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길따라 강따라(II)

 

              

 

                         창녕군 이방면에서 양산시 원동면

                                  2004년 12월 12일

                             아내와 같이 승용차와 도보 

 

 

 

 

 

 

 

낙동강 두번째 탐사길.

벌써 강의 의미가 다시금 새롭게 다가온다.

아니, 그것은 잠재되었던 강에 관한 의식을 되새기는 과정인지 모른다.

 

 

 

회상.

 

어릴 적, 남강 촉석루 건너편의 모래톱과 대나무밭 그늘에서 놀며 자라던 추억은 한동안 의식

아래로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포크레인들의 소음과 함께 높디높아 보이던 큰 트럭들이 동네 둑을 드나들면서 모래를 퍼나

르기 시작하더니  백사장은 몇년 사이에  깡그리 없어져 버렸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수영을 하다 모래 파낸 웅덩이에 빠져 죽는 일이 심심찮게 생기고 호안공사

가 진행되면서 나의 남강은 점차 위험의 대상이 되어 멀어지게 되었다.

그 댓가로 남해안 고속도로가 생겼다고 어른들은 말하였다.

 

 

 

고향을 떠난 이후 이따금씩 집 앞의 남강가를 찾으면 옛날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산뜻하고, 쾌

적하게, 정비된 도심의 강이 흐르고 있다.

 

 

 

홍수.

둑에 서면 저만치 발아래로 무서운 붉은 물살이 굉음을 내면서 흘러갔다. 하얗고 누런, 그많

은 부유거품은 어디서 생겨난 것이었을까. 그 사이에서 빠르게 더 내려가는 수박덩이, 통채로

뽑힌 나무, 지붕.... 가재도구. 아직 산채로 꽥꽥거리며 죽음을 안고 떠내려가던 돼지에 탄식

을 하던..... 참담한 구경. 엄청나게  커져버린 강의 포효.

 

 

 

어릴 때 부터 늘 배운대로,  강은 곳곳에서 역사적 대결의 현장이었다.

산성이나 성곽과 같이,

강은 방어와 공세가 부딪혀온 대결과 긴장의 공간이었다.

 

 

 

그리하여......

강은 역사였고 삶이었고,

강은 전장이었고 터전이었고,

강은 추억이자 현실이라는 느낌이 번져온다. 탐사는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다시 우포 늪에서>

 

솔나루님께서 연속되는 나의 이동선을 가늠하시고 창녕 IC에서 우포 쪽으로 내려 주메리 소

목마을  포인트 몇 곳을 미리 일러주셨다.

 

 

아이들 어릴 적에 황소개구리 포획 차 이곳에 들렀던 아내는 옛날과 너무 다른 곳으로 변해

있는 광경에 저으기 놀란다.  날이 흐리다. 그렇다고 물안개가 번져 오르는 것도 아닌, 사진

찍기에 빛이 없어 고즈넉한 새벽풍경에만 만족해야겠다.

 

 

(아래사진 : 화왕산-관룡산-영취산 이어지는 산릉 위로 아침노을이 붉게 번지는 우포)

 

 

 

(아랫사진 : 엷은 서릿기운은 겨울의 길목에 선 절기를 느끼게 한다.)

 

 

(아래사진 : 흐린 새벽의 어두움은 몽환적 우수를 자아내고.)

 

 

(아래사진 : 햇살이 드는 하늘빛이 푸르나 더 이상 머물 수 없이 우포늪을 떠난다.)

 

 

(아래지도 : 창녕 IC 에서 내리면 대개 좌회전하여 대대리 우포늪으로 향하지만, 우회

하여 1080번 도로를 타고 주메리에서 아래 그림과 같이 분홍색 실선따라 차량 주행

할 수 있다. 들풀과 함께 왕버드나무 물오르는 봄철 새벽에 찾아도 좋겠다.)

(이하 모든 지도는 1:75,000 초정밀전국지도, 동아지도 제작, 랜덤하우스중앙 간, 2004년 3월 초판)

 

 

오늘 탐행의 시작은 우포이기도 하지만 강줄기의 시작점으로는 이방면과 청덕면을 잇는

적포다리 부터다. 의령과 합천을 오가면서 이미 여러번 다녔던 적포교.

 

 

 

 

<이방초등학교에서>

 

 

--적포다리로 가는 길에 이곳에 한번 들러보실래요?

 

 

솔나루님의 댓글 제안에 이끌려 이방초등학교를 찾았다.

1080 지방도와 67 번 지방도가 만나는 삼거리 건너편에 위치한 이 시골학교에 독특한

기념비가 있다고 하였다. 일요일 아침 한적한 시골학교에 들어서니 마음이 동심으로 맑아지

는 듯하였다. 조용하고 깔끔하다. 학생수가 모자라 폐교될 처지인데도 번듯한 스쿨버스도 있

었다.

 

산토끼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어서 어디를 가느냐......

 

우리 세대들이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운 노래인 산토끼를 작사·작곡한 사람은 이일래라는 분이

다. 그는 마산 출신으로 1930년 20대에 당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창녕 이방초등학교에

서 교사로 있을 때 ‘산토끼’ 를 만들었다. 그 뒤 고향인 마산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많은

사회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 경상북도 초대 상공국장을 지냈으며 서울과 양주군 등지에서 살

다가 1979년 7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일래는 마산출신이라 산호공원에 그의 ‘산토끼’ 시비를 세워 놓았고, 이일래가 ‘산토끼’를

만들었던 창녕 이방초등학교에도 역시 ‘산토끼 시비’가 있다. 그가 창녕 이방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1세 된 갓난 딸을 안고 가을 석양에 산기슭을 바라보던 중 산토끼 한 마리가 언덕 숲

가에 뛰노는 모습을 보고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동심을 가득 담은 맑은 정서를 보여주는 이 곡은 항일 사상이 담긴 애국의 노래로 ‘산토끼’ 는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를 상징한 것이었다며, 그는 어린 2세들이 더없이 자라도록 바라는

마음에서 이 노래를 지었으며 또 널리 퍼뜨렸다. 그러나 정작 노래를 만든 그는 한 번도 자기

를 내세운 바가 없었는데 노래를 만든 10년 뒤인 1938년 마산에서 호주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이 곡을 책에 실었다. <강동욱기자의 경남문인사랑방에서 일부내용 발췌>

  

 

 

(아래사진 : 이방초등학교에서. 산토끼의 배경도 따지고 보면 고난했던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젊은 교육자의 애틋한 감성인 것 같다.)

 

 

 

<적포교에서>

 

 

적포교에 다다라 성산리 쪽 강변 공사장에서 잠시 강을 전망하고 다리를 건넜다. 강폭이 넓으

니 다리도 꽤나 길다. 적포교를 지나 적포배수장 쪽으로 내달려 황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

을 확인하였으나 시야가 좋지않아 사진을 포기한다.

 

 

 

대신 정리한 인생역경서- "황강에서 북악까지"(천금성, 동서문화사. 1981)로 전두환 전대통령이

권력의 최상층으로 부상했음을 공표한 셈이지만 덕분에 덩달아 황강이 떳다.

혹자들은 남명 조식의 고향인근에서 대조적인 인물이 나왔다고 탄식하였는데, 공과를 떠나 황강

에서 북악까지의 카피는 매우 시적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방향을 되돌려 고갯마루에서 적포교를 바라보았다.

겨울해는 저 방향에서 뜰 것이라는 지난 주의 예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흐리지만 아침햇빛은 가히 눈부시다.

수면에 반사된 빛의 양이 더해서 차마 눈을 제대로 뜨고 볼 수 없는 광량이다. 

 

 

 

(아래사진 : 합천군 청덕면 대부배수장 인근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적포교. 건너편이

창녕군 이방면이다.)

 

 

(아래사진 : 적포교 위에서 상류쪽을 바라보다. 우측은 이방면 현창리 모래동 백사장)

 

 

 

낙동강의 서쪽, 의령군 낙서면과 낙동강의 동쪽인 시남리 구간은 접근하기에 마땅한 길이

없다. 그것은 지형상 한쪽은 산 아래의 가파른 경사이고, 반대쪽은 비교적 광범위하게 퇴적

된 사토지역이라 자연 주민의 왕래가 없게된 결과일 것이다. 강의 굴곡이 심한 곳에 이런 광

경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일단, 1008 번 지방도로를 통해 칠현리를 지나  강따라 거슬러 올라 박진나루 까지 진행한

다음, 다시 되내려와 1022 번 도로를 따라 남지읍으로 가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지도에 표기된 1022번 도로는 창아지를 지나 영아지 에서 더이상  길

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칠현리 지나 1021번 도로를 따라 남지읍으로 간 후 다시 거슬러 갔

다.

 

 

남지에서의 길도 용산리까지만 연결되어 있었다.

용산리에서 강을 거슬러 영아지까지는 사람만 갈수 있는 소로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하류 쪽으로는 1022번 도로 따라 강길을 이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양강 합수 지점 에도 지도와 달리   아직 길은 커녕 다리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박진교와 박진전투 기념관에서>

 

 

박진나루터를 가로 지르는 박진교는 사람과 차량의 왕래가 적어 아예 차에서 내려 다리를 걸

어 건넜다. 아래로 내려보니 내 다리가 후들거린다. 어릴 적 남강다리 위의 배수구 아래로 검

푸른 물이 흐르는 것을 볼 때마다 공포를 느꼈으면서도 지날 때 마다 보고 싶어했다.

 

 

검푸른 심연.  아득한 과거와 가늠할 수 없는 미래의 세계도 저 심연 속에 있다. 굳이 전생과

내생으로 이야기 하지 않아도 과거와 미래는 저런 검푸른 심연에 잠겨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려워 하면서도 내심 들여다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 심연과 심연 사이를 인생(현생의 삶이

라는 의미겠지만)이라고 표현한 그리스의 어느 작가를 이 순간에 미소로 흔쾌히 동의한다. 

 

 

(아래사진 : 박진다리 위에서)

 

 

(아래사진 : 박진교 위에서 내려본 낙동강. 좌측으로 대곡리와 반포리의 긴 백사장)

 

 

 

(아래사진 : 박진전투 기념탑-기념관 옆의 언덕에 차로로 올라갈 수 있다-, 기념관) 

 

 

박진전투 ; 이른 바 돌출부 전투(이 지역이 낙동강 흐름의 형태로 돌출부가 되기에 미군들

이 지명보다 지형적인 이름을 쓴 것이리라 추측해본다.)

 

1950년 여름이었다. 거침없는 기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계속하다 8월 초 낙동강을 끼고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북한군 제4사단 병력은 창녕군 남지읍 박진 지구로 대대적인 침투 작전을 폈다고 한다.

이에 맞서 국군과 미 24사단 병력이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양쪽의 인명피해만

나고 전투는 끝이 없었다.

 

결국 8월15일 미 해병 1여단이 투입돼 결국 북한군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북한군에게 박진 지

구는 부산 점령을 위한 아주 중요한 작전지역이었고 8월 말 3만여명에 가까운 대규모 병력으

로 2차 공세를 펼쳤다. 우리 쪽에선 미 2사단이 필사적으로 맞서 결국 북한군이 물러나기 시

작했다. 이후에도 북한군은 게릴라전으로 침투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박

진 전투의 승리로 인천상륙작전의 전기가 마련됐으며 압록강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 대규모의 지속적인 전투와 끊임없는 게릴라 전투와 주야간을 통털어 창녕일대는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혼란상황에 빠지면서 주민과 지역 방위에 나선 의용군들이 크나

큰 고초를 입게 됨을 남지의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인민군과 아울러 수많은 사상자를 낸 유엔군. 진혼의 추모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늦은 감은 있지만 2004년 6월 25일 개관한  기념관의 의의가 새삼스럽다.

 

 

마을 사람들의 표현을 빌면 어떤 때는 외국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다고하니 다시 숙연하다.

국제정치적 배경을 떠나 낯선 이국 땅에서 목숨을 거둔 그들의 통증도 낙동강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위에서 미리 언급하였지만,  다시 칠현리로 돌아와 남지로 향하는 1022 번 국도를 진행하였

으나 점차 길이 나빠지고 마침내 비포장으로 가더니 영아지 입구에서 길은 끊어졌다. 공사

장 관계자에 확인하였더니 더 이상 길은 없다고 하였다. 다시 나오니 인근에 창아지 표지석이

있다.

 

 

남지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지리 창아지 마을에서 시작하여 남강과의 합류지점인 용산리 기강나루까지 낙동강 동안

(東岸)은 험준한 절벽의 연속이다. 절벽 중턱에 난 길은 꼬불꼬불 험하여 겨우 개가 다녀 길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십 여리 되는 절벽의 길은 제법 넓게 닦여져 있어 여름 한 철

피서를 위해 강바람을 쏘이며 보낼만한 곳이다.

 

 

(아래 사진 : 지도와 달리 길이 없는 영아지, 그 영아지 못미친 창아지 표지석)

 

 

남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http://www.namji.com 을 보고 ......


 

  마을마다 고유의 지명이 있다. 그 땅이름은 곧 그 마을의 역사이며 그 역사를 여실히 현대인

에게 보여 주는 가장 축약된 대명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명의 연구나 동리의 변천사와 사

건의 세세한 기록 등 향토사 연구는 곧 작은 마을의 역사의 연구와 직결되어 있다.

 

 

  남지읍 일부 뜻있는 사람들(남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http://www.namji.com/)이 그런 마

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그 어느 지역보다도 상세히 인터넷상에 정리해 놓은 것을 보면 숙연

하기까지 하다. 남지를 이해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시, 읍, 면, 리의 역사를 기록하여 책자로 남길려고 하는 시도는 어디에서나 많이들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일제시기와  해방시기 그리고 이어지는 전쟁기의 역사는 민감한 부분들이 많고

당사자들이 살아있거나 친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정이 격렬한 논의를 유발시켜 일정부분이

빠지거나 아예 발간조차 못하고 있는 저간의 사정들도 있다.


 

 어쨌거나 관에서 주도적으로 편찬,발간하는 군면의 역사 외에도 자발적인 단체에서 이런 역

사를 기록해내는 것은 보완적이고 그 자체로도 가치 있는 일이다. 감동 받았다. 

 

 

(아래사진 : 영아지 에서 바라본 개벼리 쪽 풍경)

 

 

어쨌거나 여정은 다시 칠현리로 되돌아와 1008 도로와 1021 도로 분기점에서 1021 도로

따라 남지읍으로 나왔다. 남지교와 신남지교 사이에 웃개나루(과거 집산지 로 전성했던 나

루) 인근을 일견하고 1022번 도로를 따라 가니 포장도로가 끝나고 둑으로 연결되니 불안해

진다. 아니나 다를까 용산마을에서 둑길조차 끝난다.

 

하지만 이게 왠일!

바로 여기가 낙동강과 남강의 합수지점이 아닌가.

단무지 무 밭을 가로질러 강가로 내려갔다.

모래사장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

나의 남강은 이렇게 낙동강과 합수되는구나......

 

 

(아래사진 : 남강와 낙동강의 합수지점, 건너편 좌측은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 건너

우측은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그리고 이곳은 남지읍 용산리다. )

 

 

(아래사진 : 그 이름도 아름다운 병아들  모래사장이 보이고 강변 따라 남강이 흘러들고 있다.)

 

 

 

남지읍을 지나면 낙동강은 삼랑진까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게 된다.

길도 1022번 을 따라 곧장가면 된다.

남지를 벗어나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으니 우강리의 망우정 그리고 솔나루!.  

 

 

 

 

 

 

누군가 어떤 곳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고 했을 적에 그곳이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은

당연하지만 경이롭다. 솔나루님이 소생의 지난번 졸문에 격려의 댓글(까페)을 적으셨는데 그

느낌이 한편의 단편소설로 전해져왔다. 

 

 

다음주면 드디어 솔나루에 도달하시겠군요.

 

솔나루는 남지에서 2~3km쯤 아래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제가 다닌 초등학교가 송진초등입

니다만 지금은 폐교가 되어 찜질방이 되었더이다. 송진에 나루터가 있었던 기억은 제겐 없구

요 아주 옛날에 나루터였었나 봅니다. 제 어릴땐 시나리라 불렀는데 그게 솔나루라 알아차린

건 20대때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友江이란 마을인데 예쁜 이름이죠.....

 

60년대 후반인데 그때만 해도 뱃길 따라 생활이 이루어지던 때였지요. 남강 줄기가 합쳐지던

남지는 함안 의령 창녕이 만나는 동네인지라 함안군 칠서면에 남지철교가 있었지만 주로 뱃길

로 통학했고, 의령군 지정면에서도 배타고 통학하는 친구들이 많았답니다.

 

무더기로 지각생이 많은 날은 바람이 센 날이거나 뱃사공이 무고치 못한 날인 줄 알아차렸

답니다. 그리고 남지장날 나룻배가 전복하여 지정면 주민 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픈 얘기도

있답니다.

 

 

(아래사진 : 남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자료에서 펌. 남지철교가 한국전쟁

때 파손 된 장면과 이후 당분간 나룻배 버스로 이동하던 빛바랜 장면.

나룻배의 애환..... 그것은 강이 품고 있는 또하나의 역사다.)

 

 

1969년 9월 17일.

경남 남부지방 일대가 태풍 사라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날.

추석 장날을 보고가던 나룻배가 전복되어 80여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는 나도 어렴풋이 기억

이 난다. 

  

나룻배 전복사고는 빈번히 일어났다. 강을 건너는 다리는 그만큼 절실했었고 강가를 살던 사

람들의 애환은 나룻배와 함께, 나루터와 함께 기억의 저편에 세월따라 희미하게 지워져가고

있다.  

 

(아래사진 : 망우정에서, 거너편 칠북면 쪽 백사장이 평온하고 화면 우측 인근 어디엔

가 송진-솔나루터가 있었을 게다.)

 

 

글이 길어지지만 망우당 곽재우의 이야기를 빼지 않을 수 없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의령사람으로서 그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았고, 장군에 대한 추모는 이 지

역 인근에 널리 퍼져있다. 의령, 창녕, 현풍, 달성, 대구.. 주로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다.

 

악견산성, 화왕산성, 비슬산, 진주성전투.. 이 모든 것이 님의 노력과 책임감이 베어 있는 대

목이다. 이곳에 추모정이 세워진 것은 생전에 장군이 영산현의 강나루에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고 싶어 했던 소망을 가진 것과 관련이 있을 성 싶다.

 

이참에 망우당에 대한 자료 수집을 해보니 나의 좁은 지식으로 망우당 곽재우를 가늠하고 있

었던 것이 심히 부끄러워졌다.  

 

 

(아래사진 : 처음으로 속도를 내어 1022 도로를 달리니 강변에 근사한 산세가 눈길을

끈다. 함안군 칠북면 어시미산) 

 

 

부곡면 청암리로 접어드니 한바탕 굽이를 치는 강이 단애를 이룬다.

길을 절벽을 타고 10여분 이어는데, 남지읍 이후로 가장 절경으로 꼽을 수 있다.

임해진!

 

 

(아래사진 : 임해진)

 

 

 

드디어 본포다리.

부곡에서 건너편 창원 쪽으로 연결되는  본포다리는, 대산-진영-진례 IC 도로를 가끔 이용했

기 때문에 여러번 지나갔던 경험으로 반갑다.

본포다리에서 낙동강으로 해가 떨어지는 노을은 절경이라서 여러번 때맞춰 지나기를 시도했

으나 딱 한번 그 때를 맞출 수 있었다.

 

 

 

(아래사진 : 본포다리, 해거름 때 다리 중간에서 보면 해는 낙동강으로 정확히 떨어진다.)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는 남지에 이은 두번째 큰 마을이다.

산행 후에 이곳을 지나면 도회지 저녁의 풍모가 베어나는데 조금만 벗어나면 남지와 마찬가

지로  광대한 하우스 단지를 지니고 있다. 이 시설재배지를 지나면 밀양강 줄기와 만나게 된

다.

 

 

 

오산교를 지나면서부터 비포장 둑길이다,

분주히 지나가던 트럭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길도 없는데 승용차로 어디로 가냐????

 

 

 

오우진 나루터에서 밀양강이 내려오는 하류의 다리를 건너 삼량리로 건널 줄 알았는데 다리

는 커녕 교각의 흔적도 없다. 이런 아직 공사도 하지 않은 길과 다리를 이렇게 시퍼렇게 1022

도로라고 표기해 놓다니.....

 

 

 

할수 없이 강변을 따라 둑길을 진행하니 공사중인 둑 조성은 여기서 끝이난다. 

차를 되돌려 다시 오산교로 나와 마산리로 향하니 이곳도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상남 중고를 지나, 우회전하여 삼상교를 건너니 드디어 밀양강을 가로질러 갈 수 있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무월산터널과 이어지는 교각 공사의 위용이 대단하다.

 

 

 

58번 국도를 잇지않고 거족마을에서 뒤기미를 지나 상부에서 강변으로 내려가 밀양강 합수

지점을 눈 앞에서 바라보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뒤기미 쪽 길은 이 지도에는 표시되

어 있지 않지만 교행이 어려운 1차선의 포장도로로 드라이브객들이 좋아할 만한 숨을 코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사진 : 수산교를 걸어 보았다. 다리 중간에서 상류쪽을 바라본 장면.) 

 

 

 

(아래사진 : 위 설명대로 오우진 나루에서 삼량리 쪽은 아직 다리건설이 되지 않았다.

낙동인도교와 철교가 보인다. 낙동인도교 쪽에서 보면 늘 이쪽이 아련히 느껴졌는데

이제 이쪽에서 김해 생림쪽을 바라보니 감회가 솟는다.)

 

 

 

 

(아래사진 : 뒤기미 인근 아래로 강변에 내려서니 밀양강 최하류지점이다. 건너편 산

이 밀양 외산리 붕어등 인데 정말 붕어등 같지 않은가... )

 

 

 

(아래사진 : 정면 낙동강, 우측 밀양강.... 낙동강! 밀양강을 만나다.)

 

 

 

(아래사진 : 삼랑진 낙동강 인도교. 차량 교행이 간신히 가능한 정도다.)

 

 

 

삼랑진 역사를 지나 송원으로 빠지니 삼랑진읍을 벗어난 셈이다.

이제부터 강은 동남쪽으로 빠르게 내려간다.

강폭도 보다 넓어져 큰강의 위용이 뚜렷해진다.

 

 

 

원동이나 오봉산 지락을 지나면 해가 떨어질 것 같아 오늘의 여정은 이곳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걸음걸이는 산에간 것 못지 않게 많이 걷게 되고, 피로도

도 더했다. 찾으면서 다녀야 하는 노고 때문이리라.

 

 

 

자료 준비하며 강따라 연 2주를 다니니

솔직히

산이 너무 그립다. 

 

 

원동에 다다르기 전에 용당나루을 찾았다.

 

 

 

 

 

 

 

아래사진은 강변의 시설재배단지를 지나 강가로 내려가던 중에 갑자기 나타난 당우였다.

 

가야진사.

 

이곳은 신라 눌지왕 때 강 건너편의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배를 댓던 나루터로 일명 옥지주라

불렀다. 무탈한 뱃길을 염원하여 제를 지내던 곳이며 가끔 기우제도 지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낙동강 하류에는 신라의 가야 침탈사가 있고, 여태껏 고대 가야땅을 밟고 다녔구나.

 

강변에 내려서니 쓰레기가 지천이다.

 

 

(아래사진 : 가야진사와 용당 나루 근처 강변)

 

 

 

 

(아래사진 : 안태호 지난 신불암 고갯마루에서 삼랑진을 바라보며)

 

 

 

 

 

(아래사진 : 원동면 언덕배기 찻집에서)

 

 

 

(아래사진 : 낙동강에 해가 진다. 이젠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다.)

 

 

 

 

 

(아래사진 : 오봉산 자락을 넘는 고갯마루 전망대에서)

 

 

<끝 : 긴글 끝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