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구령 출발(7:10)-고치령(9:40)-형제봉 갈림길(10:55)-마당치(11:10)-1831봉(11:40), 점심(12:40)-상월봉(15:10)-비로봉(16:50)-천문대(18:30)-죽령(20:30), 대강에서 민박


“뎅~ 뎅~ 뎅~”

부석사 종소리가 이른 새벽 꿈길을 밟고 와서 잠을 깨웠다. 새벽 3시 아침 예불을 시작하는 종소리인 듯했다. 밤새 비도 좀 뿌렸는지 숲 속에서 빗방울이 텐트 위로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져 이른 새벽의 정적을 깼다.

아직은 더 자야할 시간이라 잠을 청해보았지만 이미 청아한 종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내 마음은 온통 부석사에 가 있었다. 봉황산 부석사 뒤쪽 대간 길에 누워있던 탓인지 의상과 선묘낭자의 애틋한 전설이 떠올랐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에 얽힌 이야기는 신비롭기도 하다.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 시절에 양주성에 있는 어느 신도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집 주인의 딸 선묘가 그를 사모하였으나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하였다.

선묘는 의상의 굳은 의지에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공부와 교화, 불사에 도움을 드리겠다'는 원(願)을 세웠다. 공부를 마친 의상은 그 신도의 집에 들러 인사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는 미리 준비한 법복과 여러 가지 용품을 함에 담아 해안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이 탄 배는 벌써 멀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선묘는 가져온 함을 바다로 던지며 이 함이 배에 닿기를 기원하고, 용으로 변하여 대사를 모시고 불도를 이루게 해달라는 주문을 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 흔들림 없는 의상의 수행자세도 놀랍거니와, 부석사가 지어진 이야기 또한 신비롭기만 하다. 신라에 귀국한 의상은 중생을 교화하던 중 태백산의 한 줄기에서 절터를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산적 소굴이라고 하며 만류했으나 의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직접 산적들을 만나 선하게 살 것을 당부하고 절을 짓게 해 달라고 하니 산적들은 화가 나서 의상을 죽이려 했다. 이때 갑자기 선묘룡이 나타나 번갯불을 일으키고 봉황이 나타나 큰 바위를 세 차례나 공중에 들었다가 놓았다. 이에 놀란 산적들이 굴복하고 모두 의상의 제자가 되어 불사를 도왔다.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浮石)이라 했고, 봉황이 나타났다 해서 산 이름을 봉황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ꡔ삼국유사ꡕ에 전하는 설화지만,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의상의 흔들림 없는 욕망의 단절도 그렇거니와, 중생 제도를 위한 그의 의지와 정성, 부석사를 세우기 위해 생사를 초월해 악에 대항하는 모습은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또한 의상은 귀국한 후, 674년 경주 황복사에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가르침으로써 화엄학을 본격적으로 펴기 시작했다. 이 글은 의상의 화엄 사상을 210자로 응축시켜 놓은 화엄학의 정수인데, 오늘날까지도 애송되는 시로서 의상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에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는 사물의 본질을 깨달으면, 중생도 처음 뜻을 품자마자 곧 정각을 이루어 부처와 다름없다는 의상의 혁명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 사물은 차별될 수 없다는 평등사상과 더불어 그의 사상을 이루는 핵심이 담겨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의상은 부석사가 창건된 뒤에 논밭과 장원, 그리고 노비를 기증하려는 왕의 선심에 대하여, “우리의 법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등하게 보고 신분의 귀천을 없이 하여 한가지로 합니다. 더욱이 열반경에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어찌 논밭을 가지며 노비를 부리겠습니까?”라고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불교의 평등사상과 무소유를 실천한 승려들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이름난 고승으로서 왕의 보시를 “평등법에 어긋난다.”, “부정하다.” 하여 거절한 사람은 아마도 의상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의상은 권력을 멀리하였으며, 완고한 골품제 신분사회 속에서도 신분의 평등을 주장했다. 그의 문하에는 지통(智通)과 같은 천민 노비 출신, 진정(眞定)과 같은 빈민 출신 제자가 배출되어 그의 법을 계승하기도 한 점이 더욱 이를 증명한다.

이처럼 의상은 화엄종의 학문 높은 고승에서 벗어나 신분의 평등과 올바른 정치를 주장하며 현실에 참여했고, 또 몸소 평등을 실천한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그의 결실이 오롯하게 모여서 지방 불교의 막을 올리고 민중불교의 토대를 닦게 된 것이 부석사 건립의 의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살포시 들었던 새벽잠이 요란한 산새들의 합창소리에 다시 깨었다. 산새들은 저렇게 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건만, 우리 인간은 자신의 목소리를 갈고 닦아 뽐내려 하기보다는 남의 목소리를 시샘하기에 급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이란 남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산새들처럼 자신만의 고유한 빛깔과 목소리를 한껏 드러내 뽐내는 것일 텐데 말이다.

날이 어지간히 밝아오더니 숲 속의 정적을 깨치던 빗방울 소리도 그치고 만물과 일상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어제 너무 아파서 약을 바르고 밴드로 감싼 발바닥의 물집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강원도 구간을 마무리 짓고, 내가 살고 있는 충청도 구간에 위치한 소백산에 드는 날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며 더욱 자신감이 솟았다. 닭쌈에도 텃세가 있다더니 사람도 예외가 아닌가 보다.

비가 걷힌 뒤의 습하면서도 달콤한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아침 7시가 넘어서 마구령의 야영지를 출발했다. 지난밤 비가 촉촉이 내려서 걷기 좋고 바람도 숲 속에서 살랑살랑 불어와 상쾌했다. 몇 시간 전쯤에 비가 그쳤는지 풀 섶에는 아직 물방울들이 맺혀 있지만, 맨땅은 이미 빗물을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마르기 시작하는 곳도 있었다.

동녘에서 숲을 뚫고 낮게 비껴 들어오는 햇살은 땅바닥에 밝고 어두운 갖가지 형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온갖 초목들은 더욱 선명한 초록빛을 뽐내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요란하고 시끌벅적하던 새소리는 새들이 바삐 움직이면서 점차 듣기 편한 부드러운 소리로 바뀌었다. 여기서도 역시 둥지마다 봄부터 키워놓은 새끼들이 어미 새들과 한 둥지를 이루고 살면서 이제 반포(反哺)하느라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고치령까지 가는 길은 오르내림도 심하지 않고 등산로가 잘 정비된 국립공원 구간이라 걷기에 편안했다. 고개가 가까워지자 잡목들이 약간 심해지기는 했지만 문제될 정도는 아니어서 끝까지 힘차게 걸었다.

--부자 백두대간 종주기 [감사하지 않은 게 없었다](김연수, 푸른사상) 중에서--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2-20 2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