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비봉, 응봉능선 산행기/ 포토 에세이
(6호선 독바위역-정암사-족도리봉-향로봉-비봉-응봉능선/2004.12.14/내 아내의 유랑의 남편과)

북한산을 가기 위해 3호선을 타고 가다가 연신내역에서 6호선을 갈아타고 독바위역에서 내렸습니다. 며칠 전에 의상봉 능선 산행을 하다가 날이 늦어 대남문에서 그냥 하산하느라 비봉을 못간 것이 못내 아쉬워 하다가 가는 길입니다.
북한산을 가는 길은 구파발이나 연신내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길도 있지만, 독바위역에서는 그 버스 기다리는 시간에 매표소까지 걸어서 가는 비봉 길이 있습니다.
역 광장에 안내판이 있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등산객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왜 독바위라 하였을까요?
독바위는 이 동네 옛 이름이 독박굴이라는 데서 유래합니다. ‘독박굴’은 ‘독바위굴’의 줄임 말로 독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었던 원두표 장군이 유달리 바위가 많아 숨기 편한 이곳에 거사 직전까지 숨어 지내던 ‘덕바위굴’의 이름에서 유래 되었다고도 합니다.
독바위라는 이름은 지리산에도 주검산에 등에도 있는 이름입니다. 옛날은 항아리와 독을 많이 쓰던 시절이었거든요.
역 구내에서 역이름 답게 장석민 산 사진작가의 북한산 기암 사진전을 보는 것도 운치지가 있지만 어두컴컴한 조잡한 복사판인 것이 아쉬움을 남게 합니다.


족두리 봉을 가려면 정암사 매표소를 통하여 가는 것이 가깝습니다.
정암사는 메주를 매달아 놓은 것이 운치를 주는 것 외에는 암자라 하기에도 초라한 판잣집입니다. 거기 추위와 사랑에 떨고 있는 마음씨 착한 애완견이 있더군요.



북한산안내도가 있는 것을 보니 정암사매표소입니다. 입구에 있는 안내판은 산꾼이 시작해야하는 하루의 즐거운 이정표입니다. 오는 길에 어디로 가면 입장료 내지 않고 들어가는 곳이냐고 묻던 아낙내들이 억울하다는 듯이 입장료를 내고 있습니다.

족두리봉이 보입니다.
족두리란 오늘날 신식 혼례를 치고 폐백을 드릴 때, 연둣빛 깉에 자줏빛 깃을 단 원삼을 입고 머리에 쓰던 은근한 여섯 모가 들어나는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입니다. 원 나라의 풍습이 우리의 풍습으로 화한 것으로 옛날에는 예복을 갖출 때에 부녀자들이 쓰던 것이지요.

쇠막대 줄을 잡고 오른 족도리 봉(367m)의 정상은 커다란 하나의 바위입니다. 다른 위치에서 보면 수리 새와 같다 하여 수리 봉이라고도 한답니다. 날씨가 맑은데다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가 등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입니다.

멀리 남산 뒤에는 청계산이, 그 오른쪽에는 관악산이 운무 사이에 두덩실 뜬 것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카메라를 맞추어보지만 망원 아닌 내 디카에은 꿈일 뿐입니다.

정상 위에 있는 멋진 바위도 그 경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비둘기가 등산객들을 졸졸 쫓아다닙니다. 아침먹이를 달라고 비둘기들이 족두리봉에 출장을 온 것입니다.

산꾼은 왔던 길로 다시 가는 것이 아니라고, 도와준다고 하는 산꾼 따라 바위 타고 내려가다 보니 오금이 떨려서 중간에 포기를 하고 왔던 길로 내려와 우회하여 갑니다. 그 지름 바위 길을 젊은이들은 서서 성큼성큼 걸어서 내려옵니다. 어떤 이는 나보란 듯이 뒷걸음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이곳은 2002년에는 6명이 부상당하고, 작년에는 1명이 죽고 11명이 부상당한 곳인데 나 같은 사람이 육신을 걸고 도전하면 안 되지요.

향로봉 가는 길입니다. 향로봉이 가까와 질수록 겁이 앞섭니다. 초보운전자가 안전히 운행할 수 있는 것은 서행하기 때문입니다. 노인의 행동이 느린 것도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기도 우회로로 갑니다. 3년 동안 5명의 사망자에 부상자가 19명이라니 고희를 1년 앞둔 나이에 언감생심(焉敢生心)이나 한 일입니까.
앞으로도 더 가야할 산이 많은데, 더 써야할 글이 많은데, 더 마셔야 할 술이 남았는데 여기서 가면 안 되지요. 그러나 젊은 시절에 등산학교에 한번이라도 다녀볼 걸 하는 후회가 있지만 다 물 건너간 지난 이야기입니다.
향로봉정상입니다. 우회하다 보니 안전하게 오를 수 있는 향로봉(535m) 정상을 거꾸로 이렇게 쉽게 올라왔습니다. 여기가 가장 높은데 저 아래가 정상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높이로 정상을 따지지 않고 오르기 힘든 그 곳을 정상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향로봉 정상 돌길은 왼쪽이 족두리봉이고, 오른쪽에 삼각산이 두 계곡을 끼고 멀리 보이는 능선길입니다. 그 능선을 버리고 다시 뒤돌아 비봉을 향합니다.

능선 따라 가면 사모바위와 승가봉이 있고 그 먼 뒤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현봉, 문수사 뒤 봉우리 문수봉, 나한봉입니다.

비봉에도 위험표지가 있지만 여기는 꼭 가야 합니다. 생명을 걸고라도 진흥왕순수비를 보러 올라가야만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가서 할 일은 사진으로 남겨야 하겠다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젊어서 몇 번 올라가본 경험도 있어서입니다.

-천리안넷에서 퍼옴-
진흥왕순수비는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4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창녕(국보 제33호), 북한산(국보 제3호),이 남한에 마운령, 황초령에 두 개의 순수비가 북한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북한산비는 높이 155.1cm, 너비 79.5cm, 두께16.6cm로 지금껏은 모조품이고 옮길 당시에 부주의로 두 동강이 난 채로 지금은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비는 진흥왕대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환하여 왕이 이 지역을 순수 관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국보 제3호라는 비입니다.

나는 이 비봉에 올라올 때마다 유감을 가지고 내려갔습니다. 모방하여 만든 것이 모조품인데 이런 모조품도 있는 겁니까.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한 사각형의 돌에다가 진흥왕 순수비라고 썼을 뿐이니 원본과 크기만 비슷한 것을 어찌 모조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뜻있는 외국 학자나 여행가가 이를 본다면 이는 국가 망신입니다. 비봉이 애통할 일입니다. 순수비 모조품은 다시 세워야 합니다.

여기는 사모바위입니다. ‘사모(思慕)’가 아니라 ‘사모(紗帽)바위’입니다.
사모(紗帽)란 조선 시대 관리들이 평상시에 쓰던 관모(官帽)이지만 나라님이 혼례 날만은 서민 남정네들도 한번 써 보라고 허락한 것이 오늘날까지 혼례날 풍습이 되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산의 족두리바위와 사모바위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쌍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아내는 족두리에 나는 사모관대
그래서 아비 어미로 지금껏 삽니다.
우리도
사모 족두리 쓰고
회혼(回婚)을 맞고 싶은데-.
-늙다리 욕심



회혼(回婚)이 무엇이냐고요? 회갑(回甲) 같이 결혼한 지 육십년이 되는 날입니다. 회방(回傍)은 과거 급제한 지 60년이 되는 날이구요.
김신조 등의 북한괴뢰 1249부대가 침공한 이후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을 때 사모바위 근처에는 군막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 앞 공터에요.
욕심 같아서는 승가봉, 문수봉(727m)을 지나 백운대로 향하는 산성주능선을 타고 싶지만 지금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하는 늦은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산길은 처음 가보는 응봉능선길에 올랐습니다. 왼쪽의 진관사계곡으론 가봤지만, 오른쪽으로 삼천사계곡을 바라보며 삼천사로 빠지는 길은 처음이지요. 거기서 삼천사 마애석불이 보고 싶어서입니다.

사모바위에서 본 '북한산 안내도' 그림은 얼마 전 의상봉 능선 길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의상봉, 용철봉,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 등.

좌우가 탁 트린 하산하는 능선 길에는 진관사도 있지만 제법 멋진 바위가 많습니다.

삼각산에서 대남문을 향한 산성주능선을 보면서 앞으로 내려가야 할 저 뾰쪽한 323m의 '응봉'입니다. 그 기슭에서 오른쪽으로 되올라가야 하는 삼천사 마애미륵석가여래입상은 다음으로 기약해야 할 시간입니다.

삼천리매표소에서 보는 주요등산로 안내도는 나의 즐거운 오늘의 산행역사입니다.

[가곡/김연준 작사/박세원노래-청산에 살어리랏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