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치악역] 왕초보가 치악역 종주를 택한 어리석은 산행기


6월1일부터는 청량리발 안동행 무궁화 열차도 치악역에서 정차하지 않는다니, 기차를 이용해서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치악역 산행이 될 것 같다.


산행일자 : 2004년 05월29일 (토)
소요시간 : 09:45~18:45 총 9시간 (휴식시간 40여분 포함)
산행인원 : 분당분과 따로 또 같이


07:13  덕소에서 열차 탑승
09:39  치악역 하차
09:45  산행 시작
11:15  수리봉
12:30  시명봉
13:20  상원사
13:46  남대봉
14:55  향로봉
16:49  입석사 갈림길
17:03  비로봉
18:10  세렴폭포
18:45  구룡계곡 주차장
19:49  덕소행 기차 탑승







2004년 11월부터 산에 다니기 시작하여 동네 예봉산, 운길산 정도만 홀로 다니는 초보입니다.
지난 23일 아이들과 기차여행을 약속하고 평소 친하게 지내는 두 집이 함께 여행을 하기로 했다.
당일 아침 덕소역에 와서도 용문, 원주, 제천, 안동으로 의견이 분분하여 정하지 못하다 얼떨결에 원주를 향해 기차에 올랐다.


조용한 일요일 아침 원주역전은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었다. 우왕좌왕 12명의 24개 눈동자는 이리저리 움직였고, 결국 시내버스를 타고 치악산 구룡사 계곡으로 갔다.


그런대로 재미있는 기차여행이었지만, 준비가 너무 부실하여 뭔가 아쉬워 집에 돌아와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치악역에서 비로봉, 구룡 계곡으로 내려오는 종주코스를 읽곤, 자료를 좀 더 찾아 본다.
기차로 덕소에서 치악역으로 가서, 치악산을 종주하고 원주에서 다시 기차로 덕소까지 되돌아오는 코스가 재미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6월부터는 이런 일정은 불가능하다는 터무니 없는 의미 부여까지 하고 나니 더더욱 욕심이 났다.


일단은 이것저것 준비를 했는데 목요일 저녁부터 오는 비는 금요일 내내 제법 내리고, 내일 오전도 계속 온다고 하니 반 쯤은 포기한 채로 잠에 든다.


새벽에 일어나보니 비는 그쳤다, 그럼 출발이다…….


07:03 덕소역
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기다리는데 벌써 땀이 흐른다. 오늘 여정이 만만치 않을 텐데 날씨까지 더우면 걱정이다. 어제 밤에는 비가 계속 와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하며 잠들었었는데……


09:39 치악역
기차에서 내리니 마음씨 좋게 생기신 역장님이 동행하실 분이 한 분 더 계시니 잠시만 기다리라 하신다. 분당에서 오신 분인데 직행버스 편으로 신림을 경유하여 오셨다 한다. 힘들고 어려운 길을 혼자 가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면서도, 민폐를 끼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09:45 출발
이제 열차들이 모두 지나고 역장님의 친절한 안내와 미소를 뒤로하고 신림 쪽으로 100여미터 가다 좌측 변압시설 지나자마자 산으로 오르는 작은 흔적이 있다. 그런데 비가 그친 뒤에 새로 생긴 발자국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분이 있으신 것 갔다.


구룡사 주차장까지 7시 전까지는 가야 원주에서 덕소로 돌아오는 기차를 탈 수 있을 텐데, 출발이 늦은 듯 하지만, 힘주어 오르기 시작 한다.
아직은 풀들이 많이 자라지 않아서 그런대로 흔적을 찾아서 길을 오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특히 [원주고 15 산악회] 리본은 시명봉까지 아주 유효하게 걸려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1:15 수리봉
어느 000 이사님의 비석과 암봉들을 지나 비 온 뒤 조금은 미끄러웠지만 그리 힘들지 않게 수리봉에 도착하니 금대리 쪽과 가리파재에서 시명봉 오르는 능선이 시원하게 보인다.


이제 저 멀리 보이는 시명봉을 향해 가는데 어디선가 더덕의 향기가 나길래 분당 분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죄송 합니다…) 몇 분간 찾다가 분당 분은 먼저 출발하시고 뒤 따라 오르는데, 아! 역시 초반의 무리와 더덕을 못 찾은 탓(?)인지 리듬을 잃었다. 그 후 시명봉까지 한 시간 정도의 계속 되는 오르막에 완전히 맛이 가서 그저 머리를 땅에 박고 헉헉대며 오르고 또 오른다.


12:30 시명봉 (남대봉)
여기까지는 어찌 왔다, 하지만 벌써 너무 힘들고 물도 너무 부족할 것 같다. 겨울 산행에서는 물이 그리 필요치 않았는데, 왕초보 임을 다시 느끼며, 오늘 여정을 모두 마치기는 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하지만 숨을 돌리고 본 시명봉에서의 조망은 너무 멋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이 비로봉이고, 좌측의 것이 향로봉, 앞의 것이 남대봉 인 것 같다. 비로봉은 커녕 향로봉 정도가 내 능력인듯하다……


하지만 주먹밥과 오이 하나 그리고 작은 물병을 불안한 마음으로 반이나 비운다.
상원사의 쌍룡수를 기약하며…


13:13 영원사 갈림길
시명봉에서 여기 영원사 갈림길까지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보일 만한 것도 없었지만 후반부 20분 정도는 또다시 오르막이어서 그저 땅만 보고 걸었다.
갈림길에 들어서니 우리가 올라온 길이 금지된 산행길이란다. (벌금 50만원…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여기서 마지막 남은 물을 모두 마시고 나는 상원사 쪽으로 가야하고, 분당 분은 바로 남대봉으로 오르신다고 하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아쉽지만 각자의 길을 간다. 나보다 주행이 빠르시니 다시 만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상원사를 향해 물을 찾아 서둘러 간다.


자꾸만 내려 간다, 또 내려 간다. 다시 올라가야 하는데 내려가면 그만큼 올라가야 하는데…


13:20 상원사
물을 소중함을 이리 절실하게 느낀 적이 언제였는지, 맛있게 먹고 채우고 씻고 하니, 이제 경내가 눈에 들어 온다.
전설 속의 상원사 종 그리고 목각판, 계수나무를 대충대충 보고 물 보충으로 다시 살아난 종주 욕심에 대웅전을 보지도 못하고 (너무 힘들어 정신이 없어서 안 본 것이 아니고 분명 못 본 것 입니다.) 서둘러 법당 우측 산 쪽으로 다가가니 해우소만 보일 뿐 등산로는 없다.


상원사에서 남대봉으로 가려면 다시 일주문을 돌아 나와 영원사 쪽으로 방향을 잡고 올라야 한다.


13:46 남대봉 (망경대)
어찌어찌 남대봉에 왔다. 하지만 걱정이 많다, 분당 분을 만날 수 있을까...! 도중에 어디서 내려가는 것이 나은지...


저 아득히 보이는 비로봉은 오늘 내가 갈 곳이 아니라는 잠정적 결론 속에 일단은 향로봉으로 간다.
치마바위 부근 인듯하다, 두 분의 고인을 위한 패들이 바위 중간에 걸려 있다. 가벼운 목례를 하고 갈 길을 재촉하니.


여기가 치악평전이구나 할만한 곳을 지나 막 오르막을 오르는데 좌측 풀섶에 한 분이 평화롭게 앉아 계신다. 얼핏 보니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는 듯 했다. 참 멋있었다.
산에 올라 그 속에서 저렇게 자연과 함께 할 줄을 알아야 하는데 어찌 이 인간은 죽을 둥 살 둥 걷기만 하는 것인지, 조만간 나도 저리 해보기로 하고 갈 길을 간다.


14:55 향로봉
여기까지 오며 열명도 안 되는 사람들과 스치기는 했지만 오늘 처음으로 봉우리에서 서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가스로 인해 조망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조망 사진으로 대신하며, 갈 길을 위해 연양갱과 물을 보충하고 다시 출발 한다.


관음사나 부곡으로 내려가는 고둔치는 지척이다. 아직은 더 갈 만 하니 계속 가기로 한다.


그러나 슬슬 시작되는 오르막과 계단 그리고 또 계단… 원통재는 그렇게 땅만 보고 지났다.
고둔치로 되돌아 가지 않는 한 앞으로 가야만하니 달리 방법이 없다. 비로봉도 완주도 이미 생각에서 떠났지만 계속 걸을 뿐이다.


가끔씩 보이는 비로봉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16:27 입석사 갈림길
드디어 탈출의 기회가 왔다. 기다렸던 바이나 약간의 휴식과 좀 전의 오르막을 오른 뒤 조금은 가까워진 듯한 비로봉으로 인하여, 저 밑에서부터 종주에 대한 미련이 스며 오른다.


가자! 안되면 원주에서 자고 가지 뭐…


16:52 비로봉 아래 산불감시초소 (계곡길 갈림길)
이제 마지막 오르막, 아니 계단길이 될 듯하다. 죽이는구나…
조금 오르다 뒤를 내려보니 아니 분당 분을 다시 본다. 비로약수에 들려 오신단다. 너무 반가워 인사하고 먼저 가시라고 하고 뒤처져 오른다.


고행이 따로 없다.


17:03 비로봉
장장 7시간 20여분 만에 비로봉은 나에게 자신을 허락 한다.
얼은 캔맥주로 분당 분과 갈증을 나누니 아마도 이 맛에 산에 다시 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런데 분당 분 말씀이... 구룡계곡 주차장까지 1시간반 정도면 가능하다 하신다.
그렇다면… 7시 전에 도착 가능하고, 덕소행 기차도 탈수 있겠구나, 다시 마음은 급해지고 서둘러 사다리병창을 찾아 간다.


사다리병창! 사람들이 뭐라 할만하다, 이리 길고 가파르고 험한 오르막을 계속 올라와야 하다니, 내려가는 것도 지루할 정도이다. 아무튼 정신 없이 뛰다시피 내려온다.
산에 오래 다니려면 내리막에서 이러면 안 된다고 하시는 고수님들의 글을 많이 보았지만, 인간의 욕심이란… (사실 내 자신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 땐 그랬다.)


18:10 세렴폭포
결국 사다리병창은 끝이 났고, 분당 분은 계곡에서 좀 쉬었다 가실 모양이다.
저 계곡물에 이 피곤한 발을 잠깐이라도 담갔으면 하는 마음은 굴뚝 같지만 시간이 없다. 지난 주 여기까지는 다녀 갔었지만 시간을 알 수 없으니 바로 출발하여야겠다.


언제가 다시 뵐 다음을 기약하며 분당 분과 헤어져 마지막 여정을 재촉한다.


18:45 후회는 없다! 비룡상회 (버스 종점, 주차장)
드디어 다 왔다. 버스는 아직 와 있지 않으니, 지난주에 우리 일행에게 너무너무 잘 해주셨던 비룡상회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원주행 버스시간을 여쭤보니 10분 뒤인 6시 55분에 있다 하신다.


잊지 못한 더덕구이 포장과 산수유 막걸리를 주문하곤 재빨리 막걸리 한 잔을 목뒤로 넘기니 오늘 하루의 어리석은 짓거리들이 아득히 밀려 어디론가 가는 듯하다.


구룡사 쪽 버스 종점에 가시면 꼭 들려보세요, 후회 안 하실 겁니다.


산행 후기
한마디로 어리석은 산행이었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 할 따름이다.


산에 왜 다니는지 아직은 잘 모르지만, 이렇게 뭔가에 쫓기듯 다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산에 다니기 시작한 후 내 생활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 변한 것은 사실이나, 이런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많음에 또한 없음에 급하게 살아오다, 산을 만나고는 그 넉넉함에 멀리보임에 푹 빠져 드는가 싶더니, 하나라도 더 보고 싶어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하는 내 모습이 짠하게 느껴지는 산행이었다.


다음 산행에는 책 한 권과 산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을 꼭 가지고 가야겠다.


산에서 내려보기 위해서가 아닌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닌
남보다 빠르기 위해서가 아닌
많은 산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닌
여기서 도망가기 위해서가 아닌
산과 함께 하기 위해 오르게 하여 주소서…

▣ 신경수 - 수고하셨습니다 그 먼거리를 오직 오기와 인내로 극복하셨으니 그 다음엔 산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좋은 날들 되시기를 바라며
▣ 정범모 - 저도 금년 2월말경에 구룡사~영원사 종주를 했었습니다. 원래는 치악역쪽이나 가리파재로 내려올 예정이었는데 가을별님이 보신 그 50만원짜리 간판 보고는 그만 맘이 약해져서 꼬리 내리고 영원사로 하산하였습니다. 제가 워낙 .. 이름에 '모범'이 들어간 범생이라..^^ 치악역에서 올라오는 곳엔 경고 간판이 없는 것 같으니... 죄책감 안드셔도 될 것 같네여.. 즐산하시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 歸然 - 치악역 권역장님의 친절한 안내가 없었으면 들머리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권역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시명봉에서 가을별님이 주신 오이는 참으로 시원하고 맛이 좋았읍니다. 물이 너무 차가워 바로 일어서 부지런히 갔는데 가을별님이 워낙 빨리 가 아쉬운 마음으로 버스 뒷꽁무니만 봤습니다. 산행은 밥 먹듯이 생활화되고 친구 만나듯이 즐거워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즐거운 산행하시기 바랍니다.
▣ 歸然 - 성남터미널에서 6시30분(원주,신림,태백행) 치악역에서 내릴 생각으로 신림까지 표를 끊었으나 기사님이 "치악역에서는 정차하지 않는다"고 말을 짜른다. 앞으로 치악역에서 산행을 시작하실 분은 원주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시는 것이 시간, 차비 절약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 가을별 - 歸然님 안녕하세요! 여기서 다시 뵙네요 ^^ 사진은 잘 받으셨는지요?
▣ 歸然 - 사진 미도착, jho1915@hanmir.com