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비님이 오셔서 산행한 분들께는 편치 않은 마음이 늘 있었다. 그러나 오늘 하늘을 보니 근래 보기 드물게 별이 총총하고 그 밝기가 아주 선명하다.
버스가 삽당령에 도착하였다. 지난주에 길을 잘못 들은 4명은 마루금을 다시 밟기 위해서 반대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백두대간을 하시는 분들께는 마루금의 의미가 아주 크다. 행여 길을 잘못 들어서 엉뚱한 곳으로 갔다거나 작은 내를 건너도 그날의 산행자체를 무의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삽당령의 바람은 매우 차가웠다. 반팔? 긴팔? 고민하다가 조금 오르다보면 괜찮아 지겠지 하고 반소매로 나섰다. 언제부터인가 가을은 우리주변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고 더욱이 이곳은 산속이니 더 무엇을 논하랴! 짧디 짧은 계절이니 만큼 하루하루가 아쉬울 뿐이다. 4시40분 반대방향으로 가신 분들이 도착할 무렵 나머지 일행은 백복령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난 선두에 서서 어두움을 밀어내고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 시작했다. 물먹은 길은 미끄러웠고 숨은 턱에 걸려서 안절부절못하는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언덕을 넘었다 싶었는데 이내 내리막길은 아주 좋았는데 표시기가 하나도 안 보인다. 느낌이 너무 이상해서 일행을 정지 시켜놓고 계속 앞으로 가보니, 밭이 나오고 민가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으∼우짜 이런 일이∼. 무엇에 넋을 잃고 이리로 왔단 말인고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밤이었길 망정이지.... 얼굴의 이 화끈거림이란, 참으로 민망... 그리고 죄송.... 그래도 일행들은 보너스라고 위로를 하신다. 혹시 겉으론 그렇게 말하고 속으론 &%$!@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일행을 뒤돌려 세우고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어보니 오르막길을 다올라와서 왼쪽으로 길이 있는데 일행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그만 질러간 것이 탈이었다. 날이 밝았을 때라면 이런 현상은 없었을 것인데.... 아무튼 귀중한 25분을 정신차리라고 꾸중하시는 산신령께 상납하고 길을 재촉하였다.

서서히 날은 밝아오고, 잠시 후 떠오른 햇살은 주변의 신록을 더한층 싱그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숲속의 맑은 공기는 저 가슴속의 찌든 때를 모두 털어 내기라도 하듯이 맘껏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7시 선두는 두리봉(1,033m)에 도착하였다. 정상에는 작은 헬기장이 있었고 주변을 한눈에 담을 만큼 높아 보였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석병산까지 1.5km로 나와 있는데 길이 험하지 않아서인지 23분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석병산(1,055m) 뒷면은 깍아지른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삐쭉 솟아오른 봉우리는 마치 요새를 연상시킬 만큼 견고하게 보였다. -그래서 석병산인가?- 이곳에서는 멀리 청옥산과 두타산이 조감도를 그려 놓은 듯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는 깊은 계곡들이 있는데 마치 이곳에 하얀 물을 담아 놓은 듯이 구름이 하나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저것을 두고 운해라 한다는데 참으로 아름답다. 멋있는 사진첩마다 한장쯤 있는 그런.....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친 후 발걸음을 옮긴다. 이 능선의 특징이라 하면 산죽들이 유난히 많으며 잡목들이 사람 키만큼 높이로 길 양편으로 도열해 있으니 팔이 온전히 움직일 수 없도록 찔러댄다. 그리고 이 구간의 능선은 여타구간보다 완만한 편이라고 적고 싶다. 봉우리도 많지 않고 또 급격히 내렸갔다가 올라가야 하는 것의 정도가 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여유있게 담소도 즐기며 가끔 장난치는 모습도 보인다. 이렇게 편하게 산행하는 것이 진정한 맛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표시기가 거의 보이질 않는다. 모 은행에서 떼어 냈다더니 실감나게 허전하다. 그래서 나는 중간 중간 다시 표시기를 달아 놓았는데 잘한 건지 또는 혼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겨울 눈속에 허리춤까지 빠지는 산행을 할 때 이 표시기는 나에게 생명줄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새벽에 눈덮인산을 러셀을 하다보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사방이 온통 하얗고 나무만 쭈빗 쭈빗 튀어 나와 있을 뿐. 그래서 두시간 정도 빽(back)을 한적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해서 여러개를 달아 놓았는데...

그런데 오늘 특이한 사항(?)은 오랜만에 뵌 고박사님의 발걸음이다. 도무지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하다. 나보다 앞서가기 시작하여 끝날때까지 뵐수 없었으니 그간 축지법이라도 익히신건지....아니면 백두대간을 완주하신 관록인지....

10시 생계령에 도착하니 가까이서 풀을 깍는 기계의 소음이 들린다. 아마 벌초를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쉬엄쉬엄 796m 고지를 넘어서 잠시후엔 임도에 다다랐다. 예전에 나무를 실어 내기 위한 듯한데 길 위에는 솔잎들이 적당히 쌓여 있어서 푹신푹신 한 것이 걷기에는 아주 편했다. 그렇게 3∼40여분을 비스듬히 오르다 보면 44번 철탑이 있는 곳이 나온다.(11시25분)

잠시후 일행은 한라시멘트가 자병산을 파헤친 공사현장을 마주 대하고 섰다. 망연자실....길에 털썩 주저앉은 우리는 뭐라 할말을 잃어버린다. 저렇게 해서라도 먹고살아야 하는 건지 뭐가 우선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리고 현장 입구를 지키는 경비 아저씨는 우리보고 밖으로 나가란다. 어디가 밖이고 어디가 안인지? 또 누가 누구보고 나가라는 건지? 우린 백두대간을 산행하는 사람들인데 공사와는 상관없는 능선을 따라 갈 것이니 아무 염려 말라고 했지만 그 아저씨는 이곳의 모든 재량권을 한 몸에 받으신 듯 어깨에 힘을 주며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가뜩이나 마음 상해있는 우리로서는 나이 드신분께 뭐라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아서 일행들과 함께 우리의 갈길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성격이 불같은 대장님은 좀 다르다. 일단 산만한 등치를 앞세우며, 그 아저씨의 목소리 톤보다 세배 높여서 '자연을 파괴하는 이 회사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난 그저 옆에서 '아싸 파이팅 이겨라! 이겨라!'- 기관총이 한번 불을 뿜으니 기세 등등하던 이 아저씨 히∼이∼잉 콧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내린다. 마치 '만만치 않군' 하는 표정으로.... 잠시후 아저씨는 어정쩡한 분위기를 탈피하고자 한번 알아보겠다고 하며 저만치 사라진다.

한껏 기분 좋던 산행이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은 저렇게 짓밟히는 산들을 바라보면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대간을 보존하자는 함성도 요란하고.... 그래서 서명도 해보고..... 하지만 잠시 흥분은 멈출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왜냐하면 기업이 자연을 생각지 않는 눈앞의 이익과 해당관청이 약간의 재정을 늘이고자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에 이런 이해타산의 고리를 쉽게 끊기 어렵다. 요즘 흔히 보는 지역이기주의의 한 단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12시30분 오늘 산행을 마무리하는 백복령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수돗물에 찌든 땀을 씻고 식사와 함께 동동주를 마시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총산행시간 7시간50분)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3-04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