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에서 출발하는 안내산악회의 버스를 이용하여 설악산으로 간다.(22:00)
차 안에서 한 잔의 술로 회포를 푼다.
캄캄함 속에서 날은 바뀌고 2월6일의 새벽은 깊어가지만
오고 가는 술잔과 이야기는 계속된다.

버스가 멈추어 선 관광민예단지 휴게소에서 또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떠나가는 버스에 승차한다.
밤을 꼬박 세운 산둘님과 함께 우리 일행 4명은 한계령 주차장에서 하차한다.(02:00)

항상 북새통을 이루던 곳이지만
지금은 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쓸쓸함으로 가득 차 있다.
난로가 있는 화장실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어둠에 묻혀있는 텅 빈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도로는 살짝 얼어 미끄럽다.
손전등을 밝히며 도둑놈처럼 조심스럽게 도둑바위골로 진입한다.
불 빛 속에 드러나는 모습은 낯 익은 계곡이다.

개울을 가로질러 한참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큰 바위 아래 개구멍을 통과하면
꽤 넓은 공간이 있는 비박터에 도착한다.(02:50)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철을 제외하면 언제나 활용 가능한 곳이다.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이곳에서 라면이나 끓여먹고 가자는 의견도 있지만
좀 더 가서 먹자면서 출발한다.
올라갈수록 먹고 가자는 빈도와 강도가 심해지고 더 올라 가면 물 구하기도 힘들 것 같아서
먹고 가자는 의견에 동조하고 배낭을 푼다.(03:20)

바람을 막아주는 작은 동굴 비슷한 곳에는 고드름이 주렴처럼 펼쳐 있고
천장 바위에는 하얀 얼음 꽃이 피어 있다. 


 



쪼그리고 앉아 불을 피우자 얼음 꽃이 녹아 물이 뚝뚝 떨어 진다.
떨어지는 물을 피하려고 하늘이 트인 넓은 공간으로 내려간다.
타오르는 불꽃에 손을 녹이면서 라면을 먹는다.

어둠이 무섭지 않고 눈 덮인 겨울 산행이 두렵지 않다.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여유일까?
배부름에서 오는 것인가.
불꽃의 뜨거움에서 뿜어나는 열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찾아 산으로 가는 사람은 인간을 속박하고 억압하는 굴레를 벗어나
자연적 자유의 회복을 꿈꾼다.
죄 없는 선인(善人)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속죄하는 것이 종교의 가르침이지.

가지 마라 하지 마라는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에 의한 금지가
자연과의 조화를 모색하고 새로움을 찾고 심지어는 하나뿐인 목숨마저 담보로 하여
도전하는 모험심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
인간 능력의 극한에 도전 하고자 하는 인간정신은 실증법 뿐만 아니라 종교적 금지마저도 초월한다.

우리가 머무른 흔적을 눈으로 덮고 깨끗이 정리한다.
눈 덮인 하얀 모습. 그것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이다.

산행은 다시 시작된다(04:30)
사라졌다 나타나는 발자국 따라 계곡을 건너고 바위를 넘어 올라가면
낮 익은 곳 한계령 삼거리에 도착한다.(05:40)
동쪽으로 뻗어나간 유장한 서북주릉을 타고 걷는다.

날은 서서히 밝아오고 먼저 간 발자국 따라 걷는 산행.
“뽀도독 뽀도독 …” 리듬을 느끼고
상쾌한 공기는 폐부를 시원하게 하고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은 머리를 맑게 한다.
아 ! ! !    호연지기.
그것을 느끼고 싶다.

 

귀때기청봉과 안산. 좌측 가리봉

 

점봉산에서 북암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단목령과 곰배령도 보인다.


용아장성. 뒤로는 마등령과 황철봉.


부챗살처럼 퍼져 나간 능선과 골짜기.
하얗게 드러나는 속살을 바라보며 매끈한 여인의 몸매를 오버랩 시키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손길 따라 부드러움을 느낀다.

윤기를 머금은 까만 숲 속을 헤집으며 물길을 찾는다.
거칠고 조급한 손놀림을 거부하는 강력한 저항.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뜬다.
아름다운 설악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쌍봉(중청봉과 대청봉)

작은 표시목이 외롭게 서 있는 끝청에 도착한다.(07:30)
일출은 싱겁게 끝났지만 설악의 매력이 어디 일출뿐이겠는가?

 

볼 품 없는 고목은 세월의 연륜을 안으로 삭이면서 눈 속에서도 굳건함을 잃지 아니한다.

 

 

눈 앞에 펼쳐진 중청산장과 대청봉은 부드러움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달려가야지 한 걸음에 당신의 품에 안겨야지.
당신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고백해야지.
뺨을 어루만지는 당신의 숨결을 느끼면서 사랑을.

구름 위에 하얀 눈을 이고 있는 금강산

헬기, 중청산장, 중청봉

무너미고개 뒤로 신선대

 

 

 




중청산장에서 2시간 동안 윤더덕님이 요리한 된장찌개로 아침을 맛이게 먹느라고
대청봉에는 10:40분에 도착했다.
텅 빈 정상에서 마음을 비울 수 있는 비법이 없을까 골돌히 생각해 본다.

이따금씩 올라 오는 등산객에게 정상의 자리를 비워주지만 생각은 진척이 없고
속인은 집착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는가 보다.
주사야몽(晝思夜夢). 밤낮으로 생각하면 혹시 꿈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을는지.

 

페허가 된 대청산장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메마른 체구에 키가 큰 산장지기의 자상한 모습이 아련거린다.
행선지를 묻고 등산로를 설명해 주시고 조심 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시던,

언제나 찾아가면 항상 계시던 그 분도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셨을테지.
그때도 주말이나 연휴 때에는 산장은 늘 만원이었고 활기가 넘쳤는데 …….
세월은 흘러가고 사람은 간 곳 없지만 황량한 시멘트 덩어리 속에서도 추억은 숨 쉬고 있다.

푸른 하늘을 본다.
흰 구름이 모였다 흩어졌다 이 얼굴 저 모습을 만들면서 흘러간다.
무심한 인생인가?
덧없는 인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