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7일

덕유산에 오르기 위해 스키장 슬로프를 오르는데 갑자기 호각소리가 요란하다.

슬로프에는 등산화를 신고 오르면 안된다며 곤도라를 이용하란다.

길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될일이 아닌것 같아 곤도라 왕복권을 끊어 오르니 설천봉엔 짙은 안개가 눈을 가린다.

그저 오늘은 억만화소가 넘는 눈으로 덕유의 진경을 보는게 10만화소 디카로 보는것 보다 나을것 같지만 디카의 유혹에 몆장을 남기지만 역시 화소차이는 엄청 큰것 같다.

  

  

  

1월28일

가끔 구름이 왔다갔다 한다는 k-weather의 예보에 의지한 채 홀로 속리산 문장대를 오르기 위해 상주를 지나 화북으로 달리다가 문득 아내의 수채화 그림공부를 돕기 위해 차를 멈추고 디카를 눌러본다.

  

다시 차를 몰아 매표소에 이르니 멀리 속리산이  유유히 구름을 희롱하고 있다. 

그리 가파르진 않지만 문장대가는 길이 그리 녹녹하지 만도 않은 것이 이마에선 땅방울이 연신 안경을 타고 내리고

등줄기에도 시원한 땀줄기가 타고 내려간다.

쉬엄쉬엄 오리걸음으로 오른지 1시간 20여분만에 문장대 밑 쉼터에 도착하니 법주사에서 올라오는 님들을 반기는 천년고송이 햇살아래 길게 늘어서 있다.

  

바닷물이 하얀 색이라면 아마 이러하리라. 군데군데 드러난 암봉은 바다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

눈만 돌리면 온통 심해의 산호초를 옮겨놓은 듯한 상고대가 넘실대고 그사이로 인어가 춤을 춘다.

 

  

잠시 문장대에 올라 속리에 취해 하얀 바다위를 노닐다가 천황봉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젠 심해바다속으로 들어가 본다.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다시 문장대로 돌아와 한달음에 화북으로 내려선다.

  

  

  

1월 29일

20여년전에 아내와 함께 눈에 흠뻑 빠진 추억을 가진 계룡산으로 차를 몰아간다.

도중에 대전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함께 하자며 현충원입구에서 만나기로 한다.

동학사를 지나지 않고 계곡으로 난 평탄한 길을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간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혼자라는 단어보다는 함께라는 단어가 훨 가슴에 와 닿는다.

신선봉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남매탑으로 방향을 꺽어 비탈길을 걸어가니 따사한 햇살을 이기지 못한 상고대가 녹아 내리며 그 짧은 생을 마감하고 있는것이 어디 그들 뿐이겠는가?

잠시 남매탑에 들러 탑에 얽힌 전설을 되뇌어 본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패망하자 백제의 왕족이였던 한 사람이 계룡산으로 들어와 현재 남매탑이 있는 청량사지터에서 스님이 되어 한 칸의 초암을 짓고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스님은 나라 잃은 설음을 모두 잊고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여생을 보내고자 하루하루를 불공을 드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어 밖에는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좌선을 하며 삼매에 들어 있는데 밖에서 큰 동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이 몸을 푼 후 밖을 나가보니 송아지 만한 호랑이가 입을 쩍 벌린 채 고통스러워하며 시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이 가까이 가보니 호랑이가 동물을 잡아먹다가 갈비뼈가 목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 이였다.



스님은 호랑이에게 "네가 살생한 까닭으로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호랑이 목에 손을 넣어 갈비뼈를 빼주었는데 호랑이는 연신 고마운 몸짓을 하며 숲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호랑이는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간혹 나타나 산돼지도 물어다 놓고 노루도 물어다 놓고 가곤 했다. 스님은 호랑이가 동물들을 물어다 놓자 "내가 그토록 살생을 하지 말라고 했거늘 또 살생을 했단 말이냐?"하며 호랑이를 크게 꾸지졌다.



그리고 나서 몇 일이 지난 어느 날 밤, 스님이 불공을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이 밖을 나가 주위를 살펴보니 이게 웬일인가.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에 아리따운 묘령의 여인이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의 머리에 가르마가 단정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 갓 시집온 처녀 같았다.



이 깊은 밤 산중에 묘령의 여인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와 있단 말인가? 스님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여인을 초암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정성을 다해 극진한 간호를 했다. 그러자 여인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스님은 여인이 의식이 돌아오자 여인에게 야밤에 이 곳에 온 연유를 물었다. "낭자는 뉘오신대 이 깊은 밤에 산중에 와 계신 것입니까?"



그러자 여인은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으며 겁에 질린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스님이 여인을 가까스로 안정시키자 그녀는 비로서 입을 열었다. "소저는 경상도 상주 땅에 사는 처자이온데, 혼기가 되어 이웃 마을 양반 댁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날밤에 들기 전에 소피가 마려워 잠깐 밖을 나왔다가 갑자기 송아지 만한 호랑이가 앞에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한 끝에 그만 정신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바로 이 곳이옵니다."



여인은 결혼 첫날밤에 소피를 보려 나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이 곳까지 오게 된 것 이였다. 이 때부터 여인네들은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방에서 일을 보기 위하여 요강이 생겨났다고 한다. 스님은 여인을 초암에서 며칠 머물게 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으나 여인은 말하기를 "고향에서는 이미 죽은 목숨이온데 이 몸으로 어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스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으니 저는 스님을 평생 지아비로 모시겠나이다." 하며 청혼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스님은 "나는 불제자인데 어찌 여인과 혼인 할 수 있겠소." 라고 거절하며 그대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오누이처럼 같이 살아가자고 하여 오누이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비구, 비구니로서 수행을 하다가 말년에 한날 한시에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 이들 두 사람이 세상을 뜨자 사람들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행적을 후대까지 기리고자 석탑 2기를 쌓고 남매탑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남매탑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니 삼불봉에서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자연성능 구간이 길게 이어져있다.

이 구간은 계룡산을 대표하는 능선으로 수십길 절벽위로 등산로가 나있어 위험하기도 하지만 철제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 조심하면 크게 걱정할 것은 없는것 같다.

암봉과 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곳곳에는 괴송이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볼거리를 더하기도 한다.

 

자연성능을 지나는데 약 1시간이 지난것 같다

지척에 천황봉이 있지만 갈수 없는 곳인지라 아쉬운 발길로 은선폭포로 내려오니 물줄기는 간곳 없고

그저 이끼만이 남아있으니 겨울가뭄이 극심한건지 아님 계룡의 계곡이 얕은건지.....

 

때론 혼자 산행을 하는것도 괜찮지만 그래도 역시 산행은 벗이랑 하는게 그 맛이 깊고 여운이 오래 남는 것 같아 좋은것 같다.

3일간의 산행에서 비록 시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겨울풍광은 역시 덕유가 으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던데 다른 님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