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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개화의 고려산 진달래 군락지-



고려산 진달래(혼잡함 보다는 차분한 평일의 진달래 축제장)

2018030018호            2018-04-19()


자리한 곳 : 인천 강화군

지나온 길 : 산화(미꾸지)고개-낙조봉-고인돌군락지-진달래군락지-고려산-청련사-청련사입구-강화터미널

거리및시간: 9시간 49(11:47~16:57) : 5시간(고려산 8.1km + 청련사입구-강화터미널 3.8km = 11.9.km)

함께한 이 : 전 진장동료 4사람

산행 날씨 : 하늘은 맑고 기온 높음(미세먼지 조금 나쁨)


때 이른 더위가 기승으로 4월 기상관측 사상 가장 더운 날씨를 보였다는 19() 국내에서 가장 늦게 피지만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해 주는 진달래꽃을 감상할 수 있는 있는 곳이 강화도의 고려산 진달래꽃이라 확신하며, 전 직장 동료 4사람이 오랜만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순한 육산을 행복하게 산행했고 강화도의 대표 먹거리이며 명물인 밴댕이회와 무침으로 하산주를 나누고 산행기를 정리하려 생각해 보지만 강화군청 고려산 진달래 축제의 홈페이지 보다 더 잘 정리하고 표현 할 그릇이 못되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이 옮겨오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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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화고개에서 낙조대에 이르며 만난 풍경-


江華島(강화도)

김포반도에 이어진 내륙이 오랜 세월 침강하면서 섬 강화도가 되었다. 오늘날 그 잠긴 허리 위로 강화대교가 놓여 섬맛이 가신 지도 오래다.

제주·거제·진도·남해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큰 섬 강화도는 11개 유인도와 17개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민족의 성산 마니산과, 강화의 진산 고려산·진강산·길상산 등의 저산성 산지도 발달했으며, 산지 사이로는 비교적 넓고 기름진 평지가 마련되어 있어 섬이되 섬으로 느껴지지 않는 곳이 강화이다.

강화도는 여전히 우리나라의 첫손 꼽히는 성지이다. 시조 단군이 하강하신 이후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 지내며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기본 정서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강화의 역사는 단군 이전으로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선사시대에 막강한 지배층을 형성했던 청동기인들의 고인돌무덤이 하점면 장정리 등 강화 전역에 산재해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어떤 돌무덤은 수십 톤에 이르는 거대한 돌로 만들어져 있어 대체 그 돌들을 어디서 어떻게 옮겨왔는지 여전히 의문 속에 있다.

서쪽의 요새 강화도는 삼국시대 때부터 주목받아왔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으로 해전과 육전의 요충지였고, 고구려는 일찍이 이곳에 '혈구군'을 설치하였다. 중국과 해상·육상 통로가 없었던 신라 역시 자주 이곳을 넘봤다. 누가 한강 유역을 먼저 확보하느냐가 삼국간의 최대 관건이었다.

고려시대를 맞아 또 다른 역사적 국면이 전개된다. 몽골병의 잦은 침략을 피해 고종은 서울에서 가까운 섬 강화로 천도(1232)를 감행, 줄기찬 저항으로 39년간의 장기전을 치른다. 그 아픈 시련을 불력(佛力)에 의지해 팔만대장경을 주조, 민족혼으로 승화시킨 것은 여간 자랑스런 일이 아니다. 당시의 고려궁터가 강화읍 관청리에 남아 있다.

조선 인조는 1626년 강화를 유수부로 승격시킨다. 이듬해 정묘호란을 겪으며 인조는 이곳으로 피난했고, 후금과의 강화도 조약을 이곳에서 맺는다. 그러나 병자호란(1636)을 당해 강화는 완전 함락되고 마는 오욕의 역사를 겪는다.

효종은 나라를 잃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한을 씻고자 북벌계획을 추진하면서 이곳에 진()과 보()를 설치했다. 군사력 강화는 이후 숙종 때까지 추진되어 12·보와 53돈대, 9포대가 축조·설치되었다. 이 중 현재 복원되었거나 상태가 양호한 전적지는 스물여덟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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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DEE4B5ADD1A8B254F67-낙조대 능선에서 바라본 혈구산, 고려산, 고인돌군-


근대에 들어서도 프랑스인들의 병인양요(1866), 미국인들의 신미양요(1871), 일본인들의 운요호 사건(1874) 등 제국주의 자들이 호시탐탐 넘보는 게 강화도였다. 이들은 특히 강화도 일대의 무덤들을 파헤쳐 고려청자를 비롯해 알짜배기 부장품들을 속속 도굴해갔으며, 민가를 약탈하고 귀중한 도서들을 빼내갔다. 몇 년 전 프랑스박물관에 소장된 규장각 도서 한 권을 돌려주네 마네 하는 사건이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당시 강화에서 약탈해간 것들이었다. 그들(프랑스·미국·일본 등)이 빼내간 도서와 문화재는 현재 우리나라에는 없는 희귀한 것들로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감히 헤아릴 방도가 없다.

한강·예성강·임진강의 3대 하천 어귀에 있으면서 서울의 관문이었던 강화는 이러한 수난에 대항하면서 상처투성이의 땅이 되었다. 한국사의 축소판인 것이다. 이 지역에 형성된 문화재 역시 저항 속에서 일구고 승화시킨 것이어서 귀하고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 충렬왕 때 인천(당시는 인주)에 병합되었다가 우왕 3(1377)에 강화부로 승격되었는데, 21세기의 문턱인 19951월 강화는 다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강화는 대개 아픈 역사의 흔적 때문에 오늘날의 관광지가 되었지만, 강화는 여전히 강화이고 강인한 긍지의 땅이다. 그것이 해쳐서는 안 될 강화의 정서이다.

강화도 유적지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살펴보면 편리하다. 하나는 강화읍을 중심으로 읍성과 고려궁터, 몇몇 불교유적, 선사 시대의 고인돌무덤 등을 둘러보는 코스이고, 두번째는 해안을 따라서 조선 후기의 외침과 저항의 현장,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과 전등사, 서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정수사, 민족의 시조를 우러르는 마니산 참성단, 바다 건너 석모도의 보문사 등을 살펴보는 코스이다.


고려산 이야기

고구려 장수왕 4년에 인도의 천축조사가 가람터를 찾기 위해 고려산을 찾았다. 그는 정상에 피어있는 5가지색상의 연꽃을 발견하고 불심으로 이를 날려 꽃이 떨어진 장소마다 절을 세웠다. 하얀 연꽃이 떨어진 자리엔 백련사를, 흑색 연 꽃이 떨어진 자리엔 흑련사를, 붉은 연꽃이 떨어진 자리엔 적석사를, 황색 꽃이 떨어진 자리엔 황련사를, 청색 꽃이 떨어진 자리엔 청련사를 각각 지었다. 그러나 청련사만은 조사가 원하는 장소에 떨어지질 못해 원통한 나머지 원통암이라는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고려산 주변엔 3개의 사찰과 1개의 암자가 천오백년을 넘게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한때는 이곳에 자리한 연못을 오련지라고도 하였으며 산이름을 오련산으로, 다섯 개의 사찰을 하나로 묶어 오련사라고도 불렀으며 후에 오련산은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고려산으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려산은 고려의 정기를 품은 산으로 진달래가 피는 봄의 모습도 좋지만 백련사, 적석사 등 사찰과 고인돌 군락지, 오련지, 홍릉 등 문화재가 분포하여 역사탐방 위주의 산행에도 좋다. 서쪽 적석사를 가다보면 솔밭을 지나고 갈대밭을 지나 낙조봉을 만날 수 있는데 저녁에 서해 수평선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며 해지는 광경은 [강화8]중 하나이다.

또한, 고려산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연개소문에 관한 구체적인 전설이 있는 장소이다. 고려산 인근에서 태어나 치마대에서 말을 타고 무예를 닦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오련지에서 말에 물을 먹였다고도 하는 전설이 있다.

연개소문을 가리켜 독립 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위대한 혁명가로, 박은식은 [천개소문전]에서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일인자로 평가했다. 연개소문은 시대에 따라서 그 평가가 달라져왔다. 한때는 독재자로, 아니면 거대한 제국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민족최고의 영웅으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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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산 진달래 보다 더 즐거운 표정의 동료들-



진달래 이야기

진달래는 잎이 나오기 전인 4월부터 가지 끝에 2~5송이씩 모여 피며, 통꽃으로 꽃부리 끝은 5갈래로 조금 갈라져 있다. 수술은 10, 암술은 1. 진달래는 한국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개나리와 함께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나무로 사랑받아 왔으며, 봄에 한국의 산 어디에서나 꽃을 볼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져 있다. 개나리가 주로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는 반면에 진달래는 약간 그늘지며 습기가 약간 있는 곳에서 잘 자란다. 가지가 많이 달리기 때문에 가지치기를 해도 잘 자라며 추위에도 잘 견딘다.

꽃은 따서 먹을 수 있으므로 날것으로 먹거나 화채 또는 술을 만들어 먹기도 하며, 화전을 부쳐 먹기도 한다. 술을 빚어 먹을 경우 담근 지 100일이 지나야 맛이 난다고 하여 백일주라고도 하며, 한꺼번에 많이 먹지 말고 조금씩 먹어야 몸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달래를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하는데, 이는 두견새가 밤 새워 피를 토하며 울어, 그 피로 꽃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탐스럽게 핀 고려산 진달래 가지로 꽃 방망이를 만들어 앞서가는 여성의 등을 치면 사랑에 빠지고 남성의 머리를 치면 장원급제 한다는 재미있는 전설도 전해진다.

해도 고려산 진달래는 유난히 붉은 꽃잎을 처연하게 피우고 있다.                   -강화군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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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리 수령 200년의 소나무, 강화(읍내)산성 서문-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찾아가 안기면 언제나 포근하기만 한 을찾아서~


2018-04-23

계백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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