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산행(1) Photo 에세이(2009. 7. 2~4/인천공항- 장춘- 연길- 백두산 천지-장백폭포- 온천탕- 용정(일송정, 윤동주의 대성중학) - 두만강 도문국경지대 유람- 연길- 장충- 인천공항)

*. 연변으로 가는 백두산
  
백두산을 가기는 요번이 2번째다.
이번에는 장춘에서 연길을 통하여 백두산 북파 등반 후에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원점 회귀 코스지만 전에 못 본 장춘, 연길, 용정을 둘러보는 코스라서 기꺼이 따라 나섰다.    
처음 갔을 때는 인천항에서 배로 출발하여 단동으로 해서 백두산을 종주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구려의 유적지인 국내성(國內城) 터, 졸본(卒本) 산성이라는 오녀봉(五女峰)과 광개토대왕비(光開土大王碑)와 장수왕릉(長壽王陵)을 둘러보는 고구려 유적지 순례 길이었으니 얼마나 황홀하던지-.
돌아와서 나는 글로서 산행기와 답사기를 남겼지만 아깝게도 그 사진들을 몽땅 잃고 말아서  그 사진을 얻기 위해서 내심으로 벼르던 백두산 산행이었다.
우리들은 길림성의 수도 장춘(長春)에 내려서 4시간 거리에 있는 연변의 주도 연길(延吉)로 향한다.

*. 연변(延邊) 이야기

  중국이란 나라는 큰 나라다.
국토 면적이 세계 육지 면적의 15분의 1이나 되어 유럽이나 미합중국과 거의 비슷하게 큰 나라로 남한의 96나 되는 국토를 가진 큰 나라다.
여기에 세계인구의 4분의 1 정도인 13억 인구가 살고 있는 대국이다.
  한국은 '1특별시, 6광역시(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8도(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1제주특별자치도'이지만, 중국은 22개의 성(省), 4개의 직할시( 北京  天津, 上海,  重慶), 5개의 자치구(  內蒙古, 廣西, 西藏, 寧夏回族,  新疆위구르), 2개의 특별행정구(홍콩, 마카오)로 구성되어 있다. 대만은 대만성이라고 정해 놓고 있다.
중국 13억 인구 중에는 한족(漢族)이  94%, 소수민족이 6%로  6,000여만 명이나 되는데 그 중의 일부가  조선족으로 연길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연길은 중국의 길림성의 주도로 주요 도시인 도문, 용정, 화룡 일대를 말하는데 이를 연변이라고 한다. 연변자치주는 길림성 전체의 1/3크기로 한국의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친 넓이의 면적이다.
우리가 장춘국제 공항에서 연길로 향하여 난 길은 2008년에 개통되었다는 고속도로[高等公路, 284.7km]로 그 가는 도중에 드넓은 평야는 북간도(北間島)라 하는 땅이다. 거기에 심어 놓은 것은 곡식은 옥수수였다.   옛날 옛적 두만강 바닥에 작은 모래톱이 생겨서 섬이 되었는데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가 이 지역을 아무도 들어가 살 수 없는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정하여 놓았기 때문에, 이 주변은 청과 조선 사이의 섬 같은 땅이라 해서 간도란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후 이곳을 우리 조선족이 개간하여 옥토로 바꾼 땅이라 해서 간도(墾島)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이렇게 우리 조선민족이 사는 곳이고 두만강을 접하고 있어서 이 지역을 간도성 또는 연길성이라고 하는데 연변(延邊)이란 연길(延吉)의 주변(周邊)이라 해서 생긴 말 같다.  
연변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두만강은 나 같은 사람도 수영으로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강인데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하던 김정구의 노래와는 달리 누런 강물이었다. 여름철 비로 인한 것 같다.
갈수기나 겨울에 강이 얼면  걸어갈 정도로 강폭이 좁은 곳이 많다.
이 간도는 우리 민족이 살아왔고 살고 있으니 우리 땅인데,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해간 일제가  중국에 그 소유권을 넘겨주는 바람에 일본에 의해 빼앗긴 땅 간도가 되고 말았다니 '지옥도 못갈 놈들!'이란 욕이 절로 나온다.
  이 풀루 덕분(?)에 해외여행에 비상이 걸려서  3박 4일의 일정으로는 너무나 저렴한 여행비(29,000원)로 왔기 때문에, 우리들은 호텔의 급이 낮거나 식사가 미흡해도 불평을 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 공항에서 4시간에 장춘고속도로로 달려온 연길의 숙소 녹원대주점(록원대술집)은 생각 이상으로 크고 좋았다.   호텔은 도심지를 가로 질러 흐르는 부르하통하 강가에서 있었는데 특히 야경이 아름다웠다. 우리는 이 호텔에서백두산을 다녀서 돌아올 때 다시 1박을 더하게 된다. 좋은 것은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서 욕실에는 칫솔, 치약과 샴푸와 로션을 갖추어 부족함이 없는데다가 따라서 식사도 좋았다. 중국은 한국보다 1시간이 빠른 시차이지만 연변지방은 한국과 위도가 비슷해서 아침 4시가 되니 벌써 날이 밝았다. 적지 않은 여행을 하는 동안 터득한 것이 여행지에서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일이었다. 집을 싸놓기 무섭게 아내와 꼭두새벽 4시경에 호텔 옆에 있는 부르하통하 강가로 나갔다. 중국인들은 영어를 전혀 모르고 한국인은 중국어를 아주 모르는 민족이라. 낚시하는 사람에게  한국말로 물어보았더니, 어럽쇼 우리말로 대답해 온다.
중국에는 210만 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는데 그 대부분이 연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강가에 갔더니 낚시를 하는 사람, 산보를 하는 사람, 빙 둘러 모여서 제기를 차는 사람, 무가지를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아침을 열고 있는데 앞서간 아내가 손짓으로 급히 부른다. 강둑 아래 장이 열렸다는 것이다.
해외여행 가서 투어여행을 따라 다니다 보면 일정에 쫓겨 그 나라 그 고장의 냄새가 풀풀 넘치는 장터를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것이 항상 섭섭하더니 우리나라의 5일장 같은 그 장이 강둑 따라 500m 이상 길게 선 것이다.
아침 식사까지 1시간 반이나 남아서 우리는 행복하게도 그  장속의 한 사람이 되었다.
자전거나 노새 마차에 물건을 놓고 파는 사람도 있었지만 거의 모두가 제방 아래 땅바닥 길에 노점을 벌인 것들인데 그 중에 특이한 것으로는  장뇌, 김치, 고추장, 북한 물고기, 단고기(개), 노점 돼지고기 장수였다.
한국과 그 중 다른 것은 모든 채소나 과일을 저울에 달아서 팔고 있는 것이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니 몇 개의 사진으로 소개한다.
        

*.용정(龍井) 이야기
   백두산을 찾아간 한국인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 조선자치구인 연길(延吉)이요 그리고 용정(龍井)이다.
용정(龍井)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 함북 회령 등과 이웃한 도시로 인구 27만이 사는 도시인데 그 인구 중 67.6%가 조선족이다.
봉금령이 해제된 후 회령에서 이주해 온 우리 저선족 농부가 지금의 룡문교(龍門橋) 동쪽에서 밭갈이를 하다가 돌각담 밑에서 옛 여진족들이 쓰던 우물을 발견하였다.
이에 농민들이 이를 개수하고 물맛을 보니 이빨이 얼어들듯 차고 맛있었다.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일대가  교통의 요지여서 이곳을 지나는 객들을 위해서 말뚝을 박고 용두레 끝에다가 두레박을 매달아 놓았다.
용드레란 용두레의 방언으로 낮은 곳에의 물을 높은 곳으로 퍼 올리는 농기구의 하나였다. 그후 식자(識者)가 있어 용두레의 '용'과 우물  '정' 자를 따서 '용정(龍井)'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용정에는 유래가 되는 그 우물이 있는데 그 앞에 '龍井地名起源之井泉' 이란 비명의 표지석이 있다.

  그 용정 가는 길에 이름도 아름다운 해란강이 있다. 그 혜란 강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옛날 옛적 혜란강을 사이 두고  좌우에 비암산과 주암산 사이에 두 마을이 있었다.
비암산 기슭에는 고기그물 잘 뜨는 '란'이라는 예쁜 처녀가, 주암산 기슭 마을에는 농사 짓는  힘장사 '해'라는 총각이 살고 있었다.
  해와 란은 늘 함께 고기를 잡거나 밭일을 같이하곤 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대가리에 뿔이 두개 난 온몸이 털로 덮인 험상궂은 악마가 나타났다. 악마는 천근짜리 장도를 한 손으로 휘두르며 달려와서 양식과 말린 고기는 물론 마을 처녀까지 납치해 가버리는 것이었다.
이 악마가 나타난 후로는 마을 사람들은 양식이 떨어지고 강물은 뒤집히고 흐려져서 더 이상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이 마귀와 목숨을 걸고 힘장사 해가 싸우는데 막상막하로 그 싸움이 끝나지를 않았다.
그때 란은 치마폭에 매운 재를 악마에게 뿌리며 합심하여 악마를 죽여 버렸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용감한 해와 총명한 란의 이름을 붙여 이  강 이름을 ‘해란강’이라 불리게 되었다.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오니
간도성 룡정이로다.
굽이굽이 감도는 해란강변엔
층암절벽 기암이요 일송정이라
          -룡정 경치가


그 해란 강을 지나 용정 가는 길에 버스가 멈쳐 선다.
저 평강벌 넘어 산 위에 먼발치로 보이는 것이 '용정8경'의 하나라는 비암산의 일송정(一松亭)이니 촬영을 하라는 것이다. 우린 그냥  지나치지 않고 버스를 이렇게 멈추어 주는 것이라고 가이드가 생색을 낸다. 마이크가 고장 났다고 그동안 입을 딱 닫고 딴청을 하던 연변 가이드였다.
일행이 버스에서 내려 열심히 디카에 그 일송정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누군가가 콧노래로 '선구자'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한국인이 연길의 일송정(一松亭)에 대한 기억은 '선구자'의 노래로 인함이다.
나라를 일제에게 빼앗겼던 암울한 시절에 항일 운동의 중심지였던 만주벌판 용정을 무대로 우리들의 영웅 독립군들이 우리들의 씩씩한 선구자 기상을 우러르며 노래 하던 우리들이었다.  
그 노래의 배경이 되는 일송정에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로  늙어 늙어 찾아왔더니 오늘도 해란강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 노랫말에 나오는 '해란강'과 '룡문교'도 비암산의 '일송정'도 그렇지만 용정의 이름의 유래가 된 '용두레 우물' 등이 연길 주변에 다 있다.

다음은 그 일송정에 얽힌 일화(逸話)다.
  일제 강점기 시절 룡정 비암산(琵岩山) 벼랑 끝 바위를 뚫고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 한 구루가 있었다. 파석송(破石松) 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멀리서 보면 그 형상이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같이 보였다 해서 일송정(一松亭)이라고 불리었다.
이 일송정의 모습은 독립운동과 항일선구자들의 상징으로 조선족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를 눈에 가시처럼 생각해오던 일본헌병대에서는 일송정을 과녁으로 박격포 연습을 매일같이 하며 일송정을 없애고자 하였으나 신기하게도 이를 피해 남아 있었다.
1930년 대 초에 일제는 용정에 든 수재(水災)를 일송정 귀신 탓이라고 트집 잡아 밤중에 군경을 시켜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후추 씨를 밀어 넣고 쇠못을 박아 넣어 결국에는 그 소나무를 말라죽게 하였다.
현재 팔각정자는 1990년에 신축을 한 것으로 소나무도 심어 놓은 모양이다.  
  일송정을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에 의하면 지금은 바위에 새긴 노랫말 '선구자'가 용정시 당국에 의하여 시멘트로 매꾸어 삭제하여 버렸다는 것이다.
이 노래의 작사자 윤해영과 조두남은 한국은 물론 중국인들도 미워하는 친일파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노랫말에서 말하는 선구자는 조국 독립을 위해 만주벌판을 말달리던 우리의 영웅 독립투사들이 아니라 만주국을 건설하는 일제하 일인(日人)들을  미화한 것이라는 것이다.
윤해영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는 일제의 친일파 나팔수였다는 증거가 속속 들어났기 때문이었다.
학자들은 당시 만주 사람들은 조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선구자가 아닌 ‘산사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조두남이 21세 되던 해인 1933년 만주 무단 강[牧丹江]에서 작곡했다는 이 노래의 작곡가 조두남은 그동안 선구자 제작 경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1933년 조두남이 목단강의 싸구려 여인숙에 기거하고 있을 때 윤해영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용정의 노래'를 주며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염원하고 민족의 구심점이 될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며 가사를 전해 주며 자신의 이름이 윤해영이란 것을 밝히고는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그 날 이후 20년이 지난 해방 후까지 만날 수 없어서 그가 준 '용정의 노래'를 '선구자'로 제목을 바꾸어 노래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다 당시에 함께 활동하던 김종화의 증언에 의하여 그의 말이 새빨간 거짓임이 밝혀졌다. 김종화씨는 중국 길림성에서는 꽤 알려진 음악가였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는 만주 벌판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던 우리의 독립투사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일본군인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끄럽게도 불러온 것이다.
작사자 윤해영은 '친일인명사전'(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 실린 위인이기 때문이다.
최근 마산에 '조두남 기념관'이 세워졌으니 이를 알게 된 시민단체의 반대로 폐관하고 있는 것은 조두남이 친일파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모교 용정중학교(龍井中學校)
  용정에서는 유명한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기념 유적지나, 앞에서 말한 용드레촌, 윤동주 생가, 윤동주 묘 등을 우리들의 일정상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빼놓을 수 없는 윤동주 신인, 문익환 목사의 모교인 용정학교(대성중학교)로 간다.
국문학에서는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윤동주(尹東柱)와 이육사 (李陸史) 두 시인을 든다. 이 두 시인은 비슷한 인생을 살다가 갔다.
이육사는 윤동주보다 14살 위이지만 윤동주와 같이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국땅에서 옥사한 분이다.
윤동주는 1945년 그렇게도 그리던 해방을 6개월 앞두고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이육사는 그 1년 전에 북경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별과 시'(1948)가 유고 작이듯이, 이육사의 '육사시집'(1946)도 유고집이다.
그런데도 이육사보다 윤동주가 더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시가 우리 민족의 제2의 고향 북간도를 노래한 시인이라서 그런 것 같다.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중에서 '별 헤는 밤에서'


  
교정에는 옛날의 구 건물을 헐고 그 모습대로 지었다는 건물이 앞에 있는 윤동주의 시비가  멋있다.
그 2층에 있는 윤동주기념관에는 윤동주에 각종 관한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나는 거기서 나는 '내고양 연변'(박청산) 등 책 몇 권을 샀다. 해외여행 중 책은 내가 아끼지 않고 사는 품목이다. 거기 아니면 살 수 없는 것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이 학교를,  1941년에는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입교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여름방학에 귀국하려다가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 되어 후꾸오까 감옥에서 옥사한 것이다. 29세 환금 같은 나이였다.
연세대학교 교정에도 윤동주 시비가 있지만 일본 도지샤(東志社)대학과 교토조형대학 내에도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뿐인가 교토부(京都府)의 옥외 공원에도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를 건립하려는 움직임은 우리 저항시인 윤동주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 두만강 국경 도시 투먼(圖們)
  
  용정중학을 거쳐 우리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남양시와 마주보고 있는 국경도시 도문(圖們)으로 향한다. '도문'이란 두만강에서 생긴 말 같다.
이곳은 지난 3월 북한 구역인 웨칭진(月晴鎭)의 두만 강가에서 미국 여기자 2명이 북한군에 잡혀간 곳이다.
그 전까지만해도 함북 온성군  남양공업구와 연결된 다리 중간에 있는 조선, 중국의 국경선까지 한 사람당 20위엔씩을 낸 관광객 출입을 허하였으나 최근에는 금하고 있는 모양이다.
중국인들은 2009년 05월부터 지린성(吉林省) 투먼(圖們)시에서 기차를 타고 남양, 청진, 칠보산 등 함경북도 일대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투먼시와 함북 관광국과 보행관광 협의서를 체결했기 때문이다.
  두만 강에는 다리가 2개 놓여있다. 하나는 보도용이요, 또 하나는 기찻길이다.
북쪽을 바라보니 강건너는 수풀 때문에 보이지 않고 강 너머에는 기찻길이 지나는 터널이 있고 몇 채의 건물은 있지만 인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 두만강 국경 붉은 비 옆에서 우리의 실향민 노부부가 시름없이 지척의 북녘 따을 바라보며 향수에 젖어 있다. 그 앞에 먹을 음식을 두고.

우리는 토문강관광 부두에서 유람선을 한국 돈 6,000원 주고 타고 유람한다. 저기 보이는 도문대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유람이다.
도문대교에는 두만강 일대와 북한 땅을 더 높은 위치에서 볼 수 있다는 국문전망대가 있다지만 여기 올 때 그 다리를 지키는 국경수비대원들을 스쳐보고 지나쳤을 뿐이다.
강에 띄워 놓은 두만강관광부두에서는 커피도 팔고 북한 북어도 팔지만 북한냉막거리를 6,000원에 판다.
  술을 못 먹는 사람도 운치에 한 잔을 기울이다가 이 노 시인에게 한 잔을 권한다. 다 마시기에는 많은 분량이기 때문이다.
저절로 나의 애송시 예츠의 '술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은 오직 이것뿐.
나는 한 잔
막걸리를 들고 한숨짓는다.
-예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