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2004년 1월 31-2월 1일), 지리산을 다녀왔습니다.

여름 지리산 종주 후 세석산장의 멋스런 자태와 새벽 쏟아질 듯 한 별빛 아래를 홀로 걷던 기억이 인상에 남아 다시 한번 세석산장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슴에 담아놓았습니다.

미국 서점에 가면 '화장실에서 보는 책'이란 제목의 책들이 꽤 있습니다. 동.서양 막론하고 화장실에 앉으면 또다른 일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같은 것 같습니다. 종종 지도책을 들고 두 가지 일을 함께 하던 중 '거림코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림에서 오르면 세석산장까지 3시간이면 갈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일어나면서 바로 컴 앞에 앉아 1월 말로 산장 예약을 마쳤습니다.

지리산 산행 전후에는 항상 예상치 못하게 급한 일들이 벌어지나 봅니다. 마치지 않으면 안될 업무가 폭주하여 목, 금을 거의 밤새미 하다시피 책상에 앉아보내며, 출발 포기까지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지리산 다녀온 일요일 저녁으로 일부 일을 미루어놓고 출발을 결정하였습니다. 어떡해서던 출발 전까지 업무를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에 금, 토 양일을 금요일 점심 짜장명 꼽배기 하나로 버텼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낮 12시 출발이 1시 15분으로 지연된 것 외에는 원 계획대로 순탄하게 잘 마친 산행이 되었습니다.

전체 산행은 아래와 같습니다.

구미 친구가 나를 Pick up(1:15)-거림매표소(4:15)-휴식(10분)-세석산장(7:00)-숙박-출발(04:45)-장터목대피소(05:45)-휴식(20분)-천왕봉(7:15)-일출(7:20-30)-장터목대피소(8:50)-아침-중산리로 출발(9:45)-휴식(10분)-중산리(12:15)-빙어 및 오뎅-택시대절로 거림매표소(1:30)-가조온천(2:30)-대구(4:00)

전체 거리; 18.1km
소요 시간; 9시간
중산리에서 거림까지 택시; 덕산의 덕원 택시부 전화 972-9292/9393
거림코스 소개
; http://www.sanyaro.com/climb/kom/pickm/jrs/j-course/naedaeri/gerimgol.html
법계사 코스(장터목-중산리) 소개
; http://www.sanyaro.com/climb/kom/pickm/jrs/j-course/jungsanri/bubgesa.html

오후 3시 도착 예정이 한시간 지체되어 4시 15분에 거림매표소에 도착하자, 관리 청년이 산장 도착 예정이 6시가 지나면 야간산행 금지라 오를 수 없다는 원칙을 설명해주었습니다. 빨리 걸어도 7시가 되어서야 도착하게 되니 규정에는 어긋납니다만, 인터넷으로 산장 예약을 마쳤다는 성의를 보아서인지 큰 무리없이 티켓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계곡을 스치는 바람에 해질녁의 스산한 기운이 발걸음을 빠르게 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완만한 코스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리산이란 이름에 걸맞는 오르고 내림이야 당연히 있었고, 세석산장에 숙박할 자격으로 획득하기위해 치루어야 하는 정도의 고됨은 맛보아야 하는 구간은 당연히 있었습니다.

5부 능선부터는 산행로에 눈에 쌓여 있어 눈산행 맛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7부 능선 즈음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발 아래까지 내려왔고, 맑은 겨울 하늘에는 반달이 메마른 가지들 사이에 걸려있었습니다. 산장을 얼마 남기않아 헤드랜턴을 사용할 정도로 어둠이 짙어졌습니다. 저 멀리 세석산장 불빛이 보였을 때 "아! 세석이여!"라는 감탄사를 소리내어 외쳐보았습니다. 세석 아래의 식수장에서 물맛을 보고 산장 수속(5,000원/인)을 마쳤습니다.

한 여름 그렇게 복잡던 세석도 한겨울 1월 말에는 너무 한산하였습니다. 아마 산장 1/5 정도만 찼던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 모포 두개(1,000원/개)를 펴고 덮으며, 양편에 아무도 없어 몸부림까지 치며 편안한 하루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혹 추울까 가져온 옷을 모두 껴입고 자다 결국 얼마가지 못해 등산내복 차림으로 충분할 정도로 온기도 제공되었습니다.

저녁으로는 각자 준비한 김치, 고추장조림, 오징어젓갈, 라면 2개 + 햄, 소주, 준비한 도시락 밥으로 푸짐하고 얼큰하게 식사 및 음주를 편안히 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취사장을 구경조차 못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취사장 크기에 알맞을 정도의 인원만 있어 산행 맛을 더해주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몸부림 횟수와 숙면이 비례하는 체질이라 매끈한 나무 위의 모포는 이리저리 접히다보니 자주 잠을 깨게 되었습니다. 다음부터는 배낭 무게를 감수하더라도 침낭을 준비할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출발전 친구가 화장실 점검을 하러 간 사이 취사장 앞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얼마나 큰 늑대 한마리가 내 옆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회색이 멋지게 섞인 그런 놈이 말입니다. 순간 담배 연기를 꿀꺽 삼켜버릴 정도로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놈은 아마도 겨울 산행자 구조견으로 세석과 장터목 대피소를 마음대로 오가고 있는 구조견이었습니다. 아침 장터목에서 또 만났으니 말입니다.

잠시 후 아버지를 따라온 아이가 취사장으로 들어가더니,

"엄마야! 아빠 늑대야! 늑대가 있어 . . . . ." 라며 뛰어나왔습니다.

어느새 컴컴한 취사장 안에 그 놈이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이 놈이 세석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중간까지 내내 우리를 앞섰다가는 돌아오곤 하며 배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눈, 얼음길을 발 앞에만 불을 밝히고 아이젠으로 조심스럽게 땅만 바라보면 가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큰 늑대 얼굴이 나타나곤 하여 몇번이나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다시 앞으로 달려갔다 오곤 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시원찮은 산행인 같길래 이렇게 보호를 해줄까 기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장터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제석봉, 통천문을 거쳐 천황봉에 7시 15분경 도착하였습니다. 200명 이상의 등산인이 정상을 메우고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쪽의 어느 바위에 자리를 정하자 거세지는 바람을 헤치고 7시 30분에 해가 떠올랐습니다. 온 사방을 둘러싼 구름 위로 해가 떠오르자 흰구름이 차츰 연푸른 빛을 띄고 하늘도 푸르게 바뀌었습니다. 온도 탓인지 그나머 얼마남지 않은 밧데리가 작동이 안되어 사진을 찍지는 못했습니다.

지리산 능선은 온통 눈과 얼음 투성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젠을 착용하였지만 천황봉에서 장터목 대피소로 되돌아오는데 정확하게 1시간 20분 소요되었습니다. 장터목에서 1시간 가량 우거지국과 햇반, 소주 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법계사 계곡을 따라 중산리로 내려왔습니다.

법계사 계곡은 오전 햇살이 받는 쪽이라 녹았던 눈이 빙판길로 변해 무척 미끄러웠습니다. 특히 내리막 길이다보니 조심스레 내려올 수 밖에 없어 지도에 표시된 2시간 30분이 모두 소요하였습니다. 중산리 매표소 아래 식당에 도착하여 동동주 한잔, 빙어 한접시(2만원), 오뎅 8개로 점심으로 대신하고, 택시를 대절하여 거림매표소에 도착(20,000원)하였습니다.

일요일 오후, 여느 온천 못지 않게 복잡한 가조온천을 들러 간단히 샤워와 온탕에서 몸을 녹이고 근무지에 도착했을 때가 4시가 지난 시각이었습니다. 계획대로 진행된 산행과 온천으로 몸과 마음을 모두 청결히 한 상태로 업무를 본지 5시간.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우여곡절을 거쳐 겨우 완료하고 난 후 일시적 두통을 해결하기 위해 당직 전공의 선생과 함께 간단히 맥주 1,000c와 안주를 저녁삼아 보내고 저녁 12시에 집에 돌아갔습니다. 용케도 두 가지 일을 한번에 처리한 드문 주말이 되었습니다.

(뒷글) 이번 산행의 일등공신인 오가는 길 운전을 흔퀘히 허락한 구미 윤사장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