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록) 9/25 03:45 성삼재-04:15 코재(화엄사계곡)                                            3.0km

                        04:30 노고단-(10분휴식)-04:40노고단출발                                   10.5km 

                        05:00돼지령-05:30 임걸령(피아골)-(10분휴식)-05:40임걸령출발

                        06:10노루목-06:35 반야봉-(15분휴식)-06:50 반야봉출발

                        07:20 삼도봉(날나리봉)-(40분간 아침식사,휴식)-08:00삼도봉출발

                        08:10화개재(뱀사골)-08:40토끼봉(화개면)-09:40 명선봉

                        09:50연하천산장-(10분휴식)-10:00연하천산장출발                        3.6km

                        10:10음정갈림길-10:20 삼각봉-10:40형제봉-

                        11:30벽소령-(20분휴식)-11:50 벽소령출발                                    6.7km 

                        14:00 삼정리(음정) 도착

                                                                                                       총 10:15      23.8km

 


(반야들국화)

 

 9/24 (22:00) 토요 휴무의 사무실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무박산행의 밤길을 준비하며,

26산케의 북한산 등반과 함께하고 싶은 맘으로 김대장과 통화를 나눈다. 몸에 무리하지

않도록 염려하는 김대장의 고마운 염려를 받으며 내일 오랫만에 청보화님과 함께 가을맞이

산행길을 나선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건축과 졸업 작품을 10월 중순까지 마무리해야 한다며 추석때 큰집 차례에도 참석치 못하고

학교 부근 지하 셋방을 얻어 작업실로 꾸며 놓고, 바짝 마른 얼굴로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밤샘을 즐기는(?) 작은 놈에게, 디카 촬영법을 배우기 위해 토요일 오후동안  핸드폰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이 없다. 야간등반을 위한 저녁 식사무렵에야  바삐 나타난  얼굴은 늘 만족이다.

잠실에서 치룬 올해 연고전은 연대가 4:1로 압승을 거두었다고...

 

바쁜 와중에도 마지막 학창시절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싱싱한 젊음들이 부럽고 안심이 된다.

학창시절의 기억이라면, 명륜동 뒷골목 어두운 튀김집 구석에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취한  얼굴로

잠겨진 교문이 열리길 기다리던 나의 젊음이 이젠 이세대에서 먼 이야기로 끝이 나야한다.

부디 건강한 몸으로 내년 봄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하고싶은 일하며 맘껏 누릴 앞날의 자유를 위하여

마지막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길 기대해 본다.

 

1년 반 동안의 대간길을 비록 몸은 함께 하질 못해도 맘으로 함께 하겠다는 물푸레의 정성을 타고

출발지인 신도림역에 도착하여 2주전 처음 대간길을 나섰던 몇몇 젊음들과 반가움을 나눈다.

"2주가 꽤 길게 느껴집니다..."

산꾼들의 수줍은 정나누기가 회를 거듭할 수록 남은 대간 길은 짧아지고,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

지고, 자유인을 꿈꾸는 대간 멤버들의 뿌듯한 보람이 점점 커져 나가 진부령 넘어 향로봉, 백두산까지

넘쳐나리라...

(반야에서본 노고운해)

9/25(03:30) 첫회 보다 조금 줄어든 대간 멤버들을 실은 버스는 막힘없는 고속도로를 달려, 01:30덕유산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후, 남원 인월면을 거쳐 맑은 밤하늘 별이 쏟아지는 성삼재 주차장에 일행을 내려

놓는다. 초가을의 서늘함을 올해 처음 이곳 대간 마루금에서 느끼며 배낭에서 긴팔 옷을 꺼내 입는다.

어둠속에서 노고단쪽 매표소가 비교적 밝게 자릴잡고, 다음 구간인 만복대 오름길은 어둠속에서

희미한 달빛 아래 검게 잠들어 있다. 준비운동을 겸한 체조와 생리문제를 해결하고 비교적 한가한

야간 등반객들 틈에 끼어 매표소를 통과한다.

 

말로만 듣던 성삼재-노고단 길은 어둠 속에서도 헤드랜턴이 필요없이 ,추석 보름 갓지난 하현 달 아래

잘 정비된 부잣집 앞마당길 걷듯이 여유로운 발걸음이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대간 길인가..시민공원 오름길인가..착각이 들 정도로 거대하게 정비한

국립공원 정책자들께 마구잡이 장사를 맡기고 싶다. 이러니 구례-남원 간 산업도로 놔두고 ,대간 정맥

마루금을 통과하는 신작로 건설에 반대하는 환경론자들의 반감을 살 수 밖에...

'토지'의 최참판댁을 재현 한답시고 섬진강 어귀에 지은 大家를 보고 박경리 님이 "지리산에 미안하구나"

했다던 말이 생각난다. 오늘 백두대간 한답시고 3-4시간을 화엄사 계곡이나, 달궁계곡을 올라와야

할 성삼재 고개턱에서, 버스에 실려 와 편히 대간 첫걸음을 옮기니 그야말로  지리산에 미안하다...

 

코재 를 휘감아 오르는 고개 턱에서 빠른 걸음을 잠시 멈추고 오른쪽 구례의 빛나는 야경을 감상하니,

모처럼 쾌청한 가을 새벽의 화엄사 계곡에서 화려한 무당들의 펄럭이는 영혼이 밀려 올라온다.

노고단 지리 제3봉까지 밀어 닥치는 영혼들의 춤사위에 묻어오는 쇠붙이 내음... 화약 냄새...농약냄새..

 

***"神이 인간과 자연을 만들었다면 참 큰 실수를 한게지..

인간이란게 자연을 망치다가 더불어 신을 만들고 죽이고..제 맘데로 할거니까..."

우즈벡 공항으로 떠나던 날 아침 K노인의 독백같은 마지막 마무리 말귀가 오늘따라 머리를 맴돈다.

 

“어르신 저도 한때는 잠시동안 이지만 교회 다닌 적 있습니다”

이렇게 의도적인 친근감을 보이며, 애써 다가가는 자세로 첫날 저녁의 화두를 이끌어 내는데 쉽게

성공했다.

사실 생긴 외모나 느낌이 그런 종교적인 엄숙이나, 진지함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내게 ,

어쩌면 노인으로서는 별 부담 없이 술 한잔 나누며 시간때울 상대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순간, 내 자신이 십 수년전 국가적인 행사인 88올림픽을 계기로 우연한 기회를 잡아,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자영업의 대열에 뛰어들어 돈 한푼없는 사장 행세를 하기 시작했을 즈음에

잠시 교회를 다닌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자신있게 대답은 했으나 , 내가 기억하는 건 교회와는

거리가 멀다.

그즈음 뭔가에 좇기던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 ,가위에 눌리는 고통을 받으며 교회 현관 마루바닥

끝에서 “살려만 주시면 교회 열심히 ...”다니겠다는 약속을 하고 ,깨어난 꿈이 하도 뒤숭숭하여

2-3개월 집앞 교회에 등록을 하고 다닌적이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외국에 나다니던 본목사의

헌금 설교에 식상하여  이후론 완전히 잊고 지낸 이력이다. ****

  

노고단 산장으로 오르는 500여미터 깔딱 오름길이 오늘 처음 밟아 보는 산길다운 산길이다.

밝은 달빛과 헤드랜턴으로 발아래는 밝아 보이나, 유난히 울퉁불퉁한 바위 너덜을 처음 대하니

갑자기 발걸음이 느려진다. 그늘진 작은 돌뿌리에 발목을 매우 조심스레 밟아 오른다.

앞으로 긴 여정 속에서 부디 긴장감을 유지하며 작은 실수로 인하여 대간길을 멈추는 불상사가

없기를 간절히 바랜다. 


(반야에서본 천왕일출)

 

(04:30)노고단 산장에서 외투를 벗고 잠시 얼굴을 씻은 후 바로 5분여만에 노고단 고개에 이르니

제법 땀으로 젖은 얼굴에 냉랭한 가을 새벽이 다가온다.

자연훼손을 염려하여 막아놓은 노고단 정상을 바라보니 부드러운 봉우리가 검게 밤하늘에 솟아 있다.

오른쪽 사면에 크게 자릴 잡고 웅장하게 들어선 방송 송신탑 건물이 화려한 조명시설을 아낀 채

조용한 새벽을 맞이하고 있다.

 

老姑壇..박혁거세의 어미 전설이 아니라도, 황량하고 쓸쓸한 지리 제3봉의 광활한 평원에서 수많은

사건들을 간직한 채 조용한 새벽을 맞는 역사의 운동장에는, 일제시대의 선교사 수양관 잔해도,

여순사건의 어지러운 토론도, 주위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자연의 종석대, 만복대, 문수대도 말없이

어둠속에 갇힌 채 다가올 새벽을 겸허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정상을 본딴 고갯마루 돌탑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후 서둘러 노고단 북사면을 따라 천왕봉 100리길을

밟아 오르내리는  일렬 주능 행렬을 펼친다.  어둠속의 주능선 길은 전날 내렸음직한 비로 젖은 진흙과

간간이 이어지는 제법 큰 너덜로 인해 주위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조심스레 밟아 구례 야경을 끝으로

억새 평원이 아름답다는 돼지령을 지나 1시간여 만에 임걸령 샘물 앞에 이른다.

 

평원의 아름다움도, 피아골의 숱한 폭포와 沼를 외면한 채 이리 2천리 지루한 발걸음을 계속하는

산꾼들의 대간탐사에는 무슨 사연들을 담고 있을까..이 땅의 지붕들을 밟아 나가며 기슭마다

묻어 있는 이 땅의 슬픈 영혼들을 산등성이 고갯마루로 불러 올려 함께 춤추고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의식을 치루는 발걸음이 되어도 좋으련만...

 

왕시루봉 능선과 피아골을 오르는 남쪽 길과 임걸령이 만나는 이곳에는 유난히 전설이 많다.

林桀年이라는 화적두목 얘기며,피아골 황호랑이 얘기,화엄사 어귀 황총각 이야기들도 이곳

임걸령 길목에서 나누던 북쪽 심단골 사람들과의 하룻밤 만남 속에서 무수한 지어냄 중 하나이리라.

 

(반야봉에서)

(06:00)임걸령을 출발하여 30여분 만에 노루목에 다다라, 예정 시간보다 매우 빠른 속도로 행군하고

있음에 내가 놀랍다. 지도상의 시간이 많이 차이가 난다. 당연히 반야봉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앞쪽 선두조를 따라 붙는다. 조금씩 밝아오는 여명에 랜턴을 벗고 반창 모자를 갈아쓰니  매우 시원하다.

어제 출발전 염려 스럽던 왼쪽 허벅지 인대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안심이다. 또한 옛날 가죽등산화를

창갈이하여 시험해보니 다소 무겁긴해도 요즘의 가벼운 등산화보다 장거리 트래킹에는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

 

지리 주능에서 벗어난 30여분의 반야봉 오름길에서 정상 조금 못미친 안부에서 맞이하는 천왕일출에

모두들 디카를 꺼내들고 환상적인 해오름이 연출하는 지리 동부의 맑은 장관을 담기에 바쁘다.

어제 작은 놈에게 배운 솜씨로 후레쉬를 쓰지 않고 바위에 기대어 조리개 노출을 길게 가져가 본다.

나름대로 만족스런 구도를 잡을 수 있어 다행이다.

함께하지 못한 산케들께 서툰 솜씨라도 내가 직접 담은 싱싱한 대간의 정경들을 보여주고 싶다.

이 여행이 끝날 즈음엔 나도 제법 사진 솜씨가 붙을래나, 아무튼 디카가 쉽고 편리하다.

 

지리 제2봉 반야봉. 불교적인 해석이 아니래도 범인이 이 광활한 대자연의 정상에 우뚝 오르면

智慧로움이 솟아나 비움(空)을 깨달을 것이니, 가히 지리 주능의 한가운데에 솟아 자랑할만하다.

비록 반야낙조(지리10경)를 기다릴 순 없으나 지난번 오름에서 보지 못한 천왕일출을 멀리서나마

볼수 있었으니 3대 덕은 못 쌓아도 2대 덕은 쌓은걸까..

북으로 중봉을 거쳐 하산하는 달궁계곡 길은 휴식년으로 막혀 있고, 뱀사골 웅장한 고요를 간직하고

남으로 불무장릉을 거느린 반야봉의 서쪽 낙조자리엔 맑은 가을 하늘아래 펼치는 노고운해(지리10경)

진수를 맛보며 또한번 디카를 꺼내든다.

(삼도봉)

(07:20)노루목에서 30여분 헐떡이며 올랐던 반야봉길을 다시 되돌아 내려 오자니 급경사 길이 얄밉다.

다행히 10여분 만에 왼쪽으로 삼도봉을 향하는 삼각길을 만나니 배낭을 메고 올라와야 했던 보람이

있어 다행이고 다소 경사는 심하나 삼도봉어귀 주릉선 길에 바로 닿을 수 있었다.

 

교묘한 道界에 위치하여 낫날봉, 날라리봉 이라는 아름답고 친근한 이름을 잃고 三道峰이라 불리는

이곳 넓은 바위너럭 위에는 전남,전북,경남의 이름으로 오묘한 멧세지를 담은 청동 표지비가

하늘로 향하고 있다. 유난히 지역적 갈음에 익숙하여 현대사를 슬프게 물들인 우리세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이 하나의 산봉우리에서.....

 

생각보다 새벽길 산행객이 붐비지 않고, 빠른 걸음들로 예정된 시간보다 여유가 있어, 이곳

넓은 바위위에서 아침 식사와 긴 휴식을 취한다.

지난번 하산길에서 아픈 발걸음을 달래주던 토속주가 생각나 집에서 담근 포도주 한병을

배낭에 넣고 왔는데, 때아닌 山頂 라면 끓임에 홀려 아침 해장술로 변하고 말았다.

포도주와 라면...지친 땀흘림 뒤에 어우러지는 웰빙엔 이론이 없다.

충분한 휴식후 남은 먼길을 위해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서니, 명창 김연순 님의 '금강산 타령'이

지리산 정기와 함께 아침을 맑게 하며 울려 퍼진다.   

 


(화개재)

(08:00)아침식사후 화개재로 떨어지는 긴 계단길(600계단)은 무릎 보호대를 꺼내게 만든다.

앞으로의 긴 여정에 조금이라도 무리가 오면 안되겠다는 심정으로 미리 조치를 하고 천천히

속도를 늦춘다. 많이 내려가면 갈수록 같은 높이를 오르내려야 하는 대간길.. 내리막이 싫은 길.

 

식사후 밝은 시간 탓인지 선두조는 재빨리 나아가고 약간 후미조로 뒤처지니 오직 홀로뿐인

산길에 적막마저 감돈다.

10여분의 급경사 내림길 끝에 펼처진 花開재에는 풀잎만 무성하고,북쪽 뱀사골대피소로

향하는 길목이 경사가 급하게 느껴진다. 이곳에서 토끼봉으로 올라온 남쪽 연동골의 화개

사람들과 시장을 이루었다니, 화개장터의 시작인가..

 

토끼봉을 지나 연하천 산장이 있는 명선봉 오름길은 2시간 남짓 지루한 오름길이다.

앞뒤에 일행이 보이지 않으며 천천히 즐기는 산행을 맛보며 호흡을 가다듬으니 편하다.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  김민기, 양희은-봉우리)

흥얼거리는 노랫말이 오늘따라 조용히 다가오며 내 남은 삶에 제법 의미있는 느낌을 보탠다.


(연하천산장 단풍)

 

(10:00)생각보다 제법 뒤쳐진 걸음으로 명선봉을 넘어 연하천 산장에 도착하니, 다소 낡은 듯한

산장 건물이나, 앞마당이 넓어 편히 휴식을 취하고 무엇보다 철철 넘쳐 흐르는 식수가 마음에 든다.

빈 물병을 채우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반겨주는 총대장과 산장을 배경으로 한 컷 기념을 남긴다.

 

길지 않은 인생에서 예닐곱 차례 대간을 행하고, 전국 정맥을 밟아 내리는 자유인의 깊은 뜻을

어찌 알리요마는, 이제 초보 산행객으로 작은 꿈을 이루고자 따라 붙는 발길에 이리 여유있는 행보를

만들어 주는 대간 집행부들의 노고에 이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하고 싶다.

 

10여분의 휴식후 산장을 나서는 입구에 이른 단풍이 벌써 붉게 단장을 마쳤다. 산꾼들이 미쳐

따르는 이 땅의 사계절을 가장 화려하게 장식할 10월이 다가온 것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구상나무 숲과 주목 군락지의 초록 배경에 어울릴 지리 단풍 놀이는 언제쯤

이루어 질까...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함께하고 싶은 이도 많은데....

 

오늘의 종주 목표지인 벽소령까지 3.6km, 길어도 2시간여의 발길이 아쉬울 정도로 여유롭다.

천천히 걸음을 늦추며 양쪽 길섶에서 이름모를 풀꽃들을 담아본다.

(삼각봉)

(10:20)연하천산장을 지나 잠시후 만난 음정길 갈림에서 잠시 망설여진다. 지난회에 힘들었던

벽소령에서의 비포장 도로가 생각나, 이곳에서 북쪽 능선을 따라 탈출하느냐..

그러나 훗날, 백두대간 2000리길에 10리길 빼먹은 찝찝함을 없애기 위해 오름길에 올라서니

기울어진  고목을 배경으로 지리 남녘의 운무가 펼쳐진다. 지리仙景은 도처에 눈길을 머물게하고

긴 종주길에 피로를 잊게 한다.

 

지척에 보이는 형제봉의 암릉이 아름답게 다가오며 지리산의 유혹에 빠진 형제 아니라도,

힘든 발걸음을 머물고 싶도록 능선길이 아기자기하다. 지리능선 대부분의 낮은 조릿대와 철쭉

오솔길이 아닌, 지그재그의 암문들이 이어지는 절경을 이곳 놓칠 뻔한 능선에서 만끽한다.

이곳을 놓치고 지리능선 종주를 얘기하면 평생두고 바보스러울 일이다.

암문 바위틈을 지날때 마다 북쪽 광대골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냉장고를 열어 놓은 느낌이다.

 

살아가면서 숱하게 스치는 아름다움과 슬픈 것들 중에서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 질까..삶의 여정 속에서 묻어 지내는 무수한 사건들이 우리가 간직하고 싶은 많은

아름다움들을 스쳐 지나게 만들겠지..오늘 내눈에 비치는 이 아름다움은 내 삶의 끝자락에

찾아온 행운일까.. 멀리 느껴지던 형제봉의 높이 솟은 바위 아래서 잠시 발길을 멈춘다.


(형제봉 아래 큰바위)

 

(11:30) 형제봉에서 벽소령으로 향하는 북사면 길은 다소 어두운 너덜길에 오르내림이 이어지는

까다로운 길이다. 구간 종주의 마지막 단계에서 두어번의 줄잡이를 요하고 힘빠진 발길에

주의를 요할 만큼 모처럼의 암릉길이다.

이번 산행길에서 처음 시도한 양팔 보조 지팡이가 매우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지난번 중산리 구간 보다는 시작구간에서 다소 힘들지 않은 관계로 체력에 여유를 느낀다.

단지 삼정리까지 긴시간의 하산길이 남아 있음에 아직도 걱정이 남아 있긴하다.

 

*** "됐어,됐어..난..장사꾼이야.."

 

은퇴한 목사님 정도로 여겨지던 K노인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 별다른 느낌을 간직하긴 했어도,

짐작이 영 비껴 나가니 당황스럽다. 그 곳 우즈벡에서 농삿일을 벌리겠다는 교회 단체들의 의도야

대충 짐작도 가고 그리 당황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 백발의 노인이 대체 무슨 장사를 벌리겠다는

것인지..

 

"자네 며칠  여기 있을 동안 같이 술 친구 할 수 있겠어?.."

 

나는 그렇게 서남아 여행의 며칠 밤을 엉뚱한 소설같은 유혹에 빠져들게 되었다.****

 

연하천 산장에서  벽소령에 이르는 1시간 반 동안은 시간을 잊은 채 주위를 둘러보며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그렇게 외롭지 않은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 지나온 삶들을 반추해가며

결코 후회스럽지 않은 과거들을 스크랩 할 수 있도록 붙잡아준 모든 주위에 감사를 느낀다.

 

산장에 도착하니 오늘 종주의 완성을 자축하는 이슬이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이 기쁜

순간을 위해 무거운 술병들을 짊어지고 걸어온 정성이 아름답다. 남은 간식을 펼쳐 놓고

잠시 발을 식힌 후 긴 하산길에 나선다.   

(벽소령-음정길)

(14:00) 지난 번과는 달리 다소 안정된 발걸음이긴 하나, 2시간여의 비포장 하산길은 역시 지겹다.

가도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굽이를 수차례 돌아 들며 간간히 삼각봉 영원령 능선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계곡을 담아 본다. 이렇게 수많은 계곡이 광대골로 모여들어 삼정리에 이르면 큰 소리로

흘러 내린다.

 

대간길이 아니면 일부러 찾지 않을 이길을 잇달아 두번을 걸어 내리니, 어쩌면 지리산 자락

첫 동네 음정부락이 그리워 질지도 모르겠다.

 

하얗게 시멘트로 포장된 삼정리 마을길이 보이고 , 새로 밑창 갈아 신은 발바닥이 조금씩

따가와 올 즈음에 김대장과 함께 걷는 북한산 진달래 능선길 아래에는 김치국밥과 소주가

기다리며 지친 산꾼들의 허기진 발길을 어루만져 주었다.

 

9/26 배 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