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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정맥 까치산에서 분기한 매죽헌 단맥 시작점-




梅竹軒(매죽헌) 단맥 날씨 맑으나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2015028017호            2016-03-01()


자리한 곳 : 충남 논산시. 전북 완주군

지나온 길 : 석천(운곡리)-까치봉-통박산-성삼문묘지-군도(매죽헌로)-227m-은진임씨공원묘지

거리및시간: 산행시간 6시간 48(09:13~16:01) = 총거리: 9.3m(들머리 1.8km 포함)

함께한 이 : 신경수선배, 고송부선배 그리고 계백

산행 날씨 : 비교적 맑음


퇴행성관절염 진단 충격으로 3일연속 산행 때문인지 아니면 어젯밤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거의 뜬눈으로 지새운 탓인지 구분하기 어려우나 몸이 무거워 자리에서 뒤척이다 태양이 떠오를 무렵 모텔을 빠져나와 조반을 해결하려고 아침에 영업하는 식당을 찾느라 배회하다 찾아든 식당은 메뉴가 백반뿐이고 입에 맞지 않았으나 산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해야 하기에 억지로 비우자니 반주로 소주 한 병씩을 깔끔하게 비우고 택시를 잡아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곡리 1053-2(643번 지방도로 운곡로 서천정류장) 충남 논산시와 경계한 고갯마루 공장지대에서 산행을 준비한다.(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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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8304F56DED6F20E6598-충남 논산과 전북 완주 경계지인 들머리 풍경-



이정표(논산 가야곡면/완주 화산면)에서 화산으로 조금 내려간 능선에서 들머리 하자 어제내린 눈이 쌓여 미끄러운 경사로를 치고 올라 산행을 시작하며 생각해 보니 아차 오늘이 3월을 시작하는 첫날이며 97주년 3.1운동 기념일인데 깜빡했구나!!! 황급히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숙인다.


三一節(삼일절) : 31 독립 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민족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제정한 국경일. 일제 강점기에 있던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맞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펼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19193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19195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어요.

3·1운동의 기미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기 전, 만주에서 대한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고, 일본에서는 2·8 독립선언이 발표되었어요.

191931일 정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기 위해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적 시위를 열었어요. 이러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1949년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어요. 삼일절이 되면 정부에서 주관하여 기념식을 열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 돌아가신 애국운동가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그 뜻을 돌아보는 의식을 해요. 또 각 가정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긴답니다.         -학습용어사전 초등사회-


200m 이상의 고도차를 극복하느라 숨을 헐떡거리며 410m가량의 무명봉 2개를 넘어서며 언제가 책에서 읽었던 공감이가는 단어가 떠올라 비 맞은 중처럼 아무리 기운 센 놈도 기술 좋은 놈 못 당하고 아무리 기술 좋은 놈도 젊은 놈 못 당하고 아무리 젊은 놈도 죽기 살기로 덤비는 놈 못 당한다.”중얼거리다 보니 90여분만에 오늘 종주할 산줄기 분기점 까치봉( 456m)에 닿았다.(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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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에서 2개의 큰 봉우리를 넘기 힘들어 쉬고 있다-


매죽헌(금남 통박)단맥 : 금강기맥 까치봉에서 분기해 북쪽으로 이어지며 통박산 성삼문묘지에서 매죽헌로를 건너 227m봉 은진임씨공원묘지 구명봉 갈마산에서 호남고속도로를 건너 바위산에서 탑정호의 맑은 물을 바라보며 병암리에서 마감하는 약 11km의 짧은 산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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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594F56DED6FB030683-금북정맥 까치봉, 통박산 삼각점-


그런대로 진행할 만한 능선을 따라 매죽헌(금남 통박)단맥 산줄기 최고봉인 통박산(304m)에서 4등 삼각점을 확인하고 능선길을 따라내려 임도에 닿으니 햇살이 따스하게 잘 들어 나른함이 몰려든다. 점심을 해결하고자 편하게 자리를 잡았는데 나뭇가지에 걸려있던 눈이 포근한 날씨에 녹아 내려신경이 쓰이지만 춥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상당시간 휴식하고 200m급의 올망 졸망한 봉우리들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이런 저런 묘지들을 지나치는데 비석도 없는 엄청난 크기의 2기의 묘지를 지나며 의아해 했는데 이번엔 더욱 크고 성역화한 묘지와 마주하며 비문이 없어 궁금증이 증폭했는데 묘지진입로에 설치된 안내문에 내려가 보니 梅竹軒(매죽헌) 성삼문의 묘지였다. 선생의 묘지가 양지바르고 포근한 곳에 자리한 여건으로 녹아 내린 눈에는 천연가죽이 고어텍스 등산화 보다 약한지 신발속의 양말이 젖어 발이 시려온다.(14:08)

잘 정비된 묘지 진입로를 내려서 넓은 주차장과 단아한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경건한 마음으로 때 마침 3.1절 날이라  사당을 둘러보며 애국과 충절을 되새기며 성삼문 선생에 대한 지금 까지는 수박 걷할기식 얕은 지식이 부끄러워 보다 깊게 공부하고픈 절실한 마음으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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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죽헌 묘소, 문화제 안내판, 사당 풍경-


成三問(성삼문) : 죽음으로 매화의 지조와 대나무의 절개를 지킨 충신

조선 제일의 충의(忠義)를 지킨 인물,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목숨을 바쳐 신하의 의리를 지킨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한번 옳다고 여긴 신념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키려고 했던 산봉우리의 낙락장송(落落長松) 성삼문. 그의 곧고 맑은 지조야말로 조선 선비들의 의리 정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 수 없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다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 노은동(현재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이며, 매화나 대나무와 같은 강직한 군자의 기질을 흠모하여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본관은 창녕이며, 부친은 도총관을 지낸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그가 태어난 홍주 노은동은 고려 말의 명장이었던 최영 장군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웅이 탄생할 때 흔히 갖춰지는 탄생설화가 있듯이 성삼문도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 하는 세 번의 소리가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이름인 삼문(三問)’의 유래이기도 한데, 문헌으로 전하는 내용은 아니고 구전 설화에 가깝다.

성삼문은 143518살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3년 뒤인 21살 때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다. 안평대군을 통해 그의 학문과 인품 됨됨이를 전해들은 세종이 직접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다. 이때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발탁된 인물은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이석형(李石亨) 등이다. 성삼문은 이들과 함께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관직이 올라갔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만들다

세종 때에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왕명으로 편찬하여 1448년에 간행한 [동국정운]. 통일된 한자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란 뜻을 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기초사전>

25살 때에는 박팽년, 신숙주, 이개,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 휴가를 받아 독서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이를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는데, 집현전 학사들에게 준 특별한 혜택이었다. 집현전 시절 성삼문은 세종의 명을 받고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1443(세종 25)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성삼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성삼문은 1445(세종 27) 신숙주와 함께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黃瓚)으로부터 음운학을 배워왔다. 1447년 그의 나이 30살 때에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강희안 등과 함께 한국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는데, 수차례에 걸친 요동방문의 결과물이었다. 안평대군과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 간의 교류 또한 유명한데, 성삼문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안평대군의 정원에 있는 진풍경을 시제로 하여 <비해당 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과 그 서문을 짓기도 했다.

단종 복위를 꿈꾸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성삼문은 성리학적 정치윤리에 충실하여 어린 임금을 보필하였다. 그러나 1453(단종 원년) 왕위를 탐내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아울러 집현전 신하들에게는 정난공신의 칭호를 내려 주었다. 공신의 칭호를 성삼문은 부끄럽게 여기고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수양대군이 정치적 야심을 키우는 사이 성삼문은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 자리에 올라 단종을 가까이서 보필하였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위협에 못 이겨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는 임무는 예방승지로 있었던 성삼문이 맡았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은 옥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세조가 울고 있는 그를 한참 동안이나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의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6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오른팔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 중에서)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계획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김질을 통해 진상을 파악한 세조는 성삼문을 불러들여 결박하였다. 성삼문의 뒤를 이어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박정 등이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을 뿐이다.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나의 군주가 폐위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나으리가 평소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지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대동야승] 중에서)

성삼문의 말에 화가 난 세조는 지난 번 옥새를 가져올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다그쳤다. 성삼문은 때를 기다려 뒤를 기다렸을 뿐이다.”고 답했다.

성삼문은 부당하게 폐위된 단종의 왕위를 다시 찾고자 했다.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는 단종의 신하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아니 하였는가? 녹을 먹고도 배반을 하였으므로 명분은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하십니까?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으니,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 (남효온, 육신전중에서)

성삼문의 당찬 말에 화가 치민 세조는 쇠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 자르게 했다. 극심한 고문에도 성삼문은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다시 달구어 오게 하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독하다.”고 태연히 말할 뿐이었다.

성삼문은 세조, 즉 수양대군을 자신의 군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녹봉으로 받은 것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였으며, 세조를 향해 나으리라는 호칭으로 군신관계가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에게 있어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불의한 인간이자 역모자일뿐이었다. 실제로도 그가 죽은 뒤에 가산을 빼앗아 보니 1455년 즉 세조 즉위년부터 받은 녹봉을 별도로 한 곳에 쌓아두고 어느 달의 녹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집안에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거적자리만 있을 뿐이었다고 전한다.

성삼문이 한창 고문을 받고 있을 때 오랜 벗이자 동료였던 신숙주가 세조 옆에 있었다. 그를 본 성삼문이 노려보며 말했다.

옛날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의 능호)께서 원손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세월이 흐른 뒤에 너희들이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는 당부가 아직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호통을 들은 세조는 신숙주를 피신시켰다. 성삼문은 거사를 앞두고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비록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좋은 벗이었지만, 세종의 당부를 잊었을 뿐 아니라 불의의 편에 선 신숙주의 처세는 신의를 져 버린 것이므로 성삼문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세조의 불의를 꾸짖고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을 향한 신하의 충성을 지킨 성삼문. 세조가 성삼문에게 함께 공모한 자를 물었을 때 그는 박팽년 등과 우리 아버지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세조가 공모한 자를 재차 물으니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때 제학 강희안(姜希顔)이 관련되어 고문을 받고 있자, 성삼문이 나으리가 선대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그는 이 사건을 모의하지 않았으니 남겨 두어서 쓰게 하시오. 이 사람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하여 강희안은 석방되었다.

성삼문이 죽으러 나갈 때 좌우에 있던 옛 동료들을 돌아다보며,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이 성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수레에 실릴 때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 하나 없으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당시 그에게는 대여섯 살쯤 되는 딸이 있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며 뛰었다. 성삼문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라며 달랬다. 집안의 종이 울며 술을 올리자 몸을 굽혀서 마시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임이 주신 밥을 먹고 임 주신 옷을 입었으니

일평생 한 마음이 어길 줄 있었으랴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현릉(顯陵)의 송백(松柏)이 꿈속에 아련하네

위의 시는 성승이 지은 시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모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였다. 성삼문을 비롯하여 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하였고, 뒤에 온 몸을 찢어서 죽이는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고, 그의 아들 5형제와 아우 삼고, 삼빙, 삼성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는 멸문지화를 겪었다. 가산은 몰수되고, 처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朴從愚)의 노비가 되었다. 후손으로는 딸 효옥 외에 박림경에게 시집간 맏딸과 유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 엄씨에게 시집간 딸 등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을 뿐이다.

성삼문은 흔히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비견되곤 한다. 정몽주는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이었다. 정몽주가 절개를 지키는 마음을 담은 단심가를 지었다면, 성삼문은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절의가(絶義歌) 한편을 남겼다.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성삼문, <청구영언>

성삼문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서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에 발탁된 문신으로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추강집(秋江集)]에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죽음을 택한 절개를 기록에 남겼다.

성삼문은 2백년이 지난 뒤인 숙종 때가 되어서야 역모의 혐의가 풀렸다. 사육신(死六臣)의 무덤이 수축(修築)되고 묘지 위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고, 삭탈된 관직이 회복되었다. 또 영조 때에는 그에게 이조판서의 관직이 추증되었고, 충문의 시호가 주어졌다. 그의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에도 있다. 저서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                         ~인물한국사:정성희>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군도(매죽헌로)를 건너 삼각점이 자리한 227m봉을 지나 둥글게 우측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뚜렷하지만 양촌면 도평리에서 논산천으로 떨어지는 짧은 여맥이며, 매죽헌단맥 산줄기는 길이 없는 우측급경사로 내려서 은진임씨공원묘지로 이어지기 산줄기 때문에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매우 경사가 굽해 신중한 동작으로 나뭇가지와 풀뿌리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내려서저 거대한 묘지군락지가 눈에 들어온다. 묘지를 내려다보며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사유지로 작물을 재배하는 곳이라 출입하면 절도죄로 수사기관에 고발하겠다는 엄포성 경고판"이 앞을 막아선다. 날씨는 맑고 포근했지만 어제 내린 눈이 등산화가 달라붙어 녹아내려 천천히 스며들어 물에서 건저낸 듯 신발속 양말까지 물이 흥건해 고통이 심하니 昭君怨 / 東方虬의 유명한 한시가 떠오른다.(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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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7C34B56DED70D2E1C19-은진임씨공원묘지, 고갯마루의 살벌한 경고문-



昭君怨(소군원) :  / 東方虬(동방규)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 오랑캐 땅에는 꽃이 피지 않으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 봄이 와도 봄같지를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의대완 ) 허리띠 자연히 느슨해 져도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 ) 몸매를 위한 것은 아닐지어니


완주하려면 구명봉과 갈마산 바위산등 4km 남짓 남아 있어 시간상으로 애매한 상태라 생각이 두가지로 나뉜다. 한편으론 여기서 산행종료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다른 편에서는 야간산행을 하더라도 완주하자는 의견이 잠시 대치했으나 비상사태가 아닌 상황이라 산꾼들간의 불문율인 어떤 경우라도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일치시켜야 한다는 묵시적 양보로 산행을 접기로 의견을 통일한다. 해빙기라 진흙으로 엉망진창이 된 등산화를 잔디에 문질러 대충 오물을 털어내고 부른 택시가 도착하자 자투리 산행구간를 남겨두고 논산역으로 향한다.(16:10)

열차표를 구매하려고 역사에 들어서려는데 미화원 아주머니가 제지하며 오물투성인 등산화를 빗자루로 털어주는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서로 계면쩍게 웃고서야 용산행(KTX)열차표를 예매한다. 80여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 이틀동안 함께한 우정을 더욱 돈독히 다지라는 신의 뜻을 존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까운 음식점에서 감자탕을 안주로 소주잔을 비우다 열차시간에 맞춰 탑승한 뒤 고선배는 서대전에서 하차하고 우린 종착역인 용산역에서 하차해 시간을 확인하니 종주를 강행했다면 지금쯤 하산을 완료해 택시를 부를 시간인데 일찍 귀가하니 시원한 샤워로 이틀간의 여정을 갈무리 하기로 한다.(19:40)                             -끝-.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찾아가 안기면 언제나 포근하기만 한 을찾아서~

2016-03-09

계백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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