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종주일시: 2005.12.24.(토) 영하 5도-영상 3도

 2.교통편 

갈 때 : 6,800원 1411 수원- 신성  06:02- 08:04  

수덕사 주차장-갈산-홍성 하이마트(편승)-홍성역(시내버스,850원)

올 때 : 8,400원 1412 홍성- 영등포  15:36- 18:02

 3.종주기록

신성역,54m(08:15) - 절개지 소규모 아파트와 능선,123m(08:44) -꽃조개고개/마온모텔,66m (08:46-51)-한용운 상,101m(08:54)- 남산팔각정,207m (09:09-11) -수리고개,105m(09:28) -맞고개/포도밭,109m(09:38)- 하우고개, 86m (10:00) -살포쟁이고개,152m(10:37)-주암,293m(11:04)-백월산 첫 이정표 , 334m(11:14)- 백월산,399m (11:26) -정자 뒤 기암,385m(11:48)- 안부/옛교회건물,90m(12:38)-까치고개,101m (12:42) -위생쓰레기매립장정문(12:46)- 낙상리 안부/간벌지,108m(12:57)-산불지역 시작, 150m (13:32)-산불지역끝,223m(13:49)-홍동산,290m(14:03)-안부능선,209m (14:27)- 쌍묘,210m(14:28)-육괴정(수덕고개),118m(14:24) - 수덕사 주차장(14:50)


4.산행형태 : 홀로산행

5.도상거리 : 16.815km 실 주행거리 17.5km

6.유산기


 

24일은 원래 여러 산행약속을 했었으나 하나하나 같이 가고자 했던 산행동무들의 사정 변경으로 지난 낙남구간 벌충 때문에 합류하지 못했던 금북정맥 수덕고개에서 신성역(1965. 10. 5. 홍성역에서 관리 역원배치 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1975년 보통역으로 승격하여 현재에는 아세아 시멘트 전용선에 시멘트와 무궁화 호 열차 고객만을 취급하는 아담한 역임 ) 구간을 가기로 하였다. 공교롭게 이날 토요일님이 금북정맥 1구간 산행을 올렸으나 지난여름에 이미 좀 짧기는 하지만 다녀온 터라 2구간부터 합류하기로 마음먹고 그 전에 잇지 못한 구간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하여 태안에 있는 친구에게 서해안 지역의 적설량을 물어보고 웬만하면 진행해도 되겠다 싶어 실행을 결심한다. 정맥접근의 편의를 위하여 핑계 김에 수원역 앞에 계시는 어머님 집에 하룻밤 묵고 새벽에 일어나 장항선 열차에 승차하여 도착예정시간보다 7분 늦게 신성역 앞에 홀로 내린다. 


 

이젠 듣기조차 무서운 눈 소복이 내린 날, 하루에도 이용객이 한두 명 밖에 없다는 간이역에 등산 차림으로 중무장한 내가 내려서자 역무원이 단박에 금북정맥을 가는 것이냐고 아는 체한다. 인사를 나누고 마을 시멘트길을 따라서 왼쪽으로 진행하면 원형 반사경 4거리에서 빨간 2층 벽돌집 방향으로 올라간다. 민가를 가로지르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고 집 뒤쪽 야산으로 올라가면 잡목들이 반겨준다. 쌓인 눈을 보아하니 그냥 진행하기는 어려워 조금 지난 묘지에서 아이젠은 마다하고 스패츠를 착용하고 일어선다.


 

여름이었으면 꽤나 성가셨을 잡목을 뚫고 학계리 쪽으로 능선 따라 오르니 동물 발자국만 왼쪽으로 나 있을 뿐, 순백의 눈길 그대로다. 발자국 따라 가보니 바른 길은 아니고 바로 방향을 돌려 꽃조개 고개 쪽으로 내려가니(忠淸南道 洪城郡 龜項面 麻溫里) 홍성군 남부 우회도로 건설현장을 만난다. 풍수설에 의하면 홍성 남방에 風吹羅帶<비단허리띠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양임>의 형국인 명당이 있고, 이 고개가 옷고름을 맨 모양이라 하여 ‘고쪼개’라 칭한바 발음의 변화로 꽃조개라 한다는 국립지리정보원의 설명이다. 이 형국 설명은 임란 때 우리나라에 군속의 일원으로 왔던 풍수 두사총의 말에 의한 바, 이 사람은 다른 명나라의 술사와는 달리 순수한 맘으로 우리의 지형을 둘러보고 좋은 자리를 우리 민중에게 알리려고 애쓴 고로, 정감록 등의 예언 비기의 원형을 이루는 저작(두사총 비결)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홍성군 홈페이지에는 옛날에 진달래가 많이 피어 꽃동산을 이루어서 봄 꽃구경을 즐기던 고개라 한다. 고가를 이룬 공사현장 밑으로 고개를 우회 통과하여 올라가니 마온 모텔이 보이고 붐비지 않는 길을 건너 남산 등산로를 오른다. 오른쪽에 충령사가 있지만 외면하고 한용운 선사의 동상을 향하여 앞에 서니 그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독자에게”라는 시가 눈에 띄었다. 비에는 일부만 기록되었지만 전문을 보면


 

讀者여 나는 詩人으로 여러분의압헤 보이는 것을 부끄러함니다

여러분이 나의詩를 읽을때에 나를 슬버하고 스스로 슬버할 줄을 암니다

나는 나의 詩를 讀者들의 子孫에게까지 읽히고 십흔 마음은 업슴니다

그때에는 나의 詩를 읽는 것이 느진 봄의 꽃숩풀에 안저서

마른 菊花를 비벼서 코에 대히는것과 가틀는지 모르것슴니다

밤은 얼마나 되얏는지 모르것슴니다

雪嶽山의 무거은 그림자는 엷어감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짐니다

(乙丑八月二十九日밤 끗) <讀者에게>


 

만해 스스로가 규정한 자신의 시는 늦은 봄 꽃밭에서 지난 가을의 마른 국화를 비벼대면서 그 향기를 맡는 대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엄혹한 일제시대를 사는 독자들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후손 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해결되어(즉 일제의 질곡에서 해방) 그저 단순한 문학놀이에 불과할 것이라는 예측을 보여준다. 내가 짓는 산행시조도 이 같은 시인의 성찰자세를 가지지 아니하면 그저 문학을 빌미로 한 놀음에 불과할 뿐인지라........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난다. 웬 여인이 내려오는 것이  일찌감치 팔각정에 올라 바람 쐬고 오는 모양이 분명할 새, 부지런히 팔각정을 다녀온다. 그러니 조망이 특별한 것 같지는 않다. 다시 거슬러 와 수리고개를 향하여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고개 같지도 않은 수리고개를 넘어간다. 오른쪽에 공사 중인 마온터널이 드러나면서 잠시 후 밭둑을 지나 맞고개에 도착하니 지나 온 남산이 꽤 높게 보인다. 전의 이씨 무덤을 지나가면서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진행한다. 29번 도로 하우고개(忠淸南道 洪城郡 龜項面 篁谷里 : 이 역시 풍수설에 黃牛耕田 지형을 가진 고개라 하여 하고개라 불리기도 하며, 옛날에 洪州牧使가 洪州邑內를 바라보기 위해 자주 올랐던 고개이며 홍주를 지나 서산으로 가는 행인들이 쉬면서 말과 소에게 풀을 먹이고 사람은 한숨 돌리는 고개라 하고개, 하우고개, 황우고개라고 부른다)공사장에 도착하여 좌측 넓게 닦아진 길로 내려간다. 도로는 두 갈래로 해태상이 양쪽 도로변에 있고,  기존 도로가 조금 위에 산 쪽으로 붙었고 새길 뚫는 아래도로 까지 두 개의 도로가 연접하였다.


 

그 유래 한 번 험악한 살포쟁이 고개(옛날 황골이라는 관청에 근무하는 포도관이 이곳에서 죄인 또는 가축을 죽였다 하여 살포쟁이고개 또는 살포티라고 부르는 고개다)를 지난다.  나무에 길게 메어져 있는 표시기가 gps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길잡이가 될 것 같다. 이 흰색 긴 띠들은 한국전력 인부들이 능선길을 알리기 위해 달아놓은 것이라는데 어찌 보면 지명 유래와 연관되어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하니 식자우환인 셈인가? 죽 따르다 보면 송전탑이 나타난다. 일월산(백월산)으로 올라갈수록 육산만은 아니라는 듯 바위들이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주암에 도착하여 한숨쉬고 간다. 눈이 무릎을 넘도록 쌓인 곳이 많으니 진행이 늦어질 수밖에 없고 조급한 마음은 화를 부르나니 늦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수밖에........


 

 산행 세 시간이 지나서야 백월산 정상과 (백월산이라는 동일한 지명을 쓰는  높이 428미터의 산이 慶尙南道 昌原市 北面 月栢里에 또 있다. <19610422 고시> 아울러 다음 구간인 청양군 화성면 산정리와 운곡면 영양리,남양면 백금리 경계에도 백월산이 있어 산 모양이 달처럼 보인다거나 남양면(옛날 사양면)의 서쪽에 있으므로 달이 지는 곳이라 하여 백월산이라 함)구항면사무소 이정표 있는 곳에 도착한다. 오른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니 헬기장이 나온다. 여기서 장난기가 발동하여 헬기장 눈밭에 하트 표시 그려본다. 지도상에서는 일월산... 일월산의 지명은 慶尙北道 英陽郡 靑杞面 唐里에 (19610422 고시 : 산 봉우리가 해처럼 생겼고 맞은편 산봉우리가 반달같이 생겨 동해를 바라보면 바다에 해뜨는 것을 밝게 볼수있어 일월산이라 함)있는 산 이름이 똑같다. 홍성 일월산은 홍성 주민들이 백월산(이조 말엽에 홍주 이방으로 있던 李鍾根이란 사람이 명필이며 문장가였는데 이분의 한시구절에서 白月山下라는 구절을 따서 백월산이라 하였다. 일설에는 백제왕이 이곳에 피난 왔었다 하여 백월산이라 하게 된 것이 부르기 쉽도록 월산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일월산은 한자표기의 잘못인 듯 불린 바 없다 한다, 19610422 고시) 또는 월산으로 부르고 있고 홍성읍 월산리와 구항면 오봉리, 홍복면 중계리 사이에 위치한다. 이 곳 조망도 오서산 못지않다.  동쪽으로 홍성읍과 홍주운동장까지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 서해바다까지 보이는 우뚝한 봉우리였다. 영요대 아래에서 점심식사를 하노라니 등산객들이 청난사쪽에서 올라와 오봉리 쪽을 보며 황우석 박사 돼지 농장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눈길을 홀로 러셀하며 오노라니 지치고 힘이 들어 예상시간보다 30여분이 늦어진 것을 보충할 셈으로 충분히 쉬지 않고 내려가니 홍성청난사중수비(洪州淸難祠重修碑: 1596년 7월 (선조 29) 이몽학이 일으킨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반란 명분에 홍성 사람들이 호응하여 임천, 정산, 청양, 대흥을 지나 홍주지방으로 쳐들어오자, 당시 홍주목사 홍가신이 무장 박명원, 수사 최호, 체찰종사 신강행 등과 반란군을 평정하고 청난공신으로 책목되어 만들어진 사당이며 비각이다)  와 사당이 보인다.


 

이몽학의 민란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兵禍를 계기로 국가의 재정 곤핍, 억압적인 신분질서의 문제들로 인하여 민중의 호응을 얻게 된 사회변혁운동이었다. 왕족인 전주이씨의 서얼로서 충청도에서 종군하다가 변혁의 기운을 타고 오른 그가 지향하는 바는 썩어빠진 왕권을 타도하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거창한 것이었지만, 충청도 지역의 민간전통인 홍주 동갑계 조직의 힘을 빌려 민중을 이끌었으나 조직 내 이반과 임란 당시 홍주성에서 단련된 홍가신을 위시한 관군의 조직적인 대응 앞에 무너져 버리고 만 역사적 사실이 있었던 곳이다. 난이 무위로 돌아간 후 관의 대처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거듭되는 官弊의 양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바 있어 옮겨 적어본다. 실록에는 선조가 민심수습을 위해 승지 유희서를 보내 백성을 회유했더니 백성들이 하는 말이“역적의 변이 난 뒤부터 군관들이 역적을 잡는다는 핑계로 마을 남자들을 무조건 결박해가므로 모두 두려워서 산골짜기로 숨게 되었다. 집에 있는 재물은 역적의 장물이라고 모두 거두어가므로 쓸쓸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적당들이 거의 잡혔으므로 도사와 선전관을 요란하게 자주 내려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한다. 이 모양이 멀리 갈 것도 없이 광주항쟁에서도 되풀이 되었거니와 이즈음의 자연재해에 대응하는 고위관료의 정부 시찰 행태가 반복되는 것을 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조금 지난 정자 뒤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장군과 보살의 상이 놓여있었다. 아마도 무속인들이 의식을 치루는 장소인 모양이다. 이 곳에서 산행기에는 정자 뒷편 직진 급경사 내리막을 지나라고 되어 있는데  흔적이 없어 좌측 갈림길로 찍혀있는 발자국 따라 기암을 휘돌아 100미터쯤 내려가니 gps 방향과 판이하다.

 

 정자 뒤 바위 바로 뒷편으로 표지기들이 매달린 것을 미처 보지 못한 탓에 되올라와 우측 넓은 하산로로 가보지만 역시 다른 길이고, 잠시 헷갈리다가 정작 그 길 찾아 가보지만 그동안 길 흔적을 인도하던 동물 자취마저 없어 잠깐 나무들을 부여잡고 가다가 제 길을 또 잃는다. 낭떠러지를 이룬 왼쪽으로 내려가다가 표지기가 보이는 오른 쪽으로 또 30미터쯤 트래버스한다. 겨우 길 찾아 내려오니 긴장이 풀려 한없이 길만 따라 가고 싶어지고 목이 말라오는데 준비한 물이 떨어져 민가로 내려가 물을 구했다. 바로 옆의 능선으로 교회 종각이 버려져 있고, 물을 구한 민가는 원래 교회로 쓰인 듯하다. 시골교회의 유지운영이 至難한 일임을 웅변하고 있는 현장이다.


 

12:42  까치고개(忠淸南道 洪城郡 洪北面 中溪里 : 옛날에 고개에 참나무와 대나무가 많이 있었다 해서 대나무쟁이고개, 참나무쟁이고개 라고도 부른다) 도착. 2차선 포장도로이며 쉼터도 있는 삼거리길이다. 삼거리길에서 능선으로 가는 길은 쓰레기매립장으로 향하는 아스팔트도로다. 매립장 정문에서 좌측으로 접어들어 매립장 철조망 담장을 경계로 하여 홍동산으로 올라간다. 낙상리 안부에서는 또 한번 길을 헷갈린다. 방향감각이 갑자기 왜 사라지는지 모를 일이다. 거리야 불과 200미터 가량이지만 약 10분간 이리저리 헤맨 흔적을 보시라.

 

그렇지 않아도 몇 해 전에 산불이 난 이후로 싸리나무와 잡목이 우거져 겨울에도 이곳을 통과하기 정말 어려운 구간이다. 길도 보이지 않고, 쓰러진 나무가 얼키설키 얽혀있어 얼얼하게 매운 맛을 본다. 다만 홍동산 정상을 보며 가끔 눈에 띄는 표지기를 바라보며 오를 뿐이다. 능선에 오르면 오른쪽으로 길이 꺾이지만 산불 지역은 조금 남아있고 길이 좋아진다. 오르며, 지나온 백월산을 돌아보며 사진 찍어본다. 이곳을 지나면 홍성군의 경계를 벗어나 예산군의 지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홍동산부터는 길이 좋아 도중에 능선을 헷갈리지만 않으면 수덕고개까지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홍동산에(弘東山 308.9m) 오르니 조망은 남쪽으로 터져있고, 삼각점은 수풀에 묻혔는지 뵈지 않는다. 주욱 20분쯤 내려가다가 높은산님의 표지를 만나고 1분후 묘지 두 기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방향전환 한다. 오른쪽으로는 저수지가 보이고 앞으로 수덕산을 우러른다. 이윽고 수덕고개가 보이고 예정된 6시간보다 30분 늦게 육괴정에 내려선다. 이제부터는 홍성 역에 도달하는 시간과의 싸움인데 홍성 가는 버스기 5분전에 떠나버려 마음이 조급해진다. 하는 수없이 수덕사 앞 주차장에 내려가 편승을 시도한다. 다행히 20여분을 지체하다가 지프를 얻어 타고 갈산 면을 경유하여 까치고개를 지나 홍성 하이마트 앞에 당도한다. 다시 홍성 시내버스를 타고 역 앞에 도착하니 3시 36분발 열차표를 간발의 차이로 확보 성공! 다시 푸근해진 마음으로 입석까지 그득한 열차에 올라 금북 구간벌충을 자축한다. 산행을 反芻해보니 gps가 있다 하더라도 눈으로 길 흔적이 아주 사라진 상태에서는 나침반으로 항상 지형지물을 확인해가면서 진행할 것을 교훈으로 삼는다.


 


 

일월인가 백월인가 이름이 궁금하여

명당 이룬 고개와 뫼 힘내어 올라서서

아무도 지나지 않은 눈길 홀로 지르밟는다.


 

예부터 忠義란 말 부질없이 하지마소

백성의 마음이야 편안함이 더 나을 손

땅 좋아 어우러진들 含哺鼓腹 최고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