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산! 다시 그곳을 그리며


 

언제 : 2005년 6월 5일

누구랑: 나와 그림자 그리고 열매

어디로 : 선운사--진흥굴--도솔암--내원궁--용문굴--낙조대--천마봉--도솔암으로(약 3시간)


 

모처럼 만의 가족 여행 겸 산행이다.

가족이 함께  떠난다는게 쉬운 일 만이 아니라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면서 가능한 함께 다니면서 희미해져만 가는 가족애를 가슴에 새겨두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기획한 첫 번째의 기획물이다.

장소를 어디로 정할까 이곳저곳을 뒤적이며 찾으려 노력했지만 하루만에 갔다 올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우봉규의 너를 닮은 마을에서’ 란 책속에서 읽은 선운사가 생각이 났다.

아이들에게 전라도 땅이란 국토의 일부일뿐 아직도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었기에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문화재도 답사하고, 산행도하고, 대장금의 촬영장소니까 현장 체험도 되고, 일석 3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토요일 저녁 식탁에서 선운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인터넷(한국의 산하)을 통해 선운사와 산운산에 대한 사진도 보여주며 흥미를 가지도록 했다.

 

여행을 가든 어디를 가든지 ‘길을 가면 아는 만큼만 보인다’ 는 게 나의 지론이고 보면 아이들에게 사전 볼거리를 가르쳐 주어 흥미를 갖게 하고, 확인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가족이 함께 떠나는 가족여행이니까 가능한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돕고 이해하며 하루를 보내자고 얘기를 나눈 후 취침에 들었다.

아침 일찍 움직인 탓에 아이들은 차를 타자 마자 잠을 청하기 에 바빴다. 

여행의 즐거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부족한 잠을 채워 최상의 컨디션으로 여행을 하려는 깊은 뜻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전자보다 후자면 얼마나 더 좋을까?

서해안 고속도로는 일찍부터 연휴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는지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벌써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서해대교를 지나면서 검푸른 서해 바다와 당진 화력 발전소, s프로젝트의 진언지 행담도등 볼거리 얘깃거리도 많지만 아직도 아이들은 잠에 빠져 있다.

 

아이들을 깨울 필요성을 느꼈다.

호남평야의 풍경을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호남평야에는 누렇게 보리가 익어가고, 지평선 위로 아득한 그리움처럼 낮은 산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고, 그 산자락에 터를 잡은 마을들이 아늑한 엄마의 품처럼 펼쳐져 있다.

군산을 지나고 줄포를 지나  선운산 나들목으로 접어 들때까지는 수 있었다.

선운사 가는 길에 장관을 이루고 있는 풍천 장어집들이 입맛을 다시게 했지만 그저 향토 먹거리려니 하고 지나쳤다.

사실 풍천장에 복분자 술한잔 안걸치고 싶은 꾼이 어디 있겠는가?

차는 막바지 힘을 내며 주차장 한곁으로 달려가 자리를 잡았다.


 

선운산 바같풍경과 송악

6월의 짙은 녹음에 산은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 어디를 보아도 사진에서 본 바위의 웅장함이나 계곡의 아름다움은 찾을 길 없다.

은밀한 곳에 비경을 숨기고 있는 것 일까?

주차 관리소를 지나 두리번 거리다 왼쪽 암벽에 자라고 있는 송악을  발견하였다.

송악을 만나러 작은 개울을 건너는 재미 또한 도시에서 느끼지 못하는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송악은 음지에서 덩굴로 자라는 늘 푸른 덩굴나무라 한다. 절벽을 타고 올라 잎을 피운 송악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꼭 실타래를 섞어 놓은 듯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 온갖 풍상을 견디며 푸르름을 잃지 않고 암벽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신기롭기까지 하다. 아이들도 신기한 듯 어디까지가 나무인지 얼마나 큰 나무인지 알지를 못하겠다며 천년기념물(제 367호) 나무는 첨 본다며 기뻐했다. 송악에서의 감동을 가슴깊이 새겨 넣고는 도솔천을 건너 선운사 경내로 들어섰다.


 

도솔천의 아름다움

어느 사하촌의 모습과 같이 길게 늘어선 난전의 모습은 여행객들에게는 눈요기로 더 할 수 없는 흥미를 제공해준다. 뻔데기부터 지역의 토산물까지 그기에 걸쭉하게 뱉어내는 아주머니의 사투리까지.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모르지만 여행의 참맛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오늘은 산행보다는 여행쪽에 더 무게를 둔 탓에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많이 보고, 많이 느끼며,  많이 든는데 시간을  할애 하고 싶었다.

산문을 들어서니 도솔천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우릴 반긴다.

물은 물대로 흐르고 숲은 물을 싸고 길게 늘어서 자리자리 앉아 있다.

자연스레 생긴 기기묘묘한 나무들이 향연에 가던 발길이 멈출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특히 선운사 계곡물은 검게 보이는데 갈참나무와 서어나무 잎 속의 ‘타닌’ 성분이 많이 녹아있어 변색이 된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작은 바위사이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유난히도 하얗게 떨어졌다.

자연스런 계곡의 모습을 카메라 앵글에 담으려는 작가들의 모습이 이곳저곳 눈에 띄었다.

수림의 아름다움에 취해 걷다 보니 선운사다.


 

선운사에서

선운사는 조계종 24교구 본사이다.

백제 577년 백제 위덕왕때 검단 선사가 창건하였으며, 그후 폐사가 되어 석탑 1기만 남았는데 1354년 공민왕때 효정선사가 중수하였다, 조선 성종 3년부터 10여년간 극유가 성종의 숙부의덕원군(德源君)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본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창건 당시는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건물, 그리고 수도를 위한 24개소의 굴이 있었고 300여명의 승려가 기거하던 대가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79호인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이 있으며, 대웅전(大雄殿)도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백과 사전)

그래서인지 선운사는 고풍스런 옛 멋은 없다, 다만 대웅전 뒷산 기슭에 동백나무숲이(천년기념물 184호) 그 옛날의 영화를 대신하듯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선운사 동백은 남해안지방 보다 한달 늦게 5월경 꽃을 피운다고 했다. 서정주님의 동백을 보러와 못본아쉬움을 한줄의 시로 달랬는데, 나도 동백의 꽃은 볼 수 없는 아쉬움을 한줄의 글로 날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꽃에 취하다 보면 또 다른 것들을 놓치지 않았을까?   꽃에 취하기 보다는 동백의 푸르른 잎과 고목의 자태에 더 취할 수  있음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빠 저렇게 큰 마무 첨 본다” 한참을 동백숲 앞에 서 있던 아들놈의 말이다.

대운전 뒤의 동백 숲이 거대하고 우람하다면 대웅전 앞에 묵묵히 서서 관광객의 사진속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 괴목(?)은 또 다른  조형미를 뽐내고 있었다.

꾸불꾸불 꼭 엿가락을 휘어 꼬아 놓은 듯 무슨 나무가 똑바른 가지 하나없이 모두가 그렇게 생겼는지 신기롭기만 했다.

대웅전 부처님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잘 정돈된 경내에 아쉬움이 남았다면 동쪽 담장에 서있는 가지 잘린 고목 이었다.

밑둥을 보니 몇백년을 살았을 나무같은데 가지가 몽땅잘리고 그 자리에 돋고 있었다.

아무리 경내를 정리한다고 하지만 수백년된 나무의 가지마져 잘라내며  단장을 해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사문을 나선다.


 

차밭과 장금이

선운사를 나와 도솔암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도솔천을 따라 길은 좌우로 나뉘어진다.

선운사를 끼고 도는 자동차길 보다는 도솔천 건너 길은 옛길에 마음이 더 끌렸다.

선운교를 지나 산책길로 접어드는 길목에 차밭이 있다. 아이들에게 차밭을 구경하게 했다.

간혹 사진으로만 보았던 차밭을 직접보고, 차잎을 따서 냄새를 맡게 했다.

큰아이가 하는말 '실망이란다‘ 사진으로 볼때는 그렇게 아름답고 멋이 있었는데, 특히  민정우가 장금이에게 사랑을 고백 받은 장소가 지금 서 있는 차밭이라고 안내판에 붙여져 있다.

이렇듯 선운사 주위에는 곳곳에 대장금의 촬영 장소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다.

차밭에서 기념 사진 한 장을 찍고 진흥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선운사에서 진흥굴 가는 길은 원시모습 그대로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오솔길을 만났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나무는 나무대로 자유롭게 가지를 벌리고,  개울은 개울대로 흘러 자연스런 멋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오랜 세월에  다듬어진 나무의 모습에 가던 발길을 멈추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타닌이 함유된 물은 햇살이 없어도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누가 이 아름다운 경치를 이곳에 펼쳐 놓았는가?


 

진흥굴과 장사송

오솔길을 걷는 재미에 푹빠져 걷다가 도솔천건너 우뚝 솟은 소나무 한그루에 발이 멈추었다.

장사송이다(천년기념물 제 354호).

장사송 아래쪽에 진흥굴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천연동굴인 진흥굴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진흥왕이 말년에 수도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진흥굴인지도 모른다.

왜 삼국을 통일한 진흥왕이 황상의 자리를 버리고 심산을 찾아 부처님께 귀의를 했을까?

굴 안쪽에 모셔진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굴을 빠져 나와 장사송으로 갔다.

장사송은 내가 보아온 어떤 소나무보다도 기품있게 서 있었다. 멋스러움이 속리산의 정이품송을 능가하고도 남을 듯 하다. 한그루에 8개의 가지를 부채살 모양으로 뻗쳐놓고 하늘을 호령하고 있었다. 수령이 대략 600년쯤 되고 둘레기 3m, 높이가 28m정도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장사송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서면 도솔암 이다


 

도솔암과 내원궁 그리고 천마봉 전경

장사송을 지나 도솔암으로 올라가다 보면 정면에 우뚝 솟은 암벽이 길을 막는다.

순간 “ 야 멋지다”

“엄마 엄마 저기봐” 아들이 정신이 없다.

힘들다고 목이 마르다고 끙끙대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 바로 자연의 힘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순간 이었다.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이다. 녹음으로 덮혀있던 산에 악성 종양이라고 생긴 듯 불뚝 솟은 바위를 보노라니 먼 길을 달려온 피로가 삭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왠 보너스. 도솔암 입구 동백 한그루에 채 지지 않는 꽃들이 납루한 옷을 걸친체 마지막 정열들 태우고 있었다. 양귀비입술보다 더 붉은 꽃잎을 보니 선운사 대웅전 뒤의 동백숲에 만개했을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도솔암은 한창 불사가 진행중이었다. 도솔암 내원궁가 는 길을 계단으로 단장되어 있었다. 사월 초파일이 지난지 한달이 지났지만 계단위로는 하늘이 덮힐 정으로 등이 달려 있었다.

등마다에는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주소들이 꼬리표에 달려 있다. 행복한 사람들이다.

일년내내 내원궁에서 흘러나오는 부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귀의한다는 것. 의지한다는 것 ,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나약한 나 자신을 누구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부처님께 의지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내원궁에는 지장보살님을 모신 곳이다. 보물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내원궁에서 바라보는 천마봉과 용문굴 가는 계곡은 절경중의 절경이다.

카메라가 있으면 연신 셔터를 눌러도 아깝지 않을 절경이었다. 내원암 지장 보살님께 삼배를 올리고 마애불쪽으로 내려선다.

도솔암 위쪽 칠송대 암벽에 자리한 거대한 마애불은(보물 1200호) 나의 발길을 또 한번 잡았다.

마애불 머리위로 여러개의 구멍이 나있고 나무가 박혀 있는 흔적으로 보아 옛날에는 닫집이 있었는데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흔적만 남아 초라할 것 같았는데 전혀 그런 느낌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인자하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부처님의 품으로 안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실 석질이 화강암 같았으면 더 섬세하고 자비스런 얼굴을 짓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마져 들었다.

마애불에서 보는 천마봉은 여전히 당당하고 위용스럽다.

특히 계곡에서 정상으로 설치된 계단을 오르는 모습은 고행의 길을 걷는 수도자의 모습과도 같다.

아이들에게 천마봉을 오른다는 얘기를 하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아빠! 누구 죽일 일 있어”

“우리 여기까지 오르기로 했잖아”

“너 싫으면 여기서 기다려‘ 우리끼리 올라갔다 오마, 여기까지 와서 장금이 어머니 돌무덤은 보고 가야지”

하며 다시 충동질을 했다.

내원궁에서 바라본 용문굴의 협곡으로 들어가는 길은 대나무가 즐비하게 서 있었다.

서울 근교산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 아이들에게 그저 신기한 모양이다.

용문굴까지는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워낙 절경이고 보니 아이들이 취해 걷는 사이 거대한  동굴 앞에 섰다.


 

용문굴과 낙조대

산을 다니면서 조그만 굴들을 많이도 자나 다녀 보았지만 용문굴 같이 크고 아름다운 굴은 첨인 것 같았다.  잘 생긴 관통석 하나를 산에다 옮겨놓은 듯 했다. 아이들은 장금이 어머니의 무덤을 찾는다며 이리저리 헤메고 다닌다.

지나는 산꾼들 모두 걸음을 멈추고 동굴을 배경삼아 흔적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져 갔다.

용이 드나드는 문일까? 용이 만든 문일까? 아니면 용이 승천한 문일까?

용문굴에서의 느낌을 간직한체 낙조대로 향했다.

낙조대로 오르는 길을 여느산의 능선길과 같았다.

간혹 햇살이 내려 갈증을 나게 만들뿐 지루한 산행길은 낙조대에서 또 한번의 힘을 얻었다.

최상궁이 자살한 바위를 만났던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아무래도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 일 수밖에

이곳에서 서해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곳이라지만 오늘은 시계가 불량하여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천마봉 그리고 하산

낙조대에서 천마봉까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도솔암에서 바라본 찬마봉 위에 올라선 아이들은 기뻐 어쩔 줄 모른다.

정상에 선 기쁨을 느끼는 아이들.

오려면 내려가야 하는게 이치를 아이들이 느낄 수 있을까? 그것만 깨달을 수 있다면 오늘 여행은 대성공이 아닐까?

하산 길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시간이 3시를 넘었으니 시장기가 지나 이제는 지칠 것도 같은데 잘도 걷는다.

모처럼 만에 가족이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선운사를 지나고 왼쪽 길섶에 숨어 있는 부도탑을 구경한후 미당 서정주님의 시비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으로 운운사 산행을 마쳤다.

뒤돌아 보는 선운산은 녹음에 묻혀 비경을 감춘체 잘 가라 손짓만 한다.

선운산이여! 선운사여 ! 내 다시 그대를 만나러 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