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사진:사룡오우진기맥 2구간 고도표
아랫사진:곡들내재의 꿩사육장에서,,


사룡오우진기맥=2회차=대왕산 산행기

코스:비오재-곡들내재-갈고개-대왕산-벗고개-이이재
날짜:2004년11월16-17-18일 (2박3일)
날씨:맑음

인원:(6명 : 소수 단체인원)
조삼국, 유민형, 허건자, 김수인, 최경섭, 김종국.

산행도상거리 = 약 14.25킬로미터
산행 실거리  = 약 18.525킬로미터

산행 하행 어프로치시간 = 약10분

총산행시간 : 약 6시간48분 (필자기준)


++ 대왕산 ++
해발 615m로 남산면의 주산이며, 이 산 정상에는 1개의 봉수대가 있고 산허리에는 신라시대의 사지 7개소와 일제 때 죽창의거의 활동지가 남아있다.

오후1시42분
비오재에 도착했다. (과수원과 민가가 있고 2차선 포장도로이다.)
N35.46.20.7      E128.54.01.5

비오재에서 밭과 과수원을 가로질러 오르니 산판길이 이어진다.  전봇대가 있는 임도가 나온다. 직진하는 산판길로 가면 안된다.
우측의 임도길을 약70미터 정도 진행하니 목장 철문이 나온다.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산판길을 따라간다.
(산판길을 따라 달성서씨묘 까지 올랐으면 다시 전봇대가 있는 임도까지 내려가야한다.)

불과 50미터 진행한후 우측내리막으로 진행하는데 독도주의지역이다.

오후2시50분
곡들내재에 도착했다. (919번 도로로 대단위 꿩사육장 농가이다.)
N35.45.34.4      E128.54.00.3

경산시용성면 이정표와 청도군금천면 이정표가 있다. 이지역은 대단위 꿩사육장이다.
좌측의 길을 따라 올라가니 마을의 꿩사육장길이 이어진다.
능선으로 들어서니 T자 갈림길이다. 우측으로 진행한다.

오후3시15분
우측아래로 능선자체를 파헤쳐 들어가는 레미콘공장의 기계소음이 우렁차게 들린다.
능선자체가 무너질것같은 너무나 위험한 구간을 지난다.

오후4시
갈마리임도에 도착하면서 선두팀과 합류한다.
나홀로산행에서 그룹산행으로 연결될 때 마음이 설레이고 기쁘다는 사실이 어설프기만하다.
실제 기맥종주 탐사산행에서는 산행이 시작되고부터 사람구경하기가 별따기보다 힘들다.

오후4시35분
묘2기에서 약50미터정도 내려서다가 좌측 산판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저멀리 갈고개의 모텔건물과 민가가 시야에 들어온다.

오후4시36분
67번 송전탑을 통과한다. 숲속이 어두워오기 시작한다.

오후5시5분
갈고개에 도착했다. (69번 도로로 갈고개휴게소와 음식점, 그리고 동네가 형성되어있다.)


참고사항
비오재에서 갈고개까지 3시간23분이 소요됐다.


11월18일 오전8시20분
갈고개에서 동네길 안으로 들어서며 산행을 시작한다. 잠시후, 밭도 지나고 묘지도 지난다.
서서히 오름길이 시작되더니 기맥길이 우측으로 이어진다.

오전8시43분
448.1고지의 삼각점에 도착했다. 잡목과 억새풀에 가려져있다.

오전9시2분
478고지를 지나 바위암봉으로 되어있는 567고지를 지난다.

오전9시10분
대왕산정상에 도착했다. 정상표시석과 전적비가 세워져있다.

오전9시40분
641.2고지의 삼각점에 도착했다. (동곡412  1982재설)

오전10시
벗고개의 안부에 도착하니 우측에 임도길이 연결되어 있다. (군데,군데 시멘트길도 있다.)
앞에 선두그룹의 후미가 보인다.

오전10시45분
산허리를 돌아가는 시멘트길과 합류된다. 잠시후 능선으로 들어선다.

오전11시2분
486.1고지의 삼각점에 도착했다. (동곡411  1982재설) 잠시후, 임도길 끝부분을 지난다.

오전11시30분
이이재에 도착했다. 절개지로 공사가 중단되어있다.
우측아래로 신방리 골프아카데미와 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아스팔트도로도 보인다.

오전11시45분
경산시 남산면 신방리에 내려섰다.

참고사항
갈고개에서 이이재까지 (신방리) 3시간25분이 소요됐다.

경산시의 유명한 상대온천에 들렸다가 자인면의 장날에 때맞춰 시장구경도 하고 점심식사를 갈비살로 푸짐한상을 차린다.
사룡오우진기맥종주의 무사완주를 바랍니다.




++ 아홉용이 살았다 하여 구룡산과 구룡정 ++

용성면 매남4리 동북쪽에 해발 400여 미터의 고지를 이루고 있는 우뚝 솟은 산이 바로 구룡산 이다.
이 산은 청도군과 영천시를 경계로 하고 있어 청도 구룡, 영천 구룡, 자인 구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이 산의 위치가 3개의 시군과  경계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룡산은 곧 전설 속에 산으로 처음 구룡이라 명명하게 된 동기가 곧  동해의 용왕 이야기와 연계된다. 이야기인 즉은,
옛날 동해의 용왕에게 딸이  셋 있었다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왕비가 세상을 뜨고, 왕실은 새 왕비를 맞아들게  되었는데
새로 들어온 왕비는 처음 전처의 소생인 세 공주를 사랑해 주었으나 날이 갈수록 계모의 본질을 들어내며 학대가 심해졌다.
이를 지켜보던 용왕은 용궁에서  학대를 받는 딸을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그 중 한 딸을 육지에 나가 살도록 하였다.

세상으로 나온 용왕의 딸은 해동 조선의 정기를 지닌 명산 『금강산』을 찾아갔으나
이미 그곳에는 용왕의 동생이 터를 미리 잡고 하늘에 비를 다스리고 있음에 그도 같이 그곳에 자리할 수 없게 되자
남쪽의 태백산 줄기를 따라 살기 좋은  남으로 계속 내려오다 보니 수목이 울창하고 정상이 평평한 좋은 산을 발견하고
이 곳에 영주의 터전을 잡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구룡산 이라 한다.

동해 용왕의 셋째 딸이 이곳에 터를 잡아 천우를 다스리며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아홉의 자식을 두게 되었는데,
이가 곧 구룡이란 지명의 어원이 된 것이다.

용왕의 딸이 낳은 자식 중 여덟용은 모두 어미용의 말을 잘 따르며 효성 또한 지극하였으나
그중 막내아들이 항상 말썽을 부리며 어미용의 속을 태웠다고 한다.

어미용은 항상 막내를 타이르며 바르게 자라기를 바랬지만 한번 벋나기  시작한 막내의 행실은 바로 잡히지 않았으며,
급기야는 용이 지켜야할 계율마저 저버리고 말아 어미용을 몹시 난처하게 하였다.

그래도 어미용은 계속 막내를 설득하며 바른길을 종용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음으로 하는 수 없이 어미용은  동해의  부왕을 찾아 이를 벌해줄 것을 간청하였다고 한다.

이 때 바다의  용왕은 어미의  고생을 어여삐 여겨 용궁으로 다시 부르고 아홉용은 더 높은 하늘에 올라가 생활하게 하였는데,
이때 승천하게 된 샘이 바로 구룡정이다. 아홉의 용이 높고 넓은  하늘에 올라가 세상의 비와 구름을 관장하며 천우를 다스렸으나,

말썽꾸러기인 막내는 이 또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용왕의 영을 거역하고  본래의  살던 곳을 그리워하며 구룡산으로 치닫다
용왕의 노여움을 사 병을 얻어 그만 죽게 되었는데, 막내용이 죽은 자리가 바로 반룡산이라 전해지고 있다.

구룡산의 아홉용이 하늘로 올라간 뒤로부터 이 산 정산에 생긴 마을을 구룡리라 부르게 되었고,
그때 용이 승천하였다는 곳에는 깊은 웅덩이로 변해 남아있다.

구룡리 북서쪽 건너편에는 장재란 자연부락과 앞 냇가에는 용암이라는 큰 바위굴이 있다.
이 굴은 옛날 이곳에 살고 있던 용이 막 승천하려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한 여인의 피빨래하는 부정한 모습을 보고,
큰바위에  머리를 박고 승천하지 못하였다는데, 그때에 그 용이 들이박은  바위를 용암이라 한다.  

이 용암에는 용이 살았다는 샘이 있는데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이 샘의 물은 얼지 않는다 하며,
그 샘은 깊고 물 색깔이 짙푸르러 아무도 이 근방을 접근하지 않으며
지금도 이 샘가를 지나면 마치 용이 나타나 금새 입에 불을 품으며  승천하려는 듯한  으슥함 마저 준다.

구룡산 일대에는 큰 바위가 귀의 모양과 같이 생겼다하여
귀바위(耳岩)라는 자연부락과 남쪽에서 먼저 매화가 봄소식을 전하는 곳이라 하여  매남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신라 때에는 구룡산 아래 『송림사』와 『구룡사』라는 큰절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파편들과 전설만 남아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동남쪽의 반룡산 또한 구룡산의 준령으로, 신라시대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큰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그 흔적조차 희미한데,

근래(196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라는  대웅전은  당시의 웅장함만 간직한 듯,
깨어진 석조물에 몸체를 의존한 채 복원될 날만 기다리려는 듯 남아있다. 이 사찰이 있는 곳을 용전(龍田)이라 부르는데,
원래 이 일대는 반룡사에 따라붙은 불지로, 융성기 때에는 사찰에서 씻어 내리는 쌀뜨물이 청도 금천까지 흘러내렸다고 한다.

조선말기 큰 화재시 급히 불상을 청도의 한 사찰로 옮겨  화재로 인한 화는 면했으나,
당초의 삼존불중 주불인 아미타불만  되찾아 모시고, 좌우의  협시불은  당시 피난처의 거부로  되돌려  받지 못하였다 하며,
(1991.10.19)는 주불마저 주지승이 며칠동안 이 절을 비운 틈에 잃었다 하니 황망하기 그지없다.
반룡사가 자리한 산은 원래 구룡산 이라 하였으나,

이곳에다 절을 짓고부터 반룡산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 산의 준령은 청도 소천과  용성 곡란의 용산 줄기와 갈라지며,
소천을 지나는 산 준령은 다시 남산의 대왕산과  연결되는 명산중의 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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