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한담 60

내 마음의 빈터에 뭘 채워 넣을까?

  

 


  

 어떤 삶일지라도 분명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녹녹치 않는 우리들의 삶 그 자체가 마음먹은 대로 쉽게 이뤄낼 수 없기에 소중한 것일까? 자신의 뜻대로 뭔가를 이뤄냈을 때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최선을 다했으나 좌절되면 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신세를 한탄하면서 온갖 망념에 시달린다. 그렇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얽혀가는 삶이 아니던가.
  

 옥죄는 일상(日常)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을 때면 산을 오른다. 다른 소일거리를 찾아 나설 수도 있겠지만, 수십 년 몸에 배인 것이 산행이기에 다소 귀찮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훌훌 털어버리고 산으로 간다. 땀을 흠뻑 흘리면서 산길을 거닐면 온갖 시름을 덜어 낼 수 있어 산과의 만남은 언제나 즐거운 마음가짐으로 다가서는 유희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담양에 둥지를 내린지 어느덧 10개월에 다다른다. 그동안 금성산성은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골치 아픈 일에 휩싸여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나 잠시 여유로움이 생길 때면 늘상 찾아가는 곳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휴일이면 가고픈 명산을 찾아가면 좋으련만 안쓰럽게도 산불방지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예전에 무등산을 섭렵하듯 부담 없이 산성(山城)을 오르내리면서 내 마음의 빈터에 나름대로 뭔가를 차곡차곡 채워가고 있다.
  

 나이가 먹을수록 지혜가 늘어 더 현명해질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아무 의미 없는 심상(心想)에 싶게 빠져들어 초초함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너무 급한 성격 때문인지 사소한 일에도 버럭 화를 내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 여전히 나잇값을 못하고 실수를 연발하면서 후회스러운 행동을 일삼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늘그막에 가치 있는 알찬 삶을 일궈내기 위해 체념하지 않고 관대함으로 내 자신을 보듬어 일으키고 싶다.
  

 담양온천에서 보국문으로 오르는 산길은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시름 보따리를 풀어버리기엔 어딘지 모르게 서운함이 깃든다. 그래서 충용문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보국사터를 지나 서문으로 향하는 호젓한 오솔길로 접어든다. 계곡 언저리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새움을 틔워내 싱그러움을 안겨준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 했던가.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다고 했는데, 아직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 내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워 가파른 철마봉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단숨에 오른다.
  

 노적봉을 거쳐 충용문으로 이어지는 산성(山城)을 밟고 걸으면서 사방을 둘러보니 신록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새삼스럽게 세월의 흐름을 가늠해 본다. 숱한 아쉬움을 남기고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세월의 끝자락을 붙잡고 싶지만 어찌 잡을 수 있으랴. 무심코 던진 한마디 때문에 동료들과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지난 일들이 불현듯 떠올라 한없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겸연쩍고 아쉽기 그지없어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싶다. 그러나 쉽게 지울 것 같지만 지울 수 없는 것이 삶의 본질이 아니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아온 모든 날, 그 어지러웠던 날들도 단 하루 소중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누가 혹시 아픔과 슬픔 속에 고통을 잊으려 한다면 지우개 하나를 드릴 수 있지만 고통의 날을 지우려 한다면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고통의 날이 얼마나 소중한 날이었는지 아시게 될 거예요. 지나고 나면 - - -  그래서 제가 지우개를 드린걸, 원망하게 될 거예요” 엔젤트리 「느린 날의 행복 편지」 한 구절이 떠오른다.
  

 며칠 있으면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시작된다. 이젠 무덤덤한 시간과 더 이상 씨름하지 않고 쉼 없이 스쳐가는 세월의 한 자락을 붙잡고 싶어 한 가닥 희망의 불씨를 지피련다. 그 불씨마저 사그라지면 다시는 우뚝 설 수 없기 때문에 고달픈 삶일지라도 소중한 나날로 메워나가련다. 쉽지 않겠지만 내 마음의 빈터에 가치 있는 것으로 가득 채우리라 다짐하면서 올라왔던 길을 되밟아 내려간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