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렵게 찾은 지리산의 서산대와 문수대.

-산행 일시: 2005.2.11.

-산행구간: 피아골- 서산대- 돼지령- 문수대- 종석대- 우번암- 상선암.

-함께한 사람: 나 홀로.

<서산대에서 바라본 피아골과 무착대의 그곳을 >

 

어제 저녁만 하여도 차를 갖고 가기로 맘 먹었던 자신이 갑자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하였던 것은 배낭을 챙기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은 산행 중에 갑자기 코스변경을 할 수 있다는 이로운 점도 있었지만 어차피 나 홀로 산행이라면 문명의 이로운 점을 탈피하고 싶어서였다. 요 며칠간 따뜻한 겨울 날씨가 설날부터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오늘 아침 바깥 새벽날씨는 영하의 기온에서 상승할 줄 모르고 있었다. 설마 늦지 않을까 싶어 단숨에 달려온 역에서 나는 둔탁한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 이었다. 어제 저녁 지갑의 내용물을 겉으로만 확인한 자신의 착오가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상품권 3장 모두를 만 원권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지갑 속의 내용물은 카드 몇 장과 상품권3장 그리고 남은 돈 16000원과 다행히 배낭 속의 잔돈 2100원을 합해 18100원 이었다. 전화할까 아니면 다시 갔다 올까 하는 생각도 하였지만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고, 그렇다고 오늘의 산행코스를 다음으로 미룰까 잠시 생각하다가…… 모르겠다. 무전여행도 하는데 한번 부딪쳐 보자 하는 생각으로 기차표를 끊었다. 최대한 경비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새벽기차가 나 혼자만 달랑 떨구고 떠난 구례 구역은 이른 겨울 새벽만큼이나 황량하기만 하였다. 개찰구는 누구하나 나와있지 않고 굳게 닫힌 문이 스산함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혹시 아침 일찍 히치 해 줄 차가 없을까 기웃거리다가 피아골 첫차를 놓칠까 염려되어 5000원을 과감하게 투자한다.

  

-터미널 에서

산행하면서도 잘 먹지 않은 자신이지만 그래도 아침을 먹지 않았으니 빵이라도 챙겨야 할 것 같아 보름달 2개를 배낭에 구겨 넣고 아침 해장국의 유혹을 뿌리치며 수퍼 문을 나선다. 집에서 챙겨준다던 아내의 아침상을 생각하니 후회스럽다. 해장국을 먹어버릴까. 그렇다면 집에 갈 교통비는 어쩌지, 한 가닥 희망은 다행 이도 구례친구를 생각했지만 이른 새벽에 전화하기도 뭐하고, 업무관계로 자주 비운 친구가 산행 후 꼭 있으란 법도 없고 버스에 올라타 조용히 돈 계산을 해본다. 기차표3100원 택시비 5000원 보름달1000원 버스비2600원 합 11700원 남은 돈 6400원 이다. 피아골 직전 마을에 도착하자 마자 오늘 산행을 위해서는 아침을 컵라면이라도 먹어야 했다. 1500원 지불하고 나니 이제 남은 돈 4900원뿐이다. 이제부터 산행 시작이다. 집에 가는 일은 나중의 일이다.

<잔설과 어우러진 피아골 계곡>

 

-피아골

오곡중인 하나인 피를 심어 식량으로 어렵게 살아온 이곳 사람들이 피밭골 이란 본래의 이름이었건만 우리 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동족 상잔의 현장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 “피아골”수 십 년이 넘은 지난 그날의 역사가 발자국에 밟히고 찍혀졌으며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의 비경 속에 세월이 흐를수록 피아골의 단풍은 우리에게 또 다른 아픔의 현실을 외면한 채 아름다움으로 채색되어 지고 있는가.

  

<피아골 아침의 모습>

 

-07:35 산행 시작

상쾌한 아침이다. 하지만 지리의 자락에 들어서인지 자꾸만 움츠려 드는 자신의 목을 쑥 빼 들고 크게 한번 기지개를 키고는 이내 발걸음은 재촉하더니 이윽고 표고막터에 들어선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을이면 이곳에서 삼홍교 까지 단풍의 수려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으련만 지금은 또 다른 그날을 맞기 위하여 깊은 내면의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움트고 있는지 모른다. 반야의 중턱에서 바로 난 계곡의 물줄기는 아직 녹지 않은 얼음 속에서 입춘을 이겨낸 자연의 신비 속에 새로운 속삭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피아골 산장과 우측암릉을 바라보며>

 

-피아골산장

2년 전 내가 피아골 산장에 처음 왔을 때 함 선생님을 몰라 뵙고 제대로 인사 드리지 못함이 지금도 이곳에 오면 죄인처럼 느껴진다. 이곳에 오시기 전 1972년부터 1988년 까지는 노고단 산장의 관리인으로써 20여명의 조난자를 구하는가 하였으며 30여 년을 넘게 지리산 지킴이로써 홀로 산 생활을 하고 계신다.

<서산대의 어지러운 모습과 주위의 풍광들>

 

-서산대

지리산 옛 수도 처의 하나인 서산대. 반야봉의 7대중의 하나인 서산대에 와 있다

말로만 듣던 서산대에 들어서니 주위의 풍광이 수도 처로써 손색이 거의 없었다. 묘향대, 무착대, 문수대 등등 모두가 병풍처럼 바위의 암봉으로 쳐져 있었듯이 앞에서 보는 조망은 수도 처로써 어떤 氣를 느낄 수 있는 신령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런데 아쉬움은 무착대에서 느꼈던 것처럼 이곳에서 각종 생활도구들이 어지럽게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못내 아쉽다. 

 <힘든 상황에서 또 다른 조망을 즐기며>

 

-또 다른 고행은 시작되고.

서산대를 되돌아 나와 다시 돼지령으로 오르라고 지다람님께서 하였건만 무슨 오기에서인지 서산대의 서북능쪽으로 계곡을 치고 오르기 시작하였다.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어 하기 싫은 스패츠를 하고 나서 산죽 밭을 헤치고 또 다른 암릉 길을 오르고 잡목 숲을 헤치면서 어렵게 돼지령 헬기장에 도착하였다.

<돼지령에서 바라본 천왕과 왕시루봉.노고단 그리고 만복대의 모습>

 

-돼지령에서

며칠 전 왕시루봉 능선의 자신의 행적을 쫓아본다. 요동치는 능선의 마루금에 혼이 빠져 버린다. 불무장등 능선도 이에 뒤질세라 만만찮게 뻗어 오르더니 저 멀리 촛대봉 세석에서 시작되는 남부능선도 이에 함께 가세한다. 아름다운 섬진강의 모습은 파랗다 못해 이내 검푸른 모습이다. 필름처럼 스쳐가는 지난 생각들을 현실 앞에다 끄집어 놓고 혼색된 지리의 모습과 함께 영원의 기억 창고로 집어 넣는다.

<문수대를 찾아서>

 

-문수대를 찾아서

돼지령에서 사면을 조망하고 노고단 쪽으로 향한다. 노고단 고갯마루로 이어지는 주 등산로 사면을 따르기 전 출입금지 입간판 뒤로 길은 열려 있다. 사면을 따라 15여분 걸으면 돼지령. 질매재와 노고단으로 연결된 삼거리를 만난다. 여기에서 질매재10여M쯤 내려가야 하는데 그곳을 생각하지 못하고 또 노고단으로 계속 올라가다 주위를 살펴봤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간다면 된다는 식으로 그냥 중간에서 좌측 사면을 치고 들어간다. 한참이나 헤매다가 아닌가 싶어 다시 왔던 길 되돌아와 처음 왔던 그 삼거리에서 좌우로 살피기를…… 이렇게 우둔한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였고 도대체 문수대는 어디에 꼭꼭 숨어 있는지……

어쩔 수 없었다. 문명의 이기를 빌릴 수 밖에 지다람에게 전화를 하였다. 끊어지다 이어지고 또 끊어지다 이어지기를 하다가 결국 문제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곳은 처음에 만났던 삼거리에서 10여M 내려가면 또 다른 문수대 3거리(질매재/노고단/문수대)가 나온다. 그곳에서 우측 사면을 따라 20분쯤 들어가면 문수대가 보인다.정말 대단한 인내심이 요구되는 산행이었다. 어렵게 찾은 문수대에 올라섰다.

<문수대와 병풍의 암릉>

 

-문수대

1803년경 화엄사 승려인 초운대사가 이곳에 문수암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 문수암 이렇게 찾기 힘든 곳에 와보니 신기할 뿐이다. 50M넘는 아찔한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휘감겨 있으며 허름한 초막이 어쩌면 이렇게 정갈스럽게 짜여 있는가 절벽 밑의 샘터에는 갈수기 때문인지 몰라도 간지럽게 물이 흘러나온다. 그 밑의 또 다른 창고 비슷한 초막과 눈 속에 덮인 자투리땅의 모습으로 보아 채소밭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생활하기에 알맞은 조건이 결국 지리산의 수도처가 들어선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현대식 산장과 폐허된 외국인 별장>

  

-노고단 산장과 유래

노고단에 선교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 1920년쯤이었다. 52동의 별장을 짓고 많을 때는 300여명이 넘었단다. 이곳에 오를 때 그때 돈 1원을 품삯으로 주고 그 들을 대나무들것에 태우고 메다 주었으니, 그때 1원은 사흘품삯이 되었으니 구례 농부들의 커다란 수확(?)이었을까. 그 당시 끼니도 제대로 연명을 하지 못한 그들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그 현실이 서글퍼진다. 그러던 것이 1948년 10월 19일 여순병란 때 40일 동안 반란군의 근거지가 되었다가 그때 12월 토벌군이 불태우고 부숴버렸다. 폐허의 노고단 옛터에 최초의 산장이 1972년 산악인들의 희망을 전해 듣고 박정희 대통령이 천만 원을 하사하여 40평 규모의 산장을 세웠던 것이 효시가 되어 1988년 지금의 현대식 노고단 산장이 되었다.  

<종석대 가는 길>

 

-종석대와 우번암 가는 길. 

 지리산이라는 이름은 대지문수사리(大智文殊師利)라는 말에서 지(智)와 이(利)를 따와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리산은 문수보살과 인연이 깊은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은사에서 조금 올라가면 상선암(上仙岩)과 우번대(牛飜臺)가 있다. 문수보살을 수행하던 길상동자가 들길을 지나다가 탐스럽게 잘 익은 조의 알곡을 손바닥 위에 놓고 바라보다가 조 알곡 세 알이 손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길상동자는 알곡을 버릴 수가 없어서 입안으로 털어 넣고 먹어버렸다. 그것을 바라다보던 문수보살이 동자에게 "너는 농부가 애써서 일군 곡식을 세 알이나 먹었으니 그 업보로 3년 동안은 소가 되어 그 밭 주인집에서 업 갚음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 길상 동자는 소로 변해버렸다. 소가 되어 그의 밭 주인집에서 일 한지 어느덧 3년이 되던 어느 날 해질 무렵 그 밭 주인이 방에 있는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 보니 소가 주인을 돌아보면서 "주인장! 3년 동안 일을 하여 빚을 갚았으니 떠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고 보니 소가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주인은 깜짝 놀라 소를 따라가 보니 상선암(上仙岩) 위에 수염이 하얀 노인이 앉아 있어 소를 못 보았느냐며 물어보니 노인이 하는 말이 "소의 껍질을 저기 죽어 있고 주인은 이 쪽에 있는 오두막에서 자고 있소"라고 하여 오두막 안을 들여다보니 잘 생긴 동자가 곤하게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노인에게 물어보려고 상선암 위를 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현신했던 문수보살도 없어 졌고 다시 보니 어린 동자도 오두막과 함께 살아져 버렸다. 그 후에 그 자리에 문수의 현신을 기리기 위하여 우번암을 창건하였다.

                                                                지리산(智異山)과 우번대 (여수문화연구소에서 퍼온글).

 

<종석대에서 바라 본 화엄사 계곡과 월령봉 능선/왕시루봉 그리고 우번암>

  

산장 휴게실에서 2개의 보름달을 꾸역꾸역 집어 삼키며 칼바람을 피하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며칠 전 왕시루봉 산행에서 찍지 못한 폐허 된 외국인 별장을 들러 종석대로 향한다. 목책 넘어 종석대를 오르다 보면 두 갈래의 길이 나온다. 두 개의 길은 나중에 합류되지만 어차피 이곳에 왔으니 종석대를 오르고 싶었다. 종석대의 암릉에서 화엄사의 계곡과 차일봉의 능선을 바라다보며 우번대를 향한다. 우번대로 향하는 길은 어차피 7-80도의 암릉구간을 걸쳐야 한다. 약간의 위험은 있지만 암릉타는 재미가 솔솔 하기만하다. 이윽고 우번암 가는 길은 편하고 호젓하며 남쪽의 태양빛을 받으며 가는 여유로운 길이다. 다른 암자와는 달리 주위의 암벽은 없지만 종석대에서 뻗어 내려온 위치에 명당자리임에는 틀림없었다.  

<상선암>

 

-또다른 암자 상선암을 찾아서.

이곳에서 상선암 가는 길은 암자를 지나면 시원스럽게 조망이 트이는곳이 나온다

삼거리에서 밑으로 살며시 길은 열려있다. 호젓하고 정겨운 산길은 남쪽으로 내려 뻗은 능선이라 겨울산행답지 않게 따뜻한 기분이다. 이윽고 20여분을 내려가니 그 많던 산죽길이 뚝 끊어지고 만다. 혹시 우측으로 난 길이 있을까 몇 번이고 확인하였지만 이내 나타나질 않으니 또 다시 잘못 찾은 길이 아닌가 싶어 아쉬웠는데 언젠가 누구의 산행 기에서 봐왔던 다리가 나오더니 삼거리에 도착하였다. 분명 우측이 상선암으로 가는 길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까 우번암에서 40여분을 내려와서야 상선암이 있을 줄 몰랐다. 여기에서 상선암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시암재 가는 길에서 항상 보아왔던 상선암에 와 있다. 본채 옆 건물 뒤의 커다란 절벽바위가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더니만 스님은 출타 중 이 시다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계시는 분이 이곳의 위치와 또 다른 우번암 가는 길을 자세히 안내 해주신다. 그리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안내 해 주시면서 버스편이 어려우니 택시를 불러주겠다는 고마움은 나의 빈 주머니 사정을 알고 그러시는지....... 이윽고 시암재 아래의 도로에 떨어지자마자 히치(hitch hiking)에 성공하여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에필로그.

처음부터 어렵게 시작된 산행이었는데 또 하나의 멋진 테마 산행이 되었다. 설마 포기 할까 생각도 하였지만 부딪혀보는 산행이 결과는 좋았다. 지리의 대변이시자 달인이신 지다람님께 이 산행 기를 통하여 고마움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한참이나 지났을까 잠에서 깨어난 자신은 이미 순천역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주머니 속의 나머지 돈1100원을 만지작거리면서……

  

-산행 코스별 시간.

-07:35 직전마을 (산행 시작).

-07:55 삼홍교.

-08:35 피아골 산장.

-09:10~09:25 서산대에서.

-10:35 돼지평전.

-10:40~11:35 알바시간.

-11:55 문수대 삼거리.

-12:15 문수대.

-12:45~13:10 노고단 산장.

-13:40 종석대.

-14:05 우번암.

-15:00~15:15 상선암.

-15:30 산행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