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정맥의 맥을 이은 추월산 그곳에서 -


  12월 첫 산행으로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달래고자 했다. 오늘 하루도 아무런 대가없이 그저 받은 날이지만 얼마나 소중한 '새로운 날'인가를 새삼 느껴보며 조용히 창가로 다가갔다. 저리도록 사무치는 그리움이 문풍지의 작은 떨림 같은 간절함으로 되살아난다. 옷소매를 파고드는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친구 삼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자 바람의 고향인 산으로, 산으로 나는 벌써 달려가고 있었다.


   정안휴게소에서 우연히 무수한 검정양복의 사람들을 접하면서 다시 한번 삶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삶의 끝에서의 때늦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창조주의 뜻하심에 순응하면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야할 자신을 되새겨보았다.


   오늘은 전남5대 명산중의 하나로 전남 담양군과 전북 순창군의 경계에 소재한 추월산을 오르기로 했다. 추월산은 '가을의 보름달이 추월산에 닿을 것같이 드높은 산'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담양호와 보리암정상을 이루는 기암괴석을 품은 덕에 그 아름다움의 진가를 더한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산이다. 구름과 가랑비의 짓궂은 장난이 계속되었지만 길게 뻗은 전남.북 경계의 추월산줄기가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담양군 용치리 부리기고개에 내리자 날씨가 활짝 개었다.


   견양동 어귀에 들어서자 눈앞에 보기 드문 뽕나무밭이 펼쳐졌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어린 가지 하나하나에 들어앉은 잎눈, 그 잎눈을 들여보자 새까만 오디와 누에고치가 보인다. 뻐꾸기 우는 봄이 무르익으면 오디로 번데기로 아이들을 부르겠지........ 마을 곳곳에 자리잡은 감나무가 빨간 구슬을 푸른 하늘에 매달아놓고 유혹해대고 낯선 우리들의 출현에 멍멍이는 조용한 마을이 떠나가도록 짖어댄다.


   '허 참! 그놈 예쁘게 생겨 가지고...... 산 좋아하는 사람과 수상한 사람의 구별도 못하나!'


  일손이 부족한 탓인지 감나무마다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원래 감나무는 약해서 올라가면 쉬 가지가 갈라져서 위험하다. 작아서 상품성이 떨어진다 손치더라도 통째로 내버려둔 감이 너무 아깝다. 일손이 모자라서 아예 수확을 포기한 모양이다. 옛 솜씨를 발휘해 몇 개를 따보기도 했지만 땅에 떨어져서는 푹 퍼져버린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문바우골 개울바닥은 콘크리트바닥처럼 보였는데 실은 석회암 같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라 그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감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마을 어귀를 지나 오른쪽 산기슭으로 돌아서자 무능기재로 올라가는 본격적인 등산로가 나타났다. 비에 젖어 촉촉한 낙엽, 이 산은 오늘 나에게 어떤 기쁨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자 모든 것이 고마움과 아름다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디카의 쉼 없는 작동에 비례하여 산행에 점차 몰입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시작된 깔딱 고개, 남들보다 두세 배 바쁜 나만의 비밀(?)을 간직하며 떡갈나무 낙엽을 밟고 나아가자 중턱부터는 심심찮게 암벽이 나타났다. 암벽에 새파랗게 돋아난 이끼. 그곳에서 지난 여름 내연산 12폭을 이루는 계곡에서 보았던 잘생긴 그 이끼가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었다. 계절의 변화에 순응해서 일까. 조금은 빛 바랜 이끼가 그래도 푸른색을 유지하며 바위틈 깊숙이 뿌리박고 있었다.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끼처럼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곁에 두고 오래오래 함께 하고픈 마음 간절했지만.......


   주능선을 오르기 전 보조능선에 올라서자 왼쪽으로 담양호가 자신이 키워놓은 구름을 껴안으려는 듯, 그 모습을 드러내고 오른쪽의 앙상한 나뭇가지사이로 깃대봉이 그 웅장함을 드러낸다. 겨울 산의 묘미가 뭐니뭐니해도 시야가 훤히 트여 모든 걸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인데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수시로 햇살을 가렸다가 사라지는 변덕쟁이 구름이 얄밉기는 하지만 비를 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용서된다. 겨울나무의 건강미를 느끼며 깃대봉의 아름다움에 점차 매료되어갔다.


   무능기재를 향해 가다가 구름을 비집고 나온 햇살을 등지고 아름다운 추월산의 등줄기를 디카에 주워 담았다. 멀리서 들여오는 "다래"소리에 소속감을 확인하고 주능선으로 올라섰다.


호남정맥을 이루는 산인만큼,


이 고장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산인만큼,


수리봉가는 능선은 수많은 발자국으로 그 유명세를 자랑해댔다. 어딘가 들려 올 것 같은 남도사람들의 노랫가락이 오늘은 어디서든 들려오지 않는다. 노랫가락도 겨울잠을 자는 것일까. 진달래의 가느다란 줄기가 찬바람에 감기든 것일까 하얗게 새하얗게 줄기가 변해갔다.


잎을 보낸 아쉬움이 그리움 되어


잘생긴 원래 모습 생각하며 한숨짓는데


어디 갔다 온 것일까 작년 그 바람


아무도 찾지 않는 추월능선 떠나자고 유혹하지만


연분홍 날 기다릴 그 님의 숨결 잊을 수 없네.


    담양호가 점점 그 위용을 더하고 크고 작은 저수지가 골짜기에 숨었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호수가 인접해서일까 안개성 구름이 계속 따라 다님이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햇살은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골고루 골짜기 골짜기를 비추어준다.


   독수리형상을 닮았다는 수리봉에 오르자 사면이 훤히 트여 가슴이 후련하다. 큰 줄기 작은 줄기 하나하나 모여들어 힘줄처럼 얽혀진 산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에 뜬 것일까 물을 안은 것일까 담양호가 커져만 간다. 하늘재를 향해 내려가는데 거쳐온 수리봉이 햇살을 모셔놓고 유혹을 한다. 잘생긴 자신을 다시 보아달라고. 암릉의 능선사이로 철쭉과 진달래 그리고 떡갈나무가 번갈아 가며 지루함을 달래준다.


   춤추듯 굽이굽이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추월산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제4등산로의 표지판을 지나자 추월산(731m) 정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기대보단 작은 산정은 금속의 표지기둥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다. 추월산 암봉의 극치가 보리암 정상인만큼 그곳에서 진정한 정상에서의 쾌감을 느껴보기로 했다. 정상에서 오른쪽 방향의 밀재로 내려가는 길과 갈라져서 담양호를 끼고 나아가는 왼쪽 등산로로 향했다. 다시 짙어지는 안개로 호수는 완전히 그 색깔을 잃어버리고 그곳에 앙상한 나뭇가지만을 불러놓았다. 순간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연회색바탕에 은빛 나는 나뭇가지의 수많은 아우성! 그 순간을 놓칠 내가 아니다.


   등산로가 조금은 젖어있어서 내리막길이 생각보다 미끄러웠다. 곳곳에 설치된 로프를 의지하며 작은 능선을 몇 개 넘어 보리암정상과 쌍태리로 갈라지는 이정표를 지나자 헬기장이 나타났다. 그때다 갑자기 후드득거리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야! 내릴 때 내리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줄 수 없냐! 다행히 2.3분이 채 지나지 않아 비는 그치고 하늘은 변덕쟁이처럼 햇살을 또다시 불러 놓았다.


   두 번째 헬기장을 지나 소나무군락을 지나자 눈앞에 오늘 산행의 클라이막스가 될 보리암 정상인 듯한 봉우리가 나타났다. 암릉을 로프에 의지해서 올라가자 정상에서 갑자기


 "아저씨! 보리암이 어데 있능교."


 "어덴지 찾지를 못하겐네 예. 우리 산악회 아저씨들은 마아 다 가고 우리들만 남았는데 도통 어딘지 모르겐네 예"


진주의 어느 산악회를 따라왔다는 50대후반의 아주머니 세분과 60대 아저씨 한 분이 길을 잘못 들어왔다며 당황해 했다. 단지 보리암만을 들를 목적으로 올라오다 길을 잃어버렸다한다. 중턱에 보이는 보리암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저씨! 고맙쉼더. 정말 고맙쉼데이."


진한 경상도사투리가 정상에 울려 퍼졌다.


   누가 말했던가 담양호를 불가사리 모양이라고. 내가 보기에는 골짜기 골짜기를 파고들어선 담양호의 모습이 열 십자 모양을 길게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깎아지른 암벽사이에 철계단과 사다리 그리고 로프가 설치되어있어 자연미가 없어 보였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안전이 최우선 고려되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생각보다 경사가 심했는데 중턱쯤 내려가자 '정상500m, 보리암100m'라는 푯말이 나타났다. 왜 모두들 '보리암'을 그토록 강조하는지 궁금하여 보리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보리암은 깎아지른 절벽에 지은 암자였는데 험준한 좁은 공간에 마치 제비집을 연상하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는 것과. 그곳이 임진왜란 때 김덕령장군의 부인인 홍양이씨가 왜군에 쫓기자 몸을 던져 순절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산 까치의 아름다운 무늬를 보는 행운을 덤으로 얻고 다시 하산을 시작했다. 대피소 역할을 하는 동굴을 구경하고 내려오다 하늘을 쳐다보니 보리암에 보낼 물건을 옮겨 나르는 케이블카가 운행 중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 험준한 곳까지 사람의 힘으로 물건을 나르기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널따란 하산 길 양옆에 쌓아만든 서너 개의 돌무더기 탑을 지나자 동절기등산로를 표시해 놓은「추월산등산 안내도」가 나타났다.


   소나무숲터널을 빠져나와 국민관광단지인 추월산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코앞에 담양호가 살아 춤춘다. 바람에 신이 난 듯 호수는 쉼없이 넘실거리고 분위기에 약한 나는 그 모습에 끌리어 호숫가로 갔다. 과연 담양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깨끗한 담수호란 명성답게 깨끗하기 그지없다. 그 옛날 지리시간에 '담양 죽세공'이라고 외웠던 것이 헛되지 않게, 호수 옆에 자생한 울창한 대나무가 내가 바로 담양대나무라며 반가이 맞이해 준다.(2003년12월초순)


ays0828@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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