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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산 정상의 2층 정자, 흥선대원군 묘-







백봉산(조선 유일의 황제인 홍유릉-흥선대원군 묘) <전철시리즈 제12

2016121081호              2016-12-04()


자리한 곳 :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 와부읍, 화도읍

지나온 길 : 금곡역-홍유릉-금곡고교-백봉산-350(천마지맥갈림)-청구아파트-창현교차로-흥선대원군묘-마석역

거리및시간: 6시간 54(08:14~15:07) 총거리 : 14.8km(산행 9.7km +홍유릉산책1.1km+흥선대원군묘+마석역 4km 포함)

함께한 이 : 계백 혼자서

산행 날씨 : 기온은 포근, 먼지안개 자욱해 시계불량


조선의 유일한 황제릉인 홍유릉을 찾아서

새벽에 모닝콜 울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산행지의 날씨를 확인하려고 컴퓨터를 켰는데, 오류발생이란 창이 뜨며 작동하지 않았으나 시간때문에 컴퓨터를 켜지 못해, 강제종료 후 어제 시간에 맞는 전동차를 타지 못해 시간에  어긋났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말자는 생각에, 서둘러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서 전동차에서 어젯밤에 준비해둔 지적도를 살펴보며 머릿속으로 꼼꼼하게 산행할 코스를 그려 진행계획을 수립한다.

공휴일이나 주말 상습적인 교통체증을 피할 수 있는  대중교통 지하철을 이용해 산행하여 마음적으로도 여유롭게, 산행과 주변의 문화재와 왕족의 묘지를 돌아보기는 재미가 솔솔하고 문턱이 낮아 편한, 경춘선 금곡역을 들머리로 정하고 생각하니 우리나라 유일한 황제릉인 홍유릉을 찾아야 마땅하단 생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을 살펴보고, 백봉산행 후 흥선대원군 묘를 돌아보고, 마석역을 날머리 하기로, 산행일정을 확정하고 금곡역에서 하차하니 안개 자욱한 홍유릉으로 방향을 잡았다.(08:14)

먼지안개 영향인지 으스스한 분위기가 일요일 아침이라 행인들 활동까지 뜸해 가라앉은 어두운 분위기의 시가지 대로를 따라, 진행 금곡사거리 편의점에 들려 점원에게 홍유릉 위치를 물으니, 금곡역을 지나 한동안을 가야한다는 엉뚱한 대답에 금방 금곡역에서 왔는데 그럼 방향을 잘못 잡았는 말인가? 반문했더니, 그렇다고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한 답변에 말문이 막힌다. 혹시 지도를 잘못 읽지 않았나! 헛갈려 밖으로 나와 교차로의 이정표를 살펴보다 금곡동주민센터 이정표를 확인하고 유쾌하게 파안대소하도록 개그해준  젊은 여직원에게 마음으로 감사하고,  신호를 기다리다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온 안내판<광해군묘(성묘,안빈묘)가는길 3.5km> 어제 그토록 찾아 헤맬때는  보이지 않던 이정표를 이곳에서 마주했으니 아이러니(irony)하.(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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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부터 개방해 관람 가능한 홍유릉-



洪裕陵(홍유릉)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번지의 홍릉과 유릉의 합칭이다.

조선 왕릉 중에서 남다른 격식을 갖고 있는 곳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 민 씨의 홍릉, 27대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 씨·순정효황후 윤 씨의 유릉이다. 이는 당대의 품격이 왕이 아니라 황제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조선 시대에 중국보다 한 단계 아래인 왕만 존재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조선 시대에도 엄연히 '황제'가 있었는데 우선 고종과 순종을 꼽을 수 있고 더불어 무려 8명이다. 이들은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진종(영조의 첫 번째 왕자), 장조(영조의 두 번째 왕자), 문조(순조의 왕자)로 사후 진종소황제, 장조의황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정조, 순조, 헌종, 철종도 각각 정조선황제, 순조숙황제, 헌종성황제,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었다. 또한 태조 이성계도 태조고황제에 추존되었다. 이들은 모두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고종과 순종의 세계(世系)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추존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묻힌 능은 왕릉으로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황릉'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 왕릉'이라는 표현도 '조선 황릉과 왕릉'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고종과 순종은 엄밀히 얘기하면 대한 제국의 황제이지 조선의 황제는 아니므로 '조선 왕릉'에서 고종과 순종을 제외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곳에서는 이런 명분을 따지지 않으므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을 함께 다룬다.                           -옮겨옴-


문화재 관람시간 9시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실내체육관 들머리

문화재보호법 및 문화재청 훈령 ·능원 및 유적관람 등에 관한 규정에 의거한 관람시간(09:00~17:30)으로 계획에 차질을 생각했었는데, 우려가 현실이 되어 잠겨있는 홍유릉을 밖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고, 우측산책로(1.1km)를 한 바퀴를 돌아보는 것으로 스트레칭을 대신하고 홍유릉 정문으로 복귀했으나 아직 매표소와 정문이 잠겨있다.  시간상 15분은 더 기다려야 우리나라 유일한 황제릉 탐방이 가능하기에 잠시 말설이다 결정을 내린다. 한가한 시간에 다시 찾기로 하고 금곡고교  담장길 따라 실내체육관 주차장에서 콘크리트다리를 건너 양쪽으로 그물망이 울타리 사이길에서 산행을 시작한다.(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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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1B44E58488CE03600E5-실내체육관 주차장 산행 들머리, 완만한 등산로-


임도를 10여분 진행하니 임도를 더이상 진행이 어렵고 암자(진곡사)입구에서 우회로를 따라 남양주시청사에서 올라온 등산로에 합류하니 낙엽이 소복하게 쌓여, 미풍에도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윽박지른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소나무숲길과 먼지안개로 더욱 답답하게 느껴지는 조망터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고구마와 과일로 허기를 채우고 일어서다가, 단칼로 내리쳐 둘로 쪼개진 바위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삼국연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試劍石 天下第一江山 : 시검석, 천하제일강산) 감로사 뜰에 쪼개진 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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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산 능선에서 만난 둘로 쪼개진 바위-


삼국연의 한대목이다.

유비는 병사의 칼을 빌어서 하늘에 유비가 무사히 형주로 돌아가서 王業(왕업)을 이룩할 수 있다면 이 바위가 둘로 갈라지리라!” 칼을 들어 내리치자, 바위가 불꽃을 튀기며 둘로 쪼개졌다. 뒤따라 나오던 손권이 이 광경을 보고 유비에게 물었다. “현덕공께서는 이 바위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오. 제가 조조를 깨뜨리고 ()을 일으킬 수 있다면 이 칼이 바위를 베리라 하면서 내리쳤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비가 그렇게 둘러대었다. 손권도 칼을 빼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 또한 하늘의 뜻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만약 조조를 깨뜨리게 된다면 내 한 칼에도 갈라질 것입니다.” 그리고는 칼을 들어 바위를 내리쳤다. 바위가 다시 둘로 갈라졌다. “여기가 바로 천하에서 으뜸가는 강산이구려!” 감로사의 석벽에 천하제일강산이란 구절이 들어가게 된 유래를 곱씹으며 가능하면 마음으로 즐기는 산행으로 안내하려고 노력하며 걷다보니 벌써 2층 정자가 반기는 백봉산에 안부에 닿았다.(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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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내호평역가는 갈림능선, 백봉산 정상 풍경- 


柏峰山(백봉산:589.9m) :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와부읍

한북정맥에서 분기한 천마지맥으로 마치고개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천마산, 남쪽에는 백봉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산이다. 높이는 낮으나 소나무와 잡목 등 울창한 산림이 우거져 아름다운 산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정상 남쪽 산자락에는 묘적사가 자리잡고 있다.

자가용차량 이용시에는 묘적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으며, 대중교통 이용으론 남양주시청이나 화도읍 청구아파트에서 시작하는 것이 안내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좋으며, 그리 멀지않은 거리에 자리한 흥선대원군 묘를 가족들과 탐방해 보면 더욱 좋겠다.


妙寂寺(묘적사)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에 있는 절

백봉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절은 신라 문무왕(재위, 661~680)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말이 내려오지만 지금은 이를 뒷받침 할만한 아무런 기록이나 유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신증동국여지승람) 11 양주목 불우조 기록 가운데의 "묘적사재묘적산유김수온기" 라는 간접적인 기록을 통하여서만 조선시대 세조 당시에 이 절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절에 대한 기록 가운데 (묘적산산신각중건기)에 따르면 1895(고종 32)에 규오법사가 산신각을 중건했다고 한다. 그 뒤 1969년의 화재로 대웅전, 산신각 등이 소실되었다가 1971년 자신 스님에 의해 대웅전과 요사가 중건되었다. 그리고 다시 1976년에 대웅전, 관음전, 마하선실이 중건되었고, 19791984년에는 나한전과 산신각이 각각 완성되었다. 이 절에 내려오는 말로는 묘적사는 본래 국왕 직속의 비밀기구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거기에 따르면 이곳에 일종의 왕실산하 비밀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사찰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승려교육과 아울러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옮겨옴-


팔각칠층석탑(향토유적 제1)

묘적사 대웅전 앞 우측에 위치한 팔각칠층석탑으로서 본래는 사원 앞에 위치해 있었으나 1971년 현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묘적산에 있는 이 사찰은 신라 문무왕(661~680)때 개창 되었다고 하나 확실한 고증은 얻을 수 없다. "동국여지승람" 묘적사조에 김수온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세조 당시에 이미 존재해 있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고종 32(1895) 산신각이 건립되었으며, 1969년에 화재를 만나 소실, 현 대웅전과 요사건물은 1971년 새로 중건된 것이다. 탑의 재료는 화강암이고 높이는 4.3m이다. 탑을 해체하여 현위치로 옮길 당시 이두식 표기로 된 기록이 나왔으나 곧 소멸되었다고 한다. 대체로 조선초기에 왕실의 발원으로 세워진 조형으로 추정된다.                               -옮겨옴-


백봉산에서 부터 천마지맥 능선과 함께한다.

백봉산 안부에서 부터는 한북정맥 천마지맥 능선으로 합류해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1.13km따르다 남쪽으로 흐르는 갈림길에서 묘적사계곡과 작별하고 동쪽방향의 산줄기로 진행하며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골프장이 시야에 들어오는 능선을 이어가다 가벼운 오르막인 무명봉(350m)을 올라서 잣나무숲이 아름다운 능선을 이어가다  1,45km 지점 수리넘어고개 갈림길에서 천마지맥과 아련하게  작별하고 고도가 낮아져 비교적 순하게 이어지는 흙길 능선을 70여분남짓을 이어가는 동안 산객들과 빈번하게 교차하며 덕담을 나누며 청구아파트단지에 닿았다. 아파트 숲을 빠져나와 창현고가차도 교차로에서 산행을 마감한다.(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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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지맥능선과 작별한 지점, 소나무 재선충 방지 현장-


나그네는 똑같은 길을 물었는데 답변은 三人三色(33)으로 갈린다.

어제는 '광해군 묘'를 찾아 나서며 정보부족으로 고생만하고 소득이 없었기에, 불명예를 씻고자 '흥성대원군 묘' 위치를 꼼꼼히 메모해 실수 없도록 했으나 정확하게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정말로 부끄러운 일은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알아보고자 입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란 생각으로  ①.노점상(군밤장사)에게 물으니 도리어 미안한 표정으로 모른다는 대답에 감사한다. ②.마주친 나이든 행인에게 물으니 자신 있게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멀다고 전제하며 앞으로 계속가면 큰사거리가 나오면 좌측으로 계속가면 된다는 답변은 안내에 지도와 반대라 생각하지만 면전에서 분명하냐 반문하기 난감해 다른사람에게 물어야겠다 생각하는데, 뒤따라오던 행인께서 대화내용을 들었던지, ③.먼저 말을 걸어 산행을 자주하시나 보다며 어디를 찾느냐고 묻는다.

자신은 토박이임을 강조하며 손가락으로 전방의 야산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저곳이 '흥성대원군 묘'지라 알려주며 창현초등학교 사거리에서 기업은행앞길 따라가라고 설명하다 복잡했던지, 아니다며 친절하게 바로 앞에 보이는 뚝방(묵현천)길을 알려주며 개천을 따라가면 시멘트 징검다리가 있으니 건너면 된다고 알려주어 정중하게 예를 표한다.

일러준 천변길을 따라 진행해 개천과 마주했으나 징검다리가 없어 당황했는데, 다행으로 시멘트구조물 한쪽에 얉은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건너기에 무리가 없을 것 같아, 도리가 아니지만 늘어진 시간을 단축하려고 조심스럽게 개천을 횡단해 차도에 올라서, 길을 찾았으나 공장들과 목재소등이라 길을 찾지 못하다 주민을 만나 길을 물으니, 천변길을 따르면 교량앞 횡단보도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니 따라가면 된다고 알려주어 어려움 없이 해소되니 같은 길을 묻는 질문에 三人三色(33)으로 나눠지는 답변이 현실 삶이라 생각하니 입맛이 씁쓸했다. 이런저런 곡절을 거친 어려움 끝에 드디어 비석(기념물 제48호 흥성대원군 묘)앞에 선다.(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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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CCF4858488EA90F1FD8-흥선대원군 묘 풍경-


興宣大院君墓(흥선대원군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48. 묘는 처음 1897년에 경기도 고양군에 모셔졌으나, 1906년경기도 파주군으로 옮겨졌다가, 19664월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묘역은 조선시대 능원제도(陵園制度)를 따르는 듯 하나, 대군에 맞도록 간략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상하 2단으로 나뉘어졌다. 상단에는 호석으로 둘러싸인 단분(單墳)인 봉분과 그 둘레에 석호(石虎), 석양(石羊) 1쌍이 있고, 그 바깥에 곡담과 사성이 둘러쌓여 있으며, 묘 앞에는 상석이 있다. 하단에는 망주석, 문인석, 석마(石馬)가 좌우에 각 1쌍이 있고, 묘 앞 중앙에는 방형의 장명등이 놓여져 있다. 대원군은 영조의 현손이며 남연군의 아들로 헌종 9(1843) 흥선군에 봉해졌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섭정을 맡아 조선왕조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집권 초기에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고, 당색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는 한편 국가 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고집해 개항의 시기를 놓쳤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은퇴했으며, 이 후 1882년 임오군란으로 정권을 다시 잡았으나, 출동한 청 군대에 납치되어 청나라 톈진[天津]에서 4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885년 귀국한 후에도 운현궁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원세개와 협력해 장남 완흥군 이재면(李載冕)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다. 1895년에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에 간여하면서까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옮겨옴-


에필로그

50여분 가량을 머물며 유일하게 살아 생전 대원군 호칭을 받고 10년간을 섭정까지 했던 '흥선 대원군'의 긍정과 부정적 역사의 평가에 대해 생각이 많았던지 시장기가 업습해 잔디에 안자  가볍게 요기를 끝내고, '흥선대원군 묘'를 뒤로하며 지금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써 살고 있는가? 어떤 목표를 정하면 당당하게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깨끗이 인정하고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는지 고민하는 사색에 빠져들지만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한다. 마석역에서 전철을 이용했는데 승객들로 붐비지 않아  비교적 최적한 기분으로 순탄하게 귀가한다. 경북 포항시에 계시는 妻叔(처숙)께서 보내주신 과메기를 안주하여 하산주로 소주 한병을 가볍게 비운다.                            --.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찾아가 안기면 언제나 포근하기만 한 을찾아서~


2016-12-08

계백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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