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25차 (25구간 : 댓재 ~ 백복령)



○ 산행일자 : 2007. 10. 13(토) 04:30 ~ 13:10 (8시간 40분)
○ 산행날씨 : 짙은 안개, 안개비
○ 참석인원 : 17명 (백두대간 회원 16명, 게스트 1명)
○ 산행거리 : 도상거리/ 27㎞       누적거리 : 530.6km
○ 산행코스 : 댓재-통골재-두타산-청옥산-고적대-갈미봉-1142.8봉(삼각점)...무릉계곡-백복령
○ 소 재 지 : 삼척시 미로면,하장면 / 정선군 임계면 / 동해시 삼화동,이기동,신흥동



1. 구간별 진행시간

① 접근

10/12 23:00           신복 로타리

10/13 04:05           댓재 도착

② 구간별 산행 시간

04:30            산행시작

05:52            통골재

06:40~48      두타산(1353m)

07:22            박달재

07:55~08:00  청옥산(1403m)

08:50~55      고적대(1354m)

09:55~10:10  갈미봉(1260m) / 점심

10:52~55      1142.8봉(삼각점)

11:30~40      전망바위 1

12:30~40      전망바위 2

12:55            무릉반석

13:30~14:00  복귀/무릉계곡~동해~백복령(780m)

③ 복귀

16:40            백복령 출발

21:20            신복 로타리 도착



2. 산행기록


이번 구간은 차갓재에서 저수령까지 이어가야 하지만
좋은 계절에 아름다운 두타-청옥구간을 가기로 일정을 조정한 터여서
내심 회원들과 게스트도 많이 참여할 줄 알았는데 구간이 너무 길어서인지
아니면 설악산으로 다 몰려서인지 회원도 많이 빠져 단촐한 17명이 전부다.
그동안 20명이 마지노선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백두대간 종주 3년동안은
주변 일들도 도와주고 때로는 초월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백두대간 선답자들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해 본다.

*   *   *   *   *   *   *

동해항이 내려다보이는 두타-청옥산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백두대간의
산 중에서도 경치가 수려하여 무릉계를 품은 백두대간의 미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조선시대 4대 명필 중의 한 사람인 양사언은 유독 금강산과 두타산에만
그의 글을 남겼을 정도로 두타산을 명산으로 꼽았다.

삼척부사를 지냈던 김효원은 그의 <두타산일기>에서
"금강산 다음으로 빼어난 산이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곳.
두타-청옥산은 동쪽으로는 전천(箭川), 즉 '살내'를 빚어
물줄기를 동해로 흘러 보내고 서쪽으로는 정선의 아우내, 아우라지의
골지천이 굽이굽이 정선 아리랑의 그 가락만큼 구성지게 휘어 돈다.

동해시와 정선군, 삼척시의 경계가 되는 고적대에서 보면
남동쪽으로 뻗은 대간 위로 가장 먼저 보이는 두개의 우뚝 솟은 봉우리가
청옥과 두타산이다. 피라밋 모양의 두타와 두리뭉실한 산세의 청옥을 두고
두타는 골(骨)산, 청옥은 육(肉)산이라 한다.

두 산은 나란히 이어져 있는 연봉으로, 청옥산이 두타산보다
51m가 높지만 두 산 전체를 가리킬 때는 두타산으로 부른다.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에는 두타만 보이고 청옥은 아예
거명조차 않을 정도로 청옥은 두타에 가려져 왔음이 분명하지만
여암 신경준의 산경표에는 청옥산과 두타산의 지명이 바뀌어 있고
요즘은 높이로 따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청옥-두타로 부르는 이도 많다.





(댓재 / 820m)


도중에 조금 가던 길을 되돌아 나와 새벽 4시경 댓재에 오르자
칠흑같은 새벽 안개 공기가 스산한데 불빛에 눈빨이 비친다.
벌써 백두대간 강원도 구간은 겨울에 들어선 것 같다.

424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댓재'는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특히 동쪽에서 올라가는 고갯길은
밑이 안보일 정도로 험한 지형으로 소문난 곳인데
삼척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루 세 번(07:30,13:30,16:30)
지나는 광동행 완행버스를 타고 댓재에 내리면 된다.
댓재 마루에 있는 휴게소에서 민박과 식사를 할 수도 있다.





(들머리에 있는 벤치는 쉬어가라 손짓하지만 우리는 갈길이 바쁘다)






(잠시 가쁜 숨을 되돌리고...)


새벽 어둠과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기도 어렵지만 햇댓등을 지나니
두타산이 지하에 있는지 길은 한없이 내리꽂다가 올라서길 반복한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잇는 6km 남짓한 산등성이는 거대한 횃대 같아
의가등(衣袈嶝 옷걸이 고개라는 뜻)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세월님들을 만난듯 반가운 시그널, 앞서간 님들의 발자취를 따라...)






(드디어 통골재, 여기서부터 두타산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햇댓등을 지나 얼마나 진행했을까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개가 짙다.
시그널이 간간이 보이지만 대간 시그널이 보이지 않아 판단이 안선다.
일단 골로 내려서지만 않으면 될 것같아 주위를 살피며 진행하는데
반가운 통골재 이정표가 나타났다.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되나
땀이 나지 않은 것으로 봐서 기온이 많이 내려간 것 같다.








(두타산 / 1353m)


정상에 오르자 커다란 무덤과 작은 바위들...
그 뒷쪽에 커다란 정상석이 안개속에 어렴풋이 보인다.
두타산군은 강원도 정선군과 동해시 삼척군에 걸쳐 있으며
1352.7m의 두타산과 1403.7m의 청옥산 그리고 1000m 이상의
중봉산과 망지봉 고적대 등이 하나의 산군을 형성한다.
두타산(1,353m)이라면 바늘에 실 가듯이 빼놓을 수 없는 동지가 있으니
다름 아닌 청옥산(1,404m)이다. 백두대간상에 약 4km 거리를 두고 있는
두타-청옥산은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두타산 정상에서 대간은 청옥산으로 이어지고 동해 쪽으로는
쉰움산으로 산줄기가 이어진다. 쉰움산은 오십정산(五十井山)으로도
불리는데 산정에 우물이 쉰 개나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쉰움산 아래에 있는 천은사는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제왕운기는 상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권은 중국의 반고로부터 금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사적을 7언시로 읊었고,
하권은 우리 나라의 역대 왕조를 2부로 나누어 5언시, 700자로 기록 한 것으로
하권의 단군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함께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중국 중심의 사관을 극복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일깨워준
중요한 사서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또 산성터 방향으로 신라때 축성한 두타산성터가 있는데
두타산성은 타원형으로 4.2km나 되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바로
침공할 수 없게되자 이기령으로 우회하여 연칠성령, 두타산의 뒤로 돌아
기습공격을 하는 바람에 5000명의 관군과 주민이 몰살당해
계곡이 피로 물들어 피내골, 맞은편 계곡을 피마른골,
삼화동 소를 피소라고 부른다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제는 청옥산으로..., 안개는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두타산 오르던 길로 직진하면 쉰음산과 두타산성터로 내려서고
청옥산은 좌측 정상석 뒤로 난 길로 마루금을 타고 박달령을 지나 이어간다.








(박달령 가는 길, 시계는 10m도 안되는 것 같다)


백두대간의 마루금만 따르다보면 산 속에서는 산이 보이지 않아
서 있는 곳이 어떤 산인지 얼마나 험한 고갯길인지 잘 모를 때가 많은데,
골산(骨山)인 두타산은 이웃한 청옥산과 더불어 그 수려함이 무릉계곡을 이룬다.
흔히 '무릉도원'이라 부르는 무릉계곡에는 크고 작은 폭포와 기암절벽, 눈이 시릴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자리한 드넓은 무릉반석은 이곳 산정에서는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일품인 무릉계곡, 동해, 청옥산 조망은 고사하고 10m 앞도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네 인생길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대간길을 걷는다.

두타산에서 이어지는 대간길은 급한 내리막길이다.





(길 옆에 늘어선 단풍나무들, 안개속에서 제 색깔을 다 드러내지 못해 아쉬운듯...)






(박달령이라고도 하는 박달재)


충북 제천에 있는 울고넘는 박달재와 같은 이름의 고개.
두타산에서 박달령 사이에 있는 골짜기가 박달골인데,
그 아래 박달폭포는 두 산 가운데 두타산에서 흘러온 물이
청옥산의 용추폭포에서 흘러온 물과 처음으로 만나는 합류지점으로,
이 곳에 2개의 폭포가 좌우에서 나란히 떨어져 쌍폭이라고 한다.
이 중 왼쪽에 있는 폭포가 바로 박달폭포로 수량은 많지 않지만
4단으로 꺾어지며 떨어지는 하얀 물살이 일품이라고 한다.





(구름은 짙어졌다 옅어졌다를 반복하지만 그게 그것이다)






(문바위가 인상적인 문바위재)


왼쪽의 문바위골로 댓재방향으로 곧바로 내려설 수 있다.








(문바위재를 지나자 여기는 완연한 가을풍경이다)


두타에서 청옥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은 원시림이 울창한데
벌써 가을을 지나고 있는듯 단풍과 낙엽이 정겹게 맞으니 호젓하기까지 하다.

명불허전(名不虛傳) !
역시, 아름다운 백두대간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





(학등, 오른쪽 학등능선으로 용추폭포로 내려설 수 있다)






(청옥산 / 1403.7m)


문바위재에서 청옥산 오르는 길도 제법 가파르다.
후미가 오는가 기다려도 오지않아 쉬엄쉬엄 오르니 청옥산이다.
청옥산 정상 조금 못 미친 곳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샘터가 있다는데
확인은 못했다. '푸른 옥'이란 이름을 가진 이 아름다운 산,
정상부근에 샘터까지 마련해 주고 있으니 과연 멋진 산이다.

늘 두타산에 가려 명함을 내밀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두타산보다 무려 51m나 높은 1403.7m
'녹색연합'은 '산경표'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근거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창지개명을 하면서 오기로 두 산의 지명을
바꾸어 버렸다"고 발표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무슨 열매 ?)






(청옥산 정상부근은 이미 늦가을 분위기다)


청옥산 정상에서 대간길은 오른쪽 연칠성령 쪽으로 내려선다.
아늑한 안부인 연칠성령은 무릉계곡에서 대간길로 들어 청옥산이나 고적대로
오르는 주 등산로이나 상당히 가파른 오름길이다.





(효심지극한 연칠성의 구전설화가 있는 연칠성령(連七星嶺), 일명 難出嶺)


청옥산을 오를 때 사진을 찍느라고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날 때 오른쪽 발 뒤꿈치쪽이 따끔했는데 그게 점점 정도가
심해져 복숭아뼈 안쪽 등산화와 닿은 부분에 통증이 느껴진다.
내림길은 좀 덜한데 오름길은 걷기가 제법 고통스럽다.





(이런 곳을 지날 때는 나그네가 되어야...)


이 땅에 마지막 남은 청정자연의 '곳간' 같은 곳.
일찍이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높은데 오르면 푸른 바다가 망망하고
골짜기에 들어가면 물과 돌이 아늑하니 실상 나라 안에서 경치가 제일이다'라고
감탄했던 이 곳 땅을 밟을 때는 등산객이 아니라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아직도 어느 골짜기를 뛰어다닐 것만 같은 사슴, 영기를 머금고
자라는 산삼과 약초와 송이, 명산 정기를 모아 방울방울 솟아나는 약수.
그런 장렬한 자연 앞에서는 경건해질 수 밖에 없다.





(망군대 조금 지난 곳 풍경)


고적대를 바라보며 비탈을 내려서고
연칠성령을 지나 볼록하니 솟은 바위봉은 망군대(望京臺).
한양의 임금을 향한 대(臺)라지만 고적대를 지척에 볼 수 있는 전망대.
그러나 다음에 다시 오라는듯 오늘은 구름으로 꼭꼭 숨겨 놓았다.





(태양을 만나면 한껏 끼를 발산하겠지!)






(고적대 오르는 암벽에서...)






(고적대 오르는 암릉길, 로프가 쳐져있지만 물기를 머금고 있어 조심스럽다)






(고적대 / 高積臺 1353.9m)


낟알이 붙은 볏단이나 보릿단을 쌓아 올린 더미같다해서 붙여진 고적대.
두타-청옥산군의 최고 망루역할을 하는 봉우리로 고적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대단히 감동적으로 날씨가 좋으면 무릉계곡은 물론 멀리 동해까지 운해로 덮혀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정선 아리랑의 고장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지만
어찌 달랑 한번 와서 모든 것을 다 보고 갈 수 있겠는가?
그건 욕심이고 두타-청옥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고적대는 백두대간 남쪽구간중 대가 붙은 3봉우리중 한 봉우리로
이곳 외에도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는 만복대(1431.4m)와
문경에서 운봉산이라고도 하는 문복대(1074m)가 있다

고적대는 동해, 삼척, 정선의 경계를 이룬다.





(마치 꽃잎을 뿌려 놓은듯...)






(고목은 이제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가을 산의 아름다운 모습은 맛만 보고 다시 잡목숲으로 든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힘겹게 잡목숲을 헤쳐 나가는데 위로 하는듯)






(고적대 삼거리)


조망없는 안개 속으로 이어지는 길, 이내 비탈을 다 내려니
철쭉과 싸리나무를 비롯한 잡목이 울창한 터널을 이루며 기다리고 있다.
자세를 낮춘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잡목 숲을 헤쳐 나가는데 나무에 배낭이 걸리고
스틱도 거추장스러울 정도. 키 큰 사람들은 이런 길 지나는 것이 제일 고역이다.
잔가지들을 헤치며 간신히 빠져나오니 나타난 고적대 삼거리 이정표.





(갈미봉 가는 길에... 이런 멋진 풍경이...)


갈미봉으로 가는 길은 평탄하려나 했는데 제법 오르내리는데다
길이 험하기까지 하다. 도중에 기암절벽과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볼거리가 많아 좋기는 하지만 청옥산 오를 때부터 아프던 발뒤꿈치가
오르막에서는 제법 통증이 심하게 느껴져 걷기가 불편하다.

도상거리 27km. 이제 반 정도 진행하여 아직 5~6시간은
더 가야 되는데 이대로 완주를 할 수 있을지 신경이 쓰인다.
조금 속도를 줄여 후미가 오기를 기다려 보지만
속도를 늦추니 이내 몸의 열이 식어 한기를 느낄 정도다.








(마루금을 타던 길이 자세를 낮추더니 허릿길 단풍나무 숲으로 이어간다)






(갈미봉 / 1278m)


후미는 많이 떨어진 것 같아 선두를 따라 바쁘게 오르니
갈미봉을 알리는 아크릴 판이 달려 있는 야트막한 봉우리에 올랐다.

9시 55분. 4시경에 아침을 먹었으니 점심먹을 때가 되었다.
선두를 만나 같이 식사를 할까했는데 발목에 통증이 심해 더 이상
선두를 쫓을 엄두도 안나고, 후미를 기다리기에는 날씨가 너무 싸늘하다.
할 수없이 대간들어 처음으로 외롭게 혼자 점심을 먹게 되었다.
대간가는 날은 아내가 더 신경쓰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고맙기 그지없다. 게눈 감추듯 식사를 끝내었는데도 춥다.
강원도 대간은 벌써 겨울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융단같은 낙엽길, 갈미봉에서 대간길은 2시방향이다)






(이 삼각점은? 1142.8봉 아닌가?)


점심을 먹고는 추워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내리막길을 걷다가 잠시 숲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잡목숲으로 들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선두가 지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고 시그널도
드문드문 보인다. 야트막한 오르막을 오르는데 발목 통증이 심하다.
봉우리에 올라서니 나타난 삼각점. 다시 지도을 확인하니 1142.8봉 아닌가?
대간길은 좌측 허릿길로도 가고, 이 봉우리를 올랐다가 다시 만나는데
난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이 봉우리로 오른 것이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아직 10km나 남았는데 무리를 해서는 안될 것 같다.
이기령까지는 내리막이니까 이기령에서 탈출 하기로 하자.

그런데..., 
좌측길로 들어서야 대간길과 만나는데 직진하여 능선으로 내려섰다.
저 아래 단풍나무 숲을 보고는 아무 생각도없이...





(이 아름다운 단풍숲에 홀려 대간길을 벗어나고 있었다)






(정말 장관이다. 일행들과 같이 볼 수 없음이 안타까울 정도로...)






(짙은 구름이 걷히며 때마침 햇살까지 비치니... 황홀하다)









(단풍숲이 끝날 즈음 정신을 차려보니...)


제 정신으로 돌아와 보니... 이 길은 대간길이 아니었다.
탈출할 이기령으로 가기 위해 대간길로 올라 서려는데 비탈이 엄두가 안난다.
지도를 펼쳐 현재 위치와 지형을 살피니 무릉계곡쪽으로 능선이 흘러 내린다.
지도에는 등산로가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길도 제법 뚜렷하다.
그럼 이기령까지 갈 것없이 이 길로 탈출을 하자.
핸드폰을 켰는데 안테나가 뜨지 않는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멋진 적송이 반기는 조망바위에서)


30여 분 구름과 숲이 커튼을 친듯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숲
급비탈을 정신없이 내려섰다. 하긴 무릉계곡까지 1000m 이상의 고도차가 나니
어느 정도 비탈은 예상했지만 곤두선 비탈은 가만히 서 있어도 저절로
미끌어져 내려간다. 내림길에서는 통증이 덜해 다행이었다.
얼마나 내려섰을까 아름다운 적송들이 줄서서 반기고
앞산이 보이기 시작하는 곳에 좋은 전망바위가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닌가?





(저 아래가 무릉계곡)


두타-청옥이 빚은 이십리가 넘는 골
신선의 세계가 열린다는 곳, 무릉계곡!
아하! 갈미봉부터 백복령까지 땜빵할 때 하더라도
무릉계곡으로 내려 설 수 있다니 이건 전화위복이고 순전한 덤이다.

조선 전기의 4대 명필가 중의 한 사람인 양사언은
"여기는 신선이 노닐던 이 세상의 별천지라
물과 돌이 부둥켜서 잉태한 오묘한 대자연에서
잠시 세속의 탐욕을 버리니 수행의 길 열리네"
라는 글을 남겼는데 무릉계곡에 서 있으면 양사언이
왜 이런 글귀를 남길 수 밖에 없었는지 알듯하다.





(저 아래는 동해시 삼화동, )






(앞쪽으로는 수십길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비 맞은 가을꽃 쑥부쟁이도 청초한 모습으로 가을을 보내고 있다)






(다시 한 참을 내려오니 관음암 입구 갈림길)









(무릉계곡)


두타산과 청옥산이 빚은 절경으로 기암절벽과 천연림,
폭포와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한데 어우러진 곳이 바로 무릉계곡이다.
옛날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겼는데 그 흔적이
바로 양사언을 비롯한 수많은 선비들이 남긴 무릉 반석의 석각이다.
무릉반석도 절경이고 양사언의 석각도 명필이지만,
박달골과 사원골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살내'란 이름으로
동해로 흘러가듯 이곳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서려있다.

두타산 중턱에는 신라 파사왕 23년 서기 100년에 쌓았다는
두타산성이 있는데, 조선 태조 14년 1414년에 삼척부사 김익손이
대대적으로 중건해 그로부터 180년 후인 임진왜란 당시 강릉 삼척일대의
의병들이 이곳에 집결해 최후의 항전을 벌이던 곳. 임진년 7월 강릉을 점령한
왜병이 난공불락의 두타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사람을 잡아다가 갖은 협박끝에
산성을 오르는 뒷길을 알아내고는 접근이 어려운 무릉계를 버리고
백두대간을 따라 두타산 정상 쪽에서 내려와 산성을 공격하게 되니
무릉계곡을 굳게 방어하던 의병들은 예상밖의 공격을 받고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고 한다.

피내골 절벽에서 3일간의 항전을 벌였으나
끝내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해 계곡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피내골'이란 지명이 생겼고, 피내골 핏물은 삼화동 소까지
흘러내려서 이 소를 '피소' 또는 '피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당시 의병들이 쏜 화살이 수없이 떠내려 와 원래 박곡천,
북평천이라 부르던 개울 이름이 '살내(箭川)'로 불리게 되었다.

또 가슴아픈 민족상잔 6.25때는
인민군 피복창이 들어섰는데 미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또 다시 계곡에 피 비린내가 진동하였다고 하니
눈이 시리도록 푸른 저 물빛이 민족의 아픈 역사를
품고 흐르는 한 맺힌 슬픔일 줄이야.








(토요일 오후 가족단위 산객들이 용추폭포 방향으로 오르고 있다)






(무릉반석)


무릉계곡에 들어 입구에서 먼저 만나는 무릉반석에는
수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신선경에 감탄한 감흥의 글들이 새겨져 있다.
무릉반석 옆에는 한일합병 당시 지역의 유림들이 조직한 금란계라는
모임을 기리기 위한 금란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두타-청옥산 일원은 궁예시대부터 새 세상을 그리던 이들이
몸을 숨긴 채 때를 기다렸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武陵仙院 中坮泉石 頭陀洞天)


무릉계곡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조선시대 명필 양사언이 이곳의 절경에 감탄해 무릉반석에
"武陵仙院 中坮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 이라고
쓰면서부터 무릉계곡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무릉반석에 새겨진 기념명자의 석각은 선조들의 풍류를 보는 듯하다.

또, 이조 중기의 학자 유한전은 정조 때 삼척부사를 지내던 당시
무릉계곡 용추폭포 용추소 벼랑에 '龍湫(용추)' 라는
이름을 지어 새겨 놓았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동해출신 최인희 시인의 시비 "낙조")


落 照

소복이 산마루에는 햇빛만 솟아 오른듯이
솔들의 푸른빛이 잠자고 있다

골을 따라 산길로 더듬어 오르면
나와 더불어 벗할 친구도 없고

묵중히 서서 세월 지키는 느티나무랑
운무도 서렸다 녹아진 바위의 아래위로
은은히 흔들며
새어오는 범종소리

白石이 씻겨가는 시낼랑 뒤로흘려 보내고
고개 넘어 낡은 단청
山門은 트였는데

천념묵은 기왓장은
푸르른 채 어둡나니


※ 최 인희(崔 寅熙 1926.12.29 ~ 1958.8.31)





(백복령, 오늘 산행의 날머리)


무릉반석을 거쳐 무릉계곡 입구 주차장으로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동해시로 나왔다가, 다시 택시를 타고 백복령으로 향했다.
꼬불꼬물한 길로 백복령에 오르니 대기하고 있는 버스가 반갑다.
1시간 정도면 선두가 도착할 것 같다.





(백복령 / 780m, 산경표에는 百福嶺, 현지 안내판 돌기둥에는 百卜嶺)


백복령은 백두대간 너머 첩첩산중에 파묻힌 임계와 정선을 잇는 큰 고개.
동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백복령을 경유 임계까지 하루 2회(05:50, 16:40 출발)
버스가 지난다. 간간이 차들이 지나가지만 역시 대중교통으로는
연결이 어려운 곳이다. 동해시에서 택시비 3만원.

옛날 무거운 소금가마를 지고 끝없이 오르는 이 험준한 고개를
넘었을 민초들을 생각하니 편하게 오른 것 같아 송구스런 마음

백복령에서도 보려고 하는 동해는 아직도 구름에 쌓여 보이지 않는데
저 발치에 꼭 벌레가 파먹어 신음하는 자병산 줄기가
볼썽 사나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저녁먹으러 들린 식당 앞 바다, 동해는 언제나 가슴이 탁 트이게 한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타다가 다시 낮아질대로 낮아진 바닷가에서
출렁대는 파도와 소금기 실려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더 없이 상쾌하다.





(조금은 별스런 식당)


바닷가에 정취도 있고 기사님이 추천하여 들린 곳.
생선회와 매운탕을 시켰는데 식사가 끝나도록 회가 나오지 않는다.
주인한테 확인하였더니... 주인아저씨가 술이 거나한 상태에서 주문을
받는 바람에 그만 회는 빠뜨리고 매운탕만 준비를 시켰다고 한다.
매운탕. 울산에서는 회 시키면 딸려 나오는게 매운탕인데...
거참!, 다시 시켜먹고 갈 수도 없고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기는 했지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기전부터 와 보고 싶었던 두타-청옥산 구간.
미루어 좋은 계절 대간길에서 만났지만 비경은 안개로 꼭꼭 숨겨 버린데다,
백복령까지 다 가지 못하고 도중에 탈출을 하고 말았으니...
그렇다. 두타-청옥이 어디가는 것도 아니기에 무리하지 않고
도중에 탈출한 것도 잘한 것 같고, 탈출도 생각지않은
선경 무릉계곡으로 했으니 그 또한 덤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라도 다시 오게 만드는가 싶다.


다음에는 댓재에서 다시 시작할까 아니 백복령에서
고적대까지 남진하여 무릉계곡으로 내려서 무릉선경을
거닐어 볼까? 행복한 고민아닌 고민을 해 본다.
우선은 발뒤꿈 치료부터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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