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은 가봤을 제주도. 어쩌면 누구나 알고 있기에 제대로 모르는 곳인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를 아는 이는 많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보다 관광지로서 위상은 떨어졌지만 제주도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특히 겨울 제주는 다양한 컬러를 간직하고 있다. 푸른 바다와 흰눈 쌓인 산, 싱싱한 감귤의 오렌지빛과 화산석의 검은색이 만나는 그곳에서 색의 향연이 열린다. 언제나 설렘과 낭만이 교차하는 제주도에서 새해 새출발을 다짐해 보자.

# 화이트:백색의 지상낙원 눈 덮인 한라산

한라산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남한 최고봉(1950m)답게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다른 볼거리들을 제쳐 놓고 산행을 선택할 만큼 등산 마니아가 아니라면 대개 먼발치에서 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렇다고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잘 정비된 등산로를 이용하면 하루 일정으로 정상 등정이 가능하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이 신년 소망을 기원하러 한라산에 오른다. 산 중턱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이면서 쪽빛 제주 바다와 우뚝 솟은 정상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군데군데 볼록하게 솟은 오름(기생화산)들은 꼭 한라산의 여드름 같다.


특히 눈 쌓인 한라산은 그 자체로 진경이다. 사방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마치 유럽의 알프스 어디쯤에 있는 착각이 든다. 바람이라도 불면 쌓인 눈들이 바람결에 흩날리며 환상적인 설무(雪舞)를 보여준다.

한라산 등반 코스는 어리목·영실·성판악·관음사 코스 등 총 4개. 이 중 어리목과 영실 코스는 일부 구간 휴식년제를 시행 중이어서 정상 등반이 통제되고 있다. 코스별로 입산과 하산 가능 시간이 다르다. 어리목(064)713-9950, 영실(064)747-9950, 성판악(064)725-9950, 관음사(064)756-9950

# 그린:평화를 생각하는 알뜨르비행장

서남부 모슬포 일대는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일제는 이곳을 발판 삼아 대륙 침략을 꾀했으며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본토 사수를 위한 방어 거점으로 사용했다. 일제의 전략요충지로서 250만㎡에 달하는 부지 곳곳에는 일제의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다. 알뜨르(아래쪽에 있는 들이라는 뜻의 제주방언)비행장을 비롯해 비행기 격납고·지하벙커·관제탑·카이텐(자살특공어뢰정) 기지·진지 동굴 등이 있다. 일제의 다양한 침략전쟁 시설이 이처럼 한곳에 집약된 곳도 없다.


잔디 깔린 알뜨르 활주로에 들어서면 황량한 느낌이 온 몸을 압도한다. 포탄공격을 받았을 때 복구를 빨리 하려고 활주로를 포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중국 상해를 폭격한 비행기들이 떴다. 주변에는 20여개의 격납고가 온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다. 전쟁 말기 가미카제호 은닉장소로도 쓰였다. 일제는 섬 전체를 군사요새화하면서 제주도민은 물론 멀리 전라도 사람들까지 징용했다고 한다. 인근 가마오름 평화박물관에 가면 미로처럼 얽힌 총연장 2㎞에 이르는 지하 군사 갱도가 있는데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 2005년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제주도는 앞으로 서남부 일대를 평화투어코스로 개발할 계획이다. 평화박물관 (064)772-2500

# 레드:하늘 붉게 물들이는 일출과 일몰

섬을 반으로 나눠 동쪽은 일출, 서쪽은 일몰을 볼 수 있다. 산이건 바다건, 뜨는 해든 지는 해든 모두 그림이 된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일출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하고 구름도 많아서다. 보기 힘들지만 그 광경은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장관이다. 그러니 짧은 여행기간 중 일출·일몰을 보려면 ‘천운’이 따라야 한다.

제주의 해돋이 명소는 역시 성산 일출봉이다. 연초에도 새해 일출을 보려고 수많은 인파가 이곳을 찾았다. 구름을 뚫고 탁 트인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면 한 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슬포 앞 형제섬, 용두암, 우도 등도 소문난 일출 포인트다.


서귀포에 있는 외돌개는 일몰 감상지로 유명하다. 약 150만년 전 화산 폭발로 생성됐는데, 뭍에서 떨어져 바다에 외롭게 서 있다고 해서 외돌개란 이름이 붙었다. 섬 꼭대기에는 해송이 무리를 이루고 해넘이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서쪽 끄트머리인 수월봉도 제격이다. 하루 일과를 마친 태양이 차귀도 앞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장면이 펼쳐진다.

# 오렌지:지금 딱 좋은 싱싱한 감귤 체험

제주도에 가면 꼭 해봐야 할 게 바로 감귤따기 체험이다. 특히 지금 가면 제주 감귤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원래 11월 말이면 거의 수확이 끝나는데, 날씨가 안 좋아 한 달 이상 늦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당도는 더 좋아졌다. 나무에서 바로 따 까 먹는 귤 맛은 시장에서 사먹는 것과 확실히 다르다. 주렁주렁 매달린 오렌지빛 귤들이 진녹색의 이파리와 상큼한 조화를 이룬다. 올해는 2월 말까지 체험이 가능하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감귤체험’이라고 써붙인 푯말이 자주 눈에 띈다. 농장들이 길가 곳곳에 들어서 있다. 어디든지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다면 주저없이 들어가면 된다. 특히 아이들과 체험하기 안성맞춤이다. 감귤나무는 키가 작아서 아이들도 쉽게 딸 수 있다. 체험비용은 5000∼7000원선. 무료인 곳도 있다.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는 대신 안에서 무제한 먹을 수 있는 농장도 많다.


귤을 딸 때 꼭 지켜야 할 사항. 반드시 전지가위를 사용해 꼭지 부분을 잘라야 한다. 손으로 따면 꼭지는 귤나무에 붙은 채 귤만 빠지는데 이럴 경우 꼭지가 썩어 들어가 나무에도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귤림성(064)739-3331

# 블랙:곳곳에 펼쳐진 현무암 돌담길

돌·바람·여자가 많다는 제주도.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건 역시 돌이다. 현무암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화산석이라고 알려졌지만, 여기서는 말 그대로 지천에 널린 흔하디흔한 돌이다. 돌과 더불어 살다가 돌로 돌아간다고 할 만큼 제주 사람들과 돌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돌을 캐내 농경지를 만들었고 그 캐낸 돌로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만들었다. 거센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곳곳에 돌담을 쌓기도 했다. 이름도 다양하다. 밭을 보호하려고 쌓으면 밭담, 집 안으로 들어가는 올래(진입로) 돌담은 울담이다.

이런 돌담길이 이제는 운치 있는 공간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울퉁불퉁한 검은색 돌덩이로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듯한 돌담길이 옛 정취를 떠올리며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 설촌마을이 대표적인 곳이다. 이 마을은 현무암을 한 줄로 쌓은 밭담과 돌담이 공존하는데 모두 합치면 무려 10㎞에 이른다. 또 대부분 돌로만 만들어져 흔히 볼 수 있는 토석담(돌과 흙이 섞여 있는 돌담)과도 구분된다. 한때 문화재청이 설촌마을 돌담길을 문화재로 등록하려고 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