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신선주월단맥종주


종주에 필요한 5만분의1 지형도 도엽명 : 충주


[지명(다른이름, 삼각점△ 고도m, 거리km/누계km) : 고도는 도면상 또는 등고선상 평균높이이며 거리는 도상거리임]


백두대간 마패산에서 분기한 백두신선지맥이 흐르며 박달산 지난 헬기장인 743.7봉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하여 괴산군 감물면과 장연면의 경계를 따라 봉수대터(670, 0.4)-임도(370, 1.1/1.5)-19번국도 누릅재(297, 0.4/1.9)-월봉(410, 0.7/2.6)-매바위(470, 0.5/3.1)-舟越산(490, 0.4/3.5)-주월령(250, 0.7/4.2)-등고선상310봉(1.5/5.7)-중부내륙고속도로-510번지방도로 양고개(190, 0.5/6.2)-옥답산(△509.6, 1.5/7.7)-마당재(370, 0.8/8.5)-△435.4(0.7/9.2)-옥녀봉(467.4, 0.6/9.8)-약사리봉(410, 0.5/10.3)-중부내륙고속도로 조곡터널(290, 0.7/11)-510번지방도로 조곡리 하리마을(150, 1.5/12.5) 지나 옥답산이 발원한 조그만 개울이 달천을 만나는 곳(150, 0.3/12.8)에서 끝나는 약12.8km의 산줄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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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진이 안보이시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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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신선주월단맥종주 






언제 : 2016. 12. 3(토) 맑음


누가 : 신경수


어디를 : 괴산군 감물면에서 장연면 방곡리를 넘는 19번국도 느릅재에서 백두신선지맥 박달산 남측 헬기장인 743.7봉 분기봉으로 올라 백두신선주월단맥을 따라 옥답산을 지난 매봉재에서 괴산군 장연면 조곡리 상리마을까지


박달산(△824.8) 전위봉(743.7) : 괴산군 감물면, 장연면

월봉(410) : 괴산군 감물면, 장연면

매바위(470) : 괴산군 감물면, 장연면

주월산(502.9) : 괴산군 감물면, 장연면

옥답산(△509.6) : 충주시 살미면, 괴산군 장연면


구간거리 : 13.4km 접근거리 : 1.9 단맥거리 : 8.5 하산거리 : 1.5 기타거리 : 1.5


구간시간 11:10   접근시간 1:20   단맥시간  5:30  하산시간 1:00   기타시간 1:30  휴식시간 1:50




강매역에서 요새님을 5시에 만나 휴게소에서 우동으로 가볍게 아침을 대신하고 

나는 괴산군 감물면에서 장연면 방곡리를 넘는 느릅재에서 내리고 

요새님은 강일님을 만나기 위해 불정면사무소로 갑니다

297


방곡리쪽으로 바라본 주월산 매바위의 멋진 모습인데 사진이 별루입니다


등산로 안내판과 장연면 작은 팻말과 잘 찾아보면 숨겨진 느릅재 안내판이 있습니다  


소나무 한그루가 고고하게 서있는 곳이 매바위 정상 너른 암반입니다 

우측 끝봉이 주월산이구요 


안내판을 보니 봉수대터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그러나 현지에 가보면 전혀 봉수대가 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그렇다고 하니 인용을 할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월산을 지나 주월령까지 등산로가 붉은색으로 죽 그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답사결과 주월산 정상에서 주월령으로 가는 능선은 

길이 전혀없는 가시 잡목이 발목을 잡는 엄청 귀찮은 능선입니다 

믿지 마십시요 산줄기를 하지 않는다면 우측 방곡리 새터말이나 간곡리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좋은 길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내려갈만 합니다 ^^


여기 안내판에 있는 주월산 높이는 매바위 높이니 역시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산불감시초소 위치가 매바위 바로 옆에 있군요 잘못 표기된 것입니다 

주능선봉우리라는 지명도 잘못 표기된 것입니다 

봉우리가 아니고 그저 한1분만 올라가면 되는 살작 오른 낮은 둔덕 수준입니다 


이거 참 정부에서 만들었다고 다 믿을 수도 없구 

참 딜레마입니다 

이런 안내판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니 

요즘 정국을 보면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슬픈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 씁쓰름합니다     


각설하고 절개지가로 오르는데 

어제부터 시큰거리는 왼쪽 무릎 때문에 진행이 원활치 못합니다 


19번국도 느릅재 :  7:30


암튼 편안한 산책로 같은 길을 시나브로 올라 막판 돌계단 몇개 오르면 이정목이 있는 임도입니다 

370, 0.4


8:00


짧은 목책난간줄을 올라

긴 목책난간줄을 잡고 한없이 올라갑니다 


8:15


살짝 올라선 곳에 국기지점번호가 있는 쉼터에 이릅니다 


8:20


거대한 바위가 나오고 목책난간줄이 왼쪽으로 올라서면

장의자가 있는 쉼터로 등산안내판과 이정목이 있습니다

이상한 코팅지가 하나 나무에 달려있습니다 


봉수대터 : 8:35

 

목책난간줄 암릉이 계속됩니다 


밧줄 암릉길도 계속됩니다 



이정목에 박달산1.1, 느릅재1.9km라고 합니다 

 

드디어 이정목 우측 백두신선지맥상 분기봉인 도면상743.7봉으로 올라서면


돌로 원형을 친 너른 헬기장으로 하얀 칠을 해 산뜻해서 좋긴하지만 

페인트통들이 몇개나 버려져 있어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둘레 나무들이 많이 커서 조망은 없습니다 


새로만든 커다란 풍향기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이어지는 백두신선지맥쪽으로는 길 흔적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엇이랍니까 

봉오름이님 코팅지가 여기도 있습니다



이 봉우리 이름이 무심봉이랍니다 


하동의 무심이님 봉우리가 드디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분이 알면 뭐라고 할지 모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측 산밑 감물면 매전리 증자동에 

무심사라는 절이 있어 무심봉이라고 작명을 하신 것 같은데 

참 못말릴 분입니다 

나는 그 봉우리 이름을 인정 못하겠습니다 


그런 곳까지 그런식으로 임의대로 이름을  짓는다면 

만봉이니 이만봉이니 하는 봉우리 숫자는 별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더 걱정은 모두들 그 이름을 아무 검증없이 쓰고 있으며

나중에는 지도제작자까지 그 이름을 지도에 표기를 하는 웃지못할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그 지도를 보는 사람들에게 마치 그 이름이 공식적인 이름이라고 검증까지 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각종 매체를 통해 전파가 되면서 기정사실화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발 각관련단체나 정부에서 말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각방송과 언론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봉이니 이만봉이니 하는 산을 올라간 일을 가지고 

마치 대단히 특별한 분으로 보도를 하고 있으니 그런 식으로 이름을 지어서라도 

그런 반열에 들고 싶은 욕심에 더 이름을 많이 짓는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산줄기 답사를 하루종일 하다보면 그런 봉우리 몇 수십개 많게는 백여개도 일상적으로 넘나듭니다

아마도 1대간 9정맥 기지맥 산줄기 종주를 하시는분들은

그런 식으로 작명을 하신다면 몇십만봉은 거뜬히 오르셨을 것입니다    ^^



박달산을 쳐다보고 


정상에 있는 산불자동감시카메라철탑을 확인하기 위해 



당겨보니 우측 박달산 정상에 산불자동감시카메라철탑이 확실하게 보입니다 

안보인다구요 

제 사진 실력이 없어서 그러니 그러면 현지에 가셔서 확인해 보시면 명확합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박달산 정상을 가봐 그냥 빽을 해 가지고 고민좀 하다가 

오늘 가야할 산줄기가 길도 없을 것 같고 고속도로도 건너야하는 지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어 

박달임금님한테는 섭섭하지만 그냥 느릅재로 빽을 하기로 합니다 


743.7봉 헬기장 백두신선주월단맥 분기봉 :  8:50  9:05출발(15분 휴식) 


이제부터 (백두신선)주월단맥 능선길입니다 


주월산을 지나 중부내륙고속도로를 가기전까지는 

감물면과 장연면의 경계능선을 가게됩니다 


목책 난간줄로 내려가 암릉에 설치된 밧줄을 잡고 내려갑니다 


9:15


바윗길로 내려가다가 살짝 오른 암봉이 있는 곳에 이릅니다 

그저 바윗덩어리이지 독립된 봉우리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약합니다 



암릉을 내려가 장송숲에 장의자가 있는 편편한 바위밑 공터에 이릅니다 


등산로 안내판에 쉼터로 표기된 곳입니다 


이정목이 있습니다

박달산1.5, 느릅재1.5km랍니다 


엉성한 '박달산 등산안내도' 판에 쉼터로 표기된 곳입니다 

이 안내판에는 '봉수대터'라는 지명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우측으로 가면 천만길 바위벼랑이 나오고 조망이 좋습니다  





감물면을 사방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들인데 표고차가 엄청나 전부 들판으로 보입니다 



이상한 코팅지가 하나 나무에 달려있습니다 

이곳이 봉화봉 봉수대라고 하는데 참 못말릴 사람인 것이 또 확인됩니다 

이곳은 봉우리가 아니고 바위벼랑 밑 쉼터일 뿐입니다 


도저히 봉수대가 있었던 자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은 지형이지만 

느릅재 등산로 안내판에 봉수대터라는 지명이 있으니 봉수대는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봉화봉이라는 봉우리 이름은 나는 인정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분기봉에서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이정목에 박달산 느릅재 각1.5km라고 합니다 

등산로 안내판도 있구요 


좌측으로 가면 분재같은 소나무들이 있는 천만길 바위벼랑에 이릅니다 

조망이 더없이 좋지만 아무 안전시설이 없으니 

너무 다가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690 


쉼터 전망대 봉수대터 : 9:20


밧줄도 나오고 목책난간줄도 나오고 시나브로 내려가며 



살짝 오른 곳에 장의자와 국가지점번호판이 있는 쉼터에 이릅니다 

590, 2.5


쉼터 살짝 오른 곳 : 9:35


목책난간줄이 나오고 급경사를 한없이 내려갑니다 

작은 묘가 있는 쉼터에 이릅니다 


9:45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주월산의 그 아름다운 암봉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당겨본 거대한 암릉 매바위능선과 우측 높은 주월산 

그 너머로 좌측으로 원을 그리고 있는 주월단맥 능선이 보입니다 


확실하게 보이는 곳에서 찍으니 매바위 주월산 옥답산을 지나 

월악산을 닮은 뾰족한 옥녀봉도 가늠이 됩니다 


그래서 확인차 당겨 보았습니다 

환상적인 매바위암릉 뒷산줄기 한가운데 뾰족한 암봉이 보이시지요^^ 옥녀봉입니다 


장의자2개가 있는 쉼터에 이릅니다 

등산로 안내판에 쉼터라고 표시된 곳입니다 


9:50


납작묘가 있는 쉼터에 이릅니다 


9:55


돌계단을 내려가면 좌우로 도는 임도가 있고 


등산로를 알리는 이정목으로서는 많이 미흡한 이정목이 있습니다 

느릅재0.3km라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상당히 더 깁니다 



느릅재로 내려가는 곳에는 작은 등산로팻말이 있는데 역시나 느릅재300m라고 합니다 

350, 3.1


임도 : 10:00


낮은 둔덕을 넘어 내려가면서 도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우측으로 신암농원 녹슨철조망이 시작됩니다


도로변에 이르면 등산로안내판과 장연면 작은 안내팻말과 이런저런 안내판들이 있습니다  


우측으로 신암농원석이 있으며 



그 안으로 가려서 잘 안보이는 느릅재안내판이 있는데 

높이가397m로 무려 100m나 더 높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하루 빨리 수정해서 제자리로 옮겨 설치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좌측으로 조금 가면 




송신탑이 있는 곳에 


망가진 등산로안내판이 있습니다 


박달산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주월산을 지나 주월령까지 등산로가 붉은색으로 죽 그어져 있었는데  

이곳 안내판에는 방곡리 방곡저수지 북측 새터말로 제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일부 길찾는다고 진행을 하다가 빽을 했는데 좋은 길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내려갈만 합니다 ^^



이정목도 있는데

주월산까지 1km라고 하는데 턱없이 부족한 거리지만

월봉까지 거리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맞습니다 

이곳에 표기된 주월산은 도면에 있는 주월산이 아니고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지만 조망좋은 암봉인 매바위를 말하는 것이니 착오없으시기를 바랍니다 

297, 3.5


19번국도 느릅재 : 10:10


송신탑 좌측으로 오르는데 


한없이 지저분한 가시 잡목 넝쿨 사이로 뚜렷한 길이 오릅니다

등고선상370봉을 우측 사면으로 나가 내려가 



역시나 지저분한 등고선상350m 안부에 이릅니다 


10:30



좌측으로 조망이 터지는 곳에 높은 산불감시초소가 있습니다 



이담저수지 너머 달천을 건너 불정면소재지 공수방산이 가늠됩니다 



뒤돌아보면 특이한 모습의 성불산이 하늘에 떠있습니다 멋진 산입니다 


잠깐 오르면 그 다음 안부까지 표고차가 10m도 안되는 낮은 둔덕에

봉오름하시는분의 정상코팅지가 있습니다 



월봉이랍니다 그런데 내 지도에도 월봉이라고 표기가 되어있습니다 

이런 곳까지 이름이 있다는 것이 의아스럽지만 

암튼 어느 곳에선가 공식적인 이름이 있어 표기를 한 것은 틀림없어 인정하기로 합니다


아마도 이담저수지쪽에서 바라보면 

뾰족한 초승달처럼 보인다고 하여 월봉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으나 

느릅재나 방곡리쪽에서 보면 봉우리라고 보기에는 너무 약한 그저 살짝 오른 곳일뿐입니다 

430, 4.3


월봉 : 10:40


천하의 조망능선 암릉이 시작됩니다 

딱 1군데 밧줄만 있을 뿐 그 어떠한 안전시설도 없으니 조심해야합니다

그나저나 무릎 때문에 채고 오를 수가 없으니 죽을 맛입니다 


천지사방 걸리는 것이 없는 일망무제 


소나무 1그루가 박달산을 바라보며 고고하게 서있는 

편편한 암봉위에 이릅니다 매바위정상입니다


우측으로는 박달산이 하늘에 떠있고 


정상 산불자동감시카메라철탑이 확실하게 보입니다 


느릅재 아름다운 도로와 성불산으로 이어지는 백두신선지맥 마루금과 



이담저수지 건너 불정면사무소뒤 나즈막한 공수방산이 추억으로 이끌고 


당겨본 이담저수지와 공수방산 



정면으로는 가야할 암릉과 주월산이 우뚝하고 옥답산 산줄기가 좌측으로 원을 그립니다  

길도 없다는데 걱정입니다^^   



가야할 암릉과 옥답산 그 너머로 아스라한 백두대간 하늘금

월악산 영봉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당겨보니 

어디서 보아도 보이는 군계일학의 

뾰족한 갈고리 모양과도 같고 소뿔과도 같은 거대한 암봉인 월악산이 그립기만 합니다 


박달산을 쳐다보며 가야할 산줄기와 

그 너머로 하늘금을 그리고 있는 백두대간의 그 장대함에 넋을 놓고 바라보며 

정상주 한잔 없을소냐^^

470, 4.8


매바위 : 10:55  11:25출발(30분 휴식)



밧줄잡고 가까스로 뒤로 내려가 


앞에 돌탑이 있는 봉우리로 올라가기가 싫어 

거대한 바위벼랑을 좌측으로 내려가 등고선상430m 안부에서 암릉은 끝납니다 


11:30


바위섞인 빨래판 같은 급경사를 올라서면 주월산 정상입니다 



돌탑과 작은 정상석이 있습니다 높이가 470m라고 하는데 매바위 높이로 표기를 했습니다 

이곳의 높이는 502.9m가 국립지리원 5만지형도에 있는 높이이고 영진5만지도로 보면 507m입니다

GPS 높이로 보아도 그 어름 높이가 맞습니다 


주월산 : 11:40


좋은 길따라 한100m 정도 내려가면 



가지가 축쳐진 소나무가 있는 너른 묘터에 이릅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급경사를 내려가는 능선을 마루금으로 그렸지만 

사실 딱 어느 것이 마루금인지 확인하기가 조금은 아리송한 곳입니다


배선배님 시그널 1개가 있어 맞다고는 생각되지만 

국립지리원 5만지형도의 도면상으로는 경계능선이 아닙니다

영진5만지도에는 내가 그린 능선으로 경계능선이 내려갑니다 

도대체 경계능선까지 지도별로 다 다르니 뭘 믿어야하나 ^^ 


그래서 일단은 길이 좋은 경계능선을 따라 내려가며 좌측으로 능선을 가늠하는데 

도대체가 어느 것이 마루금인지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참으로 묘한 지형입니다 

도대체가 절벽같은 능선만 가늠이 되지 길은 없습니다 


느릅재 등산로 안내판에 주월령고개로 가는 것이 등산로라고 소개를 하고 있으니   

일단은 믿고 길을 찾아보았으나 터무니 없이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면 아마도 주월령에서 내려가 19번국도를 만나는 

방곡리 새터말마을 어름 어디로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에고 빽을 해서 너른 묘터에 다시 이릅니다 

좌측으로 나도 시그널 1개 달고 급경사를 내려갑니다 

400m를 약20분간 알바를 했습니다

490, 5.3(5.7) 


주월령 갈림능선 : 11:45   12:10출발(5분 휴식 20분 알바)


잠깐 내려가면 길 흔적도 없어지고 

낙엽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무진 용을 써가며 한없이 내려가는데 

우측으로 커다란 창고같은 건물들이 내려다보입니다 바로 그곳이 고개인것 같아

우측으로 능선을 가늠하는데 작은 계곡을 하나 건너갑니다 죽을 맛입니다 

가시 잡목 넝쿨 등에 걸려 목을 할퀴고 남방이 찢어지고......


고갯마루 절개지 철책위에 이릅니다 내려갈수가 없고 

우측 그 건물이 있는 곳으로는 갈수가 없습니다 

천상 좌측으로 내려가 결국은 그 조그만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불과 몇10m  거리를 왔다 갔다 했을뿐이지만 계곡같지 않은 계곡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마루금은 아닙니다 암튼 알고 이해를 했으면 합니다 


산자분수령이라는 만고불변의 원칙에 따라 

반드시 물가름을 하는 능선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건데 처음에 내려왔던 그 능선을 끝까지 내려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높은 철책 좌측 낮은 옹벽위에 돌망태가 올려진 그런 곳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2차선 도로입니다 


우측으로 잠깐 가면 장연면 작은 팻말이 있고 



조금 더 가면 감물면 작은 팻말이 있는 

그 창고같은 건물이 있는 곳으로 가 파헤쳐진 절개지가로 오릅니다 


암튼 시간만 물쓰듯 쓰며 진행이 되는데 이러다가는 아무래도 오늘 답사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요새님이 기다리시니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230, 6.4


주월령 도로 :  12:55


작은 평장묘지에 이르고 

능선으로 오르면 길 흔적이 있다가 없다가 합니다 


등고선상270봉 : 13:30  


길흔적이 계속되고 돌들 몇개가 있는 등고선상290봉에 이릅니다 


13:45


좌측 서쪽으로 진행을 하며 

우측 아래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 그 특유의 찻소리를 지겹도록 들으며 나란이 가게 됩니다

망가진 돌무더기가 있는 등고선상250m 십자안부에 이르면 

우측으로 저 아래 고속도로를 건너는 지하통로가 보입니다 


이곳에서 마루금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고속도로를 건너야하므로 

우측 계곡으로 그 통로를 향해서 내려가야했습니다 그러면 고생을 조금 덜 했을 것입니다


등고선상250m 십자안부 : 13:55


길은 여기까지입니다 

이후 길은 없습니다 가시 잡목 넝쿨 등이 어우러진 그런 능선을 오르다가 

벌목능선에 이르면 조금은 살것 같지만 


키작은 가시 잡목 넝쿨 등이 어우러진 능선이라 

엄청 귀찮습니다만 그래도 조망은 좋아 갈만합니다 


좌뒤로 박달산부터 지나온 능선이 한눈안에 다 들어옵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잘 관리된 순흥안씨 묘3기가 있는 곳을 지나 

우측으로 옥답산의 위용을 바라보며 잠시 오르면 바위들이 널린 등고선상310봉입니다


이 봉우리가 이 산줄기를 하는데 매우 중요한 변곡점입니다 

능선의 흐름에 따라 장연면과 감물면의 경계를 따라 계속가면 긴별산(404.1)을 지나 달천변에 이릅니다 

그 흐름을 어기고 우측 북쪽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가야할 옥답산입니다 

가까이서 보니 좋은 논이란 옥답이라는 이름과는 영딴판인 상당히 험해보입니다 


에너지 보충을 하고 우측 옥답산을 바라보며 북쪽으로 내려가려는데

이게 뭡니까 



자연으로 돌아가기 일보직전의 죽천님과 대전홀산아님 시그널이 모습을 보여줍니다 

엄청나게 반갑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시는 길이신지..........


등고선상310봉 : 14:15  14:35출발(20분 휴식)     


급경사를 가시 잡목 넝쿨 등이 어우러진 그런 능선으로 내려가는데 길은 없습니다

조심 조심하다보면 막판에 길 흔적이 나오고 엄청 시끄러운 찻소리를 들으며 


좌측 잘관리된 묘지로 내려가다 우측 가야할 산줄기를 쳐다보면

월악산 영봉 닮은 거대한 뾰죽한 옥녀봉 암봉이 그리워집니다 


넘의집 과수원 안으로 들어가 과수원 가운데 길로  

정면으로는 뾰족한 마치 작은 월악산을 닮은 옥녀봉을 바라보며


중부내륙고속도로 지하통로를 빠져나가게 됩니다 

150, 9


중부내륙고속도로 지하통로 : 14:55


도로따라가면 아마도 조곡리 상리마을이 나올것 같습니다만

나는 그러기가 싫어 우측으로 고속도로 옆으로 넘의 과수원을 밭을 가로지르며



나중에는 조그만 소류지를 돌아 사과밭 입구로 올라서면 2차선 510번지방도로입니다 


우측으로  도로따라 가다가 


이 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제일 가까이 바로 옆으로 달리는 지점이 

양고개 고갯마루입니다 무려 0.8km를 돌아나온 것 같습니다 

참으로 지난한 능선입니다  

170, 9.5 


510번지방도로 양고개 : 15:10  15:15출발(5분 휴식)



고갯마루 조금 전 접도구역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급경사를 오르는 길 흔적이 보이면 바로 그리로 오릅니다 


묘와 묘를 연결하여 올라 본능선에 이르러 좌측 북쪽으로 오르는데 

생각외로 뚜렷한 길 흔적이 이어집니다 고맙습니다 

210, 9.6


15:25  


좌측으로 저멀리 긴별산이 흘끔거리고 

5만지도에는 없는 둔덕 수준의 봉우리들이 계속됩니다 


급경사 오름짓이 시작되고 헥헥거리다가 



풍산홍씨 작은 납작합장묘에 이르면

똥주머니 2개가 작은 나뭇가지 폴대에 달려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용도인지 짐작조차도 할 수가 없습니다 


풍산홍씨 작은 납작합장묘 : 16:00


바위섞인 능선을 한없이 올라

등고선상470m 살짝 오른 곳에 이르면 


살짝 올라간 둔덕도 안되는 그저 민드름한 곳에 '작은옥답산'이라는 코팅지가 붙어있습니다 

이곳은 절대 봉우리가 아닌데도 이런 작명을 하시는분은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짐작이 안됩니다 


그 정도 작명을 하셨으면 몇만봉은 실히 오르셨을 것 같은데 

이제는 좀 자제를 해주시고 정부나 그 동네에서 부르는 산이름에만 붙이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대단하시다는 것을 넘어 이제는 본인이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좌측 북쪽으로  내려갑니다 

470, 10.9


16:45


뾰족한 정상으로 올라서면 판독불능 삼각점이 있고 


옥답산 정상판이 있습니다 

거기에 작은 옥답산을 작명하신분의 정상코팅지도 있습니다 


아무 곳에나 1, 2, 3...봉, 작은, 큰, 대, 소, 동, 서, 남, 북, 상, 중, 하, 좌, 우, 

고개이름, 마을이름, 절이름 등 등을 붙여서 작명 좀 하지 마시고 

제발 이렇게 이름이 있는 봉우리만 달아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드디어 충주시 살미면과 괴산군 장연면의 경계능선을 만난 것입니다

509.6, 11.1


옥답산 : 16:55  17:00출발(5분 휴식)


좌측 서쪽으로 내려가는데 바위덩어리라 좌측에서 우측으로 돌아서 내려가야합니다

길없는 급경사를 내려가면서 커다란 바위들이 나오고 잔물결로 내려가다가 

등고선상450m지점 Y자능선이 나오고 우측 북서방향으로 내려갑니다 


17:15


내려가다가 살짝 오른 등고선상410m지점에 이르면 


에고 이곳에 또 봉오름이 정상코팅지가 있습니다 이곳이 마당재봉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민망함을 넘어서 짜증까지 나려고 합니다 

이곳이 무슨 봉우리입니까 그저 살짝 올라간 둔덕이지요


이름을 지으려면 마당재를 지난 등고선상410봉에 고개 이름을 차용해 마당재봉이라고 지어야지요 

그 봉우리가 영진5만지도에는 397m봉으로 되어있고 그 위에 마당재라는 지명이 있어 그런 작명을 하신 것 같은데 

엉뚱한 위치에 달아놓은 것입니다  

11.7


17:25


등고선상350m 안부로 내려섰습니다

다음에 오를 봉우리는 등고선상410봉으로 안부와의 표고차가 60m나 되는 훌륭한 봉우리입니다 

굳이 이름을 지으시려면 그 봉우리에다가 마당재산이나 마당재봉이라는 이름을 지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당재라는 지명은 고개이름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그 봉우리가 마당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도면상 이름 표기된 곳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암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나좋자고 탈출할 길이 없다는 핑게로 야간산행을 감수하고 완주를 할수도 있지만

얼마 안있으면 밤이 올 것이고 옥녀봉 험한 암봉이 기다리고 있고 

그 어디에도 안전시설은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무엇보다도 요새님이 마냥 기다리고 계시는데 내 욕심만 채울수도 없구 

길은 없지만 좌측으로 내려가기로 합니다 

350, 11.9


마당재 : 17:35  17:40출발(5분 휴식)


처음에는 그런대로 내려갈만합니다 

내려가는 요령은 적당히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곳을 골라가며 내려가는데 

길이 없는 계곡으로 쳐박히면 엄청 고생하게 되고 밤새도록 헤맬수도 있습니다 

좌측 산사면을 이리저리 골라가면 진행을 하다가 좋은 길이 나올 줄 알았는데 

어쩔수 없이 계곡으로 떨어집니다 


랜턴에 의지해 가진 장애물을 돌파하여 

넘의집 과수원안으로 들어가 과수원길을 10여분 내려가 

좌측 조금 위로 별장같은 민가가 나오고 몇마리 개들이 낯선 사람이라고 

열열이 환영을 합니다 사람은 나올 생각도 없나 봅니다 

다음에 바로 이리로 올라갈 일이 걱정이 태산처럼 무거워집니다 


민가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사각정자와 커다란 '조곡리 상리' 마을석이 있는 510번지방도로  2차선도로에 이릅니다 

상리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무려 1시간을 내려간 것입니다 

150, 13.4


괴산군 장연면 조곡리 상리마을 510번지방도로 상리마을 버스정류장 : 18:40 


그후 


요새님이 오시고 

오늘 하룻밤을 유할 곳을 가는데 

충주나 괴산이나 수안보나 거리가 비슷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수안보가 가장 가깝다는 것입니다


주정단맥을 넘어가는 기룡목재를 넘어 

요새님이 몇번 이용하셨다는 산수모텔로 가 배낭을 내려놓고 

석문동천변 노점상 길로 가는데 거의 전부가 문을 닫았는지 열지 않았는지 

몇집만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새님이 몇번 이용했다는 삼겹살 무한리필이 되는 음식점으로 들어가

두꺼운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양푼김치찌게에 하산주를 합니다 

맛있습니다 다음에 수안보를 오게 되면 반드시 다시 찾을 생각이 드는 집입니다 


그나저나 자투리 남은 구간 들머리도 불분명한데 

언제나 오게되려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꾸 주력이 느려져 요즘 부쩍 자투리를 흘리고 다니니 

잘라먹을 수도 없구 고민만 쌓여갑니다^^   


이왕 정상은 아니지만 박달산에 올라왔으니

박달산 정상 모습과 이곳이 감물면인 이유와 박달산의 유래에 관한 

대한민국의 상고사에 대해 조금 알아보고 가기로 합시다 


조금만 관심 가지고 보아주신다면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글은 2008년 8월 어느 비오는날 백두신선지맥을 답사하고 

발표를 한 글입니다  



박달산의 역사적인 고찰과 대한민국의 상고사 개략


현재의 박달산 정상 현황


조망 엄청 좋은 박달산 정상은 산불자동감시카메라 밑에 있는 

오석정상석에 “박달산825m 충북 괴산 느릅재2.5km 추점리3.4km”라고 합니다 


“대한민국국기게양대 33대 단군00왕국 진산으로 구구절절”이라 씌인 스텐국기게양대엔 

망가진 국기가 비를 맞아 휘감겨있는 모양새와 

임금의 이름을 누군가 훼손하여 알아 볼 수가 없게 만들어 놓아 영 보기가 안좋았으며 

진한 비구름속이라 주변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나쁜 짓을 누가 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라 집에 와 찾아보니 

어럅셔 “단군 감물”이며 지금의 괴산군 감물면의 한자인 甘勿과 같은 글자인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이러면 그 임금글자를 훼손한 사람은 추측이 돼지만 반듯이 그런 것은 아니므로 뭐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누가 훼손했든지 간에 하루 속히 글자를 복구해야 

우리 고대사의 일부라도 후손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단군조선지의 역사에 대해 몇글자 적어보고 지나가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상고사 개략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시조를 단군이라 알고 있으며 

일제의 날조된 역사관에 의해서 그나마도 신화로서만 단군임금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역사의 도적행위나 마찬가지인 일인들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시켜 

우수한 자기들이 우매한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시키기 위해 그리 만들었을 뿐이다


더구나 불과 2천여년밖에 안되는 고주몽 박혁거세 온조마저도 신화로 여기거나 

아득한 원시시대처럼 느끼게 만들었으면서 

같은 연대의 중국사나 서양사에 나오는 인물들은 실존인물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금의 우리 국사교육이 이런 사고를 고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제1의 숙명적인 과제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아래의 단군에 대한 글은 단기 4319년(서기1986년) 11월 고동영이 

우리의 고대서인 "단기고사, 한단고기, 규원사화" 등을 토대로 "단군조선47대"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바 

그 중에 일부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여기에 옮겨 본 것이다   


우리나라는 나라명이 桓國(한국)이며 파내류산 

즉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미르고원이나 천산을 말한다 

바로 그 산아래서 천해의 동쪽까지 즉 지금으로 말하자면 천해는 바이칼호이며 

그 동쪽이라함은 만주와 지금의 우리나라를 말한다


남북 오만리 동서 2만리에 걸쳐있었다 

여기에는 모두 12나라 아홉족속 즉 九桓이 살았다 즉 이들이 모두 한국사람들인 것이다


그 때는 법과 명령이 없어도 모든 삶은 이치에 맞도록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공적인 일을 결정할 때 그를 대표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어 

12나라 아홉족속이 다 모여 桓仁을 桓花로 둘러쌓인 곳에 앉히고 

높이 임금으로 추대하여 드디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桓花는 槿花 즉 지금의 무궁화꽃을 말한다


그때가 BC7199년의 일이었으며 그후 桓仁시대가 열리며  BC3899년 까지 7세 역년 3301년을 이어왔다


혹자는 역년 63182년이라 하나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자세히 알수는 없는 일이다


환인시대


제1세 安巴堅  桓仁

제2세 赫  胥  桓仁

제3세 古是利  桓仁

제4세 朱于襄  桓仁

제5세 釋提壬  桓仁

제6세 邱乙利  桓仁

제7세 智爲利  桓仁


이때에 “우주의원리”를 밝힌 天符經은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다음에 나라를 세우신 桓雄天皇이 배날나라를 세우면서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鹿圖文으로 옮겼으며 

이 천부경은 伏羲씨가 지은 桓易의 모체이며 여와와 주양을 거쳐 주나라때 周易이 되었다


또한 녹도문은 현재 경남 남해군 낭하리 계곡과 

만주 길림성 경박호 선춘령과 부오소리의 암석에 그 때 새겨놓은 것으로 보이는 글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桓國의 마지막 임금때 사람은 많아지고 물자가 부족해 

삼위산과 태백산에서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할 수 있다고 여겨 

지위리 한인의 아들인 환웅을 천거하여 “弘益人間”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天符印 3개를 주며 3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고 무리들이 桓雄을 임금(天皇)으로 추대하고 

나라이름을 倍達이라 하였다


이래서 배날나라는 BC3898년부터 BC2334년까지 18세 역년 1565년간이다


환웅시대(배달나라)


제1세 桓雄 居發桓 :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인간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360여가지 일을

                    風伯 雨師 雲師에게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였으며

                    역법을 만들어 일년을 365일로 정하였으며

                    곰족의 딸을 황후로 받으며 혼례법을 제정하고

                       그 외 여러 가지 복식 제도등을 만들었으며 공수와 두열이라는 음악이 있었고 

                         계산할 때 쓰는 算木이 있었다  

제2세 桓雄 居佛理

제3세 桓雄 右耶古

제4세 桓雄 慕士羅

제5세 桓雄 太虞義 : 黙念 淸心 調息 保精의 장수법 터득

                       아들 12명중 막내아들 太皞가 바로 伏羲씨로 天河에서 卦圖를 얻었는데 

                      이것이 바로 河圖이며 洛書와 함께 桓易의 이치가 되었으며 八卦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제6세 桓雄 多儀發

제7세 桓雄 居  連

제8세 桓雄 安夫蓮 : 우리의 시조인 高矢씨의 후손인 小典에게 

                       지금의 중국 섬서성 기산현 서쪽에 있는 姜水에서 군사를 감독하였고 

                       그의 아들이 神農씨로 의약의 체계를 세웠으며 물물교환 제도를 만들어 생활이 편리해졌다

제 9세 桓雄 養  雲

제10세 桓雄 葛  古

제11세 桓雄 居耶發

제12세 桓雄 州武愼

제13세 桓雄 斯瓦羅

제14세 桓雄 慈烏支 : 蚩尤天皇이라고도 하며 창과 투구등 쇠병기를 만들었으며 12제후의 나라를 합병하였다

                     중국 軒轅과 전투를 하여 이겼으며 도읍을 지금의 중국 절강성 항주 근방에 있는 靑丘로 옮겼다

                     망나니인 헌원이 치우천황을 뵈러 가는 길에 사람이 되라는 말과 함께 

                         자부선인에게 삼황내문경을 받았으며 

                         이것이 노자로 이어져 도교의 기초가 되었으며 헌원은 지금도 도교의 개조로 숭배받고 있다

제15세 桓雄 蚩額特

제16세 桓雄 祝多利

제17세 桓雄 赫多世

제18세 桓雄 居弗檀 : 檀雄이라고도 하며 그의 아들 단군 왕검이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 이때가 BC2333년의 일이다 

                        배달나라 18세 거불단 환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곰족의 왕녀이다 

                        BC2370년 5월2일 寅時에 태어나 성장하여 河伯의 딸과 결혼하여 

                        扶婁 扶蘇 扶虞 夫餘 이렇게 네아들을 두었다


九桓의 백성들이 BC2333년 10월3일 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왕검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나라를 연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0월3일을 개천절로 정한 것이다


도읍을 새로운 땅이라는 뜻을 가진 지금의 중국 할빈의 완달산에 있는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이름을 “檀”이라 하였으며 이 아사달을 후세 사람들이 왕검성이라고 불렀다


이런 단군조선은 BC2333년부터 BC238년까지 47대 역년 2096년간이다 


단군시대 


제1세 檀君 王儉 : BC2311년 도읍을 송화강가로 정하고 이름을 平壤이라 하였다

                     BC2283년 강화도 정족산에 삼랑성을 마리산에는 塹城檀을 만들었다

                     BC2266년 도산회의에서 중국의 태평성대를 말하는 요순시절의 순임금이 회대의 제후를 감독하게 하였다

                     BC2241년 3월15일 세상을 뜨다

제2세 檀君 扶婁 : BC2238년 도량형의 표준을 정했으며 물건 가격을 통일시켜 모두 편리하였다    

                     BC2231년 토지제도인 정전법 시행과 토지대장을 만들어 세금의 기틀을 잡았다

                     BC2299년 신지 귀기가 七回歷과 邱井圖를 만들었다

                     칠회력이라 함은 일곱신에게 제사 지내는 주기로 천신 월신 화신 수신 목신 금신 토신을 말하며 

                     요즘의 일주일인 “일월화수목금토”요일을 말하는 것이며 구정도는 지금의 지적도를 말한다

제3세 檀君 嘉勒 : BC2181 을보륵이 국문정음인 지금의 한글의 모태가 되는 

                    “加臨土” 38자를 제정하여 소통이 잘 되도록 하였다

                   지금의 한글과 흡사하여 한글을 세종대왕이 창제했다는 뜻은 

                   이 가림토를 조금 변형하여 새로 정비하였음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BC2180년 동양사학의 원조인 倍達留記를 편찬하였다

제4세 檀君 烏斯丘 : BC2137년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왕으로 봉했다 후에 그의 자손들이 몽고족이 되었다

                      10월 태백산에서 하느님께 제사 지내고 선약(인삼)을 얻었다

                      BC2133년 조개껍질로 만든 圓孔貝錢을 만들었다

제5세 檀君 丘乙 : BC2087년 감성관이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기를 만들어 천도와 맞게 하였다

제6세 檀君 達門

제7세 檀君 翰粟

제8세 檀君 于西翰

제9세 檀君 阿述 : BC1980년 매년 8월1일을 정기회의 날로 정하여 민권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제10세 檀君 魯乙 : BC1950년 임금의 자문기관 설치

                   BC1949년 고시제도 도입

                   BC1946년 신원함 설치 민원해결

                   BC1893년 천문대 축조 감성관을 둠

제11세 檀君 道奚 : BC1891년 종교개혁을 실시 종교의 중흥시대를 열었음

                      BC1879년 곡식을 찧는 그릇과 띠풀로 지붕을 만들었으며 배를 만들어 무역이 트였으며 

                      농사를 절기에 맞추어 짓도록 하였음

                      BC1864년 만국박람회 개최

                      BC1854년 기계를 만드는 작청을 설치해 현상을 걸어 발명을 한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예를 들면 자명종 진천뢰 측우기 등 26점

제12세 檀君 阿漢

제13세 檀君 屹達 : BC1767년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눈 지방자치제 실시

                     BC1763년 독서 활쏘기 등을 가르키는 법정학교를 설립해 

                     학생인 國子郞을 뽑았으며 사람들은 이를 天指花郞이라 불렀다

제14세 檀君 古弗 : BC1680년 쇠로 子母錢이라는 돈을 주조했다

                      BC1670년 국립대학 설치

                      BC1666년 인구조사를 하니 1억8천만명이었다

제15세 檀君 伐音

제16대 檀君 尉那

제17세 檀君 余乙 : BC1535년 고수노가 政法原論 38질을 바침

                   BC1533년 日蝕이 있었음

제18세 檀君 冬奄 : BC1480년 고수노에게 國史 18권을 편찬하게 함

제19세 檀君 縱年 : BC1433년 국문서당을 세움

                   BC1426년 조개로 貝葉錢을 주조함

                   BC1420년 공창을 설립 종이와 옷감을 생산하였음

                   BC1410년 송화강가에 조선소를 설치했음

                   BC1391년 황운갑이 지남차와 목행마를 발명하였음

                   BC1385년 목아득이 우주원리론을 저술하였음

                   BC1382년 지이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을 저술했음

제20세 檀君 古忽 : BC1341년 共工 을홀이 九桓의 지도를 만듬

제21세 檀君 蘇台

제22세 檀君 索弗婁

제23세 檀君 阿忽 : BC1206년 군관학교를 설립해 병학을 가르쳤다

                   BC1183년 토지제도인 井田法을 가르침

제24세 檀君 延那 : BC1152년 조대원이 정치원론 10권을 바쳤음

제25세 檀君 率那

제26세 檀君 鄒魯 : BC1024년 의학원을 세워 백성들에게 가르침

                   BC1005년 위문국이 정치론 28권을 저술함

제27세 檀君 豆密

제28세 檀君 奚牟

제29세 檀君 摩休 : BC925년 왕문이 예부터 있어온 神篆이 번거로워 새로운 글을 지었음

제30세 檀君 奈休 : BC880년 부분석이 정법원리론을 저술하였음

제31세 檀君 登屹

제32세 檀君 鄒密 : BC837년 3월 日蝕이 있었음

제33세 檀君 甘勿 : BC816년 황선문이 유황발사총을 발명하였음

                   BC813년 감물산 아래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지냈음

                   BC812년 순길이 장생불로단을 만듬

                   BC804년 고삼도에게 현인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물으니 그 방법은

                   가까이 하여 그 겸손함을 보고

                   멀리하여 그 신용을 보며

                   갑자기 물어 그 말재주를 보며

                   급히 주어 어떻게 처리하는 가를 보며

                   난을 말하여 그 용맹을 보며

                   술에 취하게 하여 그 태도를 보며

                   색을 시험하여 그 몸가짐을 보며

                   재물로써 시험하여 그 청렴함을 보며

                   글을 통하여 그 학문을 보며

                   말로 물어 그 변론을 보며

                   잡사람과 같이 있게 하여 그 절개를 관찰하는

                   11가지가 구비되면 비로서 현인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박달산에 있는 감물왕국이 바로 이 단군님께서 치세를 하였던 것이며 

                      안타깝게도 지워져 있으니 다시 글자를 새겨야 할 것이다


제34세 檀君 奧婁門

제35세 檀君 沙伐 : BC765년 日蝕이 있었음

제36세 檀君 買勒 : BC699년 초나라사람 오자도가 목면종자를 가지고 입국

                   BC687년 채저명이 정치형법서를 전하였음

                   BC680년 오경박사 우문충이 토지를 측량하여 지도를 만들고 遊星說을 저술했음

                   BC675년 우세숙이 성리학과 심리학을 저술함

                   BC650년 손숙문이 의학과 화학을 저술함

제37세 檀君 麻勿 : BC642년 쇠로 方孔錢을 주조함

제38세 檀君 多勿

제39세 檀君 豆忽 : BC525년 8월에 日蝕이 있었음

제40세 檀君 達音 : BC507년 윤복지가 도덕경을 저술함

                   BC500년 진개가 치국요람을 저술함

제41세 檀君 音次 : BC488년 공상의가 종교론을 저술함

제42세 檀君 乙于支 : BC469년 철인 이일선이 천리경을 저술함

                     BC467년 백호돈이 지리학과 광물학을 저술함

제43세 檀君 勿理 : BC454년 장자학이 논리학을 저술함

제44세 檀君 丘勿 : BC423년 日蝕이 있었음

                   BC421년 최화덕이 동물학과 식물학을 저술함

                   BC416년 서백원이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의 사상의학을 저술함

                   BC410년 국학박사 황운원이 백과서를 저술함

                   BC408년 유종득이 理財學을 저술함

                   BC405년 적우순이 심리학을 저술함

제45세 檀君 余婁 : BC393년 법률을 개정하여 대동률령 공포

                   BC385년 곽태원이 양생론을 저술함

                   BC382년 마자은이 이기일원론을 저술함

                   BC369년 장소부가 의학대방을 저술함

                   BC367년 홍문선이 태학조문을 저술함

                   BC357년 조문휴가 자본론을 저술함

제46세 檀君 普乙

제47세 檀君 高列加 : BC274년 소정국이 건축학을 저술함

                     BC271년 구노선이 種樹學을 저술함

                     BC265년 신원함 설치 민원해결

                     BC248년 10월1일에 日蝕이 있었음

                     BC239년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켜 북부여를 세움

                     BC238년 임금이 유약하여 제후들의 난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단군 조선을 넘어 기원전 약7199년 이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이칼호 동쪽 드넓은 지역을 다스리며 용맹을 떨쳤으며 갖가지 법과 학문 등이 꽃을 피웠으며 

갖가지 기술들이 발전하여 국민들이 편리하게 살만한 그런 태평성대가 

47세 단군때에 이르러 급격히 쇠약해져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워 BC239년에서 BC58년까지 6대 역년 180년을 이어갔으며


그 사이 부여임금의 딸인 동신성모 

파소의 아들인 박혁거세가 13살 때 왕으로 뽑혀 신라를 건국했으며


이후 고주몽이 북부여를 이어받아 단군조선의 북쪽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뒤를 이어 온조가 단군조선의 땅인 황하와 회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대륙 동쪽에다 백제라는 나라를 세워 

삼국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7천 누백년의 역사를 없애고 작금 우리의 교육은 

여기서부터 역사라 하였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상으로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았으니 

이 글을 보시는 산님들 우리 역사의 허구성을 잠시나마 한번쯤 뒤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신 모든님들 고맙습니다


꾸벅^^  



      


산경표따르기 카페 개설에 따른 부탁의 말씀  

 

<카페명 : 산경표따르기,  부제명 : 우리산줄기 바로 세우기>


다음(daum)에 카페를 개설했습니다. 산행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백두대간보전법이 생긴지도 어언 13년째입니다

법만 만들어놓고 실제로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태백산맥 등이

지금도 각종지리교과서나 방송 기업 정부와 단체등 사회전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에 누천년간 사용해오던 우리고유의 산줄기 이름과 흐름을 

1769년 여암 신경준 선생께서 영조의 명을 받아

족보형식으로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정보 집합서인

산경표에 기초한 백두대간 낙동정맥 등 1대간 1정간 13정맥 산줄기를

바로 알고 바로 잡아보자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 주실 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입하시고 간단한 힘 실어주는 가입인사도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구체적인 사업도 아직은 확정된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 모든 회원님들과 숙의 과정을 거쳐 활동을 할 예정입니다

시작이라 가입인원이 적습니다. 

내용도 아직은 빈약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뜻을 같이 하는 님들의 열정에 힘입어 

알찬 내용으로 채워지고 빛을 낼 것입니다  

 

일반인, 산악인 관계 없이 주변에 가입 홍보도 부탁드리며,
힘있는 카페가 되도록 가지고 계신 자료들도 공유하였으면 합니다

 

앞으로 우리산줄기 이름이 널리 실생활과 인문지리 등 학문에도 쓰일수 있도록

다같이 힘을 합쳐 주십시요.

카페명: 산경표따르기
http://cafe.daum.net/woori.sanjulgi ← 클릭

 

고맙습니다! 꾸뻑~  

 

신경수, 다올, 현오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