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구간

한남정맥

산행일

아나지고개~철마산~소사고교

(17km, 7시간30분)

2007년 6월 9일(토)

 맑음

 


 

<산행 기록>

아나지고개-원적산-구루지고개-만월산-철마산-불심정사입구-성주산-여우고개-소사고교

  6:10          6:50         8:10        9:20    10:20        11:20        12:30     13:20      13:40


 

오! 인천


 

  오늘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출발한다. 5시가 되면 아침이 밝아오므로 산행출발지에 도착하면 6시쯤 된다. 한낮이면 기온이 30도까지 오르내려서 오전중에 산행을 끝내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새벽시간이지만 부지런한 사람들은 움직이고 있다. 요즘은 24시 편의점에 이어 밤새도록 영업하는 식당이 꽤 늘었다. 열심히 산다고 해야 할지 고단한 삶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순대국 집으로 들어간다. 움직이려면 아침을 먹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사적이익을 위한 일이라 해도 ‘쉬어 가면서 하지’ 염려가 된다. 밤을 새우는 일은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6:10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에서 경인고속국도로 연결하여 아나지고개에 도착하니 아침 6시다. 구석진 곳에 차를 세우고 산행준비를 한 후 지팡이를 들었다. 6시 10분에 출발한다.

  아나지고개에 있는 LG주유소를 지나 서쪽으로 내려가니 육교가 나온다. 일요일 아침이라 육교 위에서 바라보는 경인고속국도는 여유가 있다.

   

  <경인고속국도-인천방향>

  경인고속국도는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인천 인터체인지)에서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월동(신월 인터체인지)에 이르는 길이 23.9㎞의 6~8차선 고속국도인데 1968년에 완성하였다. 경인고속국도의 필요성은 서울하고 인천이 일찍부터 ‘경인 공업 지구’로 묶이면서부터인데 인천 항구에서 서울로 화물을 실어 나르는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인 1899년에 경인철도가 달리기 시작하면서 그 역할을 해 왔는데 1974년부터 전철로 바뀌면서 사람만 실어나르게 되자 경인고속국도의 비중이 커졌다.

  육교를 지나자 공원이 나오고 왼쪽 언덕을 오르자 4차선 도로를 만난다.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으로 진행하면 ‘JY정공’이 우측에 보이는데 송전철탑을 보고 올라가니 철마정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아침운동을 하는 시민들이 보인다. 한남정맥 산줄기는  도심속에서 훌륭한 휴식처가 되고 있음을 본다.

  인천광역시를 지나는 한남정맥은 부평구와 서구를 나누는 경계가 되면서 부평도서관이 있는 구루지고개까지 이어진다. 이 정맥의 능선은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를 나누는 경계선이기도 한데 부평구쪽은 한강문화권에 속하고 인천 시가지쪽은 바다의 영향을 받는 문화권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형성된 고을 이름이 서로 다르다. 부평구와 그 언저리 땅은 고구려 때에는 주부토군, 신라 때는 장제, 고려 때는 수주, 조선 때에는 부평으로 불리면서 인천하고는 다른 배경을 가지게 된다. 또 지형적으로 보면 인천 쪽이 시가지에 구릉이 많은 데에 견주어 부평 쪽은 평탄하다.

 

<원적산 철마정>

6:50

  아나지고개에서 출발한 지 40분이 지나자 원적산 팔각정에 도착한다. 시민들은 따가운 아침햇살을 피해 나무그늘아래에서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고 있다. 팔각정 옆에는 안내문이 있어 이 산의 내력을 알려준다.

   “철마산(鐵馬山)은 원래 천마산(天馬山)으로 산중턱 큰 바위에 말발굽 자국과 같이 파여 있어 이를 마제석(馬蹄石)이라 하고 이 산을 마제봉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 산밑에 가정동 마을에는 합천이씨가 대성을 이룬 명문인데 이 문중에서 아기장사가 태어나 그 부모는 후환이 두려워 아기장사를 죽이자 이 산에서 용마가 나와 울면서 떠났다는 전설이 있어 마제석은 그 용마의 발자국이라 전하고 이 산을 천마가 나왔다고 하여 천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한다.”

  그러면서 철마정 건립 배경도 알려준다. “1966년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주민 편의시설이 없어 석남약수터를 개발하고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서구 관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철마정 건립계획을 세우니...” 총 사업비 2억 9천만을 들여 97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철마정을 지나고 잠시 후 원적산 정상(196m)에 오른다. 사방이 잘 조망된다. 북쪽으로는 계양산이 까마득하고 서쪽에는 인천시가지가, 동쪽에는 부평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야말로 도심속에서 숨통이 트이는 산줄기이다.

  원적산 정상에는 인천산악회가 세운 정상석이 있고 그 옆에는 원적산 안내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부평도호부 서쪽 15리에 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원적산은 동쪽의 경계는 부평구 산곡동, 서쪽은 서구 가좌동과 석남동이다. 북쪽은 안와지고개에서 남쪽으로 중철마산 북쪽도로(건지골-철마로)까지이다. 원적산의 높이는 199m로 독립된 산군이다. ‘대동지지’와 김정호의 ‘청구도’에는 ‘園寂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적산 정상>

  철마산으로 잘못 알려진 원적산은 '원한이 쌓인 산'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시대에 서해와 한강사이에 경인 운하를 파서 연결하려고 공사를 하는데, 이 주변의 산과 고개에 암석이 많아 끝내 실패하자 '원한이 맺혔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또 원적산 서쪽 기슭에는 원적사의 절터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절은 조선 말기에 빈대가 너무 많아 폐사 되었다고 전한다.

  원적산을 지나면서부터 하산길이다. 경사가 급해 6차선 도로까지는 금방 내려선다. 이 도로는 산곡동 명신여고 앞에서 서구 가좌동으로 이어지는데, 이 고개를 '철마산 관통도로'라 부른다. 횡단보도를 건너 새사미아파트 입구의 철계단을 통하여 산줄기를 이어간다.

  경사를 오른 정상부는 또 다른 철마산이다. 쉬지 않고 계속 진행한다. 군사격장 경고문과 27번 한전 송전철탑을 지나면 부대초소의 배수로가 있는 장고개에 이른다. 

  원적산 아래의 부평구 산곡동은 이 아름다운 동산을 이루어 동산 밑에 마을이 생기니 '뫼의 끝'이란 뜻에서 '뫼끝말'이라 하고, 원적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호봉산으로 이어져 그 맞닿은 곳을 ‘장끝말’이라 하여 장끝고개인데 오늘날 장고개로 불린다. 이 지역은 상업지구로 지정되어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옛 모습을 잃고 있음을 본다.

개발된 도시의 산길은 주민들의 산책로로 잘 닦여 있다. 운동시설도 있고 곳곳에 커피나 음료를 파는 상인들도 있어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원적산을 떠난 지 1시간 20분이 지나자 구루지고개에 당도한다. 이곳은 비포장 고갯길인데 호봉산으로 연결되는 길목이기도 하다.

  잠시 휴식한 후 다시 출발한다. 주민들의 잘 닦여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도심으로 빠질 수도 있는 샛길이 자주 나온다. 정맥 능선 길을 잘 살펴 지나야 할 것 같다.

  넓은 공터를 만나서 왼쪽으로 내려가고 약수터를 지나자 부평도서관이 있는 도로에 내려선다. 도로 오른쪽으로 조금 가다보니 ‘신동아아파트’ 안내간판이 있는 삼거리이고 횡단보도를 건너가니 백운공원을 만난다. 계속해서 공원옆길을 따라가니 경인전철을 지나게 되고 좌측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나타난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고 묘목밭을 지나자 철망이 나오고 계속 내려가니 건물로 내려서게 되는데 야적장이 있는 대양G&P 회사이다. 대문이 굳게 잠겨 있어 월담을 하자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산줄기라는 것이 그러하므로...

  46번 도로를 만나고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신명여고 안내간판이 나오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팬더아파트를 바라보고 들어간다. 만월산으로 가는 길이다.

 

<만월산 정상에서 보는 태극기>

  9:20

  만월산 정상(187m)에 오른다.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데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와 태극기에 대한 애경심을 고취하고자 게양대를 세웠다는 안내동판이 있다. 가까운 곳에 만월정이 있어 인천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만월산은 주안산으로도 불리는데 주안산은 '토질이 붉고 산의 형상이 기러기가 나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만월산은 '동쪽에서 만월을 바라본다'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땅덩어리가 쉬지않고 불어나고 있는 인천은 고구려 주몽의 아들인 비류가 자리잡은 터전으로 문학산 일대에 정착하여 미추홀이라고 명명한 것이 인천의 최초 명칭이 되었다.  고구려 장수왕 때는 매소홀현, 통일신라 때는 소성, 고려시대 때는 경원부, 조선시대 태종 때 와서 비로소 인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러한 변천을 겪으면서 인천은 개항 때까지 문학산 언저리가 인천의 중심지였다.

  제물포로 대표되는 인천이 항구를 연 것은 일본의 군함인 운양호가 강화도에 와서 행패를 부리다가 우리나라 군대와 싸움을 벌인 이른바 운양호 사건의 뒤처리로 1876년에 맺어진 병자수호조규(강화도 조약)에 따른 것이었다.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제물포가 근대 인천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통상의 중심지가 되고 영사관이 설치되어 국제적인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1981년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경기도에서 분리되고 1995년 광역시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7년 현재 8구(중구,동구,남구,서구,연수구,남동구,부평구,계양구)와 2군(강화군,옹진군)으로 행정구역을 이룬다.

  

<만월산에서 보는 인천광역시>

  나도 인천과 인연이 전혀 없지 않다. 1988년 컴퓨터라는 신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부산에서 만삭의 아내를 차에 태우고 이사를 했는데 인천시 남구 숭의동이다. 제물포역이 가까웠다. 그 해 여름 더위을 수봉산의 수봉공원에서 피했고 인천시내을 내려다보며 꿈을 키웠던 것이다.

  만월산에서 휴식한 후 출발한다. KBS 송신탑을 지나자 도로를 만나게 되고 길이 막히자 우측으로 내려가서 다시 고갯마루쪽으로 올라간다. 차가 오지 않는 틈을 봐서 길을 횡단하여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SK주유소가 있고 사잇길로 들어가니 진성화학이 나오는데 능선으로 들어간다. 그 후 시멘트 도로를 만나게 되고 한참 올라가자 커피와 음료를 파는 가게가 나온다. 이 곳에서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섰는데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철마산 정상이다.

<철마산 정상>

  10:20

  또 하나의 철마산 정상(202m)에 도착한다. 산불감시초소 옆에 철마산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지목이 서 있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표지목 맞은편으로 내려간다.

군교육장을 지나 능선을 따라 가다 보니 치열하게 자리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소나무와 신갈나무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예로부터 소나무는 그 쓰임새로 인해 매우 가치있는 나무로 보호받아 왔다. 조선시대의 산림정책은 과히 소나무정책이라 할 만한데 궁궐의 목재 공급원으로서 그 이용자 계층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참나무류를 포함한 이외의 나무들은 잡목의 취급을 받아 왔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소나무는 1년에 한 마디밖에 자랄 수 없으나 음수 수종인 넓은잎나무들은 추위가 오기 전까지 자유롭게 자라므로 결국 소나무는 자리를 빼앗기고 위로 쫓겨나게 된다. 소나무 보호정책으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소나무에게 신갈나무는 빠르게 터전을 확장하며 자리 쟁탈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소나무와 신갈나무의 세력다투기>

  세 번째 철마산을 떠난지 20분 후 군작전도로를 만나고 도로따라 올라가면 부대후문이 나오는데 부대 철망따라 왼쪽으로 들어간다. 180도를 빙 돌아가면 아래쪽에 송전철탑(14번)이 보이는데 그 곳을 목표로 내려간다. 송전철탑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니 장수동 도로다. 도로 왼쪽으로 내려가니 이가백숙이라는 식당이 나오고 식당앞에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 장수IC를 통과하는 지하통로를 지날 수 있다.  지하통로를 벗어나면서 왼쪽오르막으로 도로에 올라서고 도로따라 걸어간다. 위에는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가 있다. 

  11:20

  불심정사 입구에 도착한다.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가 위로 지나고 있는 이곳에서 굴다리를 지나면 왼쪽에 한남정맥 리본이 붙어 있다. 반가운 리본을 따라 산길을 들어서는데 이곳은 군유격 훈련장이다. 잠시 쉬면서 땀을 닦는다.

  200m안밖의 산줄기를 쉼없이 이어오면서 며칠전에 ‘해발높이’를 정하는 수준원점에 대하여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해발 높이의 뿌리가 되는 수준원점은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 인하공업전문대학교정에 있는데 국토 높이의 기준점이 된다. 인천 앞바다의 만조와 간조의 중간선을 해발 0m로 1963년에 설치하였는데 원점진고는 26.6871m로 결정했다. 즉 수준원점을 0m지점에 설치하지 않고 해발 26.6871m지점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원산 앞바다를, 중국은 천진 앞바다를 수준원점으로 정하였는데 백두산의 높이가 대략 6m의 오차를 보이는 것은 나라마다 해수면의 기준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불심정사 안내석>

  군유격장에서 휴식을 끝내고 군부대 정문을 지나 정상부에 오르니 삼각점이 있는 208m봉이다. 산행을 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사람들을 뒤로 하고 넓은 길로 직진하니 군부대 철망이 나오고 왼쪽으로 철망을 따라 가니 초소가 있는 봉우리가 나온다. 내리막길로 계속 가니 도로에 내려서게 되는데 오른쪽에 군부대 정문이 있고 맞은편에 전진아파트가 보인다. 왼쪽 아파트 옹벽이 끝나는 지점에 산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오고 와우고개를 지나 성주산으로 이어진다.

  12:30

  성주산 정상(217m)에 도착한다. 이곳에도 산행을 즐기는 인천시민들이 휴식을 하고 있다.

<구름다리>

  성주산에서 곧장 내려오면 팔각정을 만나고 이어서 구름다리를 지나게 된다. 이곳이 부천시 소사구와 시흥시 대야동을 연결하는 하오고개이다. 구름다리를 건너자 꽃동산을 만나게 되는데 아름다운 꽃들을 잘 꾸며놓았다.

  신이 있어 제일 처음으로 만든 꽃을 코스모스라고 한다면 코스모스가 가냘프고 만족스럽지 않자 마지막으로 만들어보았다는 꽃이 국화다. 국화과의 황금색의 닭이라 불리는 금계국을 만나 한참 들여다보고 구경을 한다. 1920년대 북아메리카에서 우리나라로 도입된 금계국은 화단이나 도로변의 화단에 심으면 황금색의 꽃이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금계국>

  꽃동산을 지나서 바위가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면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잡는다. 여우고개 방향이다. 여우고개 직전의 쉼터에서 잠시 휴식한다.

  13:20

  여우고개에 도착한다. 2차선 도로다. 쉬지 않고 곧장 산등성이에 오른다. 정상부근에 희미한 길이 있는 왼쪽으로 리본이 붙어 있다. 잡목이 무성하고, 수풀이 희미한 길마저 가렸는데 지팡이로 헤집으며 길을 찾아 내려간다. 내려서니 과수원이다. 왼쪽으로 보니 소사 제2배수지 건물이 보이고 그 곳으로 올라선다.

 

<소사고등학교앞 도로>

13:40

  소사고등학교앞 4차선 도로에 내려선다. 이곳은 시흥시와 부천시의 경계라는 안내판이 크게 붙어 있다.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 시흥IC가 가까이 있다는 분기점 표시도 보인다. 오늘 산행은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횡단보도를 건너 시내버스를 타고 소사 전철역까지 간다. 전철을 타고 백운역까지 가서 택시를 타니 아나지고개가 가깝다.


 

참고문헌>

한국의 발견<경기도편>...뿌리깊은 나무(1983년)

숲의 생활사...웅진지식하우스

영진 5만지도...영진문화사

인천시 지명의 뿌리를 찾아서( http://ssrr.new21.net/inchon/7_place_name/place_name.htm )

산경표 마룻금을 따라 홀로 걸어가는 산꾼의 산행이야기<한남정맥4구간>...성봉현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