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황산(荒山)벌의 설원 [여원재-고남산-매요리]

오랜만에 겨울 백두대간 길을 나섰습니다. 어둠이 걷히며 차창 밖으로는 금방 잠에서 깨어난 겨울 아침 풍경이 산으로 나서는 나그네를 수줍게 맞이하였습니다. 잎을 모두 떨군 벌거벗은 가지 사이에 얹혀있는 까치집, 가을걷이를 마친 한가한 들녘, 그리고 옹기종기한 지붕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침 연기, 무엇보다도 전라도 땅에 이르자 산과 들이 눈으로 덮였는데, 엊그제 내렸다는 함박눈이 겨울 풍경화를 한층 더 아름답게 칠했던 것입니다.

인월을 지나 운봉에서 남원으로 넘어가는 24번 국도는 여원재를 넘는데, 그 여원재에서 시작되는 백두대간 길도 뽀드득 소리가 나는 눈길이었습니다. 여원재를 지나 고남산(해발 846.4미터)에 오르는데는 힘든 가파름이었으나 산마루의 통신 시설 진입로(포장길)를 벗어나서는 솔 숲 사이로 뚫어진 편안한 산길이었습니다. 하얀 눈길 위에는 솔가리가 뿌려져 있었는데, 영변의 약산에 뿌려진 진달래가 연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눈길에서 당신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산길 좌우로 이따금씩 내다보이는 감동적인 풍광을 모두 옮길 수가 없습니다. 대간 길 오른 쪽으로 펼쳐진 지리산의 아득한 봉우리들로부터 가까이 솟은 바래봉까지의 연봉(連峰)들이 장엄하기도 하고 신비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바래봉 기슭의 광활한 황산벌(荒山伐)은 고려 말에 이성계 장군이 왜군을 격퇴했던 황산 대첩(荒山大捷)의 유서 깊은 현장이며, 멀리는 삼국시대에 나제(羅濟) 간의 세력 다툼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역사의 현장은 전라북도에서 운영하는 운봉 목장이 들어섰는데 목초지(牧草地)가 하얀 이불을 덮고 겨울잠을 자듯 고요해서 보는 눈이 덩달아 편안했습니다. 아름다운 눈길에서 즐거운 연인(戀人) 한 쌍을 만났는데 그들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대간에서는, 더구나 설원에서는 모두가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구-함양-인월] [인월-여원재]
[여원재-고남산-매요리]
[매요리-인월] [인월-함양-대구]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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