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위봉사∼위봉산∼서리봉∼서방산∼종남산∼송광사

 

 


  도심의 일출

 

2007년 4월 7일 일요일 아침, D산악회버스를 이용하기 위해

서울지하철 4호선 사당역 10번 출구로 나와 국민은행건물 앞에 섭니다.

버스 탑승시각이 6시 50분인데 약 15분 먼저 도착했습니다.

벌써부터 버스를 기다리는 등산객들의 모습도 더러 보입니다.


필자는 무심코 도로건너편으로 눈길을 돌렸는데 하필 건축물사이로 아침해가 떠오르는 중입니다.

그 동안 겨울에는 해뜨는 시각이 늦어 버스를 타고 가면서

산마루위로 솟아오르는 환상적인 일출의 모습을 본 적은 있었지만

도로변에서 이런 광경을 본 것은 오래된 일이라 얼른 카메라를 꺼냅니다.

서 있는 자리를 조금 옮기니 가로수 사이로 태양이 위치합니다.

가로변의 지저분한 시설물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진 찍는 연습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습니다.

  


 


 


 

 


  높이가 60m에 이르는 위봉폭포

 

호남고속국도 전주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온 버스는 26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달립니다.

소양에서 좌회전해 741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서 송광사를 지납니다.

꼬부라진 오르막을 돌아 능선을 넘어 굴다리처럼 작은 피암터널을 통과해

위봉폭포를 조망할 수 있는 큰 표석 앞에 정차합니다(10:25).  

   
위봉폭포는 행정구역상으로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위봉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추출산 허리에 자리잡고 있는 높이 60m의 2단 폭포로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는 폭포입니다.

특히 수량이 많은 여름철에 방문하면 답답하게 닫힌 가슴을 시원스럽게 열어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며,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은 모습이 흡사 하얀 비단을 걸쳐놓은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도 이미 지난 갈수기라 얼어붙은 빙벽도 시원한 폭포수도 물론 없습니다.

그 대신 가느다란 물줄기만 흘러내리니 폭포라고 할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사실상 도로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하니 폭포와의 거리가 멀어 물줄기가 더 적게 보이는 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이 폭포는 갈수기에 큰 기대를 하고 찾아온 사람들을 실망시키기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주변풍광이 아름다워 위봉폭포는 완산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위봉폭포 표석>

 

  <위봉폭포>

 

  <위봉폭포> 

 

 

  비구니 사찰로 변한 위봉사(威鳳寺)

 

몸을 돌려세워 방금 지나온 피암터널을 건너가니 오른쪽에 위봉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보입니다.

선두대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등산로로 접어들지만 필자는 저 앞에 보이는 위봉사로 향합니다.

위봉사를 찾은 사람은 필자를 포함하여 겨우 4명뿐입니다.

 

안내산악회를 따라 다니다보면 등산로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거나 사찰을 둘러보기보다는

남들보다 먼저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는 것을

등산을 아주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습니다.

등산대회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마음의 여유도 없이 서두르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의 국민성인 "빨리빨리 문화"가 산에 와서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위봉사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스님들은 백제 무왕 5년(604년) 서암대사가 세웠으며,

고려 공민왕 8년(1359년) 나옹화상이 중창했다고 말합니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일대 5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대찰이었는데,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거의 폐사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 다시 중창이 시작되어 현재 건물들은 모두 최근에 지어진 것들로서,

보물 제608호로 지정된 큰 법당인 보광명전과 관음전, 나한전, 극락전, 위봉선원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정문의 일주문에는 추출산위봉사(추출산威鳳寺)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한자도 어려운 추출산은 위봉산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일반적으로 대웅보전이라고 불리는 본관건물에는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위봉사 일주문> 

 

 <보광명전>

 

 <보광명전> 

 

 <종각>


위봉사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되어 있는 비구니 사찰이며,

사찰 자체는 그리 특징적인 것은 없으나

도로에서 위봉사 주차장까지 약 300m 정도의 가로수 길이 정갈하고 운치 있으며,

일주문을 지나서 보광명전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주변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 사찰의 동쪽으로 나옵니다.

동편마당에는 기와담장 밑에 큰 옹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담장 곁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니 옹기의 집하장입니다.

사찰음식에서 빠지지 않는 간장과 된장 그리고 김장용 독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장독대입니다.

위봉사에 관한 시 한 수를 소개하면서 다음 행선지로 이동합니다.

 

                신라 말 한 서민이 이 산에 올라서
                숲에서 노닐고 있는 세 마리 봉황새를 보고
                이 곳에 큰절을 세워
                위봉사(威鳳寺)라 이름하였다네 
                                  (자료 : 한국수필작가회 홈페이지)

 


 

 

 


  산성으로 연결된 위봉산(威鳳山)
  
사찰의 동편 계곡 옆으로 조성된 등산로를 따라 오릅니다.

등산로주변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가 탐스럽게 피어 있지만 이를 카메라에 담을 틈이 없습니다.

우리는 위봉사를 돌았기 때문에 바로 위봉산을 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상당한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느림의 미학"을 음미할 여유가 없는 현실이 안내산악회를 이용하는 걸림돌입니다.  


능선삼거리에 도착하니 위봉산을 거쳐온 선두와 마주칩니다.

우리들은 오른쪽에 위치한 위봉산을 향하여 오릅니다.

장대봉정상(해발 524m)에 다다르니 전라북도지방 특유의 이정표가 서 있습니다(11:05).

이 이정표는 한 신용금고회사가 협찬한 것인데 널빤지 같은 네모난 알루미늄 판을 세워

위쪽에 산 이름과 해발고도를 표시한 것으로 한마디로 정말 볼품이 없습니다.

오늘 방문하는 서방산과 종남산에도 이런 이정표뿐입니다.

 

  <위봉산 이정표>  


산을 다니다보면 산 정상의 표석이 각 곳마다 특징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경기도지방의 경우 네모난 막대형의 화강암을 세워 놓고 있으며,

충북은 받침돌 위에 검은 오석(烏石)을 직사각형으로 손질해 설치해놓고 있으나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한편 강원도와 경상도 및 전라남도 등은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표석대신에

자연석을 그대로 활용(월출산)하거나 잘 다듬은 표석(운문산)을 세워

산 정상을 찾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을 때 동반자가 되어 주고

또 한번 오른 산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해 줍니다. 

경남 함양군의 경우 비록 비슷한 크기의 돌에 특정글씨체(거망산, 괘관산)로 음각한 표석을 세워 놓았지만

그 모양이 매우 아담하고 애교만점이어서 불만이 전혀 없습니다. 


위봉산정상에 서면 동쪽으로는 연석산(925m) 및 운장산(1,126m)과 구봉산(1,002m),

남동쪽으로는 마이산(686m)이 조망된다고 하지만 시계도 흐릿하고

또 잡목으로 인하여 바깥쪽을 잘 볼 수가 없는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전쟁이외의 목적으로 쌓은 위봉산성

 

정상을 다녀오는 길에 그리고 오늘 되실봉까지 산행을 하며 위봉산성의 흔적을 자주 목격합니다.

이 산성은 조선 숙종 원년(1675)에 쌓은 것으로, 1974년 전북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었으며,

둘레가 약 16km에 이릅니다.

 

이 성은 전쟁을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유사시 전주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에 있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와

그의 조상을 상징하는 위패를 피난시키기 위해

이 부근 주민을 동원하여 7년 동안 쌓은 산성(山城)입니다.

실제 동학농민봉기로 전주가 함락되었을 때 초상화와 나무 패를 이곳으로 가져 왔습니다.

 

 <산성의 흔적>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관향으로 태조는 전주 이씨의 시조입니다.

그 전주에서 태조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모신 곳이 바로 경기전(慶基殿)이었습니다.


성안에는 초상화와 위패를 모실 소형 궁전을 두었으나 오래 전에 헐려 없어졌으며,

성의 동·서·북쪽에 각각 문을 냈는데, 지금은 전주로 통하는 서쪽에 반월형 문 하나만이 남아있습니다(자료 : http://eglee.com.ne.kr).

 

 


  깜찍한 되실봉 표석

 

위봉산에서 뒤로 돌아 이미 지나온 삼거리로 되돌아옵니다.

후미대장이 우리일행을 기다라고 있습니다.

서쪽으로 이어진 상당히 부드러운 등산로를 이리저리 돌아가다가

허물어진 산성의 돌이 많이 쌓여 있는 구간의 너덜 길을 오릅니다.

 

고갯마루에 도착하니 되실봉(603m)입니다(11:50).

누군가 기다랗고 조그만 돌을 세워 되실봉이라고 써놓았는데,

그 위에 몇 개의 돌이 얹혀져있는 모양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집니다.         

 

 

 


  이정표 없는 서리봉  

      

이제부터 등산로는 북쪽으로 연결됩니다.

맞은편에서 오는 등산객을 가끔 만나며 고도를 높입니다.

630봉을 지나 제법 다리에 힘을 주고 올라 서리봉 정상(702m)에 섭니다(12:30).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상에는 공식적인 이정표가 없습니다.

오늘 주행하는 4개의 봉우리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지만

이를 알리는 이정표가 없으니 서운하기 그지없습니다.

누군가 나무에 붙여 놓은 청색널판지가 유일합니다. 

 

  <서리봉>  


일부 산행안내책자에는 이것을 위봉산 서래봉(쓰레봉)으로 표기해 놓고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400산행기』에는 그냥 독립된 산인 위봉산 서리봉으로 표기하고 있어 필자도 이를 따랐습니다.


정상은 잡목으로 둘러 쌓여있어 아무런 조망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지척에 위치한 서쪽봉우리에 오르니 남서쪽의 경관이 잘 보입니다.

서쪽으로는 무명봉인 675봉을 비롯하여 가야할 서방산과 종남산이 둥그런 산세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야할 서쪽 능선> 

 


  오도치(오도재)

 

조망터에서 간식을 먹고는 길을 재촉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바위봉(675m)에 접근하는 등산로가 오늘 산행 중 가장 경사가 심하고

또 산세가 백미(白眉)라고 합니다.

그러나 난이도는 거의 없어 단숨에 오릅니다.

이곳에서는 북쪽으로 이어진 산들도 잘 조망됩니다.

뾰족하게 삼각형 모양으로 보이는 산이 안수산(554m)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야할 675봉>

 

 <675봉에서 뒤돌아본 내리막길>

 

 <지나온 위봉산~되실봉 능선>

 

 <북쪽의 산세, 삼각봉이 안수산?>

 

  <북쪽 조망> 

 


675봉에서 서쪽으로 내려서는 길이 매우 가파릅니다.

안부에 도착하여 진달래가 피어 있는 부드러운 길을 따라 한참동안 걸어가니 오도치입니다(13:17).

산악회 C회장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산행코스가 다소 길므로 체력이 달리는 사람은

이곳에서 왼쪽 계곡으로 탈출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러나 필자는 서방산으로 가는 능선을 따라 쉬지 않고 오릅니다. 

 

 


  넓은 헬기장의 서방산(西方山)

 

지도를 보면 오도치에서 서방산까지는 단숨에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마루금으로 연결되는 등산로라는 것이 그렇게 수평으로 이어져 있지는 아니합니다.

몇 차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 보니 길은 부드럽지만 힘이 빠집니다.

   <서방산 능선을 가면서 바라본 지나온 서리봉>

 


등산로 주변에는 비록 군락을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화사하게 핀 진달래가 나그네의 길동무가 되어줍니다.

또한 산죽(조릿대)이 무리를 지어 피어 있는 곳이 많아 때로는 나 홀로 걸어도 심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서방산 오르막에는 무릎까지 시큰거려 애를 먹습니다. 지난주는 지독한 황사로  인하여 산행을 쉬었더니 체력의 저하로 다리가 잔꾀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오르니 넓은 헬기장인 서방산 정상(612m)입니다(14:07).

 

 <서방산 이정표>


정상에 서니 지금까지 지나온 위봉산과 서리봉 그리고 가야할 종남산이 뚜렷이 보이는 반면

남서쪽의 전주시가지는 연무로 인하여 흐릿합니다.

특히 날씨만 좋으면 서쪽으로는 김제 만경평야를 너머 서해바다까지 조망된다고 하지만

나에게 그런 행운이 따를 리가 없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버스를 타고 오는 도중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지만 산행들머리에 이르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열려 산행을 하면서 이 정도의 조망을 만끽하게 된 것도 그나마 다행입니다. 

 

 


  남쪽의 끝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서방산에 도착하기 직전부터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합니다.

서방산정상에서 종남산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에도 비는 계속 내립니다.

기상청의 일기예보에는 많은 비가 온다는 소식은 없었지만

주변의 분위기로 봐서 곧 그칠 것 같지는 않아 일부 등산객은 배낭 커버를 꺼내 덮습니다.


그러나 옷이 젖을 것 같던 빗방울도 발걸음을 옮김에 따라 어느새 잦아들고 다시금 태양이 빛납니다.

오히려 방금 내린 빗줄기가 대기 속의 가스를 지웠음인지

시계가 더 맑아 보이는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지나온 서리봉 능선>

 

    <진달래와 산죽>

 


서방산에서 종남산까지의 등산로는 그야말로 부드러움 그 자체입니다.

진달래와 산죽이 반갑게 맞아주고

또 때로는 푹신한 양탄자 같은 소나무갈비(송엽)가 수북히 쌓여 있는 등산로를 걸으며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포근한 감촉을 맛보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종남산(608m)에 도착하여 이정표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는

송광사방면으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14:56).  

  

 <종남산 이정표>

 


  송광사 뒤의 대숲 

 

종남산에서 급경사 길을 내려옵니다.

그 동안 걸어오는 도중에 아픈 무릎이 풀려 이제는 다리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입니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아침에 산행들머리로 진입할 때 이용했던 도로가

흡사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꾸불꾸불한 모습으로 위봉고개방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차량통행이 많은 지방도 너머로 국토의 대동맥인 익산∼상주간 고속국도건설공사가 한창입니다.


통신기지탑을 지나 고도를 점점 낮출수록 송광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키가 큰 대숲사이를 뚫고 나오자 바로 송광사 후원입니다.

전남 담양이 대나무의 고장이라지만 이곳 완주 송광사 뒤 대숲도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위봉고개 접근길>

 

 <송광사가 보이는 지점>

 

 <깨끗한 남쪽 조망>

 

 <대나무 숲>

 


  천년고찰 송광사

 

대숲을 빠져 나오니 바로 송광사입니다(16:00).

오늘 산행에 5시간 35분이 소요되었습니다(산행거리 약 14km).

완주의 송광사는 진입로의 아름다운 벚꽃 길로 인하여 찾는 사람이 많지만

승보사찰로 유명한 전남 순천의 송광사와 이름이 같다보니 그 명성에 가려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종남산 남동쪽에 있는 송광사(松廣寺)는 중국에서 선종을 수행했던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귀국한 뒤,

신라 경문왕 7년(867년)에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님은 이 절을 열면서 자신이 중국에서 수행하던 산 이름과 같은 "종남산"으로,

절 이름은 "백련사"로 명명했답니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이 절은 광해군 14년(1622년) 승주 송광사의 보조국사 제자들인 덕림스님의 주도 아래

승명(勝明), 운정(雲淨), 응호(應浩) 등의 스님들이 절을 복원·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송광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자료 : http://www.sanyaro.com).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인조는 청에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무사환국과 국난의 아픔을

불력으로 치유하고자 송광사를 거국적으로 복원시킨 뒤

호국 원찰로 삼고 '선종대가람사(禪宗大伽籃寺)'란 사호(寺號)를 내렸을 정도로 사세가 컸던 곳입니다.


송광사는 국가가 위급할 때나 기도가 감응할 때는

대웅전과 나한전 및 지장전의 불상들이 땀을 많이 흘린다고 합니다.

이 절에는 좌불상 가운데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큰 삼세불과 대웅전(보물 1234호)이 있습니다.

 

 <나한전>

 


 

                                       <대웅전 좌불>

 

 <대웅전>


사찰 뒤로 들어와서 경내에 배치된 가람을 거꾸로 돌아보려니 전체적인 구도가 잘 정리되지 않습니다.

맨 처음 목격한 나한전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오니 대웅전입니다.

대웅전 안에는 좌불상이 보이는데,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대웅전 뜰에서 안내자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어

송광사의 명성을 알 수 있습니다.

 

경내의 샘에서는 매우 적은 양의 물이 나와 갈증을 풀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지경입니다.

사천왕문과 금강문을 지나 앞으로 나오니 일주문입니다.

다시 송광사에 읽힌 시 한 수를 소개하면서 산행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옛날에 이곳을 지나던 한 선사(禪士)가
                  한 샘에서 마신 물맛이 범상치 않아
                  훗날에 제자(弟子) 시켜서
                  세운 절이 송광사(松廣寺)였다네. 
                                     (자료 : 한국수필작가회 홈페이지)
           
 

 <지장전>

 

 <종각>

 

 <금강문>

 

 <일주문>

 


  에필로그

 

주차장으로 와서 산악회 측이 제공하는 국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채웁니다.

등산버스는 다섯시가 되기도 전에 현지를 출발합니다.

오늘 산행은 위봉산∼서래봉∼서방산∼종남산을 종주하는 말발굽형 또는 U자형 산행을 했습니다.

이들 4개의 산은 전형적인 육산으로서 산세 자체는 별로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4개의 산을 종주하는 동안 행정당국에서 설치한 이정표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위 봄꽃이 만발한 명산에서 수많은 인파의 북새통속에 이들과 씨름하기보다는

이처럼 부드러운 등산로를 유유자적하게 거닐며 호젓한 산행을 즐기는 산꾼에게는

한결 뜻깊은 산행이 되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아침에 내려오면서 천안∼논산간 고속국도상의 정안휴게소에 들렀을 때

주차장을 만원사례로 만들었던 관광버스들의 행렬이 대부분 꽃을 찾아서 떠났을 것을 상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특히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산행들머리의 위봉사와 하산지점의 송광사 그리고 위봉산성에 얽힌 이야기를 배우며

조상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입니다. 끝. 

 
 
 
 
 

 

 


펜펜의 나홀로 인생
산행.여행기, 산행후기.자서전 출판, 야생화, 유머, 세계의 열쇠고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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