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구간

한남금북정맥

산행일

추정재~작은구치재

(22km, 9시간 30분)

2007년 12월 19일(수)

 맑음

  

<산행 기록>

추정재-국사봉-쌍암재-19번도로-구봉산-시루산-작은구치재

 7:30     8:30     11:10    12:40      14:05   14:40     17:00

 

  


 이제는 보은군 땅이다.

  

  그동안 한남금북정맥은 경기도 안성에서 시작하여 충청북도 음성, 괴산, 증평을 지나고 청원을 거쳐 이제는 속리산이 속하는 보은군으로 들어선다. 어느새 종착지가 가까워진 셈이다. 오늘의 산행거리는 추정재에서 작은구치재까지 도상거리 22km다. 너무 길다 싶어 아무리 지도를 들여다보아도 중간에 구간을 나눌만한 곳이 없다.

  또 월간 ‘사람과 산’ 종주팀에서 펴낸 지도를 보니 다른 구간에 비하여 소요시간을 많이 적어 놓았다. 특별히 높은 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하는 의아한 마음을 가지고 해 뜨고 해질 때까지 해보자는 심정으로 출발한다.

  7:30

  아침 해 뜨는 시간에 맞추어 추정재에 도착한다. 쌀쌀한 날씨이기는 해도 산행에는 어려움이 없을 듯하고 하늘은 맑아서 산뜻한 출발을 예고한다. 장승이 나란히 서있는 추정재의 한쪽 도로변에 차를 주차하고 출발하니 아침 7시 30분이다.

<해발 260m 추정재>

  용창공예 앞에서 관정사 방향으로 시멘트 도로 따라 간다. 5분정도 올라가니 오른쪽에 산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오고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은 고요하다. 바람소리도 없다. 여름이면 쉼없이 숲을 온통 요란스럽게 하던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없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적막한 산길을 혼자 그렇게 올라간다. 오늘은 대통령 선거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BBK 관련 동영상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혼란스러웠다. 나라를 어떤 식으로 이끌어가겠다는 정책선거가 아니라 대통령 후보의 자격을 두고 나라는 온통 시끄러웠다. “선거 안하고 어디로 가느냐?”는 집사람의 말에 “갔다 와서 투표하러 가지 뭐”했다.

  능선의 높이가 높아지자 서리가 하얗게 드러난다. 간밤에 눈이라도 내린 걸까. 그래서 길이 미끄럽다. 스틱으로 중심을 잡아도 속도가 느리다. 안되겠다 싶어 아이젠을 착용한다.

  8:30

  국사봉 정상(586.7m)에 닿는다. 추정재에서 1시간거리이다. 왕이 오른 산은 ‘국망봉’이고 신하가 오른 산은 ‘국사봉’이라고 한다던가. 국사봉 정상에는 나무판자에 한자로 쓴 표지판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 잡목이 무성하여 표지판이 없었더라면 정상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국사봉 정상>

  정상 주변은 간밤에 내린 하얀 눈이 얇게 덮여 있다. 떨어진 갈색 잎들이 깊은 가을을 연상하게 한다면 그 위에 소복하게 내린 눈은 이 땅에도 겨울이 왔음을 알려준다. 지금은 12월의 중순이라 예년 같으면 함박눈이라도 쏟아질 시기인데 지구의 온난화가 겨울을 겨울답지 않게 만들어 간다. 

<하얀 눈이 덮여 있는 산길>

  국사봉을 지나면서 그나마 조금씩 덮여 있던 눈도 그리 흔하게 보이지 않는다. 간혹 응달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크고 작은 봉우리를 연이어 지난다. 운무에 쌓여 있는 저 아래동네는 고요하기만 한데 깨끗하게 드러나는 조망이 아니라서 신비로움까지 느껴진다. 아마도 고요한 가운데 역사의 한 장을 여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테다.

<낙엽과 눈의 조화>

  봉우리를 이어가던 산길은 뚝 떨어지더니 안부를 만난다. 큰 돌탑이 있는 실티재다. 실티재는 ‘큰살티’, ‘삼일재’라고도 불린다.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때는 살티재에서 선도산 아래에 있는 미테재와 말구리고개를 지나 청주로 다니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한 노인이 3일 동안 이 고개들을 지나다가 결국 이곳에서 죽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삼일재’다.

  실티재를 지나고 다시 크고 작은 봉우리를 지난다. 580m봉, 540m봉, 602m봉, 593m봉, 피반령으로 분기되는 520m봉, 500m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그만큼 오르내림이 많다는 뜻도 된다.

<산골풍경>

  쌍암재가 가까워지면서 산골마을이 나타난다. 그림같은 풍경이라 사진을 찍는다. 농사를 짓지 않아 황토가 드러난 밭들과 시멘트로 포장이 된 듯한 도로가 보이고 그 사이사이로 집들이 한가롭게 놓여 있다. 길가에 길게 늘어서 있는 전봇대는 구석구석까지 전기가 들어간다는 뜻이니 우리나라도 꽤 잘 사는 축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배암나무 열매>

  11:10

  571번 지방도가 지나는 쌍암재에 닿는다. 보은군의 회북면과 내북면을 이어주는 도로다. 이젠 속리산까지 보은군의 땅을 지나게 된다. 보은군은 충청북도의 열 개의 시군 중에서 크기가 고작 7번째에 드는 좁은 군으로 평범한 농업 지역이다. 충청북도의 동쪽 지방이 다 그렇듯이 백두대간의 서쪽 비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논보다 밭이 더 넓어서 밭작물의 소출이 생업에 큰 비중을 지닌다. 옥수수, 콩, 고추, 마늘 같은 작물과 함께 이제는 인삼재배도 흔하게 눈에 띈다.

<쌍암재>

  쌍암재를 올라서자 인삼밭이 펼쳐지는데 인삼밭 차양막의 끝에서 사잇길로 올라서니 산길이 나온다. 넓게 펼쳐지는 개간지도 인삼밭으로 활용되기에 알맞을 듯한데 해마다 줄어드는 농촌의 인구를 부가가치가 높은 농작물 재배로 만회할 수 있으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 되겠는가. 산길초입에 빨래줄에 널어놓은 빨래같은 리본들이 미소짓게 한다. 내가 다녀갔음을 알리는 기념물같은 모습이다.

<빨래같은 리본들>

  다시 오름길이 시작된다. 호흡을 조절하며 급경사를 오르자 쌀쌀하던 날씨는 온데간데없고 땀이 흘러내린다. 겨울에 이만큼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등산이 가지는 장점이다. 산야를 구경하면서 땀을 흘린다? 자연에의 감탄과 눈으로 보는 즐거움 속에서 땀을 흘리는 것이니 등산은 백년장수의 초석이 될법하다.

  몇 개의 봉우리를 지나다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리본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마지막에 보았던 리본까지 되돌아간다. 능선상에서 오른쪽 계곡으로 빠지는 길을 놓쳤던 것이다.

  내리막길에서 한 분의 산객을 만난다. 구치재에서 출발하여 추정재까지 간다고 하였다. 나하고는 반대의 길, 그래서 자동차 키를 서로 바꾼다. 나중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간다. 너무 급경사라 ‘갈 지’자를 그린다. 급경사의 내리막이 끝나니 도로에 닿는다.

<대안리 고개>

  12:40

  19번 도로가 지나는 대안리 고개다. 서낭당 고개라고도 불리는데 예전에는 이곳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도로공사로 인하여 서낭당의 흔적은 사라지고 이제는 국립지리원에서 설치한 수준점표석이 안내문과 함께 서 있다.

  수준점표석이란 국토의 높이를 현지에 보존하고 표현하기 위하여 국립지리원에서 설치한 국가중요 측지시설이다. 이 점의 높이는 인천항의 평균해수면을 0m로 하고 그곳으로부터 높이를 정하는 것으로 국가기본측량, 지도제작, 지리정보시스템 구축 등에 중요한 기초자료로 활용된다고 한다.

  

<산골풍경>

  지도를 가지고 살펴볼 때 서낭당고개에서 424m봉 통과구간은 언덕을 지나가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만만한 구간이 아니다. 높이도 높이려니와 내려가는 길도 급경사의 내리막이다. 진작 그런 줄 알았으면 도로 따라 돌아갔을 텐데...

  구봉산으로 향한다. 점점 심해지는 오르내림 길이 힘을 빼앗고 시간을 빼앗는다. 보통의 능선길은 오르내림이 있기도 하지만 평탄한 구간이 많다. 그래서 속력을 내기도 하고 능선길의 낭만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다른 구간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느낌이다. 그제서야 ‘사람과 산’ 종주팀의 지도를 보고 왜 시간을 그토록 길게 잡았는지 이해를 한다.

  14:05

  구봉산 정상(516m)에 닿는다. 산불감시초소가 서 있고 사방이 잘 조망된다. 지나온 산줄기가 시원스럽고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오후의 강렬한 햇살을 받아 더욱 우뚝해 보인다. 이것이 우리 산하의 모습이다. 백두대간을 옆에 두고 거기서 뻗어 나오는 산줄기에  삶을 의지하고 있는 우리 민족이다. 백두대간의 산줄기에서 민족의 긍지가 뻗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새삼 호방한 산세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산밑에 있는 나의 고단한 삶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다. 산을 바라보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하는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가슴 벅찬 감회에 젖는다.

<구봉산 정상의 산불감시초소>

   

<호방한 산세>

  다시 길을 간다. 시루산으로 향한다. 갑자기 엄청나게 큰 절벽을 만난다. 자연적으로 무너져 내린 것인지 옛날에 이곳이 폐광지역으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조심스럽게 절벽지역을 벗어난다.

  14:40

  시루산 정상(482.4m)에 닿는다. 시루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새 때문에 이름 붙은 시루산은 구봉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아 있다.

  우뚝한 산의 정상에는 날카로운 바위들이 자주 눈에 띈다. 판자를 겹겹이 쌓아놓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퇴적암이다. 퇴적암이란 원래 호수나 바다 밑에서 진흙, 자갈, 모래 등이 쌓여서 굳어진 것인데 어떻게 높은 산위에서 보이는 것일까. 여기에는 재미있는 지형이야기가 하나 있다.

  약 5억 년 전 고생대에 한반도는 남위 35도 부근의 오스트레일리아 서쪽에 붙어 있었다. 오늘날 강원도 영월, 태백 지역에 많이 분포하는 석회암은 한반도가 열대의 얕은 바다속에 있었을 때 형성된 암석이다. 이후 한반도는 대륙에서 분리되어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약 3억 년 전에는 적도부근까지, 약 2억 년 전에는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놀랍게도 약 2억 년 전 한반도는 원래 2개의 땅덩어리였던 것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었는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올라온 남부 땅덩어리와 중국에 붙어 있던 북부 땅덩어리가 중생대 쥐라기 때 충돌하면서 하나가 되었고 그 때의 충격으로 한반도 전역에 대규모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시루산 정상에 보이는 퇴적암은 바다 밑에서 만들어진 암석이 대규모 지각변동으로 융기하여 솟아올라 온 것이다.

<변성퇴적암이 솟아올라 형성된 바위들>

  시루산 정상을 떠나 20분정도 가니 돌탑이 보인다. 정성이 들어간 돌탑인데 이곳은 보은군 산외면과 내북면의 경계를 이루는 시루산 분기점이다.

<시루산 분기점의 돌탑>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능선의 오르내림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오늘처럼 오르내림이 심한 구간은 여태까지 보지 못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힘도 많이 든다. 불평이 툭툭 튀어나온다. 금방 올라갈 능선을 또 왜 내려가냐고.

  시루산에서 이어지는 능선은 거의 외길이다. 갈림길도 없고 리본을 따라 가기만 해도 산행안내가 따로 필요없을 정도다. 다만 불만스러운 것은 작은 구치재까지 2시간 넘게 오르내림이 반복되면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산넘어 또 산>

  내북면의 북상골과 산외면의 길골을 이어주는 안부를 지난다. 아침에 보았던 서리나 눈은 기온이 올라가면서 모두 사라지고 낙엽이 소복한 산길을 걷는다. 산길은 넓은 잎을 가진 나무와 소나무가 세력다툼을 하는 듯한 광경을 흔하게 본다. 그 옆에는 잡목들이 잔가지를 늘어뜨리고 길손의 바쁜 걸음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나무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산골풍경을 둘러보면서 여유를 가지려고 애쓴다.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되면서 마음이 바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산길의 빼곡한 나무들>

  17:00

  작은 구치재가 가까워지고 있을 때 중간지점에서 만난 아까 그 분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해가 지고 있어서 구치재까지 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은데 작은 구치재에서 산행을 끝낸다면 내가 조금 늦는 셈이다. 순간 전화가 온다. 차를 타고 출발한단다.

  다행이다. 작은 구치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길고 긴 산길을 걸어서 오후 5시가 되니 작은 구치재에 도착한다.

<작은 구치재의 갈대>

  산외초교가 있는 구티사거리에서 산외면 산대리로 넘어가는 작은 구치재는 포장이 잘 되어 있고 지나가는 차량도 가끔 보인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산외면 초등학교 방향으로 걸어서 고개를 내려간다. 구티사거리까지는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 않는다. 내 차를 타고 돌아오는 산객을 구티사거리에서 만나 구치재까지 간다. 명함을 주고 받았는데 잃어버려 성함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아쉽다.

  택시비를 아낄 수 있었던 산행덕분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고 산에서 만난 한 사람의 인연이 소중하게 생각된다.<200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