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바스에 빠진 후배 1시간 사투 끝에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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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6일 오후 4시쯤(현지시각). 정상에서 1100m쯤 내려간 해발 5300m 지점에서 후배 최씨가 갑자기 눈 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썩은 얼음’(등산용어로 녹은 얼음) 사이로 입을 벌리고 있던 깊이 50m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진 틈) 속으로 빨려들어간 것이다. 등반 전문가로서 발을 헛디딘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급경사에서 내려와 헬멧과 스크루 등 장비를 풀고, 서로를 연결한 자일만 남긴 상태였다.
얼음 벽에 온 몸이 부딪혔다. 1초나 지났을까? 길이 25m 자일이 팽팽하게 펴졌다. 1.5m 크기로 하늘이 몽롱하게 보였다. 호리병 같은 구멍이었다. 크레바스 20여m 밑에서 시체처럼 매달려 멍하게 5분….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꼭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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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일을 잘라 나라도 살 것인가? ‘꼭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크레바스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히말라야에서 다리를 못쓰는 동료 산악인과 함께 있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같으니까. 침묵이 흘렀다.
“형님, 살려주이소~.”
크레바스 안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후배의 투박한 절규가 울려퍼졌다. “다리가 부러졌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레바스를 2m 앞둔 경사면에 벌떡 일어선 선배는 남은 힘을 열 손가락에 쏟아부어 자일을 움켜쥐었다. 후배는 감각이 사라진 다리로 필사적으로 자일에 매달렸다. 배낭 속 등강기(올라갈 때 이용하는 등반 장비)를 이용해 한 뼘 한 뼘 크레바스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부러진 갈비뼈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온 몸에 고통을 전했다. 그런 사투의 구조작업 1시간. 햇빛이 비치는 크레바스 바깥으로 후배 최씨의 머리가 나타났다. “살았다!” 말이 없던 선배 박씨는 후배의 몸을 바깥으로 끌어낸 뒤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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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최씨는 손가락, 발가락을 모두 잘라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다. 최씨는 수술을 거부하고 고향 진주로 내려가 경상대 병원에서 손가락, 발가락이 썩지 않도록 하는 치료를 받고 있다.
험한 거벽코스만 골라 8000m급 7봉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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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그는 고산 등반가들 사이에 ‘죽음의 산’이라 불리는 K2(8611m)를 산소통 없이 올라 한국 최초 ‘무산소 등정’ 기록을 세웠다. 2002년에는 시샤팡마(8026m) 남서벽을 정복,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에 유일하게 새 루트를 만들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박씨는 1997년 삼천포산악회 동갑내기 회원인 정정엽(34)씨와 결혼해 현재 아들 성율(7), 딸 진희(5)를 두고 있다. 박씨의 고향 후배인 최강식(경상대 3년)씨는 2002년 인도 가로왈 히말라야를 박씨와 함께 등반했다. 이번 등반에서 선배 박씨와 함께 ‘촐라체 북벽 동계(冬季) 등정’이란 기록을 세웠으나, 정상에서 찍은 필름을 살기 위해 하산길에 버리고 왔다. 최씨는 “언젠가는 형과 함께 꼭 필름을 찾으러 가겠다”고 했다.
"형 혼자 가, 난 틀렸어" "안돼 함께 살아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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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같은 크레바스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영하 15도를 넘는 살을 찢는 살인적인 추위에 1시간 동안 구조의 사투가 끝났을 때는 두 사람 모두 한 발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천근 만근의 무게에 호흡조차 곤란한 상황이었다.
후배의 두 발목은 퉁퉁 부어 올랐고, 선배는 숨을 몰아쉴 때마다 왼쪽 가슴을 칼로 ??는 고통을 느꼈다.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5시간 거리의 베이스캠프를 앞두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등정했던 눈덮인 촐라체봉을 쳐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자. 살아서 돌아가자” 선배가 후배를 부축했다. 하지만 내 한몸 가두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금세 한계상황에 도달했다. 선배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배는 엉덩이로 기어갔다. 양 손으로 바위를 짚은 채 엉덩이를 옮겨 조금씩 조금씩 밑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날 밤, 두 사람은 강추위 속에서 비박(텐트 없이 밤을 지새는 것)을 해야 했다.
“미안해, 혀~엉.” 후배 최씨는 선배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괘얀타, 그럴 수도 있다.” 선배도 하늘만 바라봤다. 후배는 크레바스에 빠진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선배 또한 잠시나마 줄을 끊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든 자신이 괴로웠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두려움뿐이었다. ‘과연 살아서 이 산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1월17일 아침. 선배 박씨는 크레바스 사고 때 안경을 잃어버려 온통 시야가 흐렸다. 시력이 마이너스 0.3. 안경 없이는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힘들었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던 중 70~80도의 급경사가 나타났다. 눈벽에 피켈(얼음 송곳)을 찍으며 내려왔다. 한발, 한발…. 마지막 발을 내딛는 순간 얕게 박힌 피켈 하나가 튕겨져 박씨의 이마를 깊게 긁고 지나갔다. 터져나온 붉은 피가 흰 눈위에 잉크처럼 뿌려졌다. 5㎝ 길이의 상처였다. 마음은 한없이 약해지면서도 ‘포기하지 말자’ ‘포기하면 죽는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두 사람은 배낭을 버렸다. 몸뚱아리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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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밤. 두 사람은 밤새 고통으로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박씨는 “비명을 들으며 서로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후배 최씨가 꼼짝하지 못했다. 발에 피가 공급되지 않아 물먹은 솜처럼 부풀어올랐다. “형님! 먼저 가십시오. 저는 힘듭니다.” 가장 가까운 인가(人家)가 수백m 밖이었다.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망설이던 박씨는 “내가 마을 사람을 불러 곧 너를 데리러 오겠다”며 등을 돌렸다. 몇 발자국 못가 눈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박씨의 걸음이 빨라졌다. 3시간쯤 걸었을 때 오두막 두 채가 나타났다. 벌써 눈은 발목 깊이로 쌓여 있었다. 달려가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다. 호주머니 속 피켈 망치로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마른 장작만 천장까지 쌓여 있을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 지금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이 지나면 후배, 강식이의 삶의 희망은 사라진다. ‘그 녀석 부모를 무슨 낯으로 보나.’ 크레바스에서의 갈등이 다시 밀려왔다. 그러나 박씨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물어지는 몸을 이겨낼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삐-그덕.’ 문 열리는 소리에 박씨는 벌떡 일어났다. 시커먼 그림자가 성큼 들어왔다. 후배였다. “강식아!” 후배 최씨가 눈 위에 찍힌 선배의 발자국을 따라 필사적으로 오두막까지 들어온 것이다.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선배가 “잘 왔다. 이 자식아. 진짜 잘왔다. 걱정돼서 죽을 뻔했다”고 소리쳤다. 후배는 “눈이 쏟아지는데, 그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아 따라왔다”며 웃어 보였다. 그뿐이었다.
이날 두사람은 4일 만에 오두막에 남아 있는 꿀과 말라 비틀어진 초콜릿 조각을 녹여 배를 채웠다. 쌓인 장작으로 불도 쬐었다. 2시간 간격으로 잠을 깨,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이들이 마을 사람을 만난 것은 19일 오전. 베이스캠프로 ‘헬기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틀 뒤(21일) 머리 위로 헬기가 날아왔다. ‘이제 살았구나!’ 하지만 손과 발은 온통 동상(凍傷)에 걸려 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너무나 감동적이고 진정한 산 사나니들의 사랑과우정에 감동되어 조선일보에서 퍼왔읍니다........
빠른쾌유를 빕니다.......
무슨 말씀을 올려야 할련지.....
힘내시구요.... 쾌유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