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구간

금북정맥

산행일

각원사~성거산~배티고개

(18km, 6시간50분)

2008년 8월 31일

 맑음

 


<산행 기록>

각원사-성거산-우물목고개-위례산-엽돈재-서운산-배티고개

  6:00     7:10         8:10       9:00    10:35    12:00    12:50

 

바우덕이의 넋이 서린 땅


 

  금북정맥 13구간 산행을 간다. 오늘의 구간산행은 각원사에서 출발하여 배티고개까지 도상거리 18km 구간을 예정했다. 밤 12시에 출발하여 경부고속국도 망향휴게소에서 잠을 청한다. 한낮에는 기온이 30도까지 오르내려서 덥다는 생각만 했는데 새벽녘에는 꽤 춥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5시에 휴게소 식당에서 육개장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고 일찌감치 각원사로 향한다.

  해가 짧아졌다. 6시가 가까워지자 어둠이 걷히고 주위는 환해진다. 천안IC에서 경부고속국도를 빠져나와 고요하게 아침을 맞는 각원사 앞 저수지를 지나 각원사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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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맞는 각원사 저수지>

   6:00

  배낭을 둘러메고 각원사를 출발한다. 대웅전 앞마당으로 오른다. 잠에서 깨어나는 산사의 아침은 고요하다. 향불 향기 가득한 대웅전의 부처님만이 어느 산행객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미소 짓는다. 불 켜진 대웅전에는 아무도 없다. 새벽을 울리는 목탁소리라도 기대했는지 모른다.

  “옛날 어떤 스님이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기만 하다가 죽었다. 죽어서는 물고기가 되었는데 등에 나무가 났다. 어느 날 스승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데 한 마리의 물고기가 나타나 그전의 죄를 뉘우치며 등에 난 나무를 없애 달라고 애걸하였다. 스승은 수륙제를 올려 물고기 몸을 벗어나게 하고 그 나무로써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절간에 달아 다른 스님들의 몸가짐을 경계하게 했다.”

  이것이 오늘의 목탁이 된 목어의 유래다. 목탁은 둥글넓적하게 다듬어 나무의 속을 파내 방울처럼 만든 것인데 옛날에는 목어라고 하여 모양을 물고기처럼 길고 곧게 만들어 쓰다가 오늘날 쓰는 것처럼 변화된 것이다. 목탁에는 또 하나의 뜻이 있다.

  “고기는 원래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자지 않고 도를 닦으라는 뜻으로 절간에 만들어 달아맸다”는 것이 그것이다.

  

  각원사를 뒤로 하고 산길로 들어선다. 금북정맥 능선까지는 20분 거리다. 능선에 올라서자 떠오르는 아침 해가 눈부시다. 잠시 후에 유왕골 고개에 닿는다. 태조산 주등산로길 19지점이라는 119산악위치 표지판이 있고 그 옆에 사랑의 쉼터 안내문도 서 있다. 원래는 이곳이 각원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임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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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산악 위치 표시판>

  유왕골은 목천읍 덕전리의 자연부락으로 고려 태조가 천하를 살피고 머무른 마을이라 하여 부쳐진 이름으로 현재 마을 입구에는 주민들이 세운 “유왕골 유래비”가 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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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왕골 고개>

  백제 때의 이름이 환성(歡城)이었던 천안은 사산, 대목악, 대록군으로 불리기도 하다가 고려 태조 13년(930)에 천안도독부가 되고 조선 태종 16년(1416)에 천안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 목천현과 직산현을 통합했으며 1963년 천안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천안군은 천원군으로 바뀌고 그 뒤 1995년 통합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오늘날 천안시의 위상은 어떤 모습일까.

  박태순 님의 ‘나의 국토 나의 산하’에는 천안시를 이렇게 말한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벗어나 있기에 위성도시의 혐의를 벗었고 내포지방과 공주-대전으로 연계되는 중부권 지역을 굽어보는 고자세의 도시를 이루고 있어서 혈기왕성한 청년도시의 면모를 과시한다. 연령별 인구분포도 건강한 편이고 교육도시, 산업도시, 환경도시의 이점들을 골고루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천안시는 옛 천안과 직산현, 목천현을 통합하고 있어서 동일권역이지만 지역내의 지방색에는 상쾌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즉 직산 땅은 여전히 양반이 센 편이라 하고 유관순 열사의 목천은 고집이 강한 편이다. 그리고 천안 토박이는 장사꾼 기질, 곧 상업주의 정신이 빠른 쪽이라는 것이다.

 

  다시 산길을 간다. 뚜렷한 산길은 호서대학교와 만일사 갈림길을 지나고 태조산 주등산로길 26지점을 지나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니 만일고개에 닿는다. 계곡 갈림길에는 돌탑과 성거산 라이온스 클럽에서 세운 등산로 표지판도 있다.

  잠시 휴식한다. 이곳에서 성거산 정상까지는 계속 오름길이기 때문에 에너지를 축적하고 마음자세를 새롭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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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고개>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서거정은 영남 땅으로 출장을 가는 길에 지금의 천안 직산 땅에 들렀다가 직산현 객관 동북쪽에 제원루(濟源樓)가 있음을 알게 된다. 제원루란 백제의 원류가 되는 곳에 세운 누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한편의 시를 남긴다.

  백제가 남긴 옛터에 잡초들만 무성한데/나 감개에 젖어 안타까워 한다/다섯 용이 쟁패를 부리던 시대는 지나갔을지라도/위례성에 두 봉황의 울음소리는 남아 있는 듯하구나/온조 사당은 단풍 우거진 곳에 깊숙하게 자리 잡았는데/성거산을 감싸고 푸른 구름이 비꼈어라.

  서거정은 백제의 시조 온조라는 분이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으니 그곳이 직산에 있었다 한다는 기록을 믿게 되었고 제원루 일대가 백제의 처음 도읍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7:10

  해발 579m의 성거산(聖居山)에 닿는다. 성스러운 이가 거처하는 산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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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거산 정상>

  직산은 두 마리의 봉황이 내려와 백제의 창업지가 되도록 하늘이 점지해준 신성공간이었을 것이라고 조선 초기의 시인은 살펴보았다. 과연 그러했을까.

  ‘위례성 직산설’에 반론을 편 것은 ‘아방강역고’이다. 아방강역고라는 책은 우리나라의 강역을 문헌을 중심으로 살피고 고증해서 쓴 지리서인데 저자는 정약용이다. 그는 직산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 하고 위례성은 한강 이북의 삼각산 동쪽 기슭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 서울대는 세 차례에 걸쳐 위례산성을 정밀 조사했는데 이 산성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확인하여 위례성 직산설은 검증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성거산에서 바라보는 푸른 하늘과 넓은 평야는 정말 아름답다. 조선의 한 시인이 저곳이 백제의 도읍지일거라고 단정하였고 그래서인지 이 성거산도 뜻있는 이름이 아닌가. 사실이 아니어도 괜찮다. 아름다운 우리의 산하는 어느 곳에 도읍지를 세워도 아깝지 않을 훌륭한 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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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과 넓은 땅>

  성거산 정상 표지석의 건너편에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그쪽이 성거산 정상이라고 한다. 정상 표지석이 있는 이곳은 지형도상 556m봉인데 정상 표지석에는 579m로 표시되어 있다.

  다시 산길을 간다. 성거산 정상 표지석 앞쪽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내려가니 삼거리인데 선명하게 나 있는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 길로 간다. 리본도 거의 없고 길이 희미해서 길을 잘못들기 쉬운 지점이다. 잠시 내려가다가 왼쪽 산사면으로 이어진다. 다시 중간중간에 리본이 보이고 길도 뚜렷해진다.

  잠시 후에 산 정상에 군부대 중계소 철망이 보이고 철망으로 붙는다. 길이 없어서 한동안 헤맸는데 철망을 보면서 잡목을 뚫었다. 아마도 샛길이 여럿이다 보니 방향을 잘못 잡은 것같다. 철망에 붙고 보니 잡초가 길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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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철망>

  군부대 철망을 돌아나가니 시멘트 도로가 잘 닦여 있는 부대정문이 나온다. 부대정문에서부터는 도로 따라 내려간다. 한참을 내려가니 도로변에 성거산 순교성지 표시석이 나온다. 이곳에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곳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 끝날 때까지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비밀리 모여 살던 교우촌이 형성 되었던 곳이며 특히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이 은신처로 사용하며 사목활동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성거산 교우촌 출신 순교자 23명중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소학골 출신 5분의 순교자들과 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는 천주교 성지(聖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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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거산 순교성지 표지석>

  1959년 미공군기지가 성거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 개설 당시 도로상에 있던 107기의 묘를 이장하자 길가에 표지석을 세운 것이다. 성거산의 산줄기에서 오랜 세월동안 오가는 사람없이 자연과 함께 했던 무명 순교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생명 바쳐 증거하였으니 그 거룩한 뜻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길가의 벌개미취가 그들의 넋을 위로하듯 활짝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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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개미취>

   우물목고개로 내려가는 길에 성거읍을 내려다본다. 천흥저수지가 푸른 하늘을 담고 있고 그 아래쪽에 예전에는 일대가 하나의 거대한 절터였던 천흥사터다. 천흥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태조 4년(921)에 성거산 밑에 세운 절이다. 태조가 그 산 위에 오색구름이 걸쳐 있는 것을 바라보고는 성거산이라고 이름을 짓고 그 아래 절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당간지주와 높이가 5m가 넘는 오층석탑이 보물로 지정되어 서 있다고 하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국보 제280호의 천흥사종도 이곳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니 예사로운 절터가 아니었음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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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흥저수지-주변이 천흥사터이다>

 

  8:10

  부대정문에서 도로 따라 계속 내려가니 우물목 고개에 닿는다. 입장면과 북면 납안리를 연결하는 고개인데 정항령이라고도 불린다. 아침 햇살이 따사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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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목고개>

  위례산을 향하여 길을 간다. 우물목 고개의 볼록거울 뒤편으로 이어지는 산길로 들어서니 바로 송전철탑을 만나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위례산 능선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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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철탑에서 바라보는 위례산 능선>

  시간이 지나면서 기온도 올라가나 보다. 여름을 완전히 뺏기지 않은 8월의 끝자락은 이마에 땀을 송글송글 맺게 한다. 잠시 휴식하면서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지나온 거리와 남은 거리를 가늠한다. 지도에는 골짜기마다 작은 지명이 적혀 있음도 보게 된다.

  배우리 님이 쓴 ‘우리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책을 보면 우리나라의 산과 강은 물론이고 지명까지 우리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뿌리가 없는 것이 없고 변형되어 사용되는 이름도 많다고 하였다.

  지도에 보이는 호견리는 옛날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붙여진 이름이고 범박골은 주물을 부어 철을 만들던 곳이며 우렁골은 우렁속같이 깊이 들어가는 골짜기라는 식이다.

 

  9:00

  위례산 정상(524m)에 닿는다. 우물목 고개에서 50분 거리다. 넓은 공터에는 위례산성비가 서 있고 그 옆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위례성 안내문이 있다.

  “이 산성은 해발 525.9m인 위례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태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950m 정도이다. 성벽은 토.석혼축공법과 석축공법의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흙과 돌을 혼합하여 쌓은 부분은 자연암반을 평탄하게 고른 후 1.5m 너비에 2열로 돌을 평행하게 쌓고 그 위에 흙과 잡석 및 기와조각을 섞어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5m 정도이다. 이 성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 백제의 도읍지였던 위례성으로 보기도 하나 조사결과 도읍성이라기보다는 국방을 위한 산성으로 보이며 쌓은 시기도 삼국시대 후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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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산성비>

  금북정맥의 연봉을 이루며 북쪽 비탈면이 급경사를 이루어 천연 성벽 역할을 하므로 예로부터 직산위례성, 검은산, 신산(神山)이라고도 불렸던 위례산은 산 정상의 위례성터를 비롯하여 식수로 사용한 듯한 용샘이 남아 있는데 일부 학자는 서운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쪽 끝 기지였고, 위례성은 백제 문주왕의 북쪽 끝 방어선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신산으로 불렸던 위상 때문인지 입장면의 호당리에는 산신제도 남아 있다고 한다. 53가구가 모여 사는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초에 마을의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가려서 산신제를 주관할 제관을 선정하고 길일을 택해서 제를 올리는데 산신당은 마을에서 1㎞정도 떨어진 위례산 밑에 있으며 제수비용은 마을의 기금에서 이용하고 부족하면 집집마다 염출하며 제가 끝나고 나면 전 주민이 모여서 음복하고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다.

 

  위례산을 뒤로 하고 다시 산길을 간다. 잠시 후에 실제 정상으로 보이는 524m봉에 닿는데 이곳에는 누가 쌓았는지 커다란 돌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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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정상으로 보이는 곳의 돌탑>

  하산길은 부수문이 고개로 가는 길이다.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고 평탄하게 이어간다. 역사적 흔적과 더불어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에 얽힌 전설까지 내포하고 있는 위례산을 내려가면서 우리의 땅은 이렇듯 더듬어 볼 구석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부수문이 고개를 지난다. 부소문령(扶蘇門嶺) 또는 소나무산 고개라고도 한다는데 백제 때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을 했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다고 하여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10:35

  위례산에서 1시간 30분여를 걸어 엽돈재에 닿는다. 충청남도가 끝나고 충청북도와 경기도의 경계능선으로 들어서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덧 칠장산이 멀지 않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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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돈재가 내려다보이는 능선>

  엽둔고개라고도 부르는 엽둔재는 34번 국도가 입장과 진천을 연결하여 주는 잘 닦인 도로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매우 험준하고 깊숙하여 도적떼들의 소굴이 있었는데 엽전을 가진 사람들은 모조리 엽전을 빼앗겨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 신라시대에는 백제와 국경을 이루고 있었던 곳이기에 병정들이 진을 치고 주둔하였던 곳이 바로 진천방향의 서수마을인데 조선시대이후 서수원(西水院)이라고 하는 당시의 터가 남아 있어 옛날 역마로 교통의 편의와 통신의 주역을 맡았던 곳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일이다. 안성사람으로 홍 계남이 의병 수천 명을 모군(募軍) 하여 여기에 주둔하면서 왜군과 한바탕 싸워서 이겼는데 왜군과 싸울 당시 쌓아놓은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엽돈재에서 입장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니 서운산 정상 5.4km라는 이정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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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돈재의 이정표>

  서운산으로 향한다. 길은 산길의 고속도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잘 닦여 있다. 서운산을 찾는 등산객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게다. 산길의 오른쪽은 충청북도 진천군이고 왼쪽은 경기도 안성시다.

  서운산의 왼쪽 산기슭에는 고려 원종 6년(1265년)에 명본 대사가 세웠다는 청룡사가 자리잡고 있다. 처음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는 이름으로 개창했는데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중창할 때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내리는 청룡을 보았다고 해서 절 이름이 서운산 청룡사로 바뀌었다. 청룡사는 오히려 안성 남사당의 본거지가 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1860년 청룡사의 동쪽 골짜기인 험한골은 살구나무 군락지로 행화촌으로 불리었는데 이곳에 바우덕이를 비롯한 안성 남사당 단원들이 모여 살았다. 바우덕이는 15세 나이로 조선시대 유일의 여자 꼭두새로 추대되어 소고춤, 줄타기 등의 연예팀을 이끌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당시에는 경복궁을 중건하는 일꾼들을 위로하는 위문공연을 하며 찬사를 받기도 했는데 그의 나이 23세 때 병으로 죽었다. 청룡리에는 바우덕이의 묘가 있거니와 이후 안성에는 남사당패로 인한 풍물고장이 되었으며 남사당 풍물은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경기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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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

 

  12:00

  서운산 정상(547.4m)에 닿는다. 상서로운 구름이 산을 뒤덮었다는 서운산에는 한낮의 조금 더운 기온에도 불구하고 가족단위의 산행객이 산길을 메운다. 오랜만에 보는 산길의 왁자함이 오히려 어색해진다. 정상 표지목 옆에는 서운산성에 대한 안내문도 서 있다.

  “이 성은 차령산맥의 서운산에서 뻗은 서쪽 능선에 서남방향으로 해발 535m에서 460m 지점까지 골짜기처럼 비탈진 사면을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싼 반면식 토축산성이다. <중략> 성안에는 우물터, 절터와 돌부처가 있으며 용굴이라 불리는 작은 동굴도 있다. 성안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이라 여겨지는데 임진왜란 때에 홍계남 장군이 수축하여 방어전을 전개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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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산 정상>

  서운산성 안내문에 나오는 차령산맥 어쩌고 하는 말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돌아 나온다. 정상은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조망은 없으며 먼저 자리 잡은 등산객들이 정상 주변을 차지하고 있어서 나의 갈 길을 재촉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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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고개 이정표>

  이젠 배티고개까지 하산길이 남았다. 오른쪽 사면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진천군 땅의 산세가 저 멀리 바라보인다. 소나무가 우람한 가까운 곳에서부터 희미하지만 푸른 색 옷을 입고 있는 저 먼 곳까지 우리나라의 산들은 이제 많이 푸르러졌다. 산길을 걸어도 햇볕에 노출될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숲도 우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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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에 본 산세>

  ‘정감록’에는 십승지(十勝地)가 있다고 한다. 난리가 났을 때 피란을 가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10군데의 장소이다. 십승지의 첫 번째는 경북 풍기의 차암 금계촌인데 산골 오지임에도 명당이란다. 두 번째는 안동의 춘양면, 셋째는 속리산 아래 증항 근처, 넷째는 예천의 금당동 북쪽이다. 다섯째는 남원 운봉의 동점촌 주변이고 여섯째는 공주의 유구, 마곡의 두 물줄기 사이이다. 일곱째는 강원도 영월의 정동쪽 상류이고 여덟째는 무주 무풍의 북쪽 골짜기다. 이곳은 덕유산 자락이다. 아홉째는 전북 부안의 호암아래와 변산 동쪽이며 열 번째는 가야산 남쪽의 만수동이다.

  지금 바라보는 진천 방향의 배티고개 아래 양백리는 어떨까. 양백리 계곡은 산세가 수려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수목이 울창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어느 골짜기나 개간을 하여 촌락이 형성되어 있는데 옛날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서 이곳에 은거하려는 선비들이나 정감록(鄭鑑錄)에 매혹되어 피란지를 찾던 인사들이 이 고장을 찾아서 많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상류에 위치한 마을을 상백(上白), 하류에 위치한 마을을 하백(下白)이라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 살았다 하여 양백(兩白)이라 하였고, 청학이 살던 곳이라 하여 지금도 청학동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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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쉼터를 지나 배티고개로 향한다.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가까운 곳에 오늘의 산행 종착지가 있는 것 같다.

 

  12:50

  배티 고개에 닿는다. 그런데 고갯마루에 있는 표지판에는 이티재(梨峙)로 표기되어 있다. 배티 고개는 양백리 동북 계곡을 따라 안성시로 가는 고갯길이다. 조선시대 반역의 뜻을 품은 신천영과 과거 북병사를 지냈던 이순곤의 의병과의 싸움에서 신천영이 이 고개에서 패하자 ‘패티’라고 부르던 고개 이름이 ‘배티’로 변해 불리고 있다는 설과 마을 어귀에 꿀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 고개’로 불리다가 이치(梨峙)라는 한자로 표기하고 그 훈독인 배티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인근에는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인 교우촌인 배티성지가 자리해 있어서 매년 전국의 교도들이 이곳까지 순례행군을 하는 곳이다.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20~1830년대 무렵으로 1839년 기해박해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이 순교한 뒤부터다.

  1857년 무렵에는 배티와 절골 주변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병인박해로 배티 인근의 교우촌에 큰 타격을 주어 1866~1868년 사이에 순교한 이는 모두 27명에 이른다.

  1870년 무렵 흩어진 신자들이 다시 모여 교우촌을 재건하였으며 1970년 청주교구에서는 인근의 교우촌과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을 조사하여 현재의 위치에 경당을 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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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고개>

  배티고개에서 산행을 끝내고 안성시의 택시를 불러 각원사로 되돌아가는데 기온이 올라가는 한낮은 여름을 방불케 한다.<2008.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