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새벽 4시 50분이다. 시계는 5시에 알람이 울리도록 맞추어 두었지만 어제 늦잠의 충격이 뇌리에 박혀 오늘까지 이어졌나보다. 찜질방 수면실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누워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탈의실바닥에도 누워있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이리 저리 사람을 피해 발을 디딘다. 탕에는 표정 없이 샤워를 하거나 물 속에 몸을 담그고 부은 얼굴만 내놓은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재형도 간단히 샤워를 한 후 더운물에 몸을 담그고 5분 정도 다리를 주물렀다.

 채미는 벌써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차는 서산시 터미널을 찾아간다. 지난 산행 둘째 날 새벽밥을 먹을 곳이 없어 수소문 한 끝에 터미널 주변에는 24시간 영업을 하는 식당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기억은 그대로 살아있어 오늘은 터미널 위치만 택시기사에게 물어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도로는 한적했고 새벽공기는 차가웠다.

 설렁탕과 우거지해장국으로 차가운 속을 채웠다. 식당에는 해장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가루고개에 도착을 했으나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의자를 젖히고 토막 잠을 청한다.

 벌써 해가 떴음을 모르고 골아 떨어졌던 재형은 불에 데인 듯 일어나 차의 뒷문을 열어제치고 짐을 챙긴다.  재형은 등뒤에 서있는 채미를 의식하며 등산화의 끈을 힘껏 조인다.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이지만 하루종일 자신을 기다리는 채미를 생각하면 실수 없이 빠른 시간에 목적지점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등산화의 끈이 조여질수록 마음의 끈도 조여지는 것이다.

 

07:15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만만치 않지만 멋진 산들이 즐비해 은근히 설레는 마음이 든다. 삼화목장으로 들어가는 포장길 입구에 철문은 열려있다. 완만하게 오르는 포장길은 축사를 관리하는 직원들이 묵고있는 집으로 이어지고 길은 드넓은 목장의 중앙을 관통해서 얼기설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나 있다. 아침공기는 언제나 상큼하다.
 목장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묵고있는 주택은 길 오른편에 송전탑은 왼쪽 산 위에 자리하고 있다. 재형이 가야 할 길은 송전탑을 지나 목장의 경계를 따라 이어지는 능선이다. 능선 아래로 비포장길이 계속 이어진다. 재형은 길을 따라 걸어가며 상큼한 아침공기를 홀로 즐긴다. 젖소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깬다.

 

이곳 삼화목장은 한때 김종필씨의 소유로 밝혀짐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08:03 목장의 철책을 따라 한참을 올랐는데 정맥의 길과 철책은 동시에 오른쪽으로 90도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재형은 지도 위에 나침반을 놓고 가야할 길을 가늠한다. 이제부터 태양의 강렬한 빛을 가슴으로 안고 걸어야한다. 가슴에 안은 태양은 산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될 것이라는 것을 지도가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태양을 안고 걸어가는 날이면 강한 바람을 안고 걸어가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다. 산행을 할 때는 모르지만 산행을 마친 다음날부터 얼굴은 가볍게 데인 상처가 그렇듯 허물을 벗기 시작하는 것이다.

 

08:11 목장에서 올라오는 임도에 내려선다. 짧은 시간 산보를 하는 마음으로 평탄한 능선을 따랐다. 왼쪽 앞에 송전탑이 보이고 왼쪽 산 아래로는 고풍저수지가 넓고 푸르게 펼쳐져 있다.

 

08:18 송전탑 아래에는 노란 잔디가 빈틈없이 심겨져있다. 여기까지 목장의 철책을 따라 어려움 없이 이어왔다.

 

08:30 상왕산(307.2m)에 올랐다. 삼각점이 한쪽에 박혀있고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수려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들판과 고속도로, 서산시가지와 산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는 송전탑, 이런 것들을 주워 담는다.

 

* 상왕산 :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와 용현리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 산의 이웃으로는 석문봉 입모산 문수산 등이 있다. 속설에 의하면 옛날 상왕이 이 곳에 도읍을 정하였다던가 상왕의 무덤이 있었기에 이에 연유하여 상왕산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법인대사비문에 있다고 서산군지에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법인대사비문에는 이런 기사는 보이지 아니 한다.


 상왕산 기슭에는 많은 유적이 있다.

 

* 문수사 : 운산면 상왕산 서편아래 태봉리에 위치한 오래된 사찰로 1973년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극락보전 안에 안치된 금동아미타좌불상을 조사하던 중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한 발원문(發願文)의 명문에 고려 충목왕2년(1346)이란 기록문이 나와 적어도 고려 충목왕 2년 이전에 창건된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극락보전내에 현존한 탱화의 조성연대를 살펴볼 때 지장보살도는 영조50년(1774)에 조성되었고 신장탱화와 후불탱화는 1892년, 칠성탱화는 1905년에 각각 조성된 것으로 보아 임란 이후에 중건되어 조선후기까지 불화를 계속해서 조성한 것으로 보여진다.

 

* 서산마애삼존불상 : 운산면 용현리, 백제의 미소로 불리며 1962년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 명종대왕태실 : 1986년 11월 19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121호로 지정되었다. 운산면 태봉리 태봉산 정상에 위치한 태실로 조선 제13대 임금인 명종의 태(胎)를 넣어둔 태실이다. 태실의 서북편에 비석 3기가 설치되었는데 남쪽에 설치된 비가 태실을 표시한 비로 '대군춘령아지씨태실' 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연대는 명종이 태어난 4년 후인 중종 33년(1538) 2월 2일이며, 북쪽에 설치된 비는 '왕자전하태실'로 숙종37년(1711)에 건립한 것이다. 태실은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채 방치되었던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다. 태실 전체 높이는 273㎝(태실높이90㎝)이고 주상전하태실비는 64×26×123㎝, 대군춘령아기씨비의 전체높이는 153㎝이다. 

태봉이라는 지명이 전국 곳곳에 있는데 이곳들은 임금의 태를 둔 곳이다.

 

08:43 능선은 다시 임도로 내려선다. 낙엽이 두텁게 깔린 길을 걸어왔다. 낭만을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산행은 아직 초반이라 낭만은 곧 열심히 걸어야겠다는 마음에 붙잡히고 만다.

 

08:54 목장철책을 넘어 목장으로 들어선다. 푸른 노루발풀이 찬서리를 이고 있다. 소녀의 기도라는 꽃말을 가진 노루발풀은 6월에서 8월까지 꽃을 피운다. 소나무는 활엽수가 옷을 다 벗어버린 숲 속에서, 노루발풀은 파란잔디가 노랗게 변한 목장에서, 독야청청 푸른빛을 보여준다. 재형은 허리를 굽혀 노루발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강한 생명력에 경의를 표한다.

 

09:02 여기 저기 이슬에 녹아있는 소똥을 피해가며 혼자서 킬킬대며 날뛰며 길을 걸어왔지만 이젠 목장 입구에서 시작되어 산 위로 이어져온 시멘트포장도로 위로 올라선다. 도로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목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잠시지만 목장의 주인인 젖소가 보이지 않는 목장을 내려다보며 쓸쓸한 계절임을 다시 깨닫는다.

 

09:08 목장의 제일 높은 곳이다. 이제 철책을 넘으면서 목장지대를 벗어나는 것이다. 재형은 뒤로 돌아서서 한동안 시원한 눈 맛을 준 목장과 이별을 한다.

 

09:18 오르막을 올라 봉우리를 돌아서자 넓은 산길이 능선을 따라 남으로 계속 이어지는데 그냥 걸어가면 될 것을 동쪽으로 산을 내려가는 좁은 길 입구에 달려있는 표시기가 재형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내리막길을 신나게 뛰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든다. 달림을 멈추고 지도를 본다. 그리고, 한숨을 쉰다. 잠시만에 5분이나 내려갔다. 뒤로 돌아 열심히 땀을 흘리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오르막을 오르며 재형은 자신의 경박함을 꾸짖는다. 갈림길로 돌아와서 좋은 길, 참나무 낙엽을 밟으며 넓은 길을 따라 여유를 즐기며 걸어가면서 주변을 살피니 소나무만 보인다. 이상하다. 근데 왜 밟히는 것은 참나무 마른 잎일까. 주변을 꼼꼼히 둘러보니 잎을 다 떨군 참나무가 소나무 사이사이에 상당히 많이 숨어있음을 알게된다.
 
 잎을 떨군 참나무는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뽐내지 못하고 소나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도록 인내를 가지고 있는 듯 없는 듯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인간도 그렇다. 좋은 날이 있으면 좋지 않은 날이 있기 마련이고 이렇게 좋지 않은 날이 다가오면 죽은 듯 숨죽이고 보내야 하는 것이다. 좋은 날을 기다리며...

 

09:45 지금까지도 좋은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는 자갈이 깔려있는 넓은 임도에 내려선다. 조만간 포장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정표(보은사지터 2.6㎞, 일락산 1.6㎞)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보은사지터 방향으로는 통행을 막는 노란색 막음대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일락산을 향해 간다. 

 

* 보원사지 : 운산면 용현리, 보물 102호 석조(동양최대규모 돌 그릇), 보물 103호 당간지주, 보물 104호 5층 석탑, 보물 105호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 보물 106호 법인국사보승탑비 등이 있는 역사가 깊은 사찰이다.

09:49 가야산 구조대 표지판과 이정표(일락사1.2㎞, 보은사지터2.8㎞ 황락리)를 지나 길을 가는데 오른쪽에 살짝 높은 능선이 재형이 걸어가는 속도와 같이 보조를 맞추며 친구가 되어준다. 능선에 올라서면 개심사 전경이 보일 것도 같지만 재형은 능선을 친구 삼고 '공(空)'의 마음으로 그냥 걸어간다.

 

* 개심사 :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전통사찰 제38호), 충남 4대 사찰중의 하나로, 백제의자왕 14년인 65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에 처능대사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대웅전의 기단만이 백제 때의 것이고 건물은 조선 성종 6년(1475)에 산불로 소실된 것을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물 143호 대웅전, 보물 1264호 괘불탱화. 명부전을 비롯한 아미타삼존불, 관경변상도, 칠성탱화, 제석, 천룡도, 오층석탑, 청동은입사향완, 20가지 목판경전 등 많은 문화재급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보물 제143호인 대웅전은 창건당시의 기단 위에 조선 성종 15년(1484)에 중창한 다포식 건축양식으로 그 작법이 미려하여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사찰을 중심으로 우거진 숲과 기암괴석 그리고 석가탄신일을 전후하여 만개 하는 벚꽃은 주위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사찰 주변이 온통 벚꽃으로 만발해 마치 속세의 시름을 잊은 선경에 와 있는 듯한 감동마저 느끼게 한다.

 

10:19 일락산 정상에는 벤치가 있고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이정표가 서있다. 재형은 벤치에 앉아 뭔가를 꺼내 입으로 넣으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7분이 흘렀다. 벌떡 일어나 능선을 이어간다.

 바위봉우리에 올라 오른쪽 산 아래로 시선을 준다. 황락저수지와 절집으로 보이는 건물의 기와지붕이 보인다. 탁트인 전망이 너무나 시원해 사진을 찍는다.

 

10:40 고갯마루에는 자갈이 깔려있고 양쪽으로는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있는데 대형차 정도는 무난히 산을 넘나들 수 있을 것 같다.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일락사가 나올 것이다. 석문봉이 바로 위에서 재형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석문봉 오르는 입구 좌측에는 철도침목이 한쪽에 쌓여있고 인부들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승합차 두 대가 주차되어 있다. 재형은 쉬지 않고 손짓하는 석문봉을 향해 오른다.

 

* 일락사 : 해미면 황락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창건연대는 기록된 문헌이 전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사찰에 전하는 사기와 1970년대 이후에 발간된 각종 서산군지와 해미읍지의 기록에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의현선사가 창건하였으며 인근에 있는 해미읍성의 성곽 축성이 완공되기 4년 전인 조선 성종 18년(1487)에 중수하였고 중종 25년(1530)과 인조 27년(1649)에 해미읍성 객사 중수 때 일락사도 함께 보수했다. 사찰 경내에서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불대좌와 초석이 발견되었으며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는 3층 석탑 1기(문화재 자료 200호)가 현존하고 있다. 일락사의 대웅전(현 명부전)은 1919년에 중창했다.

 
 사람들이 10여 미터 간격으로 서서 자기가 맡은 구간을 오르내리며 침목을 힘겹게 나른다.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데 땀 냄새가 시큼하다. 굵은 밧줄도 내려져 있고 돌계단도 놓여있다. 석문봉은 한창 개발중인 것이다. 재형은 침목을 나르는 사람에게 묻는다. "침목으로 계단을 만드는 겁니까?" "예"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하다. 굳이 침목으로 계단을 만들지 않아도 석문봉 오르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부지런히 올라간다.

 

10:56 능선에 올라섰다. 석문봉 정상이 지척이다. 가족이 춥지도 않은지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있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해미읍이 가깝다. 석문봉 가는 방향은 왼쪽이다. 지난밤 땅이 얼었었나보다. 서리는 이슬로 바뀌고있고 땅은 녹고있다.

 

* 해미읍성 : 우리나라 성곽 중에는 드물게 평지에 쌓은 석성으로 조선조 성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높이 5m, 길이 1,800m, 성에는 진남문과 관아문, 동헌, 객사, 서고, 망루 등 부속건물이 남아있다.

 

11:06 가야산 석문봉(653m)정상에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 홀로 걸어가는데 익숙해진 재형은 분위기 적응을 위해 한동안 멍청히 서서 사람들을 바라본다.
 정상석은 예산산악회에서 세웠고, 조금 낮은 쪽에 해미산악회에서 백두대간종주를 기념하는 뜻으로 세운 돌탑이 있다. 2001년 9월 9일 종주를 마쳤나보다. 정상석 옆에는 높이 세워놓은 깃대에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내포의 정기가 이곳에서 발원한다고 할 만큼 이곳 석문봉은 정기가 성성한 산임에 분명하다. 재형은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느낀다. 석문봉의 성성한 정기를.

 

* 내포 : 내포는 지명이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 가량 떨어진 곳에 가야산이 있는데,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10고을(당진·면천·서산·태안·해미·덕산·홍주·결성·대흥·보령)을 내포라고 부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내포지역을 홍주목이 관할하던 서천군에서 평택까지의 20여개 고을을 지칭하기도 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다'라는 내용이 언급될 정도로 살기가 넉넉한 곳이다. 이 내포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홍주목이 설치됐는데, 홍주목이 바로 지금의 홍성이다.

 

 해미읍이 좁게 보인다. 가야산 정상인 가야봉에 있는 거대한 시설물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작고 큰 바위가 이어지는 능선이다. 모든 명산은 바위산이라고 했다. 재형은 다시 한번 산다운 산을 감상한다.
 
 4분 동안 사진을 찍고 경치를 감상하고 석문봉을 내려선다. 암릉이 시작된다.
 
 아기자기한 능선을 이어가는데 오른쪽으로 한서대학교와 그 뒤로 산수저수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푸른물이 시선을 잡고, 왼쪽으로는 작은 마을과 옥계저수지 파란 물이 시선을 당긴다. 앞으로는 가야산 정상 시설물이 재형의 얼굴을 찌푸리게 한다. "좋은 것만 보려고 노력을 하자"

 

11:20 이정표(주차장 3.21㎞, 석문봉 0.4㎞, 가야봉 1.65㎞)를 지나며 앞으로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지도를 보면서 계산을 해 본다. 아름다운 능선을 걸어가면서도 다리가 무거운 것은 마음가짐의 문제라고, 마음을 바꾸어야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마음 바꾸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어금니를 지긋이 문다.

 

11:33 높이 솟은 바위봉우리 꼭지에서 사람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온다.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을 잡고 내려오는 나무꾼 같다. 평소 같으면 바위봉우리에 올랐겠지만 바위봉우리를 좌측으로 도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벤치가 마치 재형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재형은 벤치에 앉아 휴식을 하면서 채미는 개심사를 둘러보고 수덕사에 도착했을까? 어디쯤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힘들어하면서 먼 길을 걷고있나, 가야산에 산신령이 있다면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이런 저런 잡념 속을 헤매다가 일어선다.

 

11:45 가야산 가야봉(677.6m)정상을 빈틈없이 차지하고 있는 시설물을 둘러싼 철망에 닿았다. 사람들이 무척 많고 그들은 어디 앉을 자리가 없나 하고 기웃거리지만 역시 기대는 실망으로 돌아온다. 재형은 철망 왼쪽으로 내려선다.
 철망을 계속 따라가야 하지만 내려가는 길이 너무 좋아 조금 만 내려간다는 것이 100m정도 내려가 버렸다. 오른쪽으로 시설물을 철망을 향해 잡목을 헤치며 간다. 철망에 붙어 섰는데 개가 거품을 물고 짖어댄다. 뒤에는 사람이 서 있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재형을 내려다본다. 재형은 속이 무척 상했다. 어쩌겠는가? 누구를 탓해야 하나? 위태롭게 철망을 따라간다.

 

11:57 산 아래에서 시설물까지 아스팔트도로가 나있다. 도로에 내려서는데 도로를 따라 산보를 나온 사람과 만난 재형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도로를 건너 시설물 철망을 따라 가시덤불을 헤치며 나간다.

 

12:18 힘겹게 시설물의 뒤편 철망 끝 넓은 자리에 도착했다. 석문봉에서 가야봉까지 이어지는 능선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가야봉 철망에 닿았을 때 오른쪽으로 철망을 따른다면 이곳까지 빠르게 올 수 있겠다.'라고. 하지만 그의 절벽이라 힘들 것 같다.
 재형은 가야봉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걸음을 재촉한다.

 

12:30 페러글라이딩을 하도록 큰 나무를 말끔히 베어낸 곳 630m봉에 도착했다. 그런데 재형은 가야봉에서 이곳까지 내리막길임에도 힘들어하는 자신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5분을 쉬고 힘을 돋우어 다시 일어섰다.

 

 정맥을 모두 완주했다는 사람을 만나 넉넉한 인사를 나누고 무릎정도로 자란 떡갈나무가 가득한 길을 걸어간다.

 

12:58 봉우리(450m로 추정)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꾼다. 낮은 산은 낮은 산대로 높은 산은 높은 산대로 쉬운 산이 없다. 즐겨야한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걸어야한다. 하지만 마음뿐,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고통이 극한에 이를 때 자신의 내면을 바로 본다는데 다시 한번 자신을 보려고 애쓴다. 나약한 한 인간이 여기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어차피 홀로 가는 인생임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살아온 재형은 더욱 단단해 지고자 아니 더욱 부드러워지고자 오늘도 노력한다. 산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결국 깨닫고 죽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를.

 

13:28 삼각점이 박혀 있는 봉우리 410.9m봉이다. 이런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마는 그래도 정맥을 이어가는 사람으로서 위치를 확인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채미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다. 덕숭산 정상인데 사진을 찍어주고 내려가면 좋겠다고 한다. 재형은 아직 덕숭산 정상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된다며 채미에게 빨리 내려가라고 했다. 한순간 가슴이 살짝 떨린다.

 

13:45 한티고개에 내려서서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든다. 십자가, 죽음, 해미성지, 이런 조각들이 보이고 걸어온 뒤를 돌아보면 골재를 채취하고 버려진 산이 흉측하다. 모든 것이 부수어져 있다.

 

* 해미와 천주교 박해 :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사적 116호)은 1790년대로부터 백 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1870년대에까지 수십 명이 이름을 남겨놓고 있지만 그 외의 수천 명의 이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해미의 땅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쓰러져 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799년에 이보현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 옥고 후 옥사하였으며, 충청도 지방의 대대적 박해 시기였던 1815(을해)년과 1827(정해)년 기간 동안에는 손여옥 등 수많은 신자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을 해미 진영 군졸들이 수시로 급습하고 재산을 약탈한 후 신자들을 체포하여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하였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에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은 상급 치소인 홍주,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대부분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심리 절차(기록) 없이 해미에서 처형되어, 글자 그대로 무명 신자들이 수천 명 순교한 곳이 해미 땅이다.
1866(병인)년 이후 몇 년 간의 대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를 1천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3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박취득(라우렌시오)등 수십 명 뿐이다.

 

* 순교자들이 넘던 한티고개 : 면천 고을과 예산 및 덕산 고을의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이다. 교우들이 무리 지어 살던 면천의 황무실 마을과 덕산의 용머리 마을,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는 집단으로 체포되어 넘기도 하였다. 한티고개를 넘어 붙잡혀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개 마루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던 곳이 바로 여기다. 그리고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누가 애써 만든 기념물을 부수었는지 궁금해하며 산길을 오른다.

 

14:11 뒷산(447.6m)정상은 정맥에서 우측으로 약간 벗어나 있다. 갈림길에 올라서면 왼쪽으로 급하게 꺾여 내려가야 한다. 재형은 뒷산 넘어 해미산장에서 올라왔다는 부부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어떻게 여기 살고 있는 자신들 보다 이곳 지리를 더 잘 아느냐며 신기해한다.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묘지3기가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는 작은 밭이 있는 곳에서 잠시 멈추고 높이 솟아있는 덕숭산을 바라본다. 힘이 빠진 재형은 가파르게 보이는 덕숭산을 보니 한숨이 난다. 그러나 힘들수록 어려울수록 힘을 내는 법을 재형은 안다. 악이다 깡이다 세 번만 외면 그 사이 덕숭산 정상에 올라있을 것 같다.

 

14:35 여러 건물(서해안파크 황토 24 찜질방, 산장모텔, 고려한식부페)들을 보면서 나분들고개에 내려선다. 고려한식부페 앞에서 도로를 건너 절개지 우측으로 길을 잡는다.

 재형은 모처럼 '강산에'표시기를 확인한다. 먼저 간 사람을 생각하면 힘이 솟는다. 덕숭산 오르막길이 의외로 시원하고 편안하다. 산의 기운이 좋음을 느낀다.
 큰 바위 위에 드러누워 서서히 움직이는 흰 구름을 본다.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 한가지 흠이라면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음이지만 재형은 좋은 것만 느끼려 한다.

 

15:11 작은 바위봉우리에 올라서서 지나온 능선을 바라본다. 이제 얼마 남지 아니한 산행의 종착점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뗀다.

 

15:17 길인 듯 아닌 듯한 잡목을 헤치며 산을 오르다가 넓은 등산로와 만난다. 정상은 바로 위다.

 

15:25 덕숭산 정상에는 검은 표석(덕숭산정상, 해발495.2m)이 있고 산불감시초소가 보이고 사람들이 많다. 표석 뒤쪽으로 가야산 정상과 이어온 산줄기를 보면서 이제 산행이 끝나 감을 실감한다. 재형은 아무에게 사진을 부탁하고 덕숭산을 즐긴다. 

 

* 덕숭산 : 수덕산(修德山)이라고도 한다. 금북정맥 줄기로 예산읍에서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지점에 있다. 높지는 않으나 아름다운 계곡과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많아 예로부터 호서(湖西)의 금강산이라 불려 왔다.

 

* 수덕사 :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수덕사대웅전(국보 49)과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修德寺盧舍那佛掛佛幀:보물 1263)이 유명하다. 인도승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하러 왔다가 전국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최고의 영지로 정한 곳이며 법왕 원년(599)에 지명법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에는 아비지가 짓고 담징화상이 벽화를 그린 실증이 있으니 세계 유일무이한 걸작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곳은 근대 한국 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선사가 선풍을 크게 진작시켜 그 법을 만공선사에게 전함으로써 불조의 혜등을 꺼지지 않게 하여 명안종사를 배출한 선가의 종찰 덕숭총림이다. 그밖에 승려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하다 입적했다는 비구니 도량 견성암(見性庵)이 있고, 산 정상에는 수덕사와 1,020개의 돌층계로 이어지는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1973년 3월 덕숭산과 인근 가야산(伽倻山:678m) 일대가 덕숭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덕사에서 동쪽으로 4㎞ 떨어진 산 아래에는 덕산온천(德山溫泉)이 있어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15:41 산불감시초소 왼쪽으로 넓은 등산로가 보인다. 길을 잡고 내려가는데 왼쪽으로 익숙한 표시기가 보인다. 재형은 망설임 없이 좁고 가파른 바윗길을 내려간다. 5분 정도 내려가는데 오른쪽에 더욱 뚜렷한 능선이 도로를 향해 뻗어있는 것을 본다. 지도를 내고 다시 지형을 살핀다.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느낀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돌아서서 남은 힘을 다 뽑아 올려 짧은 거리지만 힘들게 오르막을 오른다.

 

15:50 잘못 들어선 곳, 원위치로 돌아왔다. 넓은 길을 따라 조금(약20m? 가깝게 느껴졌다.)내려가니 이번에는 확실하다. 왼쪽으로 내려서는 길 입구에 표시기가 두엇 달려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수많은 소나무가 베어져 쓰러져있다. 너무나 많은 나무를 베어버려 길도 찾기 힘들 정도다. 표시기는 물론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를 죽여버리는 재선충이 이곳까지 왔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넓은 바위 위에서니 수덕고개가 손만 뻗으면 닿을 듯 가깝다.

 

 수덕고개 휴게소가 바로 앞에 보이지만 철조망을 이중 삼중으로 쳐 놓아 바로 도로로 나가지를 못한다. 재형은 왼쪽으로 철조망을 따라가면서 도로로 나갈 수 있을 곳을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는지 굵은 나무토막이 철조망 높이보다 높게 걸쳐있는 곳에서 장대높이뛰기를 하듯이 철조망을 넘는다. 밭을 가로질러 40번 국도에 올라서서 오른쪽으로 버스정류장을 거쳐 고목을 향해간다. 

 

16:20 수덕고개(육괴정) 고목이 둘러싸고 있는 주차장에서 재형은 채미를 만났다. 재형은 9시간이 넘는 긴 산행을 끝냈고 굳게 묶여진 등산화 끈을 풀었다.
 
* 육괴정(六槐亭) : 1982년 10월 2일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여섯 그루와 정자를 합한 지명이다. 수령은 250년이고 나무마다 높이와 둘레가 다른데 최고 큰 나무의 높이가 24m, 둘레는 3.1m 이다.

산행을 마치고 : 육괴정 느티나무 와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연식당에서 비빔밥과 동동주를 먹고 충의사 앞을 지나 덕산온천지구로 들어갔다. 덕산사이판대온천에서 목욕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금강휴게소에서 라면을 하나만 시켜 둘이서 나누어 먹었다. 

 

* 충의사 : 매헌 윤봉길 의사께서 태어나시고 자란 곳이며 망명 전까지 농촌계몽과 애국정신을 고취하였던 곳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예산군덕산면 시량리에 위치해 있다. 충의사는 사적 제229호(72.10.14)로 지정되었으며 1967년에서 1974년까지 윤봉길 의사의 위업을 선양하고 충의정신을 후세에 기리 보존하고자 성역화 사업을 시행하였고, 매헌 윤봉길 의사 의거를 기리기 위해 매년 4월27~29일에 매헌문화재가 거행되고 있다.

 

* 윤봉길의사 : 순종 융희 2년(1908) 6월 21일 도중도 생가에서 윤황공의 장남으로 태어나 15세 때에는 학력이 뛰어나 천재소리를 들었으며 19세 때인 1926년에는 야학회를 창설하여 문맹퇴치에 힘쓰시고 1927년 농민독본을 집필하시고 독서회를 조직했다.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이란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라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상해사변 전승축하 식장을 폭파하는 대 의거 거사 후 1932년 12월 19일 25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 덕산온천 : 수온 47.7℃의 약알칼리성 중탄산나트륨천으로 게르마늄이 0.017㎎/ℓ함유되어 있으며 효능은 만성 류머티즘을 비롯하여 피부미용에 좋다고 한다.

 

◎ 2004. 11. 21(일) 맑음.
◎ 산행 기점과 종점 : 서산시 운산면 소중1리 647번 도로 가루고개 삼화목장(서산목장)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옆 40번 국도 수덕고개에서 산행을 마침.
◎ 도상거리 : 약 22km(실제거리와 차이가 많이 날것 같다.)
◎ 산행 중 통과지점과 시간 : 가루고개(07:15) - 상왕산(08:30) - 삼화목장끝(09:08) - 일락산(10:19) - 일락사 탈출가능 임도(10:40) - 가야산 석문봉(11:06) - 가야산 정상 철조망(11:45) - 가야산 정상 시설물 정문(11:57) - 630m봉 페러글라이딩 활공장(12:30) - 한치고개(13:45 해미성지) - 뒷산(14:11) - 나분들고개(14:35) - 덕숭산(15:35 수덕산이라고도 함) - 수덕고개(16:20 육괴정)
◎ 홀로 걸음.
◎ 산행시간 : 9시간 05분
◎ 유적에 관한 문의 : 서산시 운산면 문화관광과 041-660-2224.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3-04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