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의 고장인 보래봉과 회령봉

 

 


  보래봉과 회령봉 개요

 

  보래봉(1,324m)과 회령봉(1,320m)은 차령산맥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산입니다. 즉 오대산 두로봉(1,422m)에서 시작한 차령산맥이 상왕봉(1,493m), 비로봉(1,563m), 호령봉(1,561m)을 거쳐 계방산(1,577m)을 이룬 후 다시 운두령을 지나 솟구친 산이 바로 보래봉과 회령봉입니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일원은 해발 600~800미터 정도의 고냉지 지대를 이루고 있는 특이한 지형인 까닭에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 이들 산은 봉평면 북쪽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봉평면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두 산을 연계하여 산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늘과 맞닿는 운두령

 

  2006년 9월 2일 토요일, 등산객들로 만차가 된 관광버스(S산악회 주관)가 영동고속도로 장평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31번 국도를 타고 북쪽의 인제방면으로 달립니다. 구절양장(九折羊腸)처럼 꼬부라진 도로를 힘차게 오르더니 산행들머리인 운두령에 도착합니다(10:00). 고개가 하도 높아 구름도 머물고 간다는 운두령(1,089m)은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도로로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고개입니다.  


  오른쪽에는 남한 제5의 고봉인 계방산(1,577m) 산행안내 지도가 붙어있고, 그 옆에는 무궁화의 고장인 홍천을 알리는 거대한 표석이 반겨줍니다. 왼쪽의 보래봉 산행들머리에는 공터를 조성해 주차장 겸 간이매점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름 값을 하는 계방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곳에도 장사가 되는 모양입니다.

 

    <계방산 등산 안내도>

 

   <홍천군 안내표석>

 


  숲 향기 속으로

 

  숨을 돌린 후 매점 뒤 능선을 향해 들어갑니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등산로는 바로 숲길로 연결됩니다. 약 10분 후 외롭게 서 있는 산불감시초소를 지납니다. 이때부터 보래봉과 회령봉을 거쳐 하산을 완료할 때까지 완전히 숲 속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아늑한 숲길>


  그 동안 우리를 엄청나게 괴롭혔던 찜통더위도 이제는 한발 물러갔습니다. 피부에 와 닫는 알싸한 공기가 이미 9월이 왔음을 실감나게 해 줍니다. 더욱이 산들바람이라도 조금 불어오면 그 시원한 감촉은 필설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지경이며, 사람이 사는 맛을 만끽하게 됩니다. 


  간혹 태양이 내려 쬐는 곳에 이르면 어김없이 공터입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헬기장으로 조성한 것 같지만 지금은 잡풀만이 무성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도 전혀 사방의 조망을 할 수 없습니다.

 

   나무 숲 틈새로 겨우 바라보이는 바깥세상은 대기가 매우 맑아서 오늘 같은 날은 시계가 멀리 터질 것이지만 울창한 숲에 가려 이를 감상하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세 번 째 공터에서 야생화 마타리를 배경으로 북쪽으로 살포시 보이는 조망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산행을 하면서 확보한 유일한 전망사진입니다(11:13). 


  등산로에는 유난히도 고사목으로 변한 덩치가 큰 나무들이 많이 보입니다. 때로는 등산로를 가로질러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도 있습니다. 쓰러진 고목에 이끼가 피어올라 오랜 세월의 앙금을 말없이 알려줍니다. 

 

   <고사목1>

 

  <고사목2>

 

   <세번 째 헬기장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조망>

 


  황량한 보래봉(寶來峰) 정상

 

  세 번의 헬기장 같은 공터를 지나 오르내림을 계속한 후 뚝 떨어지니 보래령(1,065m) 고갯마루입니다. 이 고개는 옛날 북쪽 홍천군 내면에서 남쪽의 봉평장으로 넘나들던 큰 고갯길이었으나 일제 때 운두령 고갯길이 차도로 변하면서 주민들에게 푸대접을 받게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높은 봉우리를 오르니 보래봉입니다(12:20). 이정표에는 남쪽으로 용수골 2.4km, 지나온 방향으로 보래령 1.2km라고 표시되어 있을 뿐이어서 실망이 큽니다. 기왕에 나무로 이정표를 세우려거든 보래봉임을 알리는 표시라도 제대로 해 두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정상이라고 씌어져 있는 이정표의 일부분이 훼손되어 있어서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보래봉은 메밀꽃축제와 관련하여 많은 산악회에서 등산을 오는 곳인데 관할행정당국이나 지역산악회에서는 이정표를 다시 한번 정비하기 바랍니다.

 

   <고사목3>

 

   <고사목에 핀 이끼>

 

  <볼품없는 보래봉 정상 이정표>

 

    <서쪽으로 바라본 조망>


  보래봉에 서면 동쪽으로는 계방산이 우뚝하고, 북쪽에는 문암산, 남서쪽으로는 가야할 회령봉 너머 흥정산과 덕고산이 조망된다고 하지만 무성한 숲으로 인하여 거의 조망이 불가능합니다. 발뒤꿈치를 들고서 서쪽으로 겨우 일부 능선을 조망했지만 어느 산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낙엽이 진 겨울에 와야 주변의 산세를 잘 조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래봉은 한강기맥 주 능선상의 준봉으로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강기맥 종주산행 붐이 일면서 산 이름도 얻고, 찾는 등산인들이 많아지기 시작한 산입니다(자료 : 월간 산 2004년 12월, p.158).    


  정상에서 회령봉으로 가는 길목에 산악회 선두회원들이 모여 쉬고 있습니다. 필자도 배낭을 내려놓고 과일로 요기를 하며 약 20분간 휴식을 취합니다. 

 

 


  더욱 쓸쓸한 회령봉(會靈峰)

 

  보래봉을 내려와 회령봉으로 향하는 등산로도 변함 없는 숲길입니다. 오르내림이 그리 심하지도 않은 부드러운 육산이니 발걸음이 매우 편안합니다. 등산로 주변에는 화사한 꽃을 피운 투구꽃과 둥근이질풀이 산행 내내 길동무가 되어 주니 때로는 홀로 걸어도 쓸쓸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매우 시끄럽게 귀청을 때리던 매미 울음소리도 이제는 아주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옵니다. 

 

  <투구꽃>

 

   <둥근이질풀>


  운두령에서 계속 서쪽으로만 진행되던 등산로가 1,260봉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군데군데 무성하게 자란 조릿대 숲이 이번 여름 무더위로 심신이 찌든 속세의 사람들을 반겨줍니다. 1,260봉에서 두루뭉실한 등성이를 가볍게 넘어 오르니 공터인 회령봉(1,320m)입니다(13:26). 회령봉이라는 산 이름은 각 산의 영령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보래봉에서 보았던 이정표마저도 없습니다. 해발이 무려 1,300미터가 넘고 봉평을 북쪽에서 감싸고 있는 산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는데 정상에 아무런 표식이 없으니 그저 황당할 따름입니다.
 

    <회령봉 정상의 넘어진 나무>

 

 

 

  쌍묘를 거쳐 이방골로

 

  회령봉에서도 아무런 조망을 할 수 없으니 그냥 지나칩니다. 남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고도를 점점 낮추어 가는데 거의 가슴까지 오는 조릿대 숲을 통과합니다. 정신을 똑 바로 차리지 않으면 길을 잃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행여나 길바닥에 뾰족한 돌이라도 있는 날이면 속절없이 부상을 당할 것 같습니다.

 

   <무성한 조릿대숲1>

 

   <무성한 조릿대숲2>

 


  넓은 공터에 오니 산행개념도에 표시된 쌍묘입니다(13:52). 두 기의 묘가 나란히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잡초가 무성하여 얼른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여기서부터 동쪽의 지능선을 따라 하산합니다. 사람의 키보다도 높은 소나무 등걸에 이상하게 생긴 버섯이 자라고 있습니다. 낙엽송 조림지대를 지나 급격하게 고도를 낮추는 하산로를 걸어가노라니 왼쪽 무릎이 약간 시큰거립니다. 지난 3월 다친 발목의 영향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 종일 두 발을 동시에 사용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왼쪽 무릎만 아픈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잡풀이 무성한 쌍묘>

 

  <쌍묘 이정표>

 

   <낙엽송 조림지대> 

 

  <이름 모를 버섯>


  임도 곁의 넓은 밭에는 고랭지 배추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언덕에는 꽃차례가 매우 커서 꽤나 인상적인 궁궁이가 활짝 피어 있습니다. 민가를 지나자 회령봉 등산로안내도가 서 있는 큰 도로입니다. 지나온 산세를 뒤돌아보아도 고산이라는 분위기는 찾아볼 수도 없고 그냥 두루뭉실한 야산을 보는 것과 흡사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니 8월보다는 한결 높아진 느낌인데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는 모습에 가슴마저도 맑아집니다. 도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가니 등산버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14:50). 오늘 산행에 4시간 45분이 소요되었습니다. 

 

  <고냉지 채소밭>

 

   <궁궁이>  

 

   <회령봉 등산 안내도>

 

  <파란 하늘과 흰구름>

 


  이효석과 봉평마을
 
  한국단편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소설가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이 쓴「메밀꽃 필 무렵」은 누구나 학창시절 한 두 번쯤은 읽어보았을 필독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산은 36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작가입니다. 22세가 되던 해인 1928년에 「도시와 유령」으로 문단에 데뷔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나 안타깝게도 부인과 차남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 1942년 평양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주요작품으로는 "화분", "벽공무한", "장미 병들다" 등이 있으며, 대표작이라 고 할 수 있는「메밀꽃 필 무렵」은 그가 30세 되던 해인 1936년에  발표해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자료 :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산행 후 봉평을 들러 다음주에 열리는 "효석문화제(2006.9.8∼9.17) 준비현장과 이효석과 관련된 여러 곳을 둘러보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메밀꽃밭은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메밀꽃이 만개 되는 다음주중에 그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축제가 예정된 먹거리장터에서 다리를 건너가니 왼편에 시골초가의 형상을 한 여러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사람들은 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메밀꽃과 관련된 음식을 파는 식당입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물레방아도 빙글빙글 돌아가니 당시의 정취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문화마을의 초가>

 

    <음식점 입구>

 

   <음식점 입구>

 

   <연못과 물레방아>

 

  <음식점 간판>

 

   <음식점>


  큰 길 오른쪽으로 조성된 계단을 올라 이효석 기념관으로 갑니다. 산악회에서 1시간동안 여유시간이 제공되었기에 기념관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어 마당을 가로질러 넘어갑니다. 길섶에는 머리에 큰돌을 쓴 이효석 기념비가 흡사 고인돌 마냥 서 있습니다.

 

    <이효석 문학관>

 

   <이효석 문학비>


  기념관 주차장 옆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살펴보는데 방금 승용차에서 내린 멋지게 차려입은 한 아가씨가 들어오더니 가게 주인에게 뚱딴지같은 질문을 합니다.


  "여기 가까운 해수욕장이 어디지요?"
  "여기는 없습니다. 동해로 나가야 합니다."
  "동해 어디로 가야하나요?"
  "강릉으로 가 보세요"
  "강릉까지 가지 않고 해수욕장은 없나요?"
  "없습니다."
  "강릉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나요?"
  "약 1시간 정도 소요될 것입니다."


  내륙지방인 봉평에 와서 해수욕장을 찾는 것은 정말 이외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이미 해수욕 철이 지난 시점이기 때문이지요.


  가게를 나와 다시 큰 도로를 걸어 교량으로 되돌아갑니다. 도로 주변에는 새로 지은 음식점처럼 보이는 건축물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입니다.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옆에는 축제기간 중 이용될 먹거리장터를 조성하느라고 인부들이 바삐 움직입니다. 그 옆의 가산문학공원에도 이효석의 이야기로 넘쳐나는데, 화단에는 열매에서 하얀 꽃가루가 나오는 원예용인 분꽃이 특이한 모습으로 피어 있습니다.   

 

   <교량 옆 장승>

 

   <가산 공원의 이효석 동상>

 

   <가산공원 표석>

 

  <분꽃>

 

  <봉평 안내문>

 

   <조성중인 먹거리 장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필자는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내용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비교적 간략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이 소설의 "이해와 감상(평가)" 및 "줄거리"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남녀간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친자 확인(親子確認)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기본 줄기를 이룬다. 이 이야기가 겉과 속을 이루면서 미묘한 운명을 드러내는 과정에 '길'이 등장한다. 그 '길'은 낭만적 정취를 듬뿍 머금은 달밤의 산길이다.

 

  물론, 그 길은 허 생원 일행에게는 생업(生業)의 길목이지만, 괴로운 인생사의 현장이기보다는 삶과 자연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세계이다. 온갖 각다귀, 잡배가 우글거리는 장터의 산문적(散文的)인 현실과는 격리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일 듯이 들리는' 운문적(韻文的)인 몽환(夢幻)의 세계이다. 여기에 사랑의 추억과 인연(因緣)의 끈질김이 어우러지면서 한 늙은 장돌뱅이의 애환이 드러난다.


  이 작품의 두드러진 묘미는 인간과 동물의 본능적 애욕을 교묘하게 병치(竝置)시킨 구성 방식에 있다. 허 생원이 술집에 들어가 충주집을 탐내고 있을 때, 그의 당나귀는 암놈을 보고 발정(發情)을 한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저놈의 짐승이….' 하는 아이들의 말소리를 허 생원은 자신에 대한 조소처럼 느낀다.

 

  이것만이 아니다.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에 허 생원은 성 서방네 처녀와 꼭 한번 정을 통한다. 평생 처음이요, 마지막 기회였다. 허 생원이 처녀에게 잉태시킨 것처럼 당나귀는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새끼를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나귀의 까스러진 갈기, 개진개진한 눈은 허 생원의 외양(外樣)과 흡사하다.』

 

  <줄거리>

 『왼손잡이요 곰보인 허 생원은 노름판에서 재산을 다 날려 장터를 돌아다니는 장돌뱅이가 된다. 그 허 생원이 봉평장이 서던 날 같은 장돌뱅이인 조 선달을 따라 충주집으로 간다. 그는 '동이'라는 애송이 장돌뱅이가 충주댁과 농탕치는 것에 화가 나서 뺨을 때려 쫓아버린다. '동이'는 별 반항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물러난다. 허 생원은 마음이 좀 개운치 않다.


  조 선달과 술잔을 주고받고 하는데 '동이'가 황급히 달려온다. 나귀가 밧줄을 끊고 야단이라는 것이다. 허 생원은 자기를 외면할 줄로 알았던 '동이'가 그런 기별까지 하자 여간 기특하지가 않다.


  그 날 밤 그들 셋은 달빛을 받으며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을 걷게 된다. 허 생원은 젊었을 때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에 개울가 물레방앗간에서 어떤 처녀와 밤을 새운 이야기를 한다. '동이'도 그의 어머니 얘기를 한다. 자기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을 하다가 집을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늙은 허생원은 냇물을 건너다 발을 헛디뎌 빠지는 바람에 동이에게 업히게 되는데, 허생원은 '동이' 모친의 친정이 봉평이라는 사실과 '동이'가 자기와 똑같이 왼손잡이인 것을 알고는 착잡한 감회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동이' 어머니가 현재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발길을 옮긴다.』

 

 

  에필로그

 

  오늘 운두령에서 출발하여 보래봉과 회령봉을 거쳐 하산할 때까지 공터를 제외하고는 울창한 숲으로 인해 하늘을 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정상에 올라 사방으로 펼쳐지는 장쾌한 조망도 못하고 정상표석도 없어 실망했지만 숲 향기가 물씬 풍기는 부드러운 숲 속을 기분 좋게 걸은 하루였습니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하므로 이 시기에 산에 오르면 조망과 눈을 동시에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봉평문화마을에 들러 메밀꽃은 보지 못한 대신 이효석의 고향에서 그의 채취를 조금이나마 느낀 것은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다만 시간 부족으로 인하여 약 7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이효석 생가를 답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산악회 측에서는 지난 해 축제기간 중 이곳을 방문하였다가 수많은 인파로 인하여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이번에는 일주일을 먼저 왔다고 합니다. 대도시마다 사람들로 넘치는 요즈음 사람구경을 하려고 먼길을 떠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기에 산악회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