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2~13일
지리산, 일장거사와 백운대
 

지난 해 12월 지리산 천왕봉에서 세석까지 간 후 지금까지 백두대간의 시간은 멈추어 있었다.

올 1월 산행 계획을 세웠지만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가지 못했다.

3월부터 국립공원 봄철 입산통제가 시작되기 때문에 2월에는 지리산을 벗어나야 한다.

설 연휴를 마치고 12일, 13일을 실행의 날로 정하고 준비했다.

친구들에게도 산행계획을 알렸더니 스틱 하나 짚고 다니는 일장거사(一杖居士)가 동행하겠다고 했다.

 

12일 05시에 집을 나섰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사상역에 도착하여 역시 첫차를 타고 온 일장거사를 만났다.

진주행 06시 20분 버스를 타고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07시 40분에 도착했다.

식당에서 쇠고기국밥으로 아침을 간단히 먹고 08시 5분 중산리행 버스를 탔다.

09시 5분에 중산리에 도착하여 매표소까지 걸어가 식수를 준비하고 09시 40분에 산행을 시작했다.

집을 출발하여 지체시간 없이 쉴 새 없이 움직였으나 산행 시작하는데 4시간 40분이 걸렸다.

 

세석에 어떻게 갈까 생각 많이 했는데 중산리에서 가기로 했다.

백무동에서 한산계곡으로 통해 갈 수도 있고 청학동에서 남부능선을 타고 올라갈 수도 있으나

승용차를 직접 몰고 가지 않는 이상, 중산리로 가는 것이 가장 일찍 산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산리에서 올라가되 천왕봉은 거치고 않고 장터목으로 바로 갈 것이다.

 

몇 년 전 중산리에서 천왕봉에 올랐다가 장터목을 거쳐 중산리로 내려오면서

무릎을 다쳤던 일장거사는 지리 주능선 종주가 처음인지라 약간 긴장하는 눈치다.

그러나 몇 달 동안 꾸준히 산행하면서 몸을 단련시켰기 때문에 나는 별 걱정은 안했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체력에 맞게 걸으면 문제없을 것이다.

 

바위를 칼로 잘라놓은 것 같은 칼바위에 도착했다.

벼락을 맞았는지 정말 그렇게 생겼다.

출렁다리를 지나 천왕봉과 장터목의 갈림길에서 중산리 계곡을 따라가는 장터목으로 갔다.

장터목에서 투박한 바위투성이 이 길로 내려오다가 무릎을 다쳤다는 일장거사는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다.

언제 한번 복수혈전 해야지?

 

완만한 계곡길을 타고 가다가 홈바위교를 지나 유암폭포에 도착했다.

폭포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여기서 아이젠을 차고 겨울 지리산을 올라간다.

하늘은 흐리다. 기온은 영하 10도 정도, 바람이 거세지 않으니 춥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주능선에 올라가면 바람이 어떨지 모르겠다.

 

아빠와 함께 하산하는 초등학교 1,2학년 정도의 꼬마를 봤는데

가파른 빙판길을 내려오려니 힘이 드는지 짜증을 부리고 있다.

아마 장터목에서 1박을 하고 내려오는 길일 것이다. 아이를 강하게 키우는 아빠다.

우리는 어린 학생이 장하다고 칭찬 해주었다.

힘내어 잘 내려가거라. 친구들에게 눈 쌓인 지리산 천왕봉에 갔다 왔다고 자랑도 많이 해라.

친구들이 너를 달리 볼 것이다.

 

장터목의 샘물이 얼어붙었는지 물통 들고 계곡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춥기는 추운 모양이다. 3시간 만에 장터목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이라 취사장이 꽉 찼다. 

지리산에 처음으로 코펠과 버너를 짊어지고 왔다.

날씨가 추워서 저녁과 아침에는 따뜻한 국물이라도 먹어야 될 것 같다.

그러나 저녁에 소주 한잔하면서 밥을 해먹기로 하고 점심은 대피소에서 판매하는 야채비빔밥으로 간단히 먹었다.

 

오늘의 목적지 벽소령까지 가기 위하여 곧 출발했다.

눈 덮인 연하선경이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눈을 덮어쓴 제석봉과 천왕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하얀 눈이 주제(主題)를 돋보이게 하는 아름다운 배경이 되었구나.

연하봉과 촛대봉을 넘었다.

넓은 세석평전에 눈 맞은 세석대피소가 그림엽서나 달력에서 본 듯한 이국적인 모습이다.

세석대피소에는 들리지 않고 바로 통과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오는 종주길에 벽소령에서 세석까지 오는 구간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된다.

바위를 타는 오르막도 많고 7-8시간 걷다보니 체력도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아직  체력도 남아돌고 세석에서 벽소령으로 내려가는 것이라 오늘은 쉬울 것 같다.

 

흐린 하늘이 점점 맑아진다.

눈이 시릴 만큼 푸른 하늘이다. 가을 하늘보다 더욱 맑다.

하얀 눈, 회색 나무, 푸른 하늘의 3색 조화가 너무 보기 좋다. 

왼발, 오른발에 “뽀드득, 뽀드득”하고 소리 나는 흰눈을 밟으며 걷는 이 기분을

저  밑의 사람들이 어찌 알까보냐?

첫 번째 지리 능선종주에서 이런 기분을 맞볼 수 있는 일장거사도 행운아임에는 틀림없다.

 

선비샘에 도착했다. 이곳의 샘물도 얼어붙었다.

여기부터 벽소령까지는 막대기로 두드리며

흥얼흥얼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걸을 수 있는 평안한 오솔길이다.

오늘의 목적지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하니 17시 20분이다. 알맞은 시간에 왔다.

 

침상 배정을 받고 짐을 정리한 다음, 취사장으로 향했다.

저녁은 “라면 참치죽밥”이다.

산객들로 가득 찬 취사장 한 구석에 서서 밥 먹으며 간단히 소주 한잔 하였다.

산장에서는 한잔 마시고 빨리 자는 것이 최고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일장거사는 잊혀지는 않는 산장의 밤을 보내게 된다.

 

담요 펴고 누웠다가 밖에 나왔다.

산장의 불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 가서 하늘을 보니

그믐을 지난 미인(美人)의 눈썹 같은 초승달이 서쪽 하늘에 떠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에 익숙한 나의 두 눈에

구름 한점 없는 밤하늘의 은하수가 머리위로 쏟아져 내린다.

아, 이렇게 많은 별을 보다니, 삼각대를 안 가지고 온 것이 천추(千秋)의 한(恨)으로 남겠다.

저 하늘의 별 사진을 찍어 별 하나를 단돈 만 원에 팔아도 저 많은 별이면 최고의 갑부가 되겠다.

"별 헤는 밤"의 윤동주가 알면 큰일날 소리다.

 

20시 30분에 소등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장터 같은 산장의 밤이 적막으로 돌아가기는 요원한 일.

술 마시다 늦게 들어오는 사람, 이야기 하는 사람, 코 고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그리고 난방을 잘 해주어 너무 덥다.

이불을 덮지도 못하고 팬티 하나만 입고 누웠다.

더워서 담요 들고 방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영하 십도 이하의 날씨에 비박한다고 대피소 밖에서 자려다가 공단직원들에게 쫓겨 들어온다.

이런 소란 속에 뒤척이다 12시경에 잠들었는데 일장거사는 지리산의 첫날밤을 하얗게 지새웠다고 한다.

 

13일, 05시에 일어났다.

아침으로 사골 우거지국을 끊여먹고 06시에 랜턴 켜고 노고단으로 출발했다.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가 춥다.

별이 쏟아지는 하얀 눈길을 이마에 불 밝히며 걸어간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가는 가슴 설레는 숫총각처럼.

 

형제봉에 가까이 왔을 때 천왕봉 하늘이 붉게 물든다.

오늘은 삼대에 걸쳐 덕을 쌓은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붉은 일출을 보겠다.

주위가 너무 어두워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찍기에는 셔터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초인적인(?) 부동심(不動心)을 발휘하여 천왕봉과 형제봉을 찍는다.

다음에는 삼각대를 꼭 휴대하겠다고 주먹 불끈 쥐고 다짐했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추우니 일단 든든히 먹자고 마지막 우거지국을 끊여 먹었다.

명선봉을 내려가는 계단에서 벌거벗은 반야봉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고단쪽에서 본 모습과 달리 우락부락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왼쪽 옆에 붙어있는 삼도봉이 마치 대장을 수행하는 시중처럼 보인다.

일명 똥꼬봉으로 불리는 예쁜 엉덩이 같은 쌍봉(雙峰)이 매혹적이다.

역시 Naked한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겨울산이 좋다.

 

토끼봉은 어느 쪽으로 올라도 힘들다.

지리산의 토끼는 순한 토끼가 아니라 쫓아가는 사람의 진을 빼놓는 숨어있는 토끼다.

토끼봉을 내려와 화개재에서 공포의 552개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른다.

눈 덮인 화개재의 넓은 공터가 평화롭게 보인다.

차근차근 한 계단씩 올라가니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

 

물맛 좋은 임걸령의 샘물은 조금씩이나마 흘러나온다.

여름철에는 그렇게 수량이 풍부하더니.

돼지평전을 지나 노고단으로 가는 길은

누가 소의 잔등을 타고 가는 듯한 길이라 하던데 정말 그러하다. 부드럽고 부드럽다.

노고단을 우회하는 능선길도 눈으로 덮여 바위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 지리산행은 우리를 위해 눈이 푹신한 주단을 깔아 주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은밀히 봄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그 부드러움으로 모든 모짐과 날카로움을 다 덮어버린 것 같다.

 

노고단 안부에서 밑을 보니 종석대가 잘 보인다.

노고단에서 종석대를 거쳐 성삼재로 내려가는 것이

백두대간의 정확한 마루금을 밟는 것인데 종석대가 출입금지 구역이니

보통은 노고단에서 바로 포장도로를 걸어 성삼재로 내려간다. 

노고단대피소에서 원두커피 한잔을 마신다.

이틀 동안의 산행 피로가 가시는 것 같다. 성삼재에 내려오니14시였다.

  

택시 타고 구례로 가서 점심 먹고 목욕하고 부산으로 오는 버스를 탔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장시간 산행을 마친 동안(童顔)의 일장거사 얼굴이 뽀얗구나.

산에서 고생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장거사에게 앞으로 원활히 산으로 돌아다니기 위한 팁 하나를 일러주었다.

 

부부가 같이 산행함이 가장 좋은 일이로되 혼자 갔다 올 경우

산에서 받은 정기(精氣)를 공유(共有)함에 소홀치 마시게.

더구나 지리산 같은 명산(名山)에 하루 머물다 왔으니

그 정기(精氣)의 웅혼함은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칼바위

  

  

유암폭포

  

저 밑에 중산리

  

제석봉과 천왕봉

  

세석 가는 길

  

  

  

세석대피소

  

눈 위에 쓴 희망편지

  

칠선봉

  

  

선비샘

  

  

  

  

벽소령대피소

  

일출로 붉게 물드는 천왕봉, 밑의 불빛은 벽소령대피소

  

형제봉

  

아침 햇빛을 받는 연하천대피소

  

  

삼도봉 올라가는 552 계단

  

  

노고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