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유적탐방 산행  


산행지: 남산 (금오산, 468m) 경북 경주, 국립공원

산행일자:2008년 11월 1일 (토요일)
참가자: 창원51(YH, JS)와 친구들
날씨: 맑음


경주 남산 개관 

남산은 경주시의 남쪽에 솟은 산으로 신라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들로 이루어진 남산은 남북 8km 동서 4km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 모습을 취하고 있다.  

100여 곳의 절터, 80여 구의 석불, 60여 기의 석탑이 산재해 있는 남산은 노천박물관이다. 남산에는 40여개의 골짜기가 있으며, 신라 태동의 성지 서남산, 미륵골·탑골·부처골 등의 수많은 돌속에 묻힌 부처가 있는 동남산으로 구분된다.

남산에는 미륵골(보리사) 석불좌상, 용장사터 삼층석탑, 칠불암 마애석불을 비롯한 12개의 보물, 포석정터, 나정과 삼릉을 비롯한 12개의 사적,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상, 입골석불, 약수골 마애입상을 비롯한 9개의 지방 유형문화재, 1개의 중요 민속자료가 있다. 유적뿐만 아니라 남산은 자연경관도 뛰어나다. 변화무쌍한 많은 계곡이 있고 기암괴석들이 만물상을 이루며, 등산객의 발길만큼이나 수많은 등산로가 있다. (경주시).


참고 산행로 개념도 


다른 참고자료:  아래에서  "남산"을 찾으면 유용한 지도와 산행정보가 더 있습니다.


산행코스  : 삼릉(주차장) ~ 상선암 ~ 금오산(468m)~ 약수골(마애대불) ~ 금오사 ~ 삼릉(원점회귀)
산행시간: 약 3시간 (유적탐방포함)


산행 메모 및 사진  

 

오랜만에 경주로 가을여행을 떠났다.

언제 가도 느끼는 바이지만 큰 도시치고 경주만큼 변화의 속도가 느린곳도 잘 없는 것 같다. 


보문호 주변을 제외하고는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게 없다.
유적지 개발제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세태에 잽싸게 따라가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천년고도 경주답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한 왕조의 도읍으로 근 천년을 지속한 경우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 것이다. 

 

서양에서와 같은 거대한 석조건물은 없지만, 수많은 고분들, 크고 작은 옛 사찰과 탑, 불상, 비석 등이 
시내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곳도 드물단다.  남산에만해도 자그마치 672점이 있다고 하니 말이다.

몇년 전에 남산을 오를 때는 칠불암 쪽으로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삼릉을 거쳐 금오산으로 올라갔다.
금빛 거북의 등을 닮았다는 금오산은 신라인들의 염원과 불심이 곳곳에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들머리 : 삼릉 주차장 


포석정을 지나 조금 가다보니 삼릉입구의 울창한 송림을 지나 상당히 큰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에 주차를 하고 산행출발...
주변에는 전통 칼국수 집이 많은데 주말이면 국수 한그릇 먹는데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단다.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상선암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바로 나타나는 곳이 배리삼름, 즉 배리 마을에 있는 삼릉이다.   

 

배리 삼릉[拜里三陵]
사적 제219호. 신라의 박씨 왕인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삼릉이다. 능(陵)의 형식은 규모가 큰 원형 토분(土墳)이며, 표식(表飾)은 하나도 없고, 상석(床石)이 하나 있으나 것은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중앙에 위치한 신덕왕릉은 1953년과 1963년 2차례에 걸쳐 조사되어 내부 구조가 밝혀졌는데, 널길[?道]을 갖춘 석실(石室)이 있고, 석실 내부는 회(灰)를 칠하였다.
 

  

 

 ▲ 배리 삼릉

 

소나무 숲을 지나 한 200m쯤 더 올라가면  머리가 없어진 석조여래좌상을 만나는데 보기가 섬뜩하고 민망하다.
저리 인자한 부처님의 머리를 무슨 연유로 잘라버린 자는 몰라도 그대로 두었으면 더 자랑스런 유물이 되었을텐데 아쉽다.  

경주 일원에 머리없는 불상이 많은 이유는 임란때 왜인이 그랬다는 등 몇가지 설이 있으나 조선조때 불교에 편파적 지원을 많이한
문정왕후 사후에 지방 유생들이 분풀이를 했다는 등 조선조 때 그런일이 많았다는게 정설이라고 한다.
얼마전 단군상의 머리를 자른 기독교인들이나 이런일을 저지른 유생들이나 어떤 종교든 맹신은 좋지 않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三陵溪 石造如來坐像]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 속에서 머리(佛頭)가 없는 상태로 발견 되었다.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 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 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服飾史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통일 신라 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이다.
 

 

 ▲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머리없는 불상 바로 옆으로 잠시 올라가면 산등성이에 마애 관음보살상이 나오는데 
천 몇백년을 서 있었는 데도 아직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인자한 모습이 남아 있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三陵溪谷磨崖觀音菩薩像]
높이 약 2.4m의 석주형(石柱形) 암벽 남면에 돋을새김되어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연화좌(蓮華座) 위에 직립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한 손에는 보병(寶甁)을 들었으며, 얼굴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어 부처의 자비스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는 불상이다. 입술가에 도는 붉은 빛깔로 인해 이 불상의 미소가 더욱 인상적으로 비치는데, 이 빛깔은 인공적으로 첨색한 것이 아니라 자연암석의 붉은색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어서 더 신비스럽다. 가슴에는 영락(瓔珞), 팔에는 팔찌를 끼고 있다.  양감있는 얼굴과 신체의 묘사, 잘룩한 허리의 표현 등 통일신라시대의 이상적인 사실주의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조금 더 올라가면 선각육존불이 나오는데 바위 위에다 붓으로 그림을 그린듯 섬세하게 세겨 놓았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三陵溪谷線刻六尊佛]
바위의 표면을 정으로 쪼아 새긴 것이 아니라, 붓으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각각의 암벽에 삼존불을 그려 놓았다. 만들어진 시대는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국내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힌다. 앞쪽 바위에 그려진 삼존불의 본존(本尊)은 입상,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은 좌상(坐像)이다. 음각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냈으며, 아래쪽에 연화대좌를 조각하였다.

  

  ▲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상선암[上仙岩] 
남산의 삼릉계곡 윗쪽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 암자로 옛 절터에 최근 70여년 전에 지은 곳이다. 삼릉계곡에서 금오봉으로가는 길목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 상선암

 

작은 암자인 삼선암을 지나 잠시 가니 남산의 좌불중 가장 크다는 마애석가여래상좌상이 나온다
아래쪽 바위에서 올려다보니 엄처 크고 높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三陵溪谷 磨崖石迦如來坐像]
남산의 좌불(座佛) 중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너비 4.2m 되는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먼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다.  이 곳에 있는 다른 불상들의 세련되고 단정한 얼굴과는 달리, 이 불상은 약간 투박한 느낌을 준다. 즉, 눈은 가늘고 코는 길며, 입술은 매우 두꺼워서, 얼굴 모습이 투박하고 소박한 지방 양식을 보여주는 듯 하다.  머리부분과 몸부분이 각각 다른 시기에 조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 남산의 좌불중에서 가장 큰 마애석가여래좌상에 불공드리는 여인 

  

유적마다 더듬고 살피고 하다보니 산행은 지체된다.
이제 유적 구경은 제법했고 산행이 좀 단조롭다고 느껴질 타이밍에 남산의 비경이 나타난다.
멋들어진 바위와  높은 가을하늘, 그리고 수백년된 소나무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풍경이다.  

여기서 바위길을 조금 더 올라가면 다시한번 야~ 좋다라는 소리가 나온다.
옛날 서라벌의넓은 벌판과 군데군데 운치 있는 암봉들 위로 가을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 앉는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금오산 정상이다. 
커다란 정상석에 한자로 금오산으로 적혀 있는데 오(鰲)자는 처음 보는 한자라 집에와서 옥편을 보니 "큰 바다거북"오자다. 

 

금오산 [金鰲山]
높이는 468m로 고위산(494m)과 함께 남산을 이룬다. 타원형으로 이루어졌으며, 금거북이가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편하게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남산으로 표현되어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통분한 김시습이 1465년(세조 11)부터 7년간 이 산의 용장사에 은거하면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집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가요 "신라의 달밤" 가사중에 나오는 금오산이기도 하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어린 금오산 기슭위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 금빛 거북이산 금오산의 정상석

 

 시간이 남으면 용장계곡이나 고위산으로 갈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또 다른 행사가 있는 관계로  아쉽지만 약수골 쪽으로 하산한다.

 남산의 수목은 대부분 침엽수라 단풍은 화려하지 못하다.
 그래도 소나무 사이로 간간히 붉게 물든 단풍이 가을 정취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 금오산의 가을 

 

금오산에서 경주교도소가 있는 약수골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놓칠수 없는 유적이 바로 약수계곡 마애입불상이다.
하산로로 잠시 내려오다가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가야 되는데 (방향표시 있음), 무심결에 바로 직진하면 길도 험하고 볼거리도 없다. 

 

약수계곡 마애입불상 [藥水溪谷磨崖立佛像]
높이 8.6m, 너비 4m로 남산(南山)에 있는 석불 중 가장 크지만 어깨 이하 부분만 남아 있다. 머리는 다른 돌을 조각해서 얹게 만든 구조인데 결실되었으며, 목 부분만 부근에 있다. 부처의 발은 만들어 붙인 것으로 오른쪽 발이 따로 불상 앞에 놓였다. 바위면 양옆을 30cm 이상 파내어 육중하게 몸체를 나타냈으며, 손이나 옷주름도 10cm 정도 깊게 부조하여 햇빛이 비치면 그림자가 생겨 뚜렷이 보이는 환조(丸彫)에 가까운 표현기법이다.
  

 

 ▲ 약수계곡 마애입불상

 

잠시 더 내려오면 또하나의 머리없는 불상을 만난다. "약수골 석불좌상"이다.

  

약수골 석불좌상[藥水谷石佛坐像]
남산 약수골 계곡변에 있다. 머리가 없는 석불여래좌상으로, 엄지손가락도 잘려 나갔고, 상대석과 중대석은 석불과 따로 떨어져 흙에 절반쯤 묻혀 있다.
결가부좌로 앉은 석불은 풍만한 몸체로 우견편단의 가사를 입고 있고, 상대석에는 연꽃이 위로 향하고 있는 앙련(仰蓮)이 24개 새겨져 있다.
사각의 중대석에는 신장상(神將像)을 새겼는데, 사면에 양각된 것으로 보아 사천왕상으로 여겨진다

 

경주교도소 펜스를 끼고 우측길로 가면 금오사를 지나 대로변으로 하산한다.

대로변을 따라 삼릉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는 키큰 소나무가 하늘을 덮고 있다.

  

 


다음날 : 감은사지에 들렀다가 감포로 

 

감은사지 [感恩寺址]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신문왕 2)에 완공하였다. 《삼국사기》에 있는 바와 같이, 이 절의 금당(金堂)은 부왕이 죽은 뒤 그 화신인 용이 출입할 수 있도록 신문왕이 건립한 것 같다. 절터는 동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을 앞에 두고 서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感恩寺址三層石塔] (국보 제 112호)
2중의 기단에 사각형으로 쌓아올린 3층 석탑으로, 동·서 두 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이다. 감은사는 682년(신라 신문왕 2)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탑의 건립도 그 무렵으로 추정되어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석탑이다. 1960년에 서쪽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에 넣어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

 

  ▲ 감은사지 삼층석탑 (국보 1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