콜롬보를 닮은 눈길을 보내던 뒷자리 아저씨가 끝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합니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버스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내게로 향합니다
예- 금북정맥을......라고 운을 떼려다가 도저히 이해를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뒷골을 때립니다
"그냥 여행 삼아 좋은 산이나 명승고적을 찾아다니는 중입니다."
"그래요? 내가 20년을 여기 살았는데 이 쪽은 그럴 만한 산이 없는데......"
"우선 안흥진에 볼일이 있어 거기 먼저 들리고 다음에 산으로 갑니다."
"아-그래요......"말끝을 흐리면서 아저씨는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모양입니다

 

"여기서 내리세요."
이 쪽으로 찾아오는 등산객을 가끔 내려준 적이 있다는 기사님의 친절이 마냥 고맙습니다.
휘이 둘러보니 조그만 시골항구 뙤약볕이 뒹구는 거리엔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아지 한 마리 없이 고요하고

썰물 때라 물이 빠진 탓인지 갈매기들이 여기저기 한가롭습니다
가까운 음식점에서 안흥방파제를 물으니 마을 안쪽을 가리키며 10분쯤 걸어가면 된다고 합니다
지도를 볼까? 하다가 안흥방파제가 설마 둘일까 싶어서 그냥 마을 안 쪽으로 걸어가는데 점점 가까워지는 방파제의

 모습이 아무래도 금북의 들머리는 아닌 것 같은 의구심이 듭니다.
마을 끝 횟집에서는 이 쪽으로 등산객이 오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지도를 꺼내어서 확인하니 갈음해수욕장과 이어진 능선의 시작머리가 이 곳이 아니라 반대편 쪽입니다
마을을 지나 신진대교굴다리를 빠져 나와 벌판과 바다를 가로막은 기나긴 방파제 앞에 섰습니다
광활한 벌판은 골프장 건설이 진행중이고 방파제는 증축공사로 중장비와 돌무더기가 어수선합니다
인부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니 지나가라고 중장비를 잠시 멈추는 인정을 베풀어 줍니다
낭만적인 방파제 산책이 아니라 초반부터 황절봉 너덜지대를 가는 착각에 빠져 방파제를 벗어나니 돌무더기 너머

수풀 사이로 반가운 표시기들이 보입니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땀 닦고, 물 마시고, 지팡이 꺼내고, 신발끈 조이고,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계 꺼내서 손목에 차고는 오름길로 들어섭니다

 

마음은 급한데 더위는 서두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5분도 안되어 주루룩 육수를 뽑아냅니다
그래도 이름 모를 야생화의 미소와 때묻지 않은 순초록의 잎새들의 반김에 더위를 잠시 잊어봅니다
숲 속에서 도둑게 두 마리가 데이트 중이였는지 부지런히 자리를 피합니다
디카를 보고 더 빨리 도망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부적절한 관계였나 봅니다
처음 봉을 힘겹게 올라 갈음리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는 무성한 가시덩굴이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겪어보지 않은

순수한 야생의 모습으로 반팔 차림인 등산객을 반기고 있습니다
'최근에 지나간 사람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 길이 아닌 건지?......
수풀 사이로 보이는 모래사장을 향해 행여 긁힐세라 조심조심 내려가니 눈앞에 무성한 송림이 펼쳐집니다
개콘에 나오는 유행어처럼 "그 까이 꺼- 대충!" 송림을 뚫고 앞에 보이는 산으로 무작정 오르면 정상서부터는

길이 확연하고 표시기도 간간이 보입니다

 

해발 200m도 안 되는 봉우리 두 개를 넘어 지령산을 앞에 두고서 심신이 벌써 파업 농성을 시작합니다
'이런 날 집에서 수박이나 쪼개고 있을 것이지 왜 길은 나서가지고......'
'이래 가지고 유득재까지 가는 건 무리야, 장재에서 끝내는 게 좋겠어......'
그늘 한 점 없는 군부대철조망을 따라 사하라 사막을 가는 기분으로 걸어갑니다.
열심히 움직여보지만 이내 물 젖은 미역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어이가 없습니다
빨리 가자니 힘들어 땀 범벅이고 천천히 가자니 땡볕이 장난이 아닙니다
마침내 철조망과 이별하고 숲이 시작되는 곳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돌아보니 5-5-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내가 저 마루금을 왔단 말이지? 이 무더위에......'스스로 대견해 하며 이 참에 한 뜸 쉬며 점심을 먹기로 합니다
그늘 아래 넓적한 바위도 있어 쉬기에 너무 안성맞춤입니다
신발도 벗고 천 원에 다섯 개 하는 참외 중에서 하나를 골랐습니다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지령산을 오르니 정상을 둘러싼 철조망이 돌아가라 합니다
아까보다 더 터프한 잡목(찔레+딸기나무+청미래덩굴)을 지팡이로 밀어내며 허우적대다보니 부대 정문이 보입니다
'어라, 저건?'
억새와 싸리나무와 칡이 뒤엉켜 있는 숲 사이로 새빨간 딸기가 배시시 웃습니다
'옳거니, 사진을 찍어 볼까나? ㅋ-ㅋ-ㅋ- 귀여운 것들.'
"아저씨! 지금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자세를 잡고 마악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뒤통수를 때리는 걸쭉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뒤돌아보니

전투경찰복을 입은 덩치 좋은 친구가 다가오는데 인상이 불독 그 자체입니다
"아저씨! 지금 군 작전 지역에서 카메라 들고 뭐 하는 겁니까?
"보면 몰라요? 딸기가 이뻐서 사진 찍는 거......" 내 목소리는 그 친구의 절반도 안됩니다
"군사 기밀 때문에 카메라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카메라를 주지말고 버틸까 하다가 그 친구의 기세에 눌려 카메라를 주니 한참을 보다가 돌려줍니다
카메라 작동법을 친절히 가르쳐 주어서 그런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잘 가라고 예의 바르게 인사까지 합니다


국방과학연구소를 뒤로 도로와 마루금을 오가며 죽림고개에 내려섰으나 기대했던 죽림은 자취 없고 주유소가 보입니다
아스팔트의 지열이 싫어서 얼른 수풀로 들어갑니다
작은재를 지나, 농가를 지나, 칡넝쿨 밀림지대를 지나니 다시 마을이 나오고 드디어 도황 삼거리의 장승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도로에 서 있는 지금은 장승보다 그늘이 더 반갑습니다
들머리 그늘에서 쉬려니 숲모기들이 금세 모여들어 배낭에도 덤비고 사람에게도 마구 덤빕니다
마치 히치콕의 영화에 나오는 새들처럼 점점 수가 늘어납니다
서둘러 일어나 망초가 무성한 비탈을 계속 오르니 어망에 쓰던 밧줄이 매여 있습니다
가끔 산책로라고 쓰인 표시판이 가는 방향과 반대로 매달려 있습니다
이젠 억척스러운 잡목과 수풀이 지겹지도 않습니다
운동기구를 만나기도 하고 나무 계단을 오르기도 하면서 후동고개를 지나는데 어느덧 해가 서산에 걸려 있습니다
시원한 송림과 잡초 무성한 무덤들을 지나 윗밤고개에서 농기구를 손질하고 계시는 무표정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등산객들이 지나간 길을 여쭈니 앙상한 손가락으로 산자락에 있는 고추밭 너머를 가리키십니다
야트막한 봉우리를 넘으니 작은 도로가 나오고 603번 도로를 향해 목장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릅니다
603번 도로를 따라 멀리 우측으로 수룡저수지가 땅거미에 희미하고 초코렛 지붕의 전원주택 세 채가 목가적입니다

 

마금1리 마을이 끝날 무렵, 마지막 집을 지나 묘지로 향하는 길로 올라갑니다
콩밭에서 늦은 김을 매던 어릴 적 어머니와 흡사한 모습의 할머니가 일손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십니다
아마도 이 시각에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을 본다는 것이 쌩뚱맞을 것이기에 괜히 미안함을 인사로 대신해 봅니다
무덤들을 지나 완전히 숲 속에 들어서자 불을 켰습니다
이어지는 임도를 따르다가 잠시 길을 잃고 마을로 내려섰다가 되돌아와서 고추밭을지나니 다행히도 표시기가 있습니다
표시기를 달아준 그 분께 고마움을 느끼며 다시 임도를 따라 한동안 표시기가 없지만 끈기를 가지고 밀고 나가

통신안테나 근처에서 표시기를 만납니다
길에서 길을 찾아 헤매는 일이 점점 즐거워집니다
그저 불빛이 비치는 범위 만큼의 판단과 경험에서 오는 예측으로 장재에 도착했습니다
더위에 지쳤을 때는 장재까지 갈 엄두도 안 나더니 막상 해가 지고 선선해지자 갈만하고 길 찾는 재미도 있어

그냥 유득재까지 가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가게에서 캔맥주로 갈증과 저녁을 대신하고 32번 도로를 따라 그리 멀지 않은 쉰고개에서 좌측의 비포장 길로 들어섭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잘생긴 보름달이 환하게 길을 비쳐주고 있습니다
몇 해전 영남 알프스의 가지산 오름길에서 보던 달은 참나무 가지를 배경으로 길을 밝혀 주었는데

오늘은 배경이 소나무여서 또 다른 운치가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합니다
적적하던 차에 길동무가 생겨 힘이 납니다
자연은 정말로 친구가 되고 싶은 간절함을 가지면 친구가 되어줍니다
친구가 되었으나 우린 그동안 너무나 혼자였던 것에 익숙해진 탓인지 선뜻 말을 꺼내진 못합니다
달도 나도 숫기가 없어 그저 바라보기만 하며 유득재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었습니다
만약 무수한 헛걸음으로 흘려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몇 시간 전에 왔을 것입니다
이왕 늦은 거 내친김에 모래기재로 향할까 하다가 무릎도 아낄 겸 내일 이어서 가기로 하고 오늘의 길찾기를 접기로 했습니다
길은 내일도 변함 없이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앞서 금북을 가신 모든 분들께 엎드려 감사드립니다/철퍼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