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석이형!

오랜만에 산악회 사람들과 더불어
호남정맥 18번째 구간을 종주하고 왔습니다.
계속되는 빗줄기가 걱정되기는 했으나
오랜 지기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가을비 정도는 약간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작은 소란에 불과하였죠.

정읍휴게소에 들러 때 이른 아침을 먹고는
채 소화되지도 않은 배를 움켜지고
곡두재에 도착을 하자 새벽 3시
산행하기에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잠시 호흡을 고르는 여유를 가져 보았습니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질 즈음
나약해진 마음 한 구석에선
괜한 오기를 부렸다는 후회가 스며들고
게으른 육신은
제 한 몸 지키기 위해 정신이 없었습니다.

꿈결같은 시각이 흐르고
출발하자는 외침이 들려왔을 때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둘러 차에서 내리더니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죽었구나! 하는 탄식이 흐르고

누군가
안개 짙은 새벽 하늘을 향해
" 인자 고만 해라, 만이 묵었다 아이가 "
...

여름에 접어들면서
어느 한 구간 빠질 것 없이
산행 내내 비와 싸우며 걸었으니
'그만'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하지요.

하지만
공연히 하늘을 향해 외쳐 봐야
나약함만 보이고 마는 것을...

예까지 왔는데 그냥 가야지

그럭저럭 출발 준비가 끝나고
질퍽한 농로를 지나다
등로를 잃고

곡두재를 지나
또 한번 등로를 잃어
선두가 후미가 되고
후미가 선두가 되더니

백학봉 갈림길을 향해 오르는
바윗길에서는
또 한번
입산의 고단함이 매몰차게 다가오고
허탈함에 쓴웃음만 허공으로 날리고 말았습니다.
꾼이라는 자존심은
이제 더 이상 부릴 여유도 없었지요.

하지만
미끄러지고 깨지고
바위 잡고 씨름하며 기도한 덕에
백학봉 갈림길을 지나 상왕봉까지는
산책하듯이 산행을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여명이 밝아 길이 보인 탓도 있었지만
몇 차례 지나간 길이기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상왕봉을 지나
순창새재를 향해 가다가
또 한번 등로를 이탈하여
되돌아가야 하는 한심함을 맛보았지만
그런 것들은 산행의 양념이니
그리 아쉬울 것은 없었습니다.

순창새재를 지나
영산기맥 분기점에 다다랐을 때는
선행자들의 수고로움에
머리 조아려 고마움을 표시하였고
다가서는 조릿대의
매서움 앞에서는
단내 나는 고달픔을 맛보았습니다.

까치봉 갈림길을 지나고
신선봉을 지나
금선대에 섰을 때의 그 아찔함이란
비 온 뒤에 타는 바위 맛이 이런 것인 걸...
형에게서 배운 개똥 철학도
이런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내장산을 돌고 돌다 알았습니다.

너들을 지나고
만난 연자봉
백련암을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데
무슨 흠모할 일 있어 연자봉인지
그래도 나그네에겐
잠시 쉬는 여유를 주었습니다.

막바지에 접어든
장군봉에선
저려오는 묵직한 다리를 풀고
임진왜란 그 쓰라린 역사 앞에선
마루금을 타야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승병장 희묵대사
...지켜야할 계율...
뉘라서 그 고뇌
안다 할까만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음이니
그 고마운 마음이야
오죽하리요.
한 개비 담배에 불 붙여 드리는
우매함만 보이고 말았습니다.

장군봉을 지나고
유군치를 지나
추령으로 향할 때의 한적함에는
산 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조화로움과 여유, 그리고 성취감...
술 취한 선배처럼 멋졌습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3-04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