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단독종주기      

   제1일                                                                               1999년   4월  16일   (금)  맑음
                                                                                          유평리 12:30 ~ 치밭목 17:30 [5]
07:40 진주행 직행버스로 대전을 떠난다.
대구에서 구마고속도로 접어들면서 내가 정말 백두대간 단독종주를 해 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얼마나 벼르고 벼르던 대간종주인가?  일단 집을 떠나니 반은 이룬 것인가?
팀을 구성하라는 등 다시 생각을 해 보라는 등, 나를 아껴주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만류 했지만 왜 좀 더 적극적으로 말려주지 않았는지 원망스럽기조차 하다.
아니 그들이 만류했기 때문에 오기로 더 적극적으로 추진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구마고속도로에서 남해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주변의 산들이 완연한 봄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봄에 비가 많이 온 탓으로 남강의 물빛이 더욱 맑고 산뜻해 보인다.
진주에 도착하여 11:30 중산리행 버스로 덕천에 내려 간단히 식사를 하고 택시를 타고 유평리로 향했다. 유평리 매표소에 당도하니 춘계 산불통제기간이라 입산할 수 없단다. 등산허가서를 내보이니 본부로 확인을 해보고 나서 건투를 빌면서 통과시켜준다.
유평리가 이렇게 한가할 줄이야 전형적인 산촌의 모습 그대로 조용하고 한적하다.
할머니 몇 분이 평상에 앉아 따뜻한 봄 햇살을 쪼이며 잡담을 하시다가 커다란 배낭을 택시에서 내리는 나를 보고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수통에 물을 채우고 시계를 보니 12:30. 기억을 더듬어 조금 오르다 가 석축을 쌓은 집 앞에서 왼쪽으로 갈라져 치밭목을 향해 천천히 오르막을 걷기 시작했다.
지리산에서 가장 등산객이 적은 이 코스는 천왕봉까지 7시간 치밭목까지는 4시간이 걸린다. 여러 번 이 코스로 다녀 보았지만 항상 인적이 드문 곳이다.
잦았던 지난 봄 비로 인해 등산로 곳곳이 패이고 아직도 물이 고여 질퍽거린다. 두어 차례 쉬었을까?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15일분 주부식, 보조자일, 침낭 텐트 등 출발 때 30kg)무계가 점점 부담스러워 진다.
대간종주는 무계와 물과의 싸움이라 했던가? "무계부터 이겨야 성공할 수 있다" 는 말이 실감난다. 점점 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예상시간을 넘고 있다. 문득 뇌리에 스쳐가는 어느 해 겨을의 "장애인 천왕봉 전원 등정"의 기사와 사진을 보면서 감격했던 일이 생각난다. 육신이 불편한 장애인들도 오르는데 내가 왜 못해!  한발 한발 걸으며 발자국마다 그들의 투지를 돼 새겨 본다.
무재치기 폭포 근처에 이르니 등산로가 없어졌다. 작년 호우 때 이곳도 범람 휩쓸었나 보다 계곡 위를 보니 없던 목조다리가 새로 놓여있다. 다리 이름이 "무재치기교"  아 이제는 거의 다 왔구나!
계곡에서 바위에 물이 떨어지는 굉음이 계곡을 울리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배낭을 벗어 놓고 사진 한 장 찍어 두고 싶지만 올 때마다 실낱같은 물줄기만 보여주는 무재치기―.

                        

벌써 계곡은 자동카메라로 촬영하기에는 너무 어두워―,그보다는 도대체 몸이 말을 듣지 않다.
마지막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역시나 진돗개들만이 낯선 객을 향해 짖어댄다.
통제기간에 어떻게 올라왔느냐고 의아해 하는 관리인은 나의 행색을 보더니 대뜸 대간종주냐고 묻는다.  유평리에서 시작해 오늘 여기서 첫 밤을 신세지게 되었다고 인사하고 가스등불이 켜진 산장 안을 살피니 나 혼자다. 산장 전체를 전세 낸 샘이다.
식사 후 관리인이 끓여주는 약차 한잔을 마시며 입산통제기간에는 등산객도 없는데 하산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그럼 오늘 이 선생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의미 상통한 미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미소 속에는 산악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고독이 철철 넘쳐흘렀다.


  제2일                                                                              1999년  4월  17일  (토)   맑음
                                                                                          치밭목  07:15 ~ 벽소령 19:30  [12:15]
오늘이 내 귀빠진 날이다.(만61세)
어제 아침 집 사람이 미리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으면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오래 만에 손수지은 엊저녁 밥이 삼층밥이 되어서 할 수없이 우거짓국을 끓이다가 밥을 고  푹 삶아 먹고 출발했다. 써래봉으로 오르지 않고 중봉~하봉간 능선으로 코스를 잡았다.
코스 북사면에는 아직도 두꺼운 얼음이 녹지 않고 있어서 저 산 아래의 이른 봄기운과는 차별화 되고 있었다. 천왕봉에 올라 사진을 찍으려니 찍어줄 사람이 없다. 할 수 없이 배낭만 표지석에 기대놓고 한 장 찰칵.


 

                                          촛대봉이정표와 멀리 천왕봉
운이 좋으면 이 시간에도(10:10) 운해를 볼 수 있으련만 나한테는 그만한 행운도 따라주지 않는다. 장터목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촛대봉을 향해 아무도 없는 등산로를 터벅터벅 걷는다. 
촛대봉에 올라 사위를 돌아보니 지나온 천왕봉과 제석봉의 고사목들이 쓸쓸하게 홀로인 나를 배웅하는것 같다. 서쪽을 바라보니 명신봉, 덕평봉, 반야봉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발밑을 보니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세석산장이 봄 햇살에 나른히 잠자는 듯 조용하다. 생각 같아서는 배낭을
벗어 놓고 세석평전에서 며칠이고 쉬고 싶다.
지루한 수입목계단 길을 다 내려 갈 지음 어디서 보고 있었는지 공단직원이 나타나 심문 아닌 심문을 한다. 등산 허가서를 내 보이니 자기들은 아직까지 정식으로 허가서를 발급받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본다면서
연세도 많으신데 조심해서 반드시 성공하라고 축원한다. 고맙구먼―.
시계를 보니 세시 삼십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계속 걷기로 한다. 그러나 선비 샘을 지나고 부터 차츰 불안해
진다.  여기서 벽소령까지는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그러나 어찌하리? 이제는 세석으로 돌아 갈수도 없다 그저 계속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벽소령 임도까지만 가면 되겠다 싶어 양갱을 하나 꺼내 먹고 부지런히 걸었다.
벽소령 임도로 내려섰을 때는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임도 오른쪽에 위태롭게 걸려있던 바위들이 지난비
로 많이 무너져 내렸다. 차라리 잘된 것인지 모르겠다. 이곳을 지날 때 마다 무너져 내리지나않을까 불안했었는데―.
벽소령 산장에 거의 당도할 무렵 10여 메타 앞에 검은 물체가 있다고 느끼는 순간, 우르르 쿵쾅,  불과 몇 발자국
앞에서 벼랑 밑으로 몰려가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멧돼지와 정면충돌 할 뻔했잖아 식은땀이 주르르 흐른다.
재작년 추석때 치밭목에서 연하천까지 10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12시간 걷고도 아직 2~3시간 더 걸어야 한
다니 역시 무계는 무서운 것이다. 처음으로 무계와 행군의 시간이 반비례 한다는 사실을-.
산장관리인(공단직원) 이외는 아무도 없는 침실은 왜 그렇게 커 보이는지 오는 따라 더 썰렁하구나.
어찌나 피곤했던지 라면을 끓여 먹고는 고목나무 쓰러지듯 잠속으로 빠져 버렸다.

  
   제3일                                                                            1999년  4월  18일  (일)  맑음
                                                                                          벽소령  08:00 ~ 노고단 19:30 [11:30]
어제밤에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잠이 깊이 들지않고 계속 뒤치락 거리다가 선잠으로 지새었다, 어제 밤에는 느끼

지 못하였는데  이 넓은 산장을 나 혼자 독차지하고 있었다.
아침에 늦장을 부려본다. 오늘 제대로 행군이 될지 의문이다 점점 배낭의 무계에 신경이 쓰인다. 먹어서 무계를
줄이려는데 먹히지를 않는다. 아니 이제 이틀 먹었어야 얼마나 먹었겠나.
오늘은 뱀사골에서 마감해야 되겠다, 016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다.
11:00 연하천에서 누릉지로  점심을 하고 젊은 관리인(며칠간 대리)의 백두대간 종주 경험담을 들으며 용기를
내본다.




지리산에는 공단이 관리하는 직영산장이 4개소, 임대식 소형 산장이 5개소 있으나 아마도 나의 생각 같아서는
산이 좋아 산을 다니는 사람들은 시설은 좋으나 경직되고 기계적으로 운영하는 직영산장은 별로 좋아 하지 않을 것 같다. 반면 인정이 펄펄 넘치는 소형 산장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토끼봉을 통과하니 역시 노고단까지로 목표가 바뀐다. 급경사 길로 삼도봉까지 올려치려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
이 된다, 삼도봉 너럭바위에 배낭을 팽개치듯 벗어놓고 벌떡 들어 눕는다.
남쪽으로 길게 뻗은 불무장등 오른쪽으로 깊게 파인 피아골 그 위로 왕시리봉이 눈부시게 싱그럽다.
노루목을 지나면서 내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등산객을 한사람도 못 보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불과  1~2개월간의 입산통제로 지리산의 등산로가 낙옆이 쌓여 흔적 없이 사라지고 낯선 산에 들어온 느낌이 든
다.
새삼 나에게 등산허가서를 발급해 주신 지리산 세 곳의 소장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노고단 입구에 도착하니 철책이 높게 처져있었다. 어디 개구멍이라도 없는가?  살펴보았으나 없다. 
야! 2메타 가까이 되는 저 철조망을 어떻게 넘나?  한길이 넘는 철조망위에 30kg의 배낭을 올려놓는 것도 보통일
이 아닌데 흔들흔들하는 그 철조망 위에서 배낭이 철조망 가시에 걸리지 않도록 넘겨서 반대쪽으로 내려 노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각고 끝에 노고단산장에 도착하니 일요일이어선가 등산객이 두어 팀 보인다.
취사장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이 둘이서 삼겹살에 소주를 들다가 한잔 권하기에 염치불구하고 달려들어 한잔 주
욱 들이키니 야! 그 맛이란-. 바로 이 맛이야!
이들은 지리산 종주계획으로 화엄사에서 조금 전에 올러  왔단다. 나의 경과보고를 듣더니 걱정을 한다. 오래간
만에 환한 전등불 밑에서 맛있게 저녁을 끓여 먹었다.

  제4일                                                                             1999년  4월  19일   (월)   맑음
                                                                                          노고단 08:30 ~ 고기리 18:30  [10]
이제부터는 훨씬 자유로운 산행을 할수 있겠지. 지리산에서는 야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산장과 산장 사이의
시간과 거리의 운영을 잘 해야 한다.
앞으로는 야영이기 때문에 식수관리만 잘하면 시간과 거리는 별로 개의치 않고 자유로운 산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종석대를 지나 성삼재에서 간식거리를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침 휴게소가 대수리를 하고 있어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고 만복대로 향하였다.
고리봉 ~ 만복대 ~ 정령치(10km)의 당일 산행 시에는 시야도 넓고, 더구나 멎진 억새의 풍광은 참으로 아름다
운데, 오늘의 내게는 왜 이렇게 지겨운지 모르겠다.
묘봉치 조금 지나 있다는 샘터 찾는데 실패하고-. 사실은 피곤이 겹쳐서 곳곳에 물이 있다는 정보만 믿고 마실
물만 준비한 채 그냥 왔더니 미수가루나 라면을 못 끓이고 정령치까지 쫄쫄 굶게 생겼다.
정령치에 도착 얼른 휴게소로 들어가 보니 먹거리는 컵라면과 컵우동 뿐이다, 그럴 바에야 라면을 끓일까 싶어
식수 좀 부탁 했더니 마실 물은 드릴 수 있어도 병에 담아 드릴 수는 없단다. 간신히 사정사정하여 반병 정도 얻어 나오니 15:45시 -. 자 고기리로 발출!
고리봉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나가다 꼬리표를 따라 내려가니 이게 어디가 능선인지 알 수가 없다.처음으로
능선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런 능선은 하산하면서 확인 할 것이 아니라 올라가면서 확인하는 것이 정석 일 것이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표지기가 없었더라면 나의 독도 실력으로는 몇 시간 허비 하였을 것을 백두대간 선배들의 도움으로 그냥 발걸음
만 때어 놓으면 되었으니 그 고마움이란-. 
오늘은 몹시 피곤하다 한발 한발 때어놓는 것이 못 올 것 같던 고기리까지 이렇게 와 있다.
오래간만에 민박에서 목욕도 하고 삼겹살에 소주도 한잔 걸치니 피곤이 말끔히 가신다.


  제5일                                                                             1999년  4월  20일  (화)  맑음
                                                                                          고기리  07:30 ~ 여원제 15:30  [10]
엊저녁에 편히 잦더니 몸이 개운하다. 지리산에 관광객이 없으니 이 마을도 한갖지고 조용하다. 고기리의 아침은 계곡의 맑은 물소리와 함께 깨어난다. 이곳은 지리산국립공원의 만복대 아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자그마한 농촌 마을로 해발 400메타가 넘는 고지대로서 남원시 운봉면에 속한다.
마을 서북쪽 밑으로는 그 유명한 구룡계곡이 흐르고 있고 동남쪽으로는 1.400메타가 넘는 만복대가 가로막아 아
침이 늦는다.
후덕하게 생긴 민박집 주인 부부는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이집을 단골로 찾아온다며 주촌리 들머리를 자세히 일
러준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이렇게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어떻게 종주를 하시느냐며 건강을 빌어 주신다.
생각보다  길이 잘 열려있어 수정봉까지 쉽게 오르고 입망치를 거쳐 여원재로 하산하다가 임도로 내려 선 것이 잘못되어
다시 올라갔다 내려오느라 20여분 허비했다.
여원재  건너편 솔밭에 텐트를 치고 장교리 농협구판장까지 왕복 20여분 걸려서 1.5L짜리 오렌지 주서1병(빈병
을 수통으로)과 꽁치통조림을  사가지고 와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출발  전까지 저 오랜지쥬스를 모두 마셔버려야 한다.  빈병을 수통으로 쓰기 위해-.
이곳 여원재에서의 야영이 첫 번째 야영이다. 그리고 닷새째 식량이 줄어서 그런지 아니면 적응이 되어가는 것
인지 이제 무거운 배낭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고기리에서 주촌리까지 논 가운데의 도로를 걸어서 힁단 해 본 사람만이 이길 이 물길을 갈라놓는 줄기라
는 것을 알 것이다***




 



  제6일                                                                            1999년  4월  21일  (수)  맑음
                                                                                          여원재  08:15~복성이재17:15  [9]
고남산에 오르니 북쪽으로 88고속도로가 보이고 서북쪽으로 뻗은 능선의 암골미가 빼어나다 부절리쪽에서 한번
답사해보고 싶은 산이다.
동남풍이 몰고 온 안개로 시계가 제로다. 지금쯤 지리산이 멋지게 조망이 될 텐데-. 고남산의 두 번째 봉우리 북
쪽으로 곧게 솟은 암봉위의 자연탑이 멋을 뽑내고 서있다. 바위 사이사이에 피어난 진달래가 옛 전설을 기억나게 한다.
매요리와 사치마을 사이의 포장도로를 지나는데 누가 갔다 버렸는지 못쓰게 된 각종 전자 제품 및 타이어 등등
이 도로 숲 뒤로 가득하다 인근 부녀자들 수십명이 동원되어 수거하고 있는데 아마 두어 차정도는 될 것 같다.
사치마을은 모두 잘 지은 기와집들이라 꽤 잘사는 마을인줄 알았는데 알고 본 바로는 88고속도로 건설 당시 나
라에서 융자를 받아 지은 집들인데 아직도 융자금 상환을 못한 집이 많이 있단다.
사치재 능선에서 지리산휴게소를 내려다보니 공연히 집 생각이-
조금 올라가니 94,95년 계속해서 큰 산불이 두 번씩이나 있었던 지점을 통과하면서 훼손된 자연경관이 되 살아
나려면 몇십년이나 걸릴까? 생각해본다.
부지런히 사리봉(776.5)을 통과하고 복성이재에 도착하니 비포장도로가 반암면 쪽에서 넘어오고 있다. 도로 한
쪽편에 나의 보금자리를 펼치고-
오늘 저녁은 밥을 해서 먹고 땀을 씻지도 못하고  침낭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제7일                                                                             1999년  4월  22일  (목)  맑음
                                                                                          복성이재 07:10~중재 18:20  [11:10]
04:15분경 웅성거리며 가까워지는 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반암면 노단리에서 중재까지 신세계 영등포점 산악회
에서 구간종주를 하고 있었다,
잠이 깨이고 보니 더 잘 수가 없어서 뒤치락거리다 일어나서 출발 준비를 서둔다.
아직도 아침나절은 쌀쌀하다. 봉화산과 광대치 사이의 능선은 시야가 확 트이고 큰 나무도 없으며 철쭉나무로
가득하다  언제든 시간을 내어 철쭉 축제에 한번 참석해보고 싶다.
제4회 흥부골 철쭉제 에드벌룬이 맑은 하늘에 가볍게 떠돈다 지역 산악회에서 철쭉 밭을 비교적 잘 가꾸어 놓은
듯하다.
오늘 무려 11시간 10분 동안 걸었다, 항상 그러하듯 15시 이후 체력이 떨어져 고생한다,
체력의 한계일까?
왕복 50분 걸려 중기마을로 소주를 구하러 다녀왔다. 얼마 안 걸릴듯하여 출발하였더니 지친몸에 시골길이 제법
멀었나 보다, 그동안 외딴 고갯길에서 나의 텐트가 홀로 잘 지키고 있었다,
여기서도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다.
오늘은 반달인데 공기가 맑아서 인가 제법 밝다, 맹꽁이 우는 소리가 어렸을 때 피난지에서 듣던 기억을 다시 떠
올린다. 이런 산골에서도 등산객을 이상한 눈으로 보던 시절은 이미 먼 옛날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등산인구가 많아져서 아무데서나 아무 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8일                                                                              1999년  4월  23일  (금)  흐림
                                                                                          중재 08:30~야영장 17:30  [9]
백운산까지 600m이상 치고 올라야 한다. 한발 한발 숨이 턱에 닿도록 걸어 오른다.
평소 등산할 때 가끔 대형배낭을 짊어진 젊은이들이 아주 느린 걸음으로 반 보씩 반보씩 산정을 향하 여 걸어 오
르는 것을 보고 젊은이들이 왠 게으름을 저렇게 피우는가 싶었는데-
그러나 내가 직접 이 대형배낭을 짊어지고
걸어보니 그때 그 젊은이들의 힘겨워하는 상황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한 가지 나름대로 깨달음인데 평지걷기, 내리막걷기, 오르막 걷기 때 사용하는 근육이 각 각 다르지 아니한가
생각이 된다.
내리막이나 평지를 걷다가 오르막을 오를 때 그 근육의 바뀜, 즉 차 같으면 기어변속이랄까?  하는 것이 빨리 바
뀌지  않는 것 같다.
한참 고통스러운 순간이 지나야 비로써 서서히 오를 수 있으며 기계적인 순발력과 지구력이 살아나는 것을 느끼
게 된다, 어떤 때는 차라리 계속 오르막이고 싶을 때도 있으니 이 상황이 60줄의 나한테만 해당되는 것인가?
오르락내리락할 때 내리막은 괜찮은데 오르막에서 빨리 리듬이 바뀌도록 노력해보자.


                      혼자서 바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촬영하니 쯧 쯧...
11:55 백운산 정상 도착, 사진 한 장 찰칵, 게 누구 샷다 한번 눌러 줄분 없수-
배낭을 정상 표지석에 기대어 놓고, 카메라밑에 돌맹이를 괴여놓고 자동촬영을 시도해본다 초점이 맞거나 말거
나-
백운산~영취산 사이 약 4km구간의 산죽(조릿대)밭과 싸리밭은 정말 사람 죽인다. 동쪽 나무가지 사이로 괘관
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거망산과 황석산, 그리고 서쪽으로 장안산이 손만 뻗으면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갑자기 맑던 하
늘에 구름이 점점이 몰려오고 천둥소리도 점점 가까워져 온다,
일부지역에 소나기가 온다더니(일기예보) -  시계도 좋지 아니하고.
15:30경 덕운봉 다음 샘터까지 약 30분 남겨
놓고 드디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옷을 적시고는 않되겠다 싶어 급히 판초우의를 꺼내 배낭을 벗어놓고 배낭과 함께 뒤집어쓰고 앉아 쉬
었다. 소나기성이고,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야영장도 멀지 않으니 느긋이 비 그치기를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대간종주 중 첫 번째로 만나는 비이지만 1000m가 넘는 고산 능선에서의 비는 굵기도 굵지만 거침없는 바람과
함께 몰아치니 속수무책이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재빨리 찾아 대피하는 것이 장땡이다.  좀 있으니 우박까지 떨어진다.
모자와 판초 우의를 내려치는 우박이 제법 굵다. 몸이 식으니 추위도 엄습해 온다.
비에 대처하는 요령을 더 연구해야 되겠다. 비, 바람, 우박, 천둥 번개 속에서 쉬다 걷다 하다 보니 한쪽 하늘이
서서히 벗겨지며 언제 그랫나 하는 듯이  해가 방긋 웃는다.
17:30, 결국 2시간여 비와 싸우다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 야영에 들어갔다, 밤에 다시 비가 오건 말건 젖은 옷들
을 나뭇가지에 척척 널어놓고 잠을 청했다

제9일                                                                               1999년  4월  24일  (토)  맑음
                                                                                          야영장 09:30~육십령 14:20  [4.30]
해가 높이 올라 천막과 옷가지가 마를 때를 기다려 느즈막하게 출발했다. 오늘은 종착역이 육십령이니 천천히 움직여도 되겠지-  모처럼 여유를 부려본다.


작은 암봉에 올라서니 백운산에서 깃대봉까지 뻗은 능선이 장쾌하다. 덕유능선과 버금간다면?
그러나 그 지겨운 산죽(한길이 넘는)과 싸리밭길은- 그 안에 들어서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천둥, 번개, 비, 우박, 바람 난리를 피우던 어제의 그 날씨는 간데없고 벌써부터 땀이 나기 시작한다. 현재 7일째
건조경보란다.
백운산~깃대봉~덕유산 이 능선들이 경북과 전북의 도 경계선이다 이 능선은 동, 서로 언어와 생
활습관을 달리하는 국민들이 오랜 세월을 이 밑에 있는 육십령이라는 고개로 넘나들며 교류 하도록 가로막고 있었다니 대간의 위력을 알만하겠다.
깃대봉에서 바라본 남덕유와 할미봉은 등산인들에게 도전의욕을 용솟음치게 한다.
할미봉 입구의 석산이 대간을 홰손하고 있다.


육십령에 도착 배낭을 풀고 빨래하고-  제육복음에 소주한잔 걸치니 피로가 확-
식당아줌마께서 어제 두 사람이 묵고 아침에 떠났단다.  어떤 사람들일까?
 (이 사람들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정연수와 윤희수일 줄이야)

  제10일                                                                          1999년  4월  25일  (일)  맑음
                                                                                         육십령 06:30~무룡산 18:15  [11:45]
민박을 하니 출발시간이 빠르다 .
할미봉 북쪽사면이 온통 어름이다 배낭을 벗어서 자일로 이동 시키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장수 덕유로 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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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미봉에서 본 남덕유서봉(좌), 동봉
작년 추석때 박동현과 육십령부터~남덕유~북덕유~무주구천동으로 종주하던 기억이 새롭다.
동봉 서봉사이에 질펀하게 깔려있던 도토리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던 일, 삿갓재에서의 야영하던 일등, 장수
덕유(서봉)에 11:30 도착하여 참샘에서 점심을 들며 사방을 둘러보니 북으로 무룡산과 향적봉, 시계방향으로 황학산, 가야산, 동남으로 금원, 기백, 황석, 거망산, 그리고 남덕유 뒤로 백운산과 장수산, 더 멀리 엷은 안개속에 지리산이 길게 누어있다.
삿갓재 15:30도착, 아직 시간은 이른데 여기서 야영하느냐? 아니면 무룡산을 넘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한참을 쉬다가 내일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 무룡산을 넘기로 마음먹고 가파른 고개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역
시 힘들다 1시간 30분을 걸려서 겨우 정상에 오르니 머지 아니한 거리에 눈여겨 보아두었던 야영장소가 한눈에 들어오건만 조금도 움직이기가 싫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은 그동안 나의 고생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야! 내가 저기서부터 걸어왔단 말인가?
남덕유의 쌍봉이 석양이 만들어 낸 실루엣으로 바짝 앞으로 다가 와 있다.
1490m의 무룡산 정상인데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다.
오늘은 일요일인데도 남덕유의 두명 외에는 등산객이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정상에서 100m정도 내려와 왼
쪽 참나무 숲 밑에 야영흔적이 있고 아늑해 보이기에 얼시구 하고 배낭을 풀었다.

    제11일                                                                        1999년  4월  26일  (월) 맑음
                                                                                         무룡산 07:40~빼재 18:15  [10.35]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깨니 맹수가 머리(천막안의 머리쪽)위에서 어~흥, 어~흥, 울부짓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으흠, 으흠 큰 기침 소리를 내면서 후라쉬를 찾아 불을 밝히고 라디오를 큰소리로 틀어놓고 천막 안에 여럿이 있는 듯이 소란을 피웠다. 어~흥, 어~흥 여러 번 울부짓더니 우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 산에서 어흥 거리며 울 수 있는 동물이 무엇일까?
지리산에 호랑이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논란이 많았지만 한 번도 결론이 나 본적은 없었는데 나는 분명히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내가 후일에 이 사실을 공개하면 거짓말쟁이로 비웃겠지-  그렇다고 이 사실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 가슴속에 품고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 후 한잠도 못자고 해가 뜰 때까지 꼼작 못하고 천막 속에 가쳐 있다가 해가 거의 뜰 무렵에야 간신히 조심, 조심 천막의 지퍼를 살며시 열고 밖의 동정을 살피니 호랑이가 언제 다녀갔었냐? 다.
밖으로 나와 천막 주위를 한 바퀴 휘 돌아 보았지만 나의 실력으로는 쌓여 있는 가랑잎 속에서 무슨 흔적을 찾아보겠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일출 촬영을 몇 커트 찍고, 배낭을 챙겼다.
저 밑의 산자락에는 엷은 안개가 잔잔히 흐르고 그 속에는 아직도 잠에서 덜 깨어난 농민들이 곧 일어나 부산스럽게 삶을 시작하겠지, 해는 서서히 높아지는데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비교적 고도차가 없이 완만한 능선을 천천히 걸어서 동엽령에 도착하여 수통에 물을 채우고 한숨 쉬다가 백암봉까지 부지런히 걸었다.
백암봉 갈림길 바위턱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려고 수통을 꺼내려는데 아차! 어디서 빠뜨렸을까?
새로 장만한 새 수통이 어디로인가 도망 가버리고 없다.
큰일 났다 물은 1.5리터 팻트병에 반 밖에 없는데 앞으로 신풍령까지 어떻게 버티느냐?
중간에는 샘터가 없는데-  할 수 없이 점심은 굶고 식수로만 사용하면서 버티는 수밖에-  라면 끓이는 것도 포기하고 내쳐 걷기만 했다. 지봉을 향해 오르는데 풀숲에 1.5리터 팻트병에 물이 4/3정도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등산객도 없는 요즘 이 병속에 든 물의 수명이 얼마나 되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지만 사정이 사정인지라, 얼른 집어 들고 보니 물의 색갈은 아직 깨끗하다.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아보니 괜찮다. 조금 입에 대어보니 맛의 변화도 없다. 오냐! 식수는 있으니 이 물을 끓여서 라면을 요리하자 이게 다 신의 보살핌이시다 생각하고 적당한 자리를 잡아 코펠에 부어보니 쌀알만한 붉은색의 물거미들이 우굴 거린다.
잠시 가라앉혀서 위의 물만 따라보니 라면 끓일 만큼의 양이 된다. 얼른 버너를 꺼내 라면을 끓여 먹으니 왜 그렇게 맛이 있던지-
굶을 것을 면하게 되어서 인지 너무 맛있게 먹었다.  제발 탈만 나지 말아다오-
지봉 이후 한참을 싸리나무와 잡목들이 팔뚝을 찔러대어 시뻘겋게 피멍이 들고 군데군데 피가 흐른다.
한참을 가다보니 지팡이에 피가 묻어 끈적거린다. 팔뚝을 살펴보니 상처는 별것 아닌 것 같은데 피가 멈추지를 않고 계속 흐르는 것이 아닌가, 온몸의 피가 쉴 사이 없이 뛰고 있으니 자연지혈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잠시 쉬면서 상처 부위를 한참 압박하니 피가 멈춘다.
다 왔는데 싶은 신풍령이 왜 이렇게 멀까? 작은 봉우리 하나 넘으면 다왔지 싶은데 앞에 또 작은봉이 있다, 이런 신경전을 몇 번 거친 후 진을 뺄대로 뺀 다음 도로 절개지 앞에 내동댕이쳐진다.
기진맥진하여 아무도 없이 썰렁한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니 그래도 손님이라고 반갑게 맞이 해준다.
우선 찌개백반에 소주 한잔 걸치니 온몸이 흐늘흐늘해 진다. 한숨 돌리고 난 다음 휴게소 주인 장동원씨와 수인사를 나누고 새벽에 격은 호랑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의 판단은 호랑이가 아니고 표범일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울음소리도 비슷하고...  그러면서 구역침범을 한 인간에게 빨리 자기 구역에서 나가달라는 신호란다, 덧붙여 하는 말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먼저 공격하는 동물은 없으며 자위책으로서의 방어적 공격이니 산행을 할 때 동물들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 말란다, 지당한 말씀이다.
아늑한 자리에 천막을 칠 수 있도록 배려해주어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또 하루 해 냈다.





    제12일                                                                        1999년  4월  27일  (화)  맑음
                                                                                         신풍령 07:35~덕산재 17:20  [9.45]
삼봉산[1254m]까지 2시간 25 분소요, 한번 더와보고 싶은 산. 소사고개를 지나 대덕산 정상 15:45 도착, 북으로 삼도봉과 황학산이 희미한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있다. 기압골의 영향으로 시계는 제로.
신풍령휴게소 장동원씨는 덕유산 기슭 출생으로 50여 성상을 덕유산 품을 떠나본 일이 없는 순수 토박이로 산속에서의 삶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한번 집을 나서면 이삼일씩 산속에서 비박하면서 약초도 캐고 온갖 희귀한 나물과 버섯류를 채취해 온단다.
그러니 어느 골짜기 어느 기슭에 무엇이 언제 어떻게 익어가는지를 훤히 꿰는 덕유산 귀신이다. 나의 묵직한 배낭을 들어 보더니 왜 이렇게 무겁게 지고 다니느냔다.  넓은 비닐 두어 장만 갖고 다니면 아무데서나 비박하는데 먹을 것만 조금 준비하면 며칠쯤 휭 달려가고 다시 음식만 조금씩 준비하면 되는데 식이다.
그러나 나는 반대다, 여정이 2~3일로 단기간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50~60여일의 긴 산행에는 제일 필요한 것이 피곤을 풀 수 있는 편안한 잠자리이다. 그래야 내일의 체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덕산재에 도착하니 쌍방울 주유소는 영업을 하지않은지가 오래된 모양이고 그 앞의 포장마차도 텅 비어있다.
마침 지나가던 구미에서 온 개인택시 기사님이 등산애호가로 나의 커다란 배낭을 보더니 대간종주 하느냐? 고 묻는다.
그래 몇 마디 주고받다가 내가 요 고개 밑에 첫 번째 마을까지만 태워 달라고 했더니 얼른 타란다. 덕산까지 와서 얼마냐고 했더니 써비스란다.
고맙습니다. 기사님!  덕분에 오늘도 온돌방에서 편한 잠을 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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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일                                                                         1999년  4월  28일  (수) 흐림
                                                                                          덕산재  07:40~삼도봉 17:00  [9.20]
시내버스가 07:20에 학생들을 태우고 덕산재까지 운행하는데 여기까지 김천시이기 때문에 시내요금 500원으로 덕산재까지 20 분만에 올라왔다.
서북쪽 하늘은 시커멓고 남동쪽은 맑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우리 대간종주꾼들에게는 맑음이 좋지만 농민에게는 비가 와야 할 텐데- 담배와 술을 너무하는 것이 아닌지-  추풍령 지나서는 끊는 방법을 강구해 봐야 되겠다.
어제는 고마운 기사 덕분에 덕산에서 편한잠과 식사를 한 탓인지 발걸음이 가볍다.
970고지에서 1030고지(핼기장)에 올라 막 점심을 끝냈는데 영월의 화백 백중기씨를 만나게 되었다.
내 뒤를 따라 오다가 진갑기념 단독종주라고 쓴 리본을 보고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의아심에 부지런히 따라왔단다. 진갑에 이렇게 단독으로 종주하니 존경스럽단다. 싫지않은 칭찬에 기분이 좋다. 
우리는 같이 걷지 않고 10여분 거리를 두고 걸었다.
오늘은 요 며칠사이 등산하던 중 가장 쌀쌀한 날씨인 것 같다, 별로 땀도 흘리지 않았고 능선도 굴곡없이 상당히 수월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삼도봉 정상 화합비 앞에서 내가 걸어온 능선을 돌아보니 대덕산, 삼봉산,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새삼 도도하고 웅장해 보인다. 뒤 늦게 도착한 백중기씨와 안부에서 같이 야영하기로 하고 안부로 하산하고, 주부식이 넉넉한 나는 오늘 저녁 오랜만에 나의 실력으로 밥 짓고 찌게 끓여 둘이서 맛있게 먹었다. 종주 중 오늘처럼 푸짐하고 맛있는 식사는 처음이란다.
백중기씨는 미술교사직을 사퇴하고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위해 백두대간을 2회에 나누어 종주 하는중인데 이번이 그 첫 번째로서 지리산부터 죽령까지 스케치공부 할 계획이란다.
영감이 떠오르면 스케치 하고 사진기에 실지를 촬영하고 이 두 가지를 자료로 화폭에 명작을? 만들어 낸단다.  백중기씨는 나보다 하루 늦게 천왕봉에 올라 세석에서 관리공단 직원에게 적발되어 벌금을 물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하산하여 구례로 돌아서 관광하다가 입산 하였단다.
언제 그렸는지 내가 봉우리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산 풍경과 함께 스케치 하여 슬며시 내게 건내어준다. 고맚습니다.
천막 안에 누우니 또 걱정이다.  오늘은 또 몇 번이나 깨어야 하나?
피곤할 땐 한번 곯아떨어지면 새벽까지 푹 잣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꼭 두 세 시경 깨었다가 날아 밝을 때까지 깊은 잠이 못 들고 깜박 깜박한다.
추풍령에서 필요 없는 장비는 보내고 새 스타일로 출발해야 되겠다.



    제14일                                                                         1999년  4월  29일  (목) 맑음
                                                                                          삼도봉 08:15~바람재 17:30  [8.15]
또 아침 일찍 깨였다. 미적거리다가 밖이 조금 훤해저 왼쪽 헬기장으로 일출을 보러 올라갔다, 별로 신통치 않다. 백중기씨와 아침식사를 하고 우두령에서 만나기로 하고 먼저 출발하였다.
어제보다는 비교적 잡목도 없고 순탄한 길을 쉽게쉽게 우두령까지 왔다.
2시경 백중기씨가 부식을 구하러 간다며 흥덕리쪽으로 내려가고 나는 도로변에서 잠간 쉬고 있는데 승용차 한대가 스르르 올라오더니 불자인 듯 보이는 부인(회색바지 착용)이 차에서 내려 길을 뭇기에 자세히 일려 드렸더니 혼자서 등산하느냐? 고생 많이 한다며 참외 두개를 꺼내어 주신다.
잠시 후 백중기씨가 술과 부식을 구해가지고 올라왔다.
능선길이 비교적 순탄하여 약 두시간만에 바람재 못미처 통신탑이 있는 헬기장에 도착하여 동쪽 발아래를 보니 멀리 저녁 안게 속에 김천시가 아른 거린다.  이곳에 천막을 치기로 하고 배낭을 풀었다.
바람도 없고 날씨도 맑아 오래간만에 김천시의 야경을 배경삼아 백중기씨와 소주잔을 주고받으니 이 분위기를 무엇이라 표현해야 좋을지-
시 한 수만 겻드렸으면 시선 이태백이 질투할까?
젊었을 때 서울 남산타워에서 바라보던 서울의 야경이 생각난다.
중계소 덕택으로 오래간만에 016핸드폰이 작동하여 집으로 통화해 보았다.
내일은 늘외산에서 야영하기로 하고 나의 동반자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제15일                                                                        1999년  4월  30일  (금) 맑음
                                                                                         바람재 08:45~추풍령 19:00  [10.15]
누구요?  곤한 잠을 깨우는 자가 누구인가?  바람?  낙엽?  새소리---?
살짝 지퍼를 열고 앞을 보니 막 태양이 떠오르고 있지 아니한가!  아! 그대였었더냐?
세상에 이브자리 속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니---. 잠시 후 시뻘건 해가 이마를 내민다.
[05:40분경]엷은 안개에 파무쳐있는 계곡, 계곡, 계곡 우리의 산하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리고 지금 이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안개 속에 무친 저 농촌 마을들은 얼마나 평화로워 보이는가?  
저 농민들에게 어느 신인들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지 아니 하리 백성들이여 이 찬란한 조물주의 선물 속에서 고즈넉이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평화를 누려갑시다.
황학산 정상에서부터 하산길은 엉망이다, 도립공원중 등산로를 보수하지 아니하는 곳은 이곳뿐인가 하노라.
등산로가 비가 올 때마다 이렇게 패여나가고 보니 자꾸만 옆으로, 옆으로 더 넓게 길이 생기고, 자연훼손이 진행되고 있지 아니 한가-
바람재~괘방령 약 4km구간, 괘방령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하고 늘외산으로 향했다. 장군봉을 거쳐 김천시립공원묘원에서 올라오는 삼거리 안부를 찾지 못하여 물을 보충하지 못하고 늘외산으로 향했다, 헬기장 세 곳을 다 통과하도록 백중기씨가 보이질 안는다.
추풍령으로 하산 했는가 보다,  어떻게 할까?
내일[5/1]오후 2시경 추풍령 기념비 앞에서 보급받기로 돼있는데-  아직 시간은 많아서 추풍령까지 내려갈 수 도 있다.  하산할까?  아니면 여기서 야영을 할까? 
망서리다가 집으로 전화를 해보았다. 통화가 된다.  얼떨결에 내 지금 추풍령으로 내려가고 있으니 차를 가지고 대릴러 오라고 전화했다.
늘외산에서 추풍령까지 표고차 500m의 급경사는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에 힘든 줄 모르고 단숨에 뛰어 내려왔다.
19:00시경 추풍령휴게소에 도착하여 기다리는 동안 우선 간단한 식사를 하고 커피 한잔 마시고 있으니 태우와 함께 20:00시경 도착하여  대전으로 향했다.

    제16일                                                                        1999년  5월  1일  (토) 맑음

집에서 하루 휴식
집으로 오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김천에서 휴식하는 것보다 집에서 휴식을 하면서 잘못 챙겼던 장비도 바꾸고-  우선 제일 급선무가 등산화 교체다. 일찍이 자일산악으로 나가서 잘못구입한 등산화를 바꾸고 조끼도 망사로 구입했다.
결국 내가 집으로 오길 잘했다. 아니면 잘못구입한 등산화를 그냥 신고 고생 할번 안했나-  필요 없는 장비는 모두 내어놓고 배낭을 새로 꾸렸다.
어느새 박동현과 이석진씨가 와서 영양보충 시켜준다며 삽겹살 파티가 벌어졌다. 한참 시끌벅적하다가 모두 떠나고 나서 조용해지니 내일 다시 출발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해이해지려는 기분을 재정비하고 내일부터의 나머지 종주를 위해 신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기원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제17일                                                                         1999년  5월  2일  (일) 맑음
                                                                                          추풍령 07:00~큰재 17:30  [10.30]
추풍령 들목에 도착하여 집사람과 악수하고 돌아서서 금산으로 향하니 뒤에서 "화이팅" 하고 외친다. 손을 흔들어 주고, 자꾸 뒤로 돌아서려는 발걸음을 꾹 참고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렇게 짐을 덜어 내었는데도 배낭이 무겁다, 새로 구입해 신은 트랙스타 가이드gtx가 내 발에 잘 맞아주어야 할 텐데- 점보사 제품 중등산화(점보)는 무겁기는 해도 발이 편해서 이 등산화로 종주를 마치려 했는데 땀 발산이 되지를 않아서-  하루 밤 자고나도 신발 내부와 양말이 마르지를 않고 축축하다, 아침에 산뜻하게 출발이 되어야 하는데 축축한 양말과 신발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할 수 없이 트랙스타로 바꾸었다,
애써서 코팅해 놓은 1/50000지도를 전부 놔두고 월간 산[97년도 6,7월]발행 개념도와 설명서만 휴대하기로 하였다,
대간능선길이 너무 뚜렷하게 잘 나있어서 개념도만으로도 조금만 주의하면 무난할 것 같다,
20m보조자일도 놔두고 5m슬링을 갖고 왔다. 많은 종주자들이 길을 내었을 암능이면 5m짜리 슬링으로도 배낭을 달아 올리고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오리털 침낭도 놔두고 고어택스 침낭카바로 바꾸고 대신 겨울 내의 한 벌을 챙겼다, 정 추우면 배낭 속으로 하체를 넣기로 했다,
쌀은 잡곡을 넣지 않고[먼저는 찹쌀, 흑미] 순 맵쌀만으로 휴대했다, 특히 흑미가 코펠로는 밥이 잘 되지 않는다. 이 정도만 해도 부피와 무게가 먼저보다 많이 줄었다.
추풍령부터 큰재까지는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도 잡목과 잔솔밭으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묘함산 앞 차도를 내려오면서 젊었을 때 친구들과[재준, 고광] 어모면 도암동 묘함산 남쪽 기슭에서 고 박희범씨의 야산을 개간한다고 설쳐대던 때의 기억들이 생생히 떠오르는구나- 별 특징이 없는 잔솔밭 길을 계속 헤쳐 용문산 기도원을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면서 국수봉을 넘으니 곧 큰재다.



역시 1/50000코팅지도는 휴대 않기를 잘 한 것 같다.  출발하기 전 지도정치를 많이 했던 관계로 대충 앞에 산이 보이면 나침판과 개념도만으로 그 산이 어느 산인지를 확인하고 다음은 대간종주자들이 달아놓은 리번만 확인하고 따라가면 별 실수 없이 맞아 떨어진다. 
큰재 폐교된 (옥산초교)인성분교 앞마당 프라타나스 밑에 천막을 치고, 앞집 할머니 집으로 물 길러 갔더니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질 않으시다. 할머니께서 중얼중얼 무어라 하시는데 가만히 새겨들으니 어떤 대간종주자들이 폐를 끼치고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않고 도리어 물을 주지 않았다고 욕을 하였단다, 우리 대간종주자들은 절대로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5~6년전 대간종주 시절과는 이미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다.
오늘부터는 추위와도 싸워야 하고 침낭카바 만으로 지내야 한다.

    제18일                                                                       1999년  5월  3일  (월) 흐림
                                                                                         큰재 05:30~신의터재 19:30  [14]
일기예보에 오늘은 비가 온다기에 운행 중에 비를 맞고 걸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완전무장을 했다. 541.9고지로 잘못 올라 약 30분정도 허비하고 개터재를 지나 한참 가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
윗왕실에서 점심을 먹고 주인의 양해로 우사 옆에 천막을 쳤다가 비가 좀 뜸하기에 다시 거두어서 걷기 시작했다.
오바트라우져 안의 옷은 온통 땀으로 훔벅 젖은 채[541.9고지에서의 실수를 명심해라]비를 맞으며 행군을 하느냐? 중도에라도 야영을 해야 하느냐? 신중히 판단해야 되겠다.
다행히 가벼운 비여서 천만다행이기는 했어도 우의속의 옷은 온통 물투성이고 잠시라도 쉴라치면 금방체온이 떨어지기 때문에 쉴 수도 없었다.
간식을 먹을 수도 없고 나무에 리번을 부치는 작업도 할 수 없고 담배 한 모금 빨 수도 없이 계속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걷기만 해야 한다, 그저 리번만 확인하고 걷기만 할뿐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도 어렵다 두어 번 꺼내본 개념도는 이미 물에 젖어 휴지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시간은 오후 7시가 지났는데 신의터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빗속에서 차소리가 들린다. 이제 다 와가는 모양인가-  곧 도로가 보이고 마침 상주쪽에서 트럭이 한대 올라온다. 무조건 손을 들어 민박할 수 있는 마을까지 부탁하니 타란다. 모동에 가면 여관이 있으니 어떠하냔다. 자기는 모동에 살면서 가끔 등산객들을 보지만 오늘처럼 비까지 오는데 이 시간에 혼자서 가시는 분은 처음이란다.
그리고 이곳엔 큰 산이나 이름난 경승지도 없는데 요즘 등산객들이 이 방향으로 자주 오는 이유를 모르겠단다.
백두대간을 알기 쉽게 설명을 해드리니 그때서야 이해가 가시는지 대단한 일을 하신다며 경의를 표한다. 덕분에 늦게나마 여관에서 세탁도 하고 한기에 떨던 몸을 편히 녹일 수가 있었다.

    제19일                                                                        1999년  5월  4일  (화) 맑음
                                                                                         신의터재 08:20~화려재 17:30  [ 9.10]
신의터재에서 들목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상주쪽에서 온 시내버스에서 등산객이 한 사람 내린다. 그는 나를 불러 세우더니 같이 가자면서 신의터재 돌탑앞에서 사진 한 장 찍어 달란다, 하기야 오늘은 목표지점이 화령재이기 때문에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다. 나도 사진 한 장 찍고 싶은 참이라 쾌히 승낙하고 배낭을 벗어 놓았다.
나는 종주 중 거의 등산로에서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배낭을 벗어 놓고 기념물과 배낭뿐인 사진을 찍어 왔었는데 이번에도 또 배낭을 벗어 놓고 사진을 찍고 말았다. 사실 배낭이 무거워서 배낭을 메고는 활동이 불편하니 사진촬영도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한 사실-
걸으면서 수인사를 나누니 안양산악회 박순진(53세)씨로 나보다 먼저 지리산을 출발하여 대간종주를 하고 있는 중이란다, 이렇게 같은 목적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지점을 통과한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니 앞으로의 구간을 같이 하잔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형님으로 모시겠단다???
졸지에 아우가 한사람 생겼다. 나는 추풍령 전에 백중기씨와 2박3일을 같이 산행하며 나름대로 몇 가지 결론을 내린바 있었다,
나는 단독종주를 하기로 하고 출발 하였으니 끝까지 단독으로 진행 할 것과 만 부득이 같은 주자를 만나면 1박정도 같이하고 주행 중에는 별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의견도 들어보지 아니하고 나머지 여정을 같이 하자니 좀 무례한 것 같다.
같이 야영을 하다 헤어져 또 혼자이어야 하게 되면 더 외로워지기 싫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오늘은 같이 하기로 마음먹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비교적 고저가 없이 순탄한 등산로를 따라 쉽게 화령재에 도착하였다.





1km정도 서편으로 도로를 따라가 주유소에 같이 있는 작은 매점에서 몇 가지 부식들을 사갖고 돌아왔다. 
오늘 산행하면서 느낀 점은 산봉우리만 보고 거리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는 점, 산의 능선은 걸어가 보지 아니하고는 어떻게 휘여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는 것, 최소한 1/25000의 정밀지도로 정확히 판독을 해야 근사치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와중에도 리번 때문에 거의 길을 잃을 확률은 적다는 사실이다.
오늘은 화령재 건너편 봉화산 들머리에 있는 담배 건조장 옆에서 박순진씨와 나란히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하기로 했다,
박순진씨는 식사 후 집에 통화를 하고 모래 늘티에서 보급받기로 약속한다, 부러웁다.
016핸드폰은 1000m넘는 산정에서는 거의 통화가 불가, 그러나 011은 아주 깊은 계곡만 아니면 잘 터진다, 나는 016을 집에 놓아두고 왔다.

    제20일                                                                        1999년  5월  5일  (수) 맑음
                                                                                          화령재 07:00~피앗재 16:20  [9.20]
화령재를 출발하여 봉화산까지 비교적 쉽게 올랐다.
저 앞에 속리산 천황봉과 대궐터산 그리고 그사이의 갈령이 뚜렷이 보인다. 얼마나 자주 왔었고 또 보고 싶었던 산이던가? 꼭 집 뒤 동산에 온 기분이다.
비재 왼쪽이 굉장히 급경사다. 만수동까지 비포장도로가 보이는데 굉장한 오지란 것이 금방 느껴진다. 벌써 산세가 어제까지의 윤지미산과는 전혀 틀리다. 소나무도 죽죽 뻗어 올라 하늘을 덮었어도 그 밑은 시원하게 툭 터져 있다.
못제 조금 못미처 박순진씨를 따라 작은 암릉을 올랐다가 혼줄이 났다. 객기는 금물이다.
못제-  산 위에 늪지대같이 물이 고이는 곳을 말함. 지금은 건기라 습기가 바짝 말라있지만 물이 있을 때 쯤  다시 한 번 찾아 와보고 싶다.
이곳에서 등산겸 나물채취 하러 오신 4명의 혼성팀을 만났다, 우리의 차림을 보고 수고 한다기에 백두대간 종주이라고 하니깐 부러움 반 경외심 반으로 쳐다보며 무어 부족한 것 없느냐고 묻는다.
물, 물이 가장 부족하다니깐 자신들은 갈령으로 하산하니 마실 물만 남기고 전부 다 나누어 주신다. 
약 2리터의 물을 나누어 받고 기분이 좋다, 아주머니 한분은 과자 한 봉지를 나누어 주며 조심해서 꼭 성공하라며 격려를 해 주신다.
오늘은 북서풍으로 하늘도 맑고 시원하다. 만수동 북쪽능선 703고지 핼기장까지 주파하려 했으나 피앗재에서 갑자기 체력이 뚝 떨어져 이곳에서 야영키로 하고 박씨는 물 기르러 가고 나는 식사준비를 하였다. 웬일이냐?  내일 점심 먹을 밥까지 여유 있게 지은 밥인데 저녁 한 끼에 뚝딱 해치우다니-
나의 위는 이렇게 크지 아니한데? 체력이 떨어진 것일까? 병이 나려는 것인가?  은근히 겁이 난다.
박순진씨의 매주 보급품 지원이 부럽다.
그러나 중간 중간 보급품 지원은 시간과 노동력 낭비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박씨의 종주용 식사는 연구해 봄직하다. 미수가루 식[영양제만으로 조합]을 약 두 수푼 정도 물에 타서 마심으로 아침이나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군 비상식량? [쌀로 된 급냉건조식] 가루를 물에 타서 끓을 때까지 가열하다 끓기 시작하면 불을 끄고 10분쯤 불려서 먹는데 부럽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다, 후에 연구해볼 문제다.

 

   21                                                                        1999년  5  6  () 맑음
                                                                                         
피앗재 07:15~늘티 17:30  [10.15]
내가 문장대~밤재 구간의 산행시간을 잘못 계산한 관계로 박씨는 2 늘티에서 지원조와 만나기로 하고 05:30에 먼저 출발시켰다. 가족을 만나기에 들떠있는 사람과 같이 산행하기에는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
또 박씨는 지원을 받는 날은 따로 따로 산행 하자며 철저히 계산된 쑈맨슆 까지 발휘 했었다.
피앗재~천황봉 3시간 30, 천황봉~문장대 1시간 45, 문장대~늘티 5시간 도합 10시간이 걸렸다분명히 지난겨울 신성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문장대~밤재 구간을 답사 했는데, 도대체 이 구간에서 왜 그렇게 힘이 들고 시간이 걸렸을까원흉은 무거운 배낭이었다몇 번씩 무거운 배낭을 벗어서 슬링으로 달아 올리고, 내리고 개구멍을 기어가서 다시 배낭 끌어올리고 하니 배낭 다 닳겠다. 어려웠던 구간은 문장대에서 밤재로 가는 암릉구간이다
양옆에 꼽은 pet병은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져서 늘티에 가서는 새것으로 바꾸어야 되겠다.
지금까지의 산행으로 얻어진 또 하나의 교훈은 평상시의 당일 산행보다 속도는 1/4이 떨어지고, 체력은 1/4이 더 소모된다는 사실이다.
문장대에서 국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지 않았더라면 이 코스 통과하는데 고생 할 번했다. 중간에 울산에서 온 구간종주자(이 구간을 빠뜨렸음)한분 만나 토마토 두개를 나누어 받았다대간종주자들은 이심전심 통하는 모양이다.
천황봉~문장대 구간이 풀리면 신성산악회와 함께 한 번 더 와봐야 되겠다. 화북으로 내려와 박씨에게 전화를 하니 아들이 갤로퍼로 모시러 왔다. 여관에 오니 송어회로 저녁을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주어 오래 간만에 술 한 잔 곁드려 포식했다, 오늘은 어부인과 아드님이 지원 차 오셨단다.
오랫만에 더운물로 세탁을 하고, 샤워도 하고 따뜻한 온돌에 푹신한 잠자리를 깔고 누우니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22                                                                       1999년  5  7  () 맑음
                                                                                         
늘티 08:00~밀재 17:00  [9] 
아침에 일어나 근처 슈퍼에서 간식 외 몇 가지 보급품을 구입해 돌아오니 박씨 처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내방을 노크한다사연인즉 남편이 어제 저녁부터 계속된 설사로 탈진 상태여서 도저히 오늘 출발은 무리일 것 같으니 좀 말려달라는 것이다.
건너가 상황을 보니 도저히 불가하다. 수치심이나 자존심 같은 것은 접어두고 이삼일 요양 후 다시 출발 하도록 위로와 용기를 준 다음 아들에게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자존심에 상처입지 않도록 잘 배려해 드리도록 당부하고 박씨 내자가 해준 아침을 먹고 혼자서 출발하였다.
조항산까지 5시간, 조항산~밀재 구간이 산나물 천국 같다, 언제 다시 한 번 와 봐야지---,
밀재에서 또 혼자다. 떨어지면 외롭고 합치면 부담스럽고순진씨의 설사 분석- 그간의 첨단식사법[영양제 및 군 비상식]으로 조미료[매운맛, 짠맛 등]가 빠진 담백하고 양이 적은 식사로 위와 장이 길들여졌다가 점심도 거르고[지원조 상면 기대감으로] 달려가서 삽겹살에 고추장, 마늘, 풋고추등으로 포식을 했으니 장이 놀라서 설사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단식시 회복식할때처럼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하고 생각해 본다나의 장기는 어떠한가?  
이상 무---.







   
23                                                                        1999년  5  8   () 맑음
                                                                                          
밀재 06:30~은치재 19:15  [12.45]
비교적 일직 출발, 대야산 정상에 오르니 동쪽계곡에 아련히 가스가 차오른다. 속리산, 청화산, 조항산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 저 있다, 하산 길에 왼쪽으로 빠저야 한다는 것을 기억했는데도, 경관에 정신을 놔 버리고는 뻥 뚤린길[피아골쪽]로 내려서다가 다시 올라와야 했다.
곰넘이봉, 촛대봉, 대야산 코스는 몇 번이고 가 보고픈 코스다.
장성봉 오르기 전 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거의 다 오르던 중 장년부부 유산객들을 만나 삽겹살에 밥 한 그릇 뚝딱 해 치웠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간 내 등산상식에는 식사 후 바로 오르막을 오르면 굉장히 힘이 듦으로 쉬었다가 올라가거나, 아니면 아예 정상에 올라가서 식사해야 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다. 저 밑에서 라면을 끓여 먹은 지도 얼마 되지 아니 했는데 삽겹살과 밥 한 그릇을 얻어먹고 민망해서 바로 출발을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이상하다 모든 소화기관이 이런 상황에 알아서 기는 것일까? 힘이 펄펄 나서 단숨에 장성봉을 통과하고 막장봉 갈림길로 올라서서 악휘봉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역시 먹은 만큼 힘을 쓸 수 있구나! 생각하면서---.
악휘봉 8부 능선에서 우측으로 휘돌아 820고지를 내려서면서부터 화강암 슬랩과  바위 릿지등을 계속 내려가는데 우천시에는 위험할 것 같다,
은치재 야영장은 바람막이가 아주 잘되어 주어서 아늑한 분위기에서 야영을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부지런히 오게 된 데는 분명 한걸음 앞서간 백중기 화백을 만나서 기념사진 한 장 남겨 보려 했었는데 은치 마을로 하산했는지 지릅티재까지 달렸는지 흔적이 없다.
일기예보에는 내일 비가 온다기에 나도 은티로 내려설까 하다가 야영지가 아늑해서 그냥 천막을 쳤다봉암사계곡을 향해 무사 산행을 빌면서 잠자리에 들다.









   
24                                                                        1999년  5  9  () 맑음
                                                                                         
은티 07:00~백화산 18:00  [11]
오늘 비 예보는 잘못된 것일까
날씨가 쾌청하다.
구왕봉을 거쳐 희양산까지는 암산인데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는데 한시름 놓았다, 백중기씨의 족적이 앞서가고 있는 것 같다. 부지런히 걸으면 만날 수 있겠지---,
희양산까지 5시간 걸렸다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희양산 오름길에서 마지막 암봉을 오를 때 양팔을 이용해 뛰어오르다 가슴을 압박하게 되었는데 압박하는 순간 오른쪽 윗주머니에 넣어둔 라이타가 주머니 안에서 미끄러지면서 순전히 라이타 두께만큼의 간격이 주는 충격으로 굉장한 통증을 받았다.
옛 성터 삼거리(은티로 통함)를 지나 드디어 배너미 평전에 도착했다. 작년인가 신성산악회 멤버와 이만봉에 왔다가 이곳 배너미평전에서 길을 잃고 해매이던 기억 때문에 한번 실수했던 배너미평전의 지형을 잘 관찰하고 샘터를 찾아 식수를 보충하고 산행을 계속---,
이만봉, 곰틀봉, 973봉등 기억이 새롭다. 드디어 백화산[1063.5m]에 도착, 하늘이 잔뜩 흐려있다.
계속 야간산행으로 이화령까지 주파를 생각했었으나 다행히 큰 비소식이 아니기에 정상 헬기장에다 천막을 쳤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인지 중간에 두어 팀의 등산객을 만났었다, 어제는 장성봉에서 포식한 탓에 힘이 펄펄 이였었는데 오늘 오후부터는 또 체력이 뚝 떠러진다. 내일은 문경에서 푹 쉬어야 되겠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문경시의 야경은 역시 아름답다. 바람재에서의 김천의 야경보다는 못해도 산정에서의 야경은 항상 볼만한 별천지다.
오늘밤 하늘에는 별이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움이 있긴해도---.








    
25                                                                        1999년  5  10  () 맑음
                                                                                         
백화산 09:00~이화령 13:00  [4]
이화령까지만 가면 된다. 천천히 천막의 이슬을 말리고 출발, 황학산 지나 862 부터는 그야말로 능선이 분지 같은 기분이다. 참나무 숲 밑으로 잘 자란 수염풀[자작명]이 참 보기 좋다.
여기저기 사방이 풍성한 평지 풀밭이다. 문경시에서 이런 곳에 야영장과 공원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이화령 거의 다 와서부터 나타나는 낙엽송 솔밭은 어디서나 같이 사람의 모든 것을 평온하게 해준다. 고랭지 채소밭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계속 직진하여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마지막봉을 우회하여 이화령으로 하산 폐업을 준비 중인 휴게소 앞에서 공사장 작업차량을 얻어 타고 문경까지 내려와 약수장 여관에 배낭을 풀었다,
시장에 가서 5일분 주부식을 준비하고 오랫만에 곰탕 한 그릇에 소주도 한잔 죽---,
세탁과 샤워를 하니 온 몸이 나른해 진다만사여 안녕! 꿈 나라로---.




   
26                                                                         1999년  5  11  ()
                                                                                           
이화령 07:00~하늘재 19:00  [12]
이화령에서 조령3관문까지 7시간 소요, 정말 사람 죽이는 코스다. 기껏 5시간 예상했었는데 이곳에서 2시간을 더 허비하다니---,
신선암봉 지역의 연이어지는 암봉과 릿지를 너 댓 번 지나는데 완전히 지쳐버렸다.
조령관 휴계소에서 밥이 없다기에 파전[5000]을 하나 사 먹었는데 어찌나 크게 부쳐주셨는지 배가 꽉 찬다. 다시 힘을 내어 마패봉으로 올라갔다.
희양산에서 다친 가슴부위가 뜨끔거린다. 오른쪽 무릎도 아파온다. 온 전신이 아파오는 것 같은 기분에 몸살 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된다.
간신히 부봉의 암릉 코스를 우회하여 월향삼봉을 눈앞에 두고 순한 내리막을 터벅터벅 내려오며, 며칠사이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반성해본다.
간신히 야간 산행을 면하고 탠트를 치면서 오전에 이화령에서 만났던 두 젊은이가 나를 추월 했는지   쳐저 있는지 궁굼하다
이곳 하늘재는 경북쪽은 포장이 모두 끝났으나 국립공원 쪽은 자연생태계를 파괴한다고 반대해서 미륵리까지 비포장으로 잘 보호되어 있다.
식수는 이곳처럼 사시사철 풍부한곳도 드물 것이다내일은 조금 늦게 출발해도 되겠다.

 


 
 
  

    제27일                                                                         1999년  5월  12일  (수) 맑음
                                                                                          하늘재 08:00~눈물샘 17:20  [9.20]
바람목이라 안개가  잔득 끼어 텐트가 비를 흠벅 맞은 듯 축축하다.
오늘은 정말로 천천히 진행하여 눈물샘까지만 가야되겠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포암산을 올라보니 역시 좋은 산이다. 대부분의 명산이 그러하듯이, 우리 등산인들은 산에 들어서보면 시각적인 분위기도 중요하지만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우리를 압도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산도 예외가 아니다. 시각적이기 보다 그 산 전체의 분위기가[바위들, 죽죽 뻗은 소나무들, 등산로에서 한발작도 들어설 수 없는 숲 그리고 깊고 어두운 계곡] 훌륭한 명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산은 교통이 불편하여 생각보다 등산객이 많지 않다. 고만 고만한 능선을 거쳐 부리기재를 지나 대미산에 도착하는데 왜 그렇게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대미산 도착 전 1034봉 앞뒤의 능선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 북쪽에 용하구곡과 꾀꼬리봉이 있을 것 같으니 기회가 닿으면 한번쯤 더 와도 좋겠다.
눈물샘에 내려가 천막을 치고 누우니 만사휴의---.
행군 시 체력의 안배가 참으로 중요하다. 항상 그러하듯 오후 3시가 지나면 체력이 급격히 저하 되고 피로가 엄습한다.        ===힘[체력]의 안배===
밤새도록 골짜기 밑에서 꽥 꽥 멧되지 울음소리에 잠을 설쳤다.







     제28일                                                                        1999년  5월  13일  (목) 맑음
                                                                                          눈물샘 07:15~저수재 19:30  [12.15]
황장산 맷등바위 및 트레버스 지역은 대형배낭(25kg이상)을 짊어지고 걷기에는 참으로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구역이다. 계속 이어지는 릿지는 시야는 좋을지 모르겠으나 편안히 쉬면서 경치를 관망할 수 있는  장소로는 마땅치 않다.
패멕이재를 지나 벌재재 15:40에 도착, 벌재재는 너무 쓸쓸하다. 이상하게 야영장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할 수 없이 또 무리해서 저수재로 넘어갔다. 생각보다 마지막 구간이 여간 애를 먹이는 것이 아니다.
소백산목장으로 내려가는 도로를 지나 앞의 봉  헬기장까지 헉헉대며 오르니 예천 방면에서 올라오는 포장도로가 구불구불 산복울 타고 이어져 참으로 경관이 좋다.
휴게소에서 식사를 하고 뒤 공터에 양해를 얻어 천막을 치니 또 하루가 끝나간다.
식사는 짜장밥 뿐인데 하도 양이 많아서 다 먹은 후 종업원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산에서 내려오신 모든 분들이 몹시 허기저어 보여서 많이씩 주어오고 있단다.
이런 것도 이심전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마우신 분들이다. 결국 오늘도 또 무리했다.








     제29일                                                                        1999년  5월  14일  (금) 맑음
                                                                                          저수재 08:00~묘적령 17:30  [9.30]
꾀꼬리(?)는 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며 헤매는지---, 암놈이 어디로 갔는지? 아니지 꾀꼬리는 금실이 좋아 바람피우지 않는다지? 그러면 어느 한쪽이 천국으로 갔단 말인가?
아무리 미물이지만 떠난 님을 찾아 울며 헤매여선 무얼하나---, 애처러웁구나.
꾀꼬리는 울음소리와 색갈이 아름다운 새의 상징인데 깊은 밤에 울어대는 저 처량한 소리를 들으면 꾀꼬리의 아름답다는 이미지가 사라진다.
소쩍새(두견새)의 이미지는 새벽녁의 처량한 울음소리로 멀리 헤여저 있는 님을 그리워하는 상징성으로 어느 때 들어도 그리움의 나래를 펼 수 있는데 이 꾀꼬리는 어디서부터인가 종주 내내 따라 오며 울어대는 바람에 나에게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해준 반면 그 새의 울음소리가 아름답다는 상징성을 뭉개버리고 말았다.
출발해야 할 텐데 식당문이 열리지를 않는다. 어제 저녁에 식수를 받아 놓았어야 했는데 화장실문을 잠그지 않는다는 말만 믿고 식수를 준비하지 않았더니 전기 스위치를 꺼 놓아 급수탱크의 모터가 작동하지 않으니 물이 나올리 있나 9시나 되어야 출근을 한다는데-
할 수 없이 1km정도 떨어진 소백산 목장으로 가서 물을 받아 왔다. 콘도의 종업원이 친절하게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가도록 조치해주어 굉장히 고마웠다.
촛대봉을 지나 1033봉까지는 쉽게 왔다, 뱀재, 솔봉을 지나면서 나물채취꾼 서너팀을 만났다. 이들은 자기 들 이외에는 누가 옆을 지나가도 아는 체는 고사하고 인기척도 내지 않는다. 분명 저만치서 이들의 인기척을 느끼고 닥아 왔는데 근처에 도착하면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깜깜소식이다.
무슨 이유일까?  분명히 사람이 있었는데 근처에 와 보면 아무도 없으니 황당할 때가 가끔 있다. 그와 반대로 우리 등산동호인들은 서로 만나면 누구를 막론하고 먼저 보는 쪽이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있지 않나, 어찌되었던 얼마만의 인기척인가?
내가 묘적령에 막 천막을 치고 있는데 이화령에서 따라붙던 젊은이 두 분이 드디어 나타났다.
오늘은 묘적령에서 파티를 열게 생겼다. 오산에서 왔다는 이들은  97년에 지리산에서 이화령까지 종주를 마치고 이번에 마저 끝내려고 왔단다.
원래 3명이 한조 였었는데 한사람은 탈락하고 공석수,이주우 이들 둘이서 나머지 구간을 뛴단다. 이들(30대 후반)과 대화를 하면서 가만히 관찰을 해보니 힘과 활력의 행군이어서 부럽다,
그런대도 이들도 한사람씩 교대로 신체에 이상이 생긴단다. 조령산에서는 이군의 콘디션이 좋지 않아 조령관에서 야영을 했는데 오늘은 공군 몸에 이상이 있단다.
그런줄도 모르고 나는 이들이 나를 앞질러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들은 도리어 나더러 도데체 어르신께서 얼마나 빨리 가시는지 좀처럼 못 따라 붙겠더라며 오늘이나마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며 좋아한다.





     제30일                                                                        1999년  5월  15일  (토) 맑음
                                                                                           묘적령 07:30~죽령 11:30  [4]
오산 팀이 떠나고 나자 06:00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 한다. 소나기성이다.
나는 오늘 일정이 죽령까지이기 때문에 서두루지 않고 비가 멎기를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되었을까 누군가 옆으로 지나가는 인기척에 얼른 천막을 열고 내다보니 대간종주 차림의 등산객이 완전무장하고 저만치 벌재쪽으로 올라가고 있다. 서로 인사 못 건낸것이 아쉽다. 아직 남쪽으로 향하는 종주꾼은 한사람도 만나지 못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오산팀 이들은 아침부터 비를 흠씬 맞았겠다. 비가 뜸하기에 서둘러 천막을 걷고 죽령으로 향했다. 한참을 가다보니 누군가 매트래스를 떨어뜨렸다. 맽트를 가만히 보니 오산팀이 어제 사용하던 것이다. 그래도 하룻밤 인연이라고 그것을 주어 배낭뒤에 걸고 부지런히 따라 붙었다.
도솔봉에 올라서니 가라앉은 안개속으로 솔봉, 문봉재, 황장산이 뚜렷이 보인다. 도솔봉에서 죽령까지 사이에는 삼형제봉과 1286봉이 있는데 거의 사람의 진을 다 빼 버린다.
죽령에 도착해 확인해 보니 오산팀은 벌서 한시간전에 매표소를 통과 했단다, 공연시리 애써가며 여기까지 메고 왔군---.
휴게소 식당에서 한식부페(5000)로 점심을 먹고 단양으로 내려갔다.
단양은 몇 년 전에도 숙박 해본일이 있었지만 신단양이라는 명색이 무색하게 여관들이 규모가 작고 지저분하고 시설이 별로다.
시간이 충분해서 빨래방을 찾으니 없단다. 할 수 없이 그동안 땀에 찌든 옷들을 몽땅 세탁소에 맞기고 저녁때까지 해주도록 부탁했다. 죽령까지 가는 시내뻐스가 있다기에 승차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고 여관으로 돌아 왔다. (07:10 다리앞주차장)
준비한 6일분 주 부식을 차곡차곡 배낭을 꾸려놓고 내일은 대간의 중간지점인 소백산을 서에서 동으로 종주하는 꿈을 꾸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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