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1. 9 

 

계속되는 강추위에 몸도 마음도 자꾸 오그라드는 것 같아서 일요일 산에나 가자고 했더니

이 엄동설한에 산에는 무신 귀신이 들렸나고 핀잔을 주는 안사람,  혼자라도 간다고 하니까 산에

숨겨둔 거시기라도 있냐는 듯 알듯 모를듯한 표정을 짓더군요.

 

그렇지않아도 장단지근육이 볼성사나워진다고 산얘기만 하면 이리저리 꽁지빼며 딴청피우기 일순데

오늘 같은 날 어림도 없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겨울과 여름을 혹독하게 격어야 신상에 이로운거 모르시능가 하고 넉두리를 놓으니

그래도 조심해 다녀오시라고 전절역까지 바래다 주데요.

 

아닌게아니라 거리에 나선 사람들 차림새가 그렇고 하얗게 품어내는 입김이 추운날씨를 가늠케하는데

차에서 내리니 정말 찬기운이 허름한 옷속을 파고 듭니다..

그래도 씩씩한 아저씨들,아줌마들 중무장에 배낭메고 나선걸 보니 초록은 동색이라고나 할까 귀신홀린 듯

나온 내 모습이 한결 위안을 받고 당당해지기까지 합니다.

 

전철은 내달리는데 어디로 갈까

불광동에서 종복이가 제집처럼 드나드는 북한산은 오늘 같은 날 웬지 험상스럽고 껄끄러운 생각이 들어

신도림역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만만한 관악산으로 향했습니다.

 

늦으막하게 서울대입구에 도착하니 울굿불굿한 산행인파에 넋을 잃을뻔 했습니다.

옛날 어려운 시절 취로사업장이라는 곳에 가보셨는지요? 추운 날 몇푼 벌겠다고 삽 들고 공사현장에

몰려든 인민군같은 두리뭉실하게 차려입은 인부들모습이 기억납디다.

 

세월이 좋아져서 삽대신 먹을거 잔득 짊어지고 떠들어대는 넉넉한 모습들이지만, 그래도 이 추운날 

삭막한 산에서 뭘 어쩌겠다는걸까 따뜻하고 편안한 집을 떠나 콧물이 쩍쩍 얼어붙는 이 혹한에 산으로

몰려드는 우리들의 삶은 행복으로 포장한 살려고 버둥대는 몸부림처럼 보였습니다.

세월이 강산뿐만 아니라 인간도 많이 변모시켰나 봅니다.

 

거리낌없이 걷자면서 관악산, 삼성산의 국기봉이나 하릴없이 세며 한바탕 돌아볼 작정인양 늘 다니던

장군봉능선길로 들어섰습니다. 언덕배기를 몇 걸음을 오르지않아 숨이 턱밑까지 차오릅니다.

한 살 더 먹었다고 그새 힘에 부치능가, 아니면 아직 몸이 잠에서 덜 깬 탓인가. 숨을 달래며 몇 걸음

더해 능선길에 오르니 칼바람이 솔가지사이로 달려들어 한참 맺히던 땀방울을 말려버립니다.

 

대낮에 복면강도가 되어 잽싸게 능선을 치달아 어느새 첫번째국기봉에 이릅니다. 미끄러울까봐 무서워

꼭대기는 못 오르고 옆으로 슬쩍 돌고서는 정상을 찍고 온 듯 태연자약 오솔길로 꽁지까지 숨겨버렸

습니다.

 

오르면서 보니 독산동 방향에도 벼랑꼭대기에 태극기가 펄럭입니다. 그것도 국기봉이네요.

몸이 녹녹해지면서 3,4 국기봉에 무사히 올랐습니다.

이제 삼성산에 꽂힌 하나가 남았는데 처음가는 길이라서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삼막사로 가는 제4국기봉밑에는 청진동 골목길처럼 선지해장국냄새가 산정을 진동합니다.

이쯤해서 한잔 생각이 간절하지만 갈길 바쁜것도 아닌데 괜한 인내심을 뽐내며 저작거리 양반내들

지나치듯이 곁눈질로 탐식만하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망월암으로 잘못 가다가 돌아와 물어물어 삼성산들머리를 찾아오르니 길은 통신탑 한참 밑을 돌아

능선따라 쭉 뻗어가고 저짝 아래에서 태극기가 펄럭댑니다.

잰 거름으로 가서 국기봉 정상에 오르니 이곳 경관도 아주 훌륭하더랍니다.

안양에 사는 친구가 가끔 마나님 모시고 온다기에 핸드폰 번호를 눌렀더니 몇번 울리다가는

밧데리가 병든 닭처럼 푸르륵 가버리면서 대답이 없네요. 

무심한 친구, 밧데리 가기전에 대답이나 좀 해주지.

 

삼성산에도 가는곳마다 벼랑끝에 키작은 노송들이 만더군요. 관악산이 늠름하게 마주 보이고 수원쪽으로

광교산일댄가 옅은 개스위로 능선이 정갈하게 포개져 내려갑니다.

삼성산 제일의 조망터인 듯 사방조망이 수려합니다

입맛이 좋으면 모든 음식이 맛있을 것 같은 착각처럼, 벼랑끝에 서서 배고픈 줄 모르고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촌놈이 되었다가 호들짝 놀라 무심코 능선아래로 내려갑니다.

 

어눌한 촌놈은 다시 길을 잃고 헤메다가 어느 산님의 친절한 안내로 겨우 상월암 가는 길을 찾아

내려왔습니다. 은은한 불경소리를 따라 삼성산처마밑 제비집 같은 상월암단청에 들러 약소한 불전을

놓고, 이내 소나무숲을 지나 천인암에 들렸습니다.

누구를 기다림인지 천인암 들어가는 길은 살짝덮힌 눈까지 정갈하게 쓸어놓아 초라한 산객까지 귀히

맞는 듯 했습니다.

 

휘파람소리가 숲을 울리고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산길을 따라, 인적없이 호젓하게 걷다가 내려선 곳이

서울대수목원앞에 이르고 바로 성불사 오름길로 이어집니다.

절밥 한 그릇 간절한 생각이 또 다리에 힘을 보탭니다.

 

계곡은 제법 수량이 풍족한 듯 빙벽을 이루고 치솟은 고목에 원시림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팔봉옆에도 이렇게 깊숙하고 조용한 곳이 있군요.

 

팔봉의 맏형이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상을 차립니다.

친구들과 산행때 제법 후했던 마눌의 인심은 자취를 감추고 고작 배추국에 밥 한덩이가 다지만

막걸리 한 병은 통째로 내차지이니 더 바랄 것이 없지요.

 

어제밤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음복하는 기분으로 이 친구 저 친구에게 한잔씩 권했다가  모두 거두어

마셨습니다.

 

 

겁도없이 타고 넘었던 팔봉의 마테호른 같은 뒷모습에 한 동안 압도당하고 나니 그 흐믓함은 측량할

수가 없고 피곤함을 한칼에 날립니다.

 

불성사에 들어서니 백구 한 마리가 부처님이 모셔진 단청으로 정중히 안내합니다. 안내받은 처지인지라

그냥 돌아서기도 뭐하고 해서 또 불전을 내고 빠져나왔습니다.

 

팔봉국기봉에 이르고 보니 과천가는 육봉능선에 때극기가 또 펄럭댑니다.

힘에 겨워 그냥 7봉째이니라 번호만 메기고 다음봉 학바위능선으로 갔습니다. 통신기지아래 깔딱고개에

서 보니 연주대에 인파가 어렴풋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왜 이 추운날 산을 찾고 위험한 암벽을 오를까?. 내 자신처럼 자신을 학대해서 무슨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 자학증 환자들이 꽤 있을 것 같군요.

 

 

학바위능선 어디쯤 내 자리(소나무 한그루)에 걸터앉아 잠시 연주대에 눈길을 주고는 이내 갈 길을

갑니다. 깜박 국기봉을 잊고 밑에까지 다 내려왔네요. 허참. 이렇게 아쉬울 수가..

 

다시 서울대공학관 뒷길로 해서 연주대로 오릅니다. 이젠 오르막이 힘에 부침니다. 양지쪽 바위에 앉아

막걸리 한잔으로 힘을 보충하고 또 오릅니다. 태극기가 연주대 바로밑에서 퍽럭거리니 힘들어도 연주대를

가야겠나봅니다. 정작 연주대 정상에는 태극기가 없다는데..

 

 

이곳 국기봉은 미끈하게 잘생긴 암봉이군요. 관악산 제일경쯤 되지않나 싶어 사진을 담았습니다.

바라다보니 연주대부근에도 못 보던 기암이있어 그놈도 사진에 담았습니다.

사당동으로 질러가는 길이 있나 살펴보았으나 연주대가 벼랑으로 둘러막고 허락치를 않더군요.

 

하는 수 없이 연주대에 올랐습니다. 해가 저물고 있는데도 인파는 여전히 가득합니다. 오랜만에 연주대

암자에 들러 편안한 마음으로 삼배를 올리고 나와선 뿌연 매연속에 뭍힌 서울을 바라보며 갈 길을 찾아

봅니다. 돌아가기 싫은 곳. 그러나 어쩌겠어요, 가야지. 마누라가 다녀오라고 했는데.

 

 

사당동으로 내려가는 연주대 뒷길. 오늘은 스릴이 아니라 사지가 후들거리며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더군요. 반질반질한 얼음에 눈까지 살짝 뿌려져 있으니 막걸리에 쩔었던 눈이 경끼를 일으키며 긴장

합니다. 헛발질할까봐 바들바들 떨면서 무사히 험한 길을 잘 내려왔습니다.

 

저녁바람이 제법 차거워 국기봉은 9봉으로 마감하고 그냥 사당동으로 내달립니다.

찬바람에 입술이 갈리고 혀가 마르고 허기진 배는 무언가를 심하게 갈구합니다. 고게 무얼까

전철역앞에서 오뎅 한꼬치를 국물에 휘저어 넣으며 아껴두었던 소주한잔을 겯들였습니다.

오늘 너무 학대한 자신에게 미안해지는군요. 찜질방에라도 가서 보살펴야겠습니다.

 

내일은 더 춥다고 해선지 사람들이 모두 총총걸음입니다. 따라가기가 왜 이리도 벅차냐…  (끝)

 

산하가족 여러분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한 산행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김석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