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슬픔들

 

★2005. 9. 3일 밤∼9. 4일 오후
★금북정맥: 운곡645도로-분골고개-차동고개-각흘고개-곡두고개

 

♠세상살이
토요일 오후에 홍성을 거쳐 청양을 가려고 홍성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려니 입석뿐입니다
"홍성까지 먼데 미리 예매하시지 그랬어요?"
"일기가 고르지 못해서 어제까지는 결정을 안한 상태였어."
"그래도 표는 예매했다가 만약 안 가게 되면 취소하면 되죠"
"그러면 정말 가야될 사람이 예매를 못하잖아."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게 사는 세상이 아니에요.'
아들녀석은 되려 어리숙하다고 말하고픈 표정으로 넌지시 충고합니다
약삭빠르게, 손해보지 말고, 남보다 나부터 챙겨야 살아남는 가혹한 세상에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어느새 적응을 끝냈나봅니다
"그렇구나, 요즘 세상은......"
잔뜩 찌푸린 하늘처럼 조금은 우울한 기분으로 집을 나섭니다
'그래도 난 내 방식대로 살고싶어.' 궁시렁 궁시렁......

 

♠할아버지?
화장실 칸의 쉼터에 돗자리 깔고 앉을 생각으로 휘이- 둘러보니 이미 여덟 가구에
계단도 다 소유권 등기가 되어있습니다
틈새를 비집고 객차 안으로 들어가 배낭을 올릴까? 그냥 바닥에 놓을까? 고민하며
서성이는데 아들 또래의 눈이 무척 맑은 젊은이가 보던 책을 접으며 일어나더니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 하며 자리를 권합니다
'내가 할아버지? 어린애도 아니고 젊은이가' 순간 망치로 맞은 듯 멍합니다
선뜻 앉기가 뭐해서 사양을 하니 자기는 천안에서 내린다고 굳이 배낭을 받아
선반에 올려줍니다
졸지에 앉아 가면서도 몸과 마음이 바늘방석입니다
'아직도 이팔청춘이라며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내게 이 무슨 날벼락인가?'
통로에는 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아줌마도 아저씨도 보입니다
무안함과 황당함을 달래려 지도와 산행기를 꺼내어 살펴보고 있는데
"잠시 후 우리 열차는 천안역에......"하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하며 내리는 젊은이의 작별 인사는 나를 두 번 죽입니다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해야 할까봅니다.

 

♠벌초지대
밤 여덟 시, 운곡의 645번 도로에 남루한 등산객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택시기사님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입니다
'도대체 이 야밤에 이름난 산도 없는 큰길가에서 무얼 하려고?????
준비를 마치고 들머리를 따라 제일 높아 보이는 말끔한 산소에 올라 돌아봐도
사방은 잡초 뿐 길이 없습니다
오늘도 역시 초반은 고난의 연속인 각본이 기다리나봅니다
개망초와 칡덩굴과 한삼덩굴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어우러진 구릉지대를
허우적대며 오직 앞으로!를 일념으로 전진하니 드디어 밭이 나오고 좀더 가니 드디어
산자락 숲 사이로 배시시 금북길이 웃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길로 들어섰다고 안심하기도 잠깐, 잡목 숲을 벗어나며 아주 좋은 길을
휘파람 불며 가다보니 마을로 내려갑니다
이 무슨 조화인가? 어쩐지 쉽게 풀린다 했더니......
벌초하느라고 여기저기 훤하게 뚫린 길들을 죄다 둘러보면서 표시기를 찾아도 헛일입니다
하긴 묘지 주변만이 아니고 들어오는 길목도 잔가지는 모두 사정없이 잘라버려서
표시기를 달았던 나무나 달만한 나무가 별로 없습니다
늦은 밤 표시기와 술레잡기를 하면서 망자를 위한 반 평도 안 되는 공간 때문에
유명을 달리한  나무들에게 삼가 슬픔에 찬 애도를 보냅니다

 

♠하얀 나비
가로등이 밝혀주는 분골고개를 도둑고양이 마냥 살그머니 건넙니다
마을이 멀지 않은 야산지대이므로 가끔 평지와 과수원도 지납니다
어둠 속에서 수정을 닮은 눈들이 투명하게 반짝이는 염소마을을 지납니다
시야가 제한된 밤이기에 접할 수 있는 쏠쏠한 길찾기 삼매경에 서서히 빠져듭니다
금자봉을 지나 오래된 소나무들이 마구 베어져 썩어 가는 벌목지대에서
대신 자리를 차지한 무성한 잡목을 헤치며 내 마음밭을 보는 듯 부끄럽습니다
유독 밤에는 두터운 껍질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아를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때론 '나는 누구인가?'란 단순하면서도 난해하기 그지없는 화두에서부터
백팔번뇌의 근원인 생로병사와 희로애락, 애별리고 등 범부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온갖 집착과 상념의 세계를 넘나듭니다  
오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가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이다가 '
산은 산일 뿐이요, 물은 물일뿐이다' 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로
혜안이 열린다는 길을 알지 못함이 어둠처럼 암울하고 슬픕니다
새벽녘, 곁길을 놓치고 임도로 얽힌 미로 속에서 종잡을 수 없음에 마냥 헤매던 길섶에
세상 근심일랑 아랑곳없이 풀잎에 매달려 곤히 잠든 하얀 나비는
육신의 길도 마음의 길도 막막한 나그네를 또다시 슬프게 합니다

 

♠봉분에서
여명이 밝아올 무렵, 행여나 하는 기대로 쉬면서 반시간을 기다려도
차동휴게소는 문을 열 기미가 없기에 극정봉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숲 속은 아직 어두워 불을 켰더니 엄지손가락만 한 민달팽이가 새벽산책을 즐기고 있습니다
만약 주의를 게을리하고 갔다면 애꿎은 민달팽이는
날마다 아침 이슬에 몸을 적시는 기쁨을 누리지 오늘로 마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밤새 사전 예고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철거해버린 수많은 거미집들과
무참히 밟아버린 가녀린 생명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 옛날 조상님들은 한 목숨이라도 더 살리려는 생명존중의 배려로 짚신을 신었다고들 하는데
딱딱한 등산화에 밟힌 곤충이나 풀들은 몹시도 나를 원망하며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좀더 주의하며 아침 산비둘기 울음이 오늘따라 서글픈 서낭당고개를 건너
기나긴 세월에 풍화되어 봉분의 흔적만 남은 곳에서 문득 배고픔이 발길을 잡습니다
전망은 좋은데 토질 때문에 속살이 훤히 드러난 귀퉁이에 자리를 폈습니다
"후손의 발길이 오래인 듯한데 드시고 섭섭함을 달래시지요."
떡 반 접시와 사과 한 개를 봉분 앞에 놓아 드리고 남은 떡과 사과로 허기를 달랩니다
저 멀리 산아래 골짜기에서는 솔바람을 타고 예초기 소리가 은은히 들려옵니다
"적적하시겠어요, 찾아주는 발길이 없어서......" 혼잣말을 건네 보지만
묻힌 자는 누구이고 묻은 자는 누구이며 묻는 자는 또 누구인지 아리송합니다
잠깐의 인연을 아쉬워하며 봉수산으로 향하는 걸음이 이리도 무거운 것은 아마도
슬픔은 떠난 자가 아닌 남은 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봉수산에서 각흘고개를 향해 ㅅ자 모양으로 꺾어 드는 장대한 산세의 마루금은
극정봉에서 바라봐도 아직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숨가쁜 오르내림은 수없이 반복되며 인내심과 체력의 바닥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벌목지대를 지나고 참나무에 밀려 소나무들이 꼭대기에만 모여있는 봉우리를 지납니다
인간들처럼 자연도 피할 수 없는 적자생존의 법칙에서 남는 종이 되기를 열망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시도하며
부단히 종족보존의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자연은 인간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감정적인 표현을 거부합니다
자연은 그저 현실에 충실하며 철저히 가식을 외면합니다
자연은 치장하지도 증오하지도 돌아서지도 않습니다
자연은 봉수산 허리를 가로지른 거대한 송전탑을 투덜대지 않습니다
자연은 나에게 왜 그리 힘들게 봉수산을 오르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헐떡이며 턱밑에서 쳐다본 봉수산에는 슬프도록 파란 하늘이 걸려있습니다

 

♠목탁소리
봉수산에서 각흘고개로 가는 길은 시골길을 닮았습니다
바람을 타고 은은히 들리는 봉곡사의 목탁소리가 청아하게 귓전을 울립니다
행여 놓칠세라 귀기울이며 완만한 내림길을 따라 강물이 되어봅니다
문득 11월 동안거에 계룡산 갑사의 대자암에서 3년 무문관에 들어가는 통칙스님이 떠오릅니다
4평 선방에 들어가면 문은 외부에서 잠기고 3년 동안을 하루 한 끼만으로 두문불출하며
목숨을 걸고 오직 깨달음을 위한 수행으로 처절하게 정진해야 합니다
만약 이 길의 끝에 그 문이 열려있다면 나도 기꺼이 그 문으로 들어서고 싶습니다
목탁소리 대신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로 살벌한 각흘고개를 건너 곡두고개 가는 길가에는
이질풀이며 키 작은 물봉선이 애잔하게 피어있습니다
저들이 저리도 아름다운 꽃을 피움이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함일진대
그 동안 저 야생초처럼 아무런 꽃도 향기도 소유하지 못했음이 문득 부끄럽습니다
꽃과 향기는커녕 탐진치에 물들어 온갖 악취를 뿜고 있음이 다만 슬플 뿐입니다

 

♠찰나의 인연
광덕산 삼거리에서 버섯을 따는 분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갈재고개를 건넙니다
646봉을 향하는 오름길에도 곡두고개를 내려가는 내림길에도 귀여운 도토리가 지천입니다
행여 밟을까 조심하며 3시에 곡두고개를 내려오니 광덕계곡의 물소리가 발길을 유혹합니다
시간도 넉넉하니 계곡물에 시원하게 발을 담그고 싶어 좌측으로 임도를 따라 걷다가
도토리를 주으러 온 아저씨와 동행이 되는 행운을 잡습니다
광덕리에 사신다는 아저씨와 두런두런 걷다가 갈림길에서 갈재고개 쪽으로 가신다기에
모처럼 길동무를 놓치기 싫어서 나도 따라갑니다
두 배쯤 더 돌아가는 길이지만 구수한 입담에 홀려서 지루함을 모릅니다
이렇게 임도를 내느라고 아까운 산을 다 버려놓았다고 아저씨는 한탄을 하십니다
전에는 등산로가 좋았는데 이제는 다 없어지고 임도로만 다니는 것이 싫다고 하십니다
어느새 갈재고개를 넘어오는 길과 만난 곳에서 씻기 좋은 장소를 가르쳐 주시고
이제 아쉬운 작별을 합니다
"산길 조심하고 다음에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요."
그렇게 찰나의 인연은 첩첩산중 물소리와 함께 슬픈 여운을 남기며 멀어집니다

 

                                       영혼을 산에 준 자유인/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