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주시작 4시간째(오전 7시)

 

동이튼다.

삿갓봉을 끼고 돌 때쯤 덕유산은 달빛아래 감췄던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남부 능선의 볼륨감이 상상 이상이었다. 강직하게 솟아오른 봉우리 사이로 깊게 패인 골짜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음지마다 쌓인 눈으로 능선의 명암이 확연히 구분됐다.

강원도쪽의 뭉텅 뭉텅 이어지는 산세와는 확실히 달랐고, 그렇다고 설악산에서 본것 같은 울뚝불뚝한 근육질도 아니었다.

묘한 매력에 넋이나가 있을 때쯤 뒤뚱거리는 누군가가 저멀리서 오고 있었다. 짜리한 키와 볼록한 배 때문에 한눈에 선배임을 걸 알 수 있었다.

선배는 지쳐보였다.

어둠속에서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이 지났으니 체력적으로 1차 한계에 도달한 것은 당연한 일. 새벽녂에 남긴 라면 반 그릇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 입맛이 깔깔하다고 그 귀한 라면을 반이나 남기다니내가 미친놈이지..>

올라오다 한입에 넣은 초코파이는 그새 어디로 녹아들어갔는지 금새 허기가 밀려왔다.

 

2시간전인 5시쯤 해발 1507m 남덕유에 올랐다.

두개의 바위산에 연결된 위태로운 철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도착한 남덕유엔 둥그런 달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달빛에 어렴풋한 바위산과 눈길 능선을 보며 비로서 내가 덕유산에 올랐음을 느낄 수 있었다. 

뜻밖의 생리작용으로 대열을 장시간 이탈했던 불상사를 감안하면 정말 대견스러운 일이었다.

< 밤이니 망정이지 밝은 대낮이었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남덕유를 지나치며 우리팀 대부분은 고생이 끝난걸로 생각했지만 덕유산은 일반 산들과 확실히 달랐다. 올라오던 반대편 길은 아이젠이 소용없을 정도로 눈길이 이어졌다. 걷는건지 미끄러지는건지 구분이 안가는 급경사 내리막을 지나니 첫번째 갈림길인 월성재에 다다랐다.  남덕유를 넘어 2시간여를 오르고 내리기를 몇차례 반복했는지 진이 다 빠졌다. 어둠속에 보이는 어렴풋한 봉우리에 가까이서면 저멀리 또다른 봉우리가 우리를 기다렸고 다시 다가서면 시커먼 봉우리가 또다시 이어졌다.

전체산세를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눈길의 등락은 많은 사람들에게 체력적인 부담을 안겨주었다.

특히 초행인 등반객들은 체력보다도 심리에서 덕유산에 압박당하고 있었다.

새벽녂의 피로는 삿갓을 엎어논 모습의 삿갓봉을 돌아가며 극에 달했고 선배는 이미 차안에서 당당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삼각주먹밥을 많이 먹어서 페이스가 떨어졌다고 푸념을 했다.

내가 볼땐 삼각주먹밥 보다는 볼록하게 솟은 아랫배가 문제였다.

여전히 까까머리 최형사는 기운이 넘쳤고 베테랑 박사장도 멀쩡해 보였다.

 

범인들 도망치다 반 죽겠어요?

삿갓봉을 돌아 쉬는 길에서 농을 던졌다.

에이 ~~ 산을 잘 타는거 하구 달리기 하는거 하구 같나

나 백 미터는 16초여.. 그것두 7~8년전 그랬지 아마

대신 오래는 뛰어

한시간 쫒아가서 잡은놈도 몇있어  

그놈아들 나중에 잡아서 보니 눈들이 하얗게 뒤집혀 있더라구

 

최형사의 입담으로 선배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자자 갑시다 조금만 가면 삿갓재 대피소야 거기가서 밥먹구 좀 쉬자구

베테랑 박사장이 지체되는 시간을 당기기 위해 갈길을 재촉했다.

 

산장의 아침식사(오전 7시 30분)

 

여기저기 버너에 불이 오르고 구수한 냄새가 대피소 취사장에 진동한다.

아무런 장비를 가져오지 않은 나는 선배팀에 합류했다.

 

가져온 빵을 취사장 반대편에 앉아 입에 넣으려는 순간 형이 나를 불렀다.

난 미안한 마음에 일단 한번 빼봤다.

형  나 빵 가져온거 있어서 그거 먹을게

형이 다그쳤다.

무슨 소리야 까불지 말고 라면 먹자. 우리 싸온거 많어 . 걱정하지마

< 후와 다행이다. 이 길을 빵 하나 먹구 버티라는건 나 보구 죽으라는 얘기..ㅋㅋ >

일부러 보이는 자리에서 빵을 먹은건 내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어서 였다.

 

동튼길을 30분쯤 지나 삿갓봉과  무룡산 사이에 골 능선에 포근히 자리잡은 삿갓재 대피소는 50여명이 머물수 있는 조그만 산장이다.

방하나를 위아래로 나눠 2층은 여자들이 아래층은 남자들이 잔다고 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에 있는 대피소에 비하면 규모는 작았지만 눈길에 자리잡은 그 모습이 너무 이뻤다.

전날밤 머문 10여명이 등반객들도 우리팀들 사이에 섞여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그들중 일부는 새벽길을 거슬러온 우리들이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이도 있었다.

< 대단하기 모가 대단해.. 힘들어 죽는줄 알았구만 ..>

 

라면을 두 젖가락 뜨니 바닥이 보인다. 애써 끓인 라면이 몇 젖가락 만에 국물만 남았다. 분명 3봉을 끓였는데 어째 1봉도 안돼는거 같았다. 선배,최형사,박사장 그리고 나 .

코펠은 비었건만 모두들 나무 젖가락을 놓지 못했다.

그럴수록 꼽싸리 낀 내가 미안했다.

 

우리음식이 바닥나니 자꾸 다른팀에 눈길이 간다. 정말 추접하다.

이렇게 비참할 때가.

두리번 거리는데 바로 옆 자리에서 연대장이 이상한 작업을 하고 있다.꼭 음식이 탐난다기 보다 그 작업이 신기해서 말을 건넸다.

그게 모에여 ?

이거요?  이것도  밥이에요

아니 무슨 밥이 비닐 봉투에 들었어요?

군대 비상식량이에요 “” 물만 부어서 스프넣고 비벼 먹으면 되는거에요

전경을 나온 내가 그런걸 알리가 없었다.

< 연대장은 역시 다르네.. 밥두 저런걸 먹구 . 진정한 산악인들은 저런걸 먹나???>

연대장의 짤막한 대답 속에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미 연대장의 코펠옆에는 팩소주 봉투 두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 쏘주 두병 까구 인솔이 가능할지.>

 

이쪽에서 사과한 쪽 다른쪽에서는 귤 하나를 나눠주었다 . 팀중엔 고기도 굽고 밥도 해먹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기웃거려 따낸 식사치곤 꽤 성찬이었다. 역시 산 좋아하는 사람중에 인심 나쁜 사람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산장앞에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다보니 언제 이렇게 걸었나 싶다. 저멀리 거창땅이 보이고 월성 마을도 눈에 들어왔다. 올라오는 동안 잊었던 속세였다.

멀리 보고 있노라니..

다시금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맴돈다.

이것 저것 주변의 꼬인일들..

희망퇴직이 진행중인 회사와 곳 떠나게 될 몇몇의 동료들…….

 

선욱아 모해 , 이리와 커피한잔 하자

선배가 부르는 소리에 잡념은 남겨놓은채 산장으로 들어갔다.

 

- 4편으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