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북한동 일원/ 포토 에세이
(구파발-산성매표소-대서문-덕암사-북한산성계곡-법용사-중성문-노적사-용학사-중흥사지-태고사-북한산대피소-동장대-대동문-아카데미하우스/ 2005.1.3/내 아내의 유랑의 남편과)


*. 새해 첫 산행
새해 첫 산행지로 정한 '북한산 북한동'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북한산성을 쌓은 후예들이 살고 있는 곳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싶어서 그동안 책도 구하고 연구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습니다.
산성 매표소를 지나 얼마를 왔는데 지척지척 가랑비가 오고 있습니다. 고아텍스 상의를 입고 오긴 했지만 여기에 판초를 입고 가니 십상입니다.
북한산성은 다음과 같은 봉우리들을 이용하여 이어 쌓은 것입니다.

대서문~의상봉~용철봉~용혈봉~증취봉~나월봉~나한봉~문수봉~대남문~대성문~보국문~대동문~동장대~용암문~만경대~위문~백운대~염초봉~-원효봉~시구문~대서문


산성매표소를 지나서 대서문 이 가까워지면 곳곳에서 북한동 주민들의 이름으로 '어서 오십시오' 하는 글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 글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이들 주민들을 눈의 티끌처럼 바라보고 있는 국립공원 당국의 '북한산 집단시설 정비사업'에 맞서는 북한동 주민들의 사수(死守)의 의미를 지닌 생존의 의지요, 절규입니다.

*.북한산성의 정문 대서문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大西門)입니다. 서울 성곽에 서대문(西大門)이 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기 위해 첫음절 ‘서’와 둘째 음절 ‘대’를 서로 바꾸어 놓은 것이지요. 남대문: 대남문, 동대문: 대동문이 다 그러하듯이.
당시에 전란이 나면 한양의 백성들을 이끌고 정문인 대서문(大西門)을 통하여 북한산성에 들어오게 되어 있을 정도로 북한산성은 큰 규모였습니다.
서울 시내 사대문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남대문과 동대문은 분명 문(門)이면서도 돌아가는 상징적인 문이지만, 북한산성의 모든 문은 그 문을 통과하여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북한산성의 대서문(大西門)은 정문이라서인지 14개 문 중에 가장 그 원형대로 잘 보전되어 있는 문이기도 합니다.
그 문에 들어가기 전에도, 들어가서도 북한동 주민의 먹거리 상가가 있습니다.
상가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등산만을 서두르다가 항상 지나치는 길가에는 당집이 있고 크고 작은 멋진 절도 있습니다.

대서문 우측의 무량사를 지나 조금 올라간 곳의 좌측 계곡 건너에 용굴암 당집이 있지요. 등산할 때 우리들의 이마 살을 찌푸리게 하는 굿 소리를 듣게 되는 곳입니다.
흔히들 여자 무당을 ‘무당’이라 하고 남자 ‘무당’은 박수라고 합니다.
이들은 춤을 통하여 무아의 탈혼(脫魂)의 과정을 거쳐 신과 접하여 인간의 소망을 신에게 고하여 풀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영매자(靈媒者)가 된다는 사람들이지요.
기독교인 이상으로 미신을 싫어하는 이 사람이지만 국문학을 전공한 까닭인지 무속에 관심은 많습니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 우리들의 조상들에게는 그들은 무시할 수 없었던 절대적인 존재들이었으니까요.
그곳 박수에게 허락을 얻어 당집에 들어갔더니 마음씨 착한 황소 만한 개가 우중인데도 나를 대형 고드름이 유난히 멋진 자연 굴로 인도해 주더군요.
무속에서 흔한 강한 삼원색의 천과 자연 바위 속에 산신령 같은 모습을 모신 그런 치성소였습니다.

*. 대불과 굴법당(窟法堂)의 덕암사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 간 약수터가 있는 곳의 덕암사(德巖寺)는 가볼 만한 곳입니다.
대서문을 오르면서 계곡 건너 원효봉 석벽에 커다란 백색 대불(大佛)을 볼 때마다 누구나 언제 가봐야지- 하고 벼르던 곳이었을 테니까요.
가보았더니 대불은 아깝게도 시멘트로 만들어 모신 것이었지만 그보다 이 산에서는 가장 크다는 석굴에다가 석가 삼존불을 모시었더군요. 지금까지 내가 본 석굴 중 가장 멋지고 범상치 않은 입구를 가진 굴법당(窟法堂)이었습니다. 여기서300m 지점에 시구문(屍口門)이 있고 1.6km 를 더 가면 원효봉이지요.
시구문(屍口門)의 '屍'(시)란 주검 '시' 자이니 서울의 광희문처럼 죽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란 뜻이지요.
시구문을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는데, '수구문 차례'라는 말이 있습니다. 술잔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먼저 돌아갔을 적에 우음엣 소리로 하는 말입니다.
뒤돌아 왔던 길로 해서 상가 밀집지역의 다리를 건너 대남문을 향한 북한산성계곡 길에 들어서서자 급히 서둘러서 상가 앞을 지나갑니다.
지난겨울 이곳을 지나다가 벌집을 따는 것을 촬영하고, 사진을 넣어 글 한 수 주기로 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였기 때문이지요. 약속도 빚이라는데 실없이 말빚을 진 것이니까요.
이 근처 절벽이나 나무 곳곳에는 말벌이 수박 만한 벌집을 지어놓고 알을 까서 새끼를 기르다가 벌들이 떠나간 벌집이 많습니다. 그때 상가 주인 아들들이 벌집을 따는 장면을 찍었었거든요. 그 벌집을 상가 안에 장식으로 걸어놓기 위해서라 했지요.
이분들은 대대로 여기서 태어나서, 학교를 다니고, 이 고향에서 살아가는 북한산 북한동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현재 40호 정도 살고 있답니다.

*. 북한동이 사람과 을축 년 대홍수
다음은 '북한산'의 저자 박인식씨가 이런 분들에게서 채록하여 기록한 것을 토대로 하여 북한리에 대한 여러 문헌을 찾아 요약한 이야기들입니다.

"이 고을의 이름은 옛날에는 북한리라 했습니다. 북한산성이 축조되면서 들어와서 성을 지키는 병사(守城軍)의 식솔들이 대대로 살아 온 곳이 바로 북한리였지요.
그러다가 1907년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된 이후 묵정밭을 일구고 어렵게 살던 북한리 주민들에게, 1925년의 을축년의 대홍수라는 큰 시련이 덮쳐 왔습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최대의 홍수는 을축년 7월에 사흘 동안 걸쳐 중부 지방에 내린 650mm 집중 호우였습니다.
그 홍수가 한강 수위를 12.26m로 올려놓아서 서울 전 지역이 물에 잠겨 650명이 죽고 이재만이 9만4천여 명에 주택 4만5천60 체가 침수된 한국판 노아의 홍수였지요.
그중에도 북한산에는 특히 더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산영루, 무지개다리가 떠내려가고, 산사태로 8부 능선에 있던 북한리 가옥은 물론 농토마저 다 유실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인명 피해로 같은 날 제사를 지내고 있는 집안이 많답니다.
그래서 그 후 북한리 주민은 나무를 해서 살거나, 살구나무, 자두나무를 키워 근근이 연명하여 왔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만해도 자하문의 자두는 유명했었거든요.
1983년에 북한산이 국내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자 북한동 주민들은 등산이나 유람객을 상대로 하는 음식 장수로 변신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랍니다."
을축년 대홍수가 수많은 재산과 인명만 앗아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홍수 5년 뒤 일제는 대보역이라 부르던 일산제방(一山堤防)을 행주산성에서부터 심학산까지 축조하여서 고양(高陽)군 사람들이 홍수의 걱정을 덜게 되었습니다.
이때 행주 외동에 살던 한 분이 그때까지 버려졌던 땅에 배수로를 파 이 늪지대를 옥토로 만들어 전국에서도 유명한 능곡 쌀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덕양구 사람들이 그를 기려 덕양구 토당동에 '이가순공덕비'를 세워 주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정명훈 정명화 정트리오의 외할아버지랍니다.
그뿐인가요, 송파구 풍남동에 을축대홍수로 뜻밖에 얼굴을 들어낸 백제의 항아리 두 점을 그 고장 사람이 주워가지고 박물관으로 팔러온 사람이 있어서 천년 동안 숙제였던 백제의 도읍지가 그 근처였음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기도 하였지요.
그렇게 일제에 의해 쌓여진 8m의 일산제방(一山堤防)이 1990년 일산대홍수로 9월 9일 무너지자, 한국의 아우토반이라 불리는 폭 50m 도로의 자유로가 완성되어서 오늘날의 일산신도시 건설을 하게 된 것이랍니다.

북한산성계곡 길가에 석상 하나가 서 있습니다. 석상이 있을 만한 자리도 아닌 곳입니다. 그 얼굴은 아주 젊고 세련되지 않은 너무나 단순한 모습이 치졸하기까지 한 조각품입니다. 그 옆집에 '환웅일도모법연구위원회'(桓雄一度母法硏究委員會)라는 간판을 보니 단군의 석상 같습니다.


*. 능인선원의 국녕사
조금 더 가니 다리 건너 법용사를 지나서 국녕사(國寧寺)로 가는 길입니다.
차길에서도 40분 이상이나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이곳은 의상대사가 수행 정진한 의상봉 기슭이요, 일찍이 사명대사가 나라에 환란이 있을 것을 예지하고 창건하여 승병을 양성하고 배치하여 성문을 사수케 한 한국 불교의 실천 도량이랍니다.
원래 설립 당시에는 89칸이었다는 유서 깊은 절을 능인서원에서 중흥시킨 절입니다. 높이가 무려 33m가량으로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 설악산 신흥사 좌불 동상 다음으로 좌고 70척의 큰 동불상입니다. 공사비만도 100억 원 이상이나 들였다 하고, 수백 톤이나 하는 동(銅)을 이 깊은 산중까지 헬기를 이용해서 날랐다는 대공사였습니다.
능인선원에서는 그 동안의 불교의 고질이었던 불교가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었던 것을, 현대에 맞도록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호국 불교로 바꾸어 부처님의 위력으로써 나라의 안녕과 발전과 통일을 빌기 위한 큰 뜻을 펴나가고 있습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 왔을 때 어쩔 수 없이 종래의 토속신앙과 융합하였기 때문에 불교에는 기복적이고 무속적인 요소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좌불상 뒤에 만 불의 부처를 모시는 일이 90% 정도 진행되고 있는 중 입니다.
그런데 큰일 났습니다. 마당에 천막을 두룬 간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자 배낭을 열어 보았더니 도시락이 없어졌습니다. 올라오다가 우중에 판초를 뺄 때 길가에 도시락 통을 떨어 뜨리고 온 모양입니다. 할 수 없이 준비해간 참치 통졸임으로 허기를 때우고 있는데 공양보살이 내 모습을 보고 절밥에, 김치에다, 감주까지 주는 것으로 요기하고 대신 초콜릿을 하나 놓고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절밥을 공으로 얻어먹기는 평생에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 성안의 성문 중성문(中城門)

분명 대서문으로 들어왔는데 중성문(中城門)이 또 있으니 이 무슨 문인가요? 대서문이 너무 평탄하고 취약한 지역이어서 이 성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은 이 일대 계곡만 차단하면 나라님이 거둥하시는 행궁이나 승영, 창고 등 성내 시설은 물론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산성수비의 보완대책으로 축성된 성곽입니다.

임진왜란, 병지호란의 외침으로 인하여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자 숙종의 명으로북한산성을 4월부터 쌓기 시작하여 6개월만인 9월에 완성하고 중성(中城)이 그 다음 해에 완성하는 것을 보려고 나라님께서 직접 행차하였답니다.
당시 성 길이는 21 리 60보(98.5km), 평균 18척(8척), 둘레가 9척으로 성에는 모두 14개의 성문이 있었습니다.

*. 노적사(露積寺) 가는 길

운하교(雲河橋)를 건너갑니다. 하늘은 ‘구름’(雲)이요 ‘하’(河)는 계곡수라면 다리를 건너고 있는 ‘나’는 무엇이지요? 하늘을 건너가는 구름인가요? 흘러가는 계곡물인가요? 건너가는 다리인가요?
노적봉 아래 노적사(露積寺)를 향하는데 지게꾼 한 분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개의 경우 이렇게 한번만 만나고 지나치는 우연들입니다.
노적사 가는 길가에는 쇠기둥을 박고 연결된 줄에 드문드문 연꽃등이 걸려 있는데 기둥에는 불경 구절이 걸려 있어 걸음을 멈추게 하지만, 너무 표현이 불교의 화두와는 너무나 멀어 실망을 하게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거든요. 그중에 제일 멋진 것도 이런 식입니다.
‘게으른 무리 중에서 부지런하고, 잠든 사람 가운데 깨어나 공부하는 사람은, 빨리 뛰는 말이 느린 말을 앞지르듯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법구경



노적사에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6개월만에 완성되었다는 이 북한산성도 저렇게 힘들여 쌓았을 것입니다.
'노적봉' 하면 유달산이 생각납니다. 그 710m 노적봉 밑에 노적사(露積寺)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절을 진국사(鎭國寺)라 한 것을 보면 외적에게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듯이 보이게 했다는 호국에의 의지를 이름에서도 읽을 수 가 있겠군요.
평상시의 성(城)은 주로 산에 사는 스님들이 지키게 하기 위해서 승군(僧軍)을 조직하고 중흥사 등 12개의 사찰을 증축하거나 새로 세웠으나, 현재는 원효암, 태고사, 상운사만 남아 있습니다.

*.증흥사지에서


용학사 근처에는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총융사의 재임 시 선정비 공덕비가 가득한데 지금은 23기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암반에 음각된 내용도 승군대장인 팔도총섭의 산성 수호에 완벽을 촉구하는 내용이지요. 앞개울이 산영루가 있던 자리구요.

지금은 중흥사지라는 표석과 낡은 건물 한 채만 남았지만 중흥사는 고려 말 이 절의 주지였던 태고 보우(普愚)가 중수했다 절입니다. 숙종 때에는 136칸이나 되는 대 사찰로 증축되어 북한산성을 지키는 승군총지자인 승대장이 머물던 승영(僧營)이 여기였으나 을축대홍수와 6.25로 다 불타버리고 말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드넓은 사지와 번성했던 게시된 사진이 옛날을 말해줍니다.

위 그림처럼 옛날에는 이 주변에다가 130칸의 행궁(행궁: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무르는 궁)과, 5만석을 비축할 수 있는 140칸의 군창(軍倉:군대 창고)들, 99개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를 만들었습니다. 물이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지금의 북한산성계곡 따라 세웠던 것이지요.

*.태고 보우(普愚)의 태고사 창건

매년 봄이 되면 하얀 꽃이 백설이 내린 것 같이 핀다는 수령150년 묵은 23m의 귀룽나무를 지나 태고사에 왔습니다. 고려 말 우왕의 왕사였던 태고 보우(普愚) 선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중흥사의 부속암자였지만 북한산 태고사는 조선불교를 총괄하는 총본사가 된 사찰입니다.
이 절의 자랑은 보물 제 611호의 '원증국사탑비'와 후면 언덕에 있는 '태고국사사리탑'이지요. 태고(太古)라는 말은 원증국사의 시호를 말하는 것이지요.
특히 이 비문은 우리들이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로 시작되는 시조를 쓴 목은 이색이 교지를 받들어 지었는데 비문 끝에 최영, 이성계 등의 이름이 있어 더욱 유명하지요.

*.북한산 대피소와 장군이 호령하던 동장대

태고사에서 800m 오르니 젊어서 다니던 북한산대피소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북한 산장이라고 하여 매점이 있었고 수많은 인파가 있었는데, 오늘은 신정 연휴가 끝나고 각 직장에서 시무식하는 날이라 사람은 나 혼자뿐이지만 옛날에 마시던 샘만은 물맛이 여전합니다.

흰눈을 밟으며 동장대를 갑니다. 시단봉 위에 휘영청 시원한 처마가 푸른 하늘을 찌르듯이 서 있습니다. 장대(將臺)란 성, 보(堡:작은 성), 둔(鎭 칠 둔), 수(戍:수루) 등의 동서에 쌓아 올린 장수의 지휘대입니다.
북한산성에는 동장대(시단봉 위), 남장대(나한봉 동북쪽), 북장대(중성문서북)의 3개의 장대(將臺) 가 있는데 지금은 그 중 크고,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동장대(東將臺)만 복원하여 놓았습니다.
그 동장대 너머 서쪽으로 하루해가 지고 있습니다. 아침에 집에서 일찍 떠나왔지만 여기에 분량 상'으로 실을 수 없는 곳곳을 뒤지듯 다녀오느라고 행복했던 나의 하루는 하산하기도 전에 벌써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 대동문을 지나 가장 하산길이 가까운 아카데미하우스로 내려갈 것입니다.
중간쯤 오다 보니 어두워서 헤드렌턴을 켜고 산을 내려갑니다.

산꾼의 천국이던
아름다운 산의 하루

별빛이 빛나는 밤은
이 세상이 우리들 나라
즐거운
곳에서 오라하여도
저 작은 집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