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구간

호남정맥

산행일

오도치~봉화산~봇재

(16km, 6시간)

2008년 6월 6일

 맑음


 

  <산행기록>

  오도치-대룡산-그럭재-배각산-봉화산-봇재

   11:20   12:50   13:45   14:35    15:20 17:20


 

 소리와 녹차의 고장 보성땅


 

  호남정맥 여덟 번째 산행을 간다. 오늘은 지난번 산행을 끝냈던 오도치에서 봇재까지 도상거리 16km이다. 더불어 이틀 연속산행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시간계산을 해 보자. 요즘의 해지는 시간이 저녁 7시쯤이니 6시까지 산행을 끝내기로 한다면 산행시간은 16km이니까 7시간으로 잡고, 오전 11시쯤에는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포천에서 오도치까지 이동하는데 자동차로 7시간정도 소요되므로 집에서 출발하는 시간은 새벽 4시다. 이틀치 물과 식량을 준비하고 출발한다.

  “산행도 여행이다”라는 생각이 없다면 이동하기도 쉽지 않은 7시간을 또 간다. 그래도 오늘은 잠을 자고 낮에 이동하므로 지루함은 덜하다. 산천을 구경하며 달리기 때문이다.

  11:20

  오도치는 커다란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주차공간이 따로 없어서 자동차를 길가에 바짝 붙인다. 고개를 지나다니는 차량은 뜸하고 오전 햇살이 따갑다. 예정보다 20분 늦게 산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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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치>

  아까 오도치로 올라오면서 보았던 보리밭이 퍽 인상 깊게 남았다. 어릴 적에는 겨울에 보리를 밟으러 학교에서 단체로 보리밭으로 달려가곤 하였는데 근래에는 보리를 재배하는 곳이 없어 볼 수가 없던 것을 이곳 전라도 땅에서 넓은 보리밭의 모습을 본 것이다.

  유럽 풍토에 맞는 곡종이 밀이라면 한반도의 풍토에 알맞은 곡종은 보리요, 벼는 일년내내 더워야 하는 열대지방에 알맞은 곡종이다. 우리 조상들이 알맞은 보리농사보다 알맞지 않은 벼농사를 선택하고 그렇게 힘겨이 지어내린 것은 쌀이 보리에 비해 단위 면적당 소출량이 많기 때문이고 좁은 땅에서 많은 사람이 살아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노릇이었다. 그런데다가 보리는 밥맛도 떨어지고 먹고 나면 쉽게 배가 꺼져서 쌀에 비하여 이미지가 나빠졌으므로 괄시하고 천대하던 곡종이기도 하다.

  즉,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을 보리범벅이라 하고 싱겁고 재미없는 사람을 보리죽에 물탄 것 같다 하며 어울리지 못하고 따돌림 당하는 사람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라고 하는가 하면  몹시 후려 패는 것을 보리타작한다 하였다. 꽁보리밥, 보리떡, 보리죽 하면 극빈의 상징이 되어 그런 것이 향수속의 풍광으로 남아 있었으니 반갑기만 했을까.

 

  능선으로 올라서니 보성군 득량면의 들판이 내려다보이고 크고 작은 봉우리들 사이로 득량만의 푸른 바다가 아련하게 보인다. 호남정맥은 보성군을 남서방향으로 지나면서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구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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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면의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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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운>

  벼와 같이 까끄라기(芒)가 있는 씨앗을 파종하는 날이라는 망종(芒種)이 어제이고 본격적인 여름의 문턱에 이르고 있는 6월 초순이다. 대룡산으로 향하는 산길에는 예쁜 꽃들이 활짝 피어 산행객을 반긴다. 간혹 바람이 이는 능선은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뭉게구름이 하늘을 덮기도 한다. 적운이라고도 하는 뭉게구름은 보통 맑은 날 오전에 발생한다. 태양에 의해 데워진 지면이나 해수면의 열이 그 위에 있는 습한 공기를 상승시켜 뭉게뭉게 만들기 때문인데 산행에는 안성맞춤인 날씨가 된다.

 

  12:50

  오도치에서 이어지는 산길은 1시간 30분쯤 지나자 대룡산 갈림길에 이르고 5분 거리의 대룡산 정상(440m)에 닿는다. 정상석과 하나의 시비가 서 있다. 어느 가문의 후손이 세운 듯한 비룡등천의 시비에는 “명당에 선조를 모셨으니 구룡이 승천하겠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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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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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산에서 본 보성읍 방향>

  비룡등천 시비의 뒤편에는 대룡산을 예찬하는 시가 새겨져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노령의 동남 끝에 비룡하는 산이여 조계와 백운까지 힘차게 벋었어라. 유경의 계곡에서 흐르는 한 방울 물은 온누리의 생명 빛과 힘과 소리의 근원이어라. 중생은 인연소기건만 불변하는 푸른 정기 천고의 정적속에 호연지기를 배우던 소망은 다시 정상에 올라 장엄하고 너그러운 모습 앞에 머리를 숙인다. 용지에서 솟아 날아라 용문을 향해 솟구쳐라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네 품에 안기리니 아! 내 혼이 쉼을 얻을 영원한 산이여!”

 

  대룡산에서 내려와 다시 정맥을 이어간다. 방향은 남쪽으로 틀어 그럭재로 향하는데 숲을 벗어나니 봇재로 향하는 산줄기가 선명히 드러난다. 그 옆에는 보성읍에서 봇재로 향하는 18번 국도가 나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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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재로 향하는 산줄기>

  13:45

  그럭재가 내려다보이는 능선에 닿는다. 보성에서 순천으로 향하는 2번 국도가 지나는 그럭재는 이 지방사람들이 기러기재라고 부르는 곳이다. 기러기가 공중을 날아다니다가 편평한 모래펄에 맵시있게 내려앉은 '평사낙안(平沙落雁)'의 모습이어서일까. 아니면 두 다리를 바짝 뒤로 모으고 높은 하늘을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행렬의 낭만적인 정취를 담아서일까. 보성군청의 홈페이지에는 지역의 지명유래가 나와 있지 않아서 기러기재의 유래를 알 수가 없다.

  도로에 내려서기 전에 밭두렁에는 개망초가 군락지를 이루고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다. 잔풀꽃이라고 부르는 국화과의 두해살이풀 중에는 망초라는 꽃이 있는데 북아메리카에서 귀화하여 우리나라 전역에서 핀다. 개망초는 망초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개’자를 붙여 부르는데 사실 망초와는 많이 달라서 꽃이 큰 편이다. 무엇이 망초보다 못하여 붙은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의 들판을 새하얗게 만드는 개망초는 계란 프라이를 해놓은 것 같다해서 ‘계란꽃’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개망초도 망초와 함께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꽃인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전국에 퍼져서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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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

  그럭재는 오른쪽 아래편으로 지하통로가 있어서 돌아가야 안전한 곳인데 차가 오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횡단한다. 둘러가기 싫어서 고속으로 달리는 차를 피하여 도로를 횡단하는 것을 생각하면 나도 양반되기는 틀린 모양이다.

  절개지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길가 한 쪽에 대룡산과 봉화산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서 있다. 봉화산까지 4.6km라고 하니 2시간 거리는 될 것이다. 절개지 위의 능선상에서 잠시 휴식한다. 그럭재 아래의 휴게소도 내려다보이고 오도치에서부터 지나온 능선이 하늘금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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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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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재를 지나는 2번국도>

  능선에서 잠시 휴식한 후 출발한다. 봉화산을 향하여 선명한 능선 길을 달리는 것이다. 측백나무 숲을 지나고 송신탑을 지나 여유있는 산길을 이어가는데 오후의 햇살은 따갑게 내리쬔다. 어느새 6월의 햇살은 여름의 그것과 맞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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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백나무 숲>

  능선상에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애도하는 무덤이 있는가 하면 돌보지 않은 채 방치된 무덤도 보인다. 못되면 팔자 탓, 못살면 조상 탓, 패가하면 무덤 탓... 그래서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고도 한다는데 우리나라의 남도잡가에도 내 탓이 아니라는 핑계노래가 있다.

  “엄마엄마 추야장 긴긴 밤에/실꾸리나 감을 일이지/날 만들어 놓고/이리 고생 다 시키시오” 하고 고생하는 딸이 낳아준 엄마 탓을 하자, 엄마는 “추야장 긴긴 밤에 네아배 기어들어 너를 만들었지 내가 만들었나” 한다. “아배아배 추야장 긴긴 밤에/멧방석이나 만들 일이지/날 만들어 놓고/이리 고생 다 시키시오” 하자 “북망산 조상들이 제삿밥 못먹을까 싶어 아들 하나 낳으라고 해서 네가 생겨났지 내가 만들고 싶어 만들었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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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각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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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면 풍경>

 

  15:20

  그럭재를 출발한 지 1시간 30분쯤 지나자 봉화산 정상(475m)에 닿는다. 정상에는 보성군에서 세운 봉화대 복원기념비와 함께 시인 안도현이 쓴 “봉화산”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새천년 하늘에/우뚝 봉화대 서니

 이 산 모롱이/해맑은 빛살 받아/늘푸른 차나무 켜켜이 서고

 강강수월래/그 봉화 올리던 밤/겨레 함성이 밀물져 오면

 섬진 샛강이 흐르는/내고장 시절도 좋을시구

 머루 다래랑 멧새 기르며/청대같이 꿋꿋한/보성의 넋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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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기념비>

  봉화산 봉화대는 왜적의 침투상황을 급히 전달하기 위한 군사적 통신수단으로 고려 공민왕(1352~1374)때 현재의 규모로 축조되었다. 동으로는 고흥 장기산, 서로는 장흥 천관산.억불산, 서남으로는 직봉인 회천 전일산 봉화대와 상응하여 보성군 관아에 직결된 봉화대로서 봉화에 따라 출전명령이 내려져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호국의 얼이 서린 봉화대였다. 그러나 조선조 고종 32년(1895년) 전국의 봉화대 폐지에 따라 이 곳 봉화산 봉화대도 폐지되었으며 100여 년이 넘게 방치되어 있던 것을 보성문화원을 중심으로 봉화대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새천년을 맞아 복원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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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봉수대>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시원스럽다. 득량만과 득량면의 넓은 들판이 내려보이는가 하면 보성읍도 잘 보인다. 정상에서 휴식한 후 곧장 남서쪽 능선을 이어간다. 저 멀리 이동통신 안테나가 보이기 때문에 방향을 잡는 것도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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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통신 안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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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통신 안테나가 있는 산불감시초소>

  산불감시초소를 지나간다. 주위에는 의자가 준비되어 있으나 따가운 햇살에 그늘이 없어서 쉴 수는 없겠다.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진행하니 남쪽으로 조망이 트이면서 차밭이 드러난다. 득량만의 바다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와 있고 산행의 종착지인 봇재도 멀지 않다.

  “술을 즐기는 백성은 망하고 차를 즐기는 백성은 흥한다.”며 차 마시기를 즐겨 호조차 다산으로 지었던 정약용의 말이다. 백성을 흥하게 한다는 이 차의 원료가 되는 찻잎을 따내는 차나무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규모로 재배하는 곳이 바로 보성군인데 호남정맥에서 처음으로 차밭을 만나는 순간이다.

  이곳 보성읍 봉산리 일대는 자연 조건이 차를 재배하기에 알맞아 식민지 시대부터 대규모로 차밭이 만들어졌던 곳이다. 차나무는 날씨가 따뜻하고 강수량이 1500mm가 넘어야 잘 자라는데 이곳은 강우량이 좀 모자라지만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교차되는 터라 아침과 저녁에 안개가 많아 보충을 해준다.

  이곳의 차밭은 1941년에 일본인이 야산 30정보를 개간하고 인도산 베니호마레 종 차나무를 심으면서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해방이 되면서 12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1957년에 대한다업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이 차밭을 사들여 경영하면서 1962년부터 홍차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후 다른 회사도 들어와 차밭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1969년에 전라남도가 녹차생산을 농특산업으로 지정하고 일본산 개량 차나무를 많이 심으면서 차밭은 더욱 넓어져 우리나라 최대 차 산지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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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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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무>

  차밭을 구경하면서 능선을 따라간다. 능선에는 이동통신 중계기가 있는 곳에서부터 임도가 설치되어 있어서 이정표가 있는 임도사거리까지 불편 없이 이어간다. 잠시 후에는 노산마을과 화죽리를 잇는 고개에 닿고 이곳에서 봇재를 향하는 능선으로 방향을 잡아 가는데 남쪽 능선의 사면에는 차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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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 사거리>

  봇재가 멀리 않은 능선길은 뚜렷하게 좌우를 갈라놓았다. 능선의 왼쪽은 바다가 보이는 해안지방이고 오른쪽은 보성읍이 있는 내륙지방이다. 정맥은 지방을 나누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삶의 방식까지 나누는 기준이 된다. 작은 안부를 지나는데 나무에는 안내문이 하나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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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양골재>

  “여기가 재양골재입니다. 버스가 천포지방에 다니기 전에는 화죽리, 천포리, 서당리, 객산리 사람들이 보성장에 가거나 광주 순천에 기차를 타려고 할 때 여자들은 짐을 머리에 이고 남자들은 등에 짊어지고 이 재를 넘었습니다. 유학을 하는 학생들은 자취를 하기 위해 또는 하숙집에 쌀을 주기 위해 끙끙대며 땀을 흘리며 넘어야 했습니다. 장에 갔던 사람들이 막걸리를 거나하게 먹고 한가락을 뽑으며 넘거나 소를 몰고 가거나 또 늦게까지 오지 않는 가족이 있는 집에서는 석유등을 들고 마중을 오기도 했지요. 이곳 사람들에게는 애환이 깃든 고개랍니다. 몇 십 년은 이렇게 사람들의 줄이 끊임이 없이 이어졌답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 장에 갔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다리며 고갯마루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추억이 있다. 맛있는 것을 사 오시기 때문이다. 시골의 작은 고개를 넘어 오시는 그분들의 십리길도 힘들고 어려웠겠지만 해안지방에서 내륙의 보성으로 가기 위하여 넘어야 했던 호남정맥의 고갯길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힘든 고개였을지 짐작이 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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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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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봉우리>


   17:20

  해발 210m의 봇재에 내려선다. 왼쪽에는 주유소가 보이고 건너편을 올라서니 봇재소공원이라고 음각된 바윗돌이 고갯마루에 세워져 있다. 18번국도가 보성과 회천의 바닷길을 따라 장흥군과 이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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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번국도가 지나는 봇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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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재소공원>

  지나가는 택시를 세워서 타고 오도치로 돌아간다. 길가의 다원 주차장에는 차밭을 구경하러 온 자동차 행렬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다. 택시 기사님의 말씀으로는 지금은 구경오는 관광객이 줄어들었단다. 처음에는 봇재로 향하는 자동차 행렬이 엄청난 정체를 빗기도 하여 불편이 많았는데 그 바람에 도로를 4차선으로 넓히는 공사가 시작되어 이제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

  오도치에서 자동차를 타고 보성읍으로 들어간다. 시내를 몇 바퀴를 돌아 사우나를 찾아 샤워를 하고 저녁을 해결한 후에 봇재로 돌아간다. 아까 산행을 끝낸 후에는 보지 못했던 차밭의 풍경을 만난다. 봇재가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므로 보성의 차밭은 마음속의 그림일 뿐이었는데 이제야 뚜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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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재에서 보는 차밭>

  해가 지면서 어둠이 내린다. 다원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잘 준비를 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긴 20km의 여정이 준비되어 있으므로. 넓디넓은 다원의 주차장은 그 많던 차량이 빠져나가고 주위는 정적 속에 잠겨든다.<2008.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