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하지 않을  같지만 중요한 산줄기, 금남정맥

 

근래 대간·정맥 산행이 보편화되고 있고, 이와 아울러 기맥과 지맥(이에 대한 정의는 공론화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산행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학문적으로는 산경표를 근간으로 하여 현재의 상황에 맞게 산줄기를 재정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지질학적인 산줄기(산맥) 생성 연대, 지각 생성 작용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히말라야산맥, 로키산맥처럼 산맥 중간중간에 강이나 하천이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한편 산경표에 나타난 것처럼 지리적인 개념만이 아니라 생활권이라는 인문적인 요소를 감안하는 산줄기 개념이 옛날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우리나라의 산맥 체계를 지배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시대부터 근래까지 이러한 고유의 산맥 체계가 잊혀져 있다가 이우형 선생을 위시한 여러 선각자들의 노고에 의하여 ‘1대간 1정간 13정맥이라는 우리의 인문지리적인 산줄기 체계가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산은 물을 가르지 않는다는 기본원칙과 산줄기는 생활권을 분리한다는 부대원칙(?) 따라 산경표에서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정맥을 주요 강의 이름과 ‘·또는 ‘’(‘ 없음) 방향을 따서 이름을 붙였고, 산줄기는 생활권(또는 강의 유역) 가르게끔 정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한북정맥, 금북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 낙남정맥, 등의 예에서 보듯이 정맥이 반드시  하구의 북단이나 남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있습니다.  하구에서 끝나는 정간·정맥은 장백정간, 한남정맥, 낙동정맥  개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유의 산맥 체계는 생활권을 중시했음을   있습니다.

 

이제, 정맥중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금남정맥에 대하여 저의 견해을 피력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금남정맥은  길이가 다른 정맥에 비하여 짧기도 하려니와 지금의 금강 남쪽을 온전히 두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산경표(신경준 선생) 비합리성까지 들먹이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중요시되는 계룡산을 지나가게 하기 위하여 산줄기를 의도적으로 돌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강을 기준으로 보면  견해는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옛날 삼국시대 이래로 산경표의 금남정맥이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산줄기보다 민족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삼국시대에 한강을 지배하기 위하여 고구려, 신라, 백제가  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백제가 먼저 한강을 지배하다가 고구려와,  뒤로 신라에 의하여 빼앗긴 이후 삼국시대 말기에는 금강이 백제의 실제적인 국경이 되었습니다. 물론 백제가 영토를 수복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금강을 넘어 북상하기는 했지만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후백제도 금강 이남의 (호남) 기반으로 하여 한강까지 세력을 넓혔다가 결국 내분과 패전에 의하여 금강 이남으로 물러섰다가 고려에 망하였습니다. 따라서 금강은 한강 다음으로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로부터 금강이 국가 경계선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기는 했지만 생활권(, 충청과 호남) 가르는 실제적인 역할은 금남정맥이 담당하였음은 여러 역사적인 사실로부터   있습니다.  예를  가지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백제와 후백제가 망할  최후의 전장은 황산벌(지금의 논산)이었습니다. , 충청지방에서 금남정맥을 넘어 처음으로 호남땅으로 들어선 곳입니다.

②후백제왕 견훤의 무덤은 논산에 있습니다. 野史이긴 하지만 견훤이 임종할  무진주(전주) 바라보는 곳에 묻어달라고 했으며, 따라서 지금의 논산은 후삼국과 고려초기에 호남지방에 속하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③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에 의하여 호남지방으로 진격하지 못한 왜군이 이미 점령한 충청지방으로부터 호남지방으로 진격하려고 하다가 梨峙전투에서 권율장군에게 패하여 좌절됩니다.  梨峙가 바로 대둔산 동쪽의 배티입니다. , 금남정맥이 지나는 배티는 충청(충청남도) 호남(전라북도) 경계짓는 고개인 것입니다.

④동학농민혁명때 호남지방을 평정한 농민군이 충청지방으로 진격하려다가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여  기도가 좌절됩니다. 우금치는 금남정맥에서 불과  km 북방입니다.

⑤금남정맥이  맥을 다하는 부여지방에서는 해발고도가 불과 100~200m 불과합니다. 그러나, 정맥을 따라 곳곳에 성곽을 쌓은 흔적이 보입니다. , 전쟁의 방어선 또는 생활권 분리라는 역할을  것을   있습니다.

 

왕사봉에서 금강 남단으로 이어지는 소위 금남기맥(일부는 금강정맥으로 부르기도 함)은 미륵산을 지나서부터는 그 산줄기가 미미하여(즉, 평야지대를 이루어) 생활권을 분리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의 충청도와 전라도(실제로는 전라북도)의 경계선을 보면 거의 금남정맥과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산경표의 금남정맥은 어떠한 정맥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 채, 현재의 금강하구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지위를 격하시키려는 의도는 옳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연하자면, 만일 강을 중심으로 정맥이나 기맥을 재편성하려 한다면 (예를 들어)남덕유산에서 진양호로 이어지는 소위 진양기맥(남강기맥)이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합수점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기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