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산행기


ㅇ 일시 : 2004. 12. 11(토)
ㅇ 위치 : 충북 보은군, 경북 상주군
ㅇ 높이 :1,058m
ㅇ 코스 : 법주사-문장대-신선대-입석대-천왕봉-법주사(약 18km. 7시간 20분)


   여름날의 울창함과 가을날의 화려함. 한겨울 눈꽃의 환상적인 모습. 그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한 12월의 산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초라해 보였다. 헐벗고 앙상하고 화장끼 하나 없는 얼굴. 찾아가 위로를 받기보다는 그 헐벗은 어깨를 따뜻하게 다독여주고 싶게 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내 옆에서 불혹의 나이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저와 같을까. 12월의 산에서 20대 초반에 만난 아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산악회 정기 산행이 속리산(俗籬山)으로 정해졌다. 속세를 떠나 있는 산. 내 생의 첫산행지. 첫 산행 후에도 여러 번 찾아가 보았지만 최근에는 다녀온 지가 꽤 오래되어 어떻게 변하였을까 궁금해진다. 08시 10분 대전을 출발하여 09시 40분 산행을 시작한다.

  

   매표소 지나 바로 나타나는 법주사는 하산 길에 들러보기로 하고 바로 문장대 길로 발길을 재촉한다. 길고 지루한 세심정까지의 길을 지나 문장대까지 오르는데 2시간. 헐벗은 나무 외에 별로 볼 것도 없고 조망도 되지 않아 지겹고 힘이 드는 길이다. 이 길이 싫어 상주 쪽에서 오름질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차편이 불편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솔잎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마지막 비탈길에 힘을 보탠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철계단에서 땀을 흠뻑 빼며 힘들게 문장대 능선에 오른다. 오를 때와는 달리 한꺼번에 탁트이는 조망. 쾌청한 날씨 덕분에 오늘 조망은 유난히 좋다. 멀리 계룡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식장산, 서대산, 대둔산, 진악산등 대전부근의 산들과, 주흘산, 월악산등 문경, 괴산 부근의 산들, 멀리 덕유산의 남덕유와 서봉, 그 앞으로 적상산. 그 너머로는 조그마하게 지리산 천황봉도 살짝 비치는 듯하다. 한 자리에서 대한의 중부지방에서 내노라하는 산들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겨우 1,000m 조금 넘는 산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남북도의 산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니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닌가. 문장대에 올라 묘봉, 관음봉의 바위들까지 둘러보며 한참을 산들의 물결에 시선을 빼앗기다 내려온다.

  

   문장대를 내려오자 12시. 이제 전망 좋은 바위틈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각자 싸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발아래 펼쳐지는 고향집 뒷산과 대전의 산들을 다시 살펴본다. 참 가까이에 있다. 대전과 속리산이 저 지척의 거리였던가? 그러고 보면 산과 산사이의 공간은 사람들 인식의 공간보다도 훨씬 가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멀게만 느껴지던 어느어느 지역의 산들. 한번 찾아가 보려면 몇 시간씩 차를 타고 달렸던 공간. 그 공간을 산들은 너무도 가벼이 뛰어넘어 가까이 있는 이웃처럼 서로 이야기하고 손잡고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저 산들을 우리는 도(都)로 나누고 시(市)로 나누고  마을과 마을로 나누었으니 얼마나 부질없고 하잘 것 없는 일을 하였단 말인가? 결국은 그것이 우리의 가슴까지 갈라놓는 일이 되고 말았으니---부끄러울 뿐이다.

  

   금적산 기슭을 기점으로 고향집 뒷산을 찾아 소주를 한잔 올린 후 능선길로 접어든다. 청법대, 신선대, 입석대, 비로봉, 천왕봉 어느 능선에서도 조망이 가능하고 능선을 돌아 설 때마다 바위들이 나타난다. 부드럽고 온화한 속리의 바위들이다. 무릇 속세를 떠나 마음을 다스렸으면 저와 같아야 옳으리라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바위들이다. 약 3시간의 능선길을 그런 바위와 함께 오르고 내리니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낀다.

  

   이상한 일이다. 오늘 산행은 마음이 설레거나 들뜨지가 않는다. 여러 번 다녀본 길이라 그런가? 아니면 저 헐벗은 산과 나무들에게서 불혹의 나이로 접어들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인가? 다만, 헐벗을수록 조망이 좋아지는 역설적인 사실 앞에서 잠시 위로를 삼아보지만, 정작 내가 보는 나의 조망의 깊이는 동네 뒷산보다도 못하니 마음이 아릴 뿐이다.

  

   이제 천왕봉에 오른다. 속리의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구병산 줄기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아무리 보아도 황홀한 조망이다. 표석비와 주능선을 배경으로 풍경을 담고 한참동안 사방을 둘러보다 천천히 하산을 시작한다.

  

   하산 길. 드디어 무릎이 아파 오기 시작한다. 보통 오른쪽 무릎만이 아팠었는데 오늘은 양쪽 무릎이 다 아프다. 언제나 겪게 되는 하산의 고통이지만 오늘은 더욱 고통스럽다.  절룩이며 꺾이기를 고통스러워하는 무릎을 억지로 꺾으며 내려오는데, 세심정 부근에서 수십년된 금강송이 옆에 서 있는 졸참나무에 의지하여 생명을 연명하는 모습이 보인다. 결코 가볍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혼자서도 살아가기 힘든 숲 속에서 남의 부러진 허리마저 떠 안은 졸참나무의 마음을 생각하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한없이 가벼워진 요즘의 세태와 자꾸만 비교되어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세심정 계곡 물에 하산의 피곤함을 잠시 씻어 내리고, 다시 길고 지루한 발길을 재촉하여 마지막 목적지 법주사에 들리니 대웅전 보수공사가 한참이다. 첫 산행 때만해도 그 커다란 청동불상도 없었고, 새롭게 올린 누각들도 없어서 참으로 한적하고 아름다운 절이었는데 이제 그 때의 모습은 영영 잃어버리는 것 같다. 몇 개의 국보와 보물만을 가벼이 둘러 본 후 산행을 마친다. 

  

   오랜만에 다시 올라본 속리산. 유난히 조망이 좋았던 날씨. 헐벗은 나무와 산자락들로 인하여 마음이 약간 우울해진 산행. 그 속에서 힘들수록 서로 의지하고 보듬어 주고 살아가야 함의 아름다움을 얼핏 느낀다.

  
 
(문장대 능선에서 본 조망)


 

 

(문장대)


 

(관음봉)


  

(문장대에서 본 상주 방향)


  

(입석대)


 

(비로봉 바위)


 

(천왕봉)


 

(천왕봉에서 본 구병산)


 

(천왕봉에서 본 속리산 주능선)


  

(졸참나무에 기대고 있는 금강송)


 

(법주사 팔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